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또는 그레고리오)는 나지안주스의 주교로 45년간 사목했던 성 그레고리오(Gregorius the Elder, 1월 1일)와 성녀 논나(Nonna, 8월 5일)의 아들로 카파도키아(Cappadocia, 오늘날 튀르키예 중부 아나톨리아 중동부를 일컫는 고대 지명) 지방 나지안주스(오늘날 악사라이[Aksaray] 인근 베라카르[Bekarlar]) 인근 아리안주스(Arianzus)의 가족 별장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를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고, 기도와 사랑의 실천으로 모범이 된 어머니로부터 신앙의 큰 영향을 받았다. 유년 시절 그는 가정에서 성경 읽기를 배웠고, 그 후 카파도키아의 카이사레아(Caesarea)와 팔레스티나(Palestina)의 카이사레아 수사학교에 다녔고,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를 거쳐 아테네(Athenae)에서도 수학했다. 356년까지 아테네에 머무르는 동안 그는 성 대 바실리오(Basilius the Great, 1월 2일)와 교제했고, 장차 황제가 될 배교자 율리아누스와도 함께 공부했다. 30세 무렵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세례를 받고 소박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위해 성 대 바실리오와 함께 폰투스(Pontus) 지방의 이리스 강변에서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부친의 권유로 362년 부활절에 사제품을 받았고, 372년경에는 성 대 바실리오에 의해 나지안주스 남쪽에 있는 고대도시인 사시마(Sasima)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사시마 교구는 아리우스파(Arianism)의 영향력이 큰 지역으로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성 그레고리오는 주교로 축성은 되었으나 부임하지는 못했다. 374년 봄, 아버지가 선종한 후 그 뒤를 잇도록 나지안주스의 주교로 임명되었지만 1년 후에 그는 이사우리아(Isauria) 지방의 셀레우키아(Seleukia)에 있는 수도원으로 떠났다. 378년 아리우스파인 발렌스 황제가 죽고 정통교회에 대한 박해가 수그러들자 일단의 주교들이 그를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로 초청해 아리우스파 지역에서 정통교회의 활성화를 도모하게 했다. 그래서 그는 작은 공동체인 아나스타시아(Anastasia) 교회에서 설교를 시작해 수많은 개종자를 얻었다. 이때 그는 아리우스파인 막시무스(Maximus)와 격렬한 논쟁을 일으켰고, 380년에는 새로 입교한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그의 가르침을 정통 교리로 인정하고 아리우스파 지도자를 축출하는 칙서를 발표하게 해서 정통파 신앙의 승리를 이끌었다. 그는 381년 3월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그 도시의 주교로 인정받고, 안티오키아의 멜레티우스(Meletius)가 사망한 후 총대주교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총대주교 임명은 큰 파문을 일으켰다. 안티오키아와 이집트의 교회가 주교좌 이전에 반대하며 격렬히 반대하자 성 그레고리오는 모든 논쟁을 끝내고 교회의 평화를 위해 주교직에서 물러났다. 공의회가 끝나기 전에 나지안주스로 돌아온 그는 383년 에울랄리우스(Eulalius)가 후계자로 임명될 때까지 나지안주스의 주교직을 맡았다. 그 후 그는 저술 활동과 수도 생활에 전념하고자 아리안주스로 내려와 생애의 마지막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는 신학자로서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그중 44개의 연설문이 대표적이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아리우스 이단에 대항해 정통교회를 수호하는데 큰 공적을 남긴 5개의 신학적 연설문으로, 니케아(Nicaea) 신앙 고백을 해설하고 성령 신성 부인론자들을 반박하며 삼위일체 교리를 변호한 것이다. 그리고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를 비판한 호교론적 연설문도 있다. 그 외에 아버지와 동생인 성 체사리오(Caesarius, 2월 25일)와 성녀 고르고니아(Gorgonia, 12월 9일)의 장례식 때 쓴 추도사가 전해지고 있다. 정통 교리를 수호하고 탁월한 신학적 업적으로 인해 그는 성 대 바실리오와 니사(Nyssa)의 성 그레고리오(1월 10일)와 함께 카파도키아의 3대 교부 중 한 사람이자 동방 교회의 4대 교회학자 중 한 명으로 선포되었다. 그는 389년경 1월 25일 아리안주스에서 선종한 것으로 알려졌다. 동방 교회에서는 그의 축일을 보통 선종한 날로 알려진 1월 25일에 지내거나 30일에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Joannes Chrisostomus, 9월 13일)와 성 대 바실리오와 함께 기념한다. 서방 가톨릭교회는 1505년부터 5월 9일에 그의 축일을 그리고 6월 11일에 그의 유해를 콘스탄티노플에서 로마로 이장하여 성 베드로 대성당 내의 한 경당에 모신 것을 기념해왔다. 옛 “로마 순교록”은 이 두 날짜에 그에 대해 기록하였다. 1969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른 로마 보편 전례력 개정이 이뤄지면서 그의 축일을 1월 2일로 옮겨 성 대 바실리오와 함께 기념하게 되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1월 2일 목록에서 주교이자 교회학자인 성 대 바실리오와 그의 친구이자 사시마의 주교, 콘스탄티노플의 주교, 마지막으로 나지안주스의 주교로 봉사하며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신성을 옹호한 나지안주스의 성 그레고리오 신학자를 함께 기억한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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