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바라 오리오(Barbara Aurillot)는 정부 고위관리인 니콜라스 오리오(Nicholas Aurillot)의 딸로서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그녀의 아주머니가 있는 롱샴(Longchamps) 수녀원에서 교육을 받고 종교적인 생활을 원했지만 16세 때에 재정 관리인 피에르 아카리(Pierre Acarie)와 결혼하게 되었다. 그녀의 남편은 신심이 깊고 또 애덕을 실천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바르바라 오리오는 모두 6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 중 셋은 카르멜회 회원이 되었고, 한 명은 사제가 되었다. 그러던 그녀의 집안에 큰 재앙이 다가왔다. 그녀의 남편은 앙리 4세(Henri IV)에 대항하는 가톨릭 연합의 후원자였다. 그래서 앙리 4세가 왕으로 즉위하자마자 피에르 아카리는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고 일종의 모반 혐의로 파리에서 추방되었다. 바르바라 오리오는 가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아빌라(Avila)의 성녀 테레사(Teresia, 10월 15일)의 저작에 심취하고 애덕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녀의 이 모든 선한 일들은 결국 앙리 왕의 감탄과 지원을 이끌어냈다. 그녀는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의 맨발의 카르멜회를 프랑스로 불러왔고, 1604년부터 1609년 사이에 5개의 수녀원을 세웠다. 1613년 47세의 나이로 남편과 사별한 그녀는 아미앵(Amiens)에 있는 카르멜회에 입회를 청하여 허락을 받고 강생의 마리아(Maria)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곳은 그녀의 큰딸이 있는 곳이었다. 그녀는 성 프란치스코 드 살(Franciscus de Sales, 1월 24일)의 영적인 제자로 비록 만 4년밖에 수도자로서 살지 못했지만 기혼자로서 뛰어난 성덕의 소유자로 인정을 받았다. 그녀는 “주님, 제가 저지른 온갖 나쁜 표양을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말씀을 남기고 4월 18일 퐁투아즈(Pontoise)에서 선종하였다. 그녀는 1791년 교황 비오 6세(Pius VI)에 의해 시복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