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피에르 필리베르 모방(Pierre Philibert Maubant) 신부의 한국 성은 나(羅)이고, 이름은 세례명인 베드로(Petrus)를 한문으로 음차하여 백다록(伯多祿)이라 하였다. 그는 1803년 9월 20일 프랑스 칼바도스(Calvados) 지방의 바시(Vassy)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그날 바로 세례를 받았다. 어려서부터 그는 “세상 끝까지 가서 우상을 섬기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는 비르(Vire) 고등학교와 바이외(Bayeux) 대신학교를 졸업하고 1829년 5월 13일 사제품을 받았다. 보좌신부로 사목하면서 동양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의 서한을 읽고 선교사가 될 결심을 굳힌 그는 1831년 11월 18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3월 마카오로 출발했고, 마카오에서 중국 사천(四川) 교구의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선교지인 사천으로 가는 도중 조선의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브뤼기에르(Bruguiere, 蘇) 주교를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1833년 3월 조선 선교사를 자원하였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성 모방 베드로 신부의 경건함과 열정적인 면을 좋게 보아 기꺼이 조선의 선교사로 받아들였다. 성 모방 베드로 신부는 복건성(福建省)과 북경(北京) 등을 거쳐 서만자(西灣子) 교우촌에서 1년간 머무르며 한문과 중국 문화를 공부하였다. 1835년 10월 20일, 조선 입국을 목전에 두고 브뤼기에르 주교가 내몽골에서 선종한 후 그 소식을 들은 성 모방 베드로 신부는 즉시 서만자를 떠나 11월 17일쯤 마가자(馬架子) 교우촌에 도착했다. 이미 브뤼기에르 주교로부터 부주교로 임명되어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모든 권한을 위임받은 그는 주교의 장례를 치른 다음 즉시 마가자를 떠나 당시 주교를 영접하기 위해 국경에 와 있던 조선 교회의 밀사들을 만나 조선 입국을 결정하였다. 압록강을 건너 의주 성문을 비밀리에 통과해 천신만고 끝에 입국에 성공했는데, 이때가 1836년 1월 13일로 그는 처음으로 조선에 입국한 서양인 선교사가 되었다. 무사히 서울에 도착한 성 모방 베드로 신부는 성 정하상 바오로(丁夏祥, Paulus)의 집에 머물며 조선말을 배우는 한편 우선 한문으로 글을 써서 고해성사를 주었다. 그는 서울에서 시작해 다음으로 경기도와 충청도의 교우촌 16~17개를 방문해 세례를 주고 여러 성사를 집전하였다. 1836년 12월까지 어른 2백 13명에게 세례를 주고, 6백 명 이상에게 고해성사를 주었다. 또한 가는 곳마다 회장을 뽑아 주일과 축일에 교우들을 모아 공동으로 기도하고 교리문답과 그날의 복음 성경과 성인 전기들을 읽고 배우도록 지도하였다. 성 모방 베드로 신부는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도 큰 관심을 두어 최양업 토마스(崔良業, Thomas), 최방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崔方濟, Franciscus Xavier), 성 김대건 안드레아(金大建, Andreas) 등 세 명의 소년을 선택하여 라틴어를 가르치고 성직자에게 필요한 덕행을 가르치는 한편, 당시 상황에서 조선 내에서의 신학생 교육이 불가능했기에 1836년 12월 3일 이들을 마카오로 보내 정식으로 신학을 배우도록 하였다. 1837년 1월 성 샤스탕 야고보(Chastan Jacobus) 신부가 무사히 조선에 입국하자 성 모방 베드로 신부는 그를 맞이한 뒤 곧바로 경기도 양근(楊根) 땅으로 가서 조선말을 배우며 성사를 집전하였다. 그해 부활 대축일을 양근에서 성 샤스탕 야고보 신부와 함께 보낸 그는 남쪽 지방으로, 성 샤스탕 야고보 신부는 북쪽 지방으로 가서 사목활동을 펼쳤다. 그런데 지나친 활동으로 몸이 쇠약해진 성 모방 베드로 신부는 1837년 7월 심한 열병에 걸려 서울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다. 그는 상태가 심각해 성 샤스탕 야고보 신부에게 종부(병자)성사까지 받았는데, 그 후 차츰 열이 떨어져 3개월 뒤에 건강을 회복하였다. 1837년 12월 말에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Imbert Laurentius) 주교까지 조선에 입국하면서 조선 교회는 3명의 프랑스 선교사들에 의해 커다란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1839년 기해년이 시작되면서 조정은 다시금 천주교인들을 탄압하기 시작했고, 배교자의 밀고로 세 명의 외국인 선교사가 조선에서 활동하고 있음이 알려졌다. 기해박해가 본격화하자 신자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가 자수하여 서울로 압송되었고, 주교의 명으로 충청도 홍주(洪州) 교우촌으로 숨어들었던 성 모방 베드로 신부 또한 자수를 권유하는 주교의 편지를 받고 자수하여 서울로 압송되었다. 전라도의 한 교우촌으로 피신했다가 자수한 성 샤스탕 야고보 신부까지 서울로 압송되면서 세 선교사는 비로소 포도청 옥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포도청과 의금부에서 여러 차례 형벌과 문초를 당하면서도 끝까지 의연하게 신앙을 고백했다. 조선 정부는 그들이 절대 배교하지 않을 것임을 확인하고 마침내 대역 죄인이라는 죄목으로 군문효수형에 처하도록 판결하였다. 처형 장소는 한강 변의 새남터로 결정하였다. 1839년 9월 21일, 사형을 집행하는 날이 되자 세 선교사는 팔을 뒤로 결박당한 채 가마를 타고 형장으로 끌려갔다. 형장에 이르자 포졸들은 선교사들의 옷을 벗긴 다음 손을 앞가슴 쪽으로 결박하고, 겨드랑이에 긴 몽둥이를 꿰고, 화살로 귀를 뚫고, 얼굴에 회를 뿌린 다음 군중의 조롱과 욕설을 듣게 하였다. 그런 다음 사형 선고문을 읽고 칼을 들어 처형하였다. 성 모방 베드로와 성 샤스탕 야고보 신부 그리고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는 마지막까지 태연하게 하늘을 향해 기도할 뿐이었다. 그들의 순교로 조선 교회는 천신만고 끝에 얻은 성직자들을 3년 만에 모두 잃게 되었다. 이때 성 모방 베드로 신부의 나이는 35세였다. 성 모방 베드로 신부와 두 선교사의 시신은 새남터에서 순교한 후 20일 뒤 죽음을 각오한 신자들에 의해 노고산(서울시 마포구 노고산동 서강대 뒷산)에 매장되었다가 1843년 삼성산(서울시 관악구 신림동 산57-1)으로 이장되었다. 그 후 1901년 10월 21일 발굴되어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겨졌고, 그해 11월 2일 명동대성당에 안치했다가 1967년 절두산 순교성지 내의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성당 지하에 마련된 성인 유해실에 안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 모방 베드로 신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103위 한국 순교성인’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9월 21일 목록에서 새남터에서 신자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순교의 길을 걸은 파리 외방전교회의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와 성 샤스탕 야고보와 성 모방 베드로 신부가 한국의 새남터에서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그들의 축일은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에 함께 경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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