성녀 마리아 프란치스카(Maria Francisca)는 안나 마리아 로사 니콜레타 갈로(Anna Maria Rosa Nicoletta Gallo)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16세 때에 부친이 어느 집안의 자제와 혼인하도록 강요하였으나 자신은 이미 하느님만 사랑하기로 결심한 후라며 거절하였다. 그러자 그녀의 부친은 그녀를 방안에 가두고 빵과 물만 주는 등 갖은 학대를 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이것도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한 단계로 받아들이며 인내하였고, 어머니가 그녀를 설득하려 하자 자신은 작은 형제회 3회 회원이 되겠다는 뜻만 밝혔다. 결국 그녀는 1731년 9월 8일 작은 형제회의 3회원이 되었다. 성녀 마리아 프란치스카의 주요 신심은 주님의 수난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녀는 그 후 38년 동안이나 교구사제인 요한 페시리의 사제관에서 일하였다. 이때 그녀는 신비스런 현상들이 몸에서 일어남을 감지하기 시작했는데,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거나 사순절의 금요일이 되면 예수님의 수난에 버금가는 고통을 앓기 시작하였다. 즉 게세마니(Gethsemane) 동산의 번뇌, 매 맞음, 가시관을 쓰심, 모욕, 침 뱉음, 죽음에 이르는 고통 등이었다. 사실 그녀는 오상 성흔을 이미 받았던 것이다. 이외에도 그녀에게는 더 많은 신체적인 고통이 따랐는데, 그것도 모자라서 자발적인 고행까지 행하였다. 한 번은 연옥 영혼들의 고통을 체험하였다고 한다. 성녀 마리아 프란치스카는 프랑스 혁명 초기까지 살았다. 그녀는 이 혁명의 무서움을 미리 예언하였다. 성녀의 유해는 나폴리의 산타 루치아 델 몬테(Santa Lucia del Monte) 성당에 모셔졌다. 그녀는 1843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Gregorius X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867년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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