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라르도(Berardus)는 교황령에 속한 움브리아(Umbria)의 카르비오(Carbio)에서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213년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가 설립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였다. 성 프란치스코는 1219년에 제2차 수도회 총회를 마치면서 작은 형제회의 사도직을 선교 영역으로 확장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해 아랍어에 능통한 성 베라르도 신부와 동료 사제인 성 오토(Otto)와 성 페트루스(Petrus, 또는 베드로) 그리고 평수사인 성 아쿠르시오(Accursius)와 성 아주토(Adjutus)를 북아프리카의 이슬람교도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파견하였다. 그들은 배를 타고 이탈리아에서 출발해 포르투갈에 도착한 후 에스파냐의 세비야(Sevilla)로 갔다. 당시 이베리아반도는 8세기 초부터 오랫동안 이슬람 세력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들은 세비야에서 무어인에게 선교하다가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가 석방된 후 모로코 왕국으로 추방되었다. 모로코에 도착한 후 성 베라르도와 동료들은 이슬람교의 중심지인 마라케시(Marrakesh)로 가서 길거리에서 설교를 시작했다. 아랍어를 하는 사람은 성 베라르도 혼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고 무함마드(Muhammad)의 교리를 포기하라고 공개적으로 설교할 때 무어인들은 그들이 실성했다고 판단해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래도 계속해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하고 이슬람교를 비난하자 모로코의 무어인 왕은 그들을 붙잡아 그리스도인들의 영역으로 돌아가도록 배에 태워 쫓아 보냈다. 그러나 성 베라르도와 동료들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모로코로 돌아와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결국 무어인 왕은 그들을 체포해 감옥에 가둔 후 그리스도교 신앙을 포기하도록 설득하다 실패하자 직접 칼을 들어 그들 모두를 참수형으로 처형하였다. 이렇게 해서 1220년 1월 16일에 작은 형제회의 첫 순교자들이 탄생하였다. 그들의 시신은 포르투갈을 거쳐 이탈리아의 아시시로 돌아와 장엄하게 안장되었다. 그들의 유해가 포르투갈의 코임브라(Coimbra)에 있는 성 십자가 성당에 도착했을 때, 성 아우구스티노 참사 수도회의 한 젊은 사제가 자신도 순교자가 되겠다는 열정에 사로잡혀 코임브라의 작은 형제회로 소속을 옮겨 안토니오라는 수도명을 받고 곧바로 아프리카 선교를 지원했는데, 그는 파도바(Padova)의 성 안토니오(Antonius, 6월 13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렇게 성 베라르도와 동료들의 순교는 작은 형제회 회원들의 선교 열정에 불을 붙였고, 그로부터 7년 뒤인 1227년에는 성 다니엘(Daniel, 10월 10일)과 여섯 명의 동료가 모로코의 세우타(Ceuta)에서 순교하는 역사로 이어졌다. 성 베라르도와 동료 순교자들은 1481년 교황 식스토 4세(Sixtus IV)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옛 “로마 순교록”은 1월 16일 목록에서 작은 형제회 순교자들의 이름을 전해주었고,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같은 날 목록에서 작은 형제회의 성 프란치스코가 무슬림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파견한 이들이 오늘날 모로코의 마라케시 근처에서 무어인 지도자의 명령에 따라 칼에 찔려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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