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페트루스(Petrus, 또는 베드로)는 1499년 에스파냐 서부 에스트레마두라(Extremadura)의 알칸타라에서 변호사이자 그 지방 주지사인 아버지 페드로 알론소 가라비토(Pedro Alonso Garavito)와 부유한 귀족 가문 출신인 어머니 마리아 빌레라 데 사나브리아(Maria Vilela de Sanabria)의 아들로 태어나 후안 데 가라비토(Juan de Garavito)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는 고향에서 문법과 철학을 공부했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가 재혼한 뒤에는 살라망카(Salamanca) 대학으로 가서 법학을 공부하였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아직은 어린 15살 정도의 나이에 만하레테스(Manxarretes)에 있는 작은 형제회의 매우 엄격한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그는 수도명으로 베드로를 선택하고 매우 엄격한 금욕과 보속의 생활을 실천했고, 19살 때 수도원 문지기가 되었다. 그리고 아직 사제품을 받기 전인 1521년 바다호스(Badajoz)에 새로운 공동체를 설립하도록 파견되었다. 그리고 1525년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에스트레마두라 지방에서 설교하면서 로브레딜로(Robredillo), 플라센시아(Plasencia), 라파(Lapa) 그리고 에스트레마두라 수도원의 원장으로 봉사했으며, 라파 수도원을 봉쇄수도원으로 요청하여 허가를 받기도 했다. 설교가로서 그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면서 리스본(Lisbon)에 있는 포르투갈 왕실에서 그를 궁중 전속사제로 초청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왕의 여동생을 포함해 몇몇 저명한 사람들을 개종시켰고, 수도원으로 돌아와서는 1538년에 에스트레마두라에 있는 성 가브리엘 관구의 관구장이 되었다. 그는 더욱 엄격한 규칙을 만들어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의 정신에 따라 수도원을 개혁하려고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1540년 플라센시아에서 열린 관구 총회에서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규칙서를 통과시키지 못하자 그는 관구장 직책을 사임하고 아빌라의(Avila)의 성 요한(Joannes, 5월 10일)과 함께 리스본 교외의 아라비다(Arabida) 산으로 들어가 완벽한 고독 속에서 은수자의 삶을 살던 마르티노 다 산타 마리아(Martino da Santa Maria) 신부와 합류하였다. 곧이어 다른 수도자들도 그들의 생활에 매력을 느껴 은수 생활에 합류하면서 여러 개의 작은 공동체가 설립되었다. 그 후 그는 관구 내에서 통과하지 못한 규칙서를 가지고 코리아(Coria) 교구의 주교로부터 승인을 얻은 후 새로운 수도원을 세울 허가를 받기 위해 맨발로 로마까지 가서 1552년에 교황 율리오 3세(Julius III)의 승인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작은 형제회에 속하지만 성 베드로의 규칙서에 따라 운영되는 새로운 수도원, 즉 알칸타라의 성 베드로의 프란치스코회가 시작되었다. 이것이 스스로 ‘가장 엄격한 규칙을 지키는 형제들’(Fratres Strictissimae Observantiae) 또는 나중에 ‘알칸타린 수도회’(Alcantarines)로 불리게 된 작은 형제회의 엄격한 개혁 분파(Ordo Fratrum Minorum Discalceatorum)의 시작이었다. 그들은 철저한 가난과 금욕을 실천했다. 작은 방에 살며 바닥에서 잠을 자고 맨발로 다니며 고기와 생선, 달걀과 포도주도 마시지 않고 오랜 시간 동안 기도와 침묵 속에 생활했다. 그리고 매우 짧은 시간을 그것도 앉아서 잠을 잤다고 한다. 그러면서 다른 많은 수도원이 그의 규칙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결국 1561년에 그의 규칙을 따르는 수도원을 모아 성 요셉 관구가 설립되었다. 1560년 그는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Teresa of Avila, 10월 15일)를 만나 그의 고해신부 겸 상담자가 되었고, 가르멜 수도회의 개혁운동을 격려하고 조언하였다. 성녀 데레사는 “자서전” 안에서 성 베드로의 삶과 활동, 기적과 예언의 은사 등에 관해 전해주었다. 성 베드로는 “기도와 묵상에 관한 논문”(Tratado de la oracion y meditacion)을 썼는데, 이것은 나중에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Franciscus Salesius, 1월 24일)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아빌라에서 남쪽으로 80km 정도 떨어진 산악 마을인 아레나스(Arenas)에 새로운 수도원 짓는데 생애의 마지막 2년을 보냈다. 그는 1562년 아레나스 수도원의 문을 열고 나서 병에 걸렸고, 그해 10월 18일 오늘날 그의 이름을 따서 아레나스 데 산 페드로(Arenas de San Pedro) 수도원으로 불리는 아레나스 수도원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선종하였다. 그의 시신은 아레나스 인근 산 안드레스 델 몬테(San Andres del Monte) 수도원 성당에 묻혔다. 그는 1622년 4월 18일 교황 그레고리오 15세(Gregorius XV)에 의해 시복되었고, 1669년 4월 28일 교황 클레멘스 9세(Clemens IX)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리고 그는 1862년에 브라질의 수호성인으로, 1962년에 에스트레마두라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어 공경을 받고 있다. 옛 “로마 순교록”은 10월 19일에 그의 축일을 지낸다고 했으나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0월 18일로 옮겨 조언의 은사와 참회와 금욕의 탁월한 삶으로 에스파냐 수도원을 개혁했고, 가르멜 수도회를 개혁한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조언자였다고 그에 관해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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