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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안드레아스 보볼라(Andreas Bobola, 또는 안드레아 보볼라)는 1591년 11월 30일 폴란드 남동부 스트라코치나(Strachocina)에서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606년 폴란드 북부 브라니에보(Braniewo)의 예수회 대학에서 공부한 후 1611년 7월 31일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빌나(Vilna, 오늘날 리투아니아의 수도인 빌뉴스[Vilnius])에서 수련을 마치고 2년 후인 1613년에 첫서원을 했다. 그리고 1613년부터 1616년까지 빌나 아카데미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브라니에보와 폴라츠크(Polatsk, 오늘날 벨라루스 북쪽에 있는 도시)에서 학생들에게 문법을 가르치다가 1619년에 다시 빌나로 돌아와 신학을 공부하고 1622년 3월 12일 사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바로 오늘날 벨라루스의 냐스비주(Nyasvizh)에 있는 예수회 학교 부속 성당에서 첫 사목활동을 시작하였다. 2년 뒤에는 빌나로 돌아와 성 가시미로(Casimirus) 성당의 본당신부가 되어 본격적인 사목활동을 펼쳤다. 그는 뛰어난 설교자로서 성모회를 지도하며 여러 협력자와 함께 죄수와 가난한 이들을 방문하고 아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1625년부터 1629년까지 빌나 인근에 페스트가 창궐했을 때도 그는 환자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했다. 1630년 종신서원을 마친 성 안드레아 보볼라는 오늘날 벨라루스 동부의 바브뤼스크(Babruysk)에 있는 예수회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그는 사제 부족으로 정교회로 개종한 가톨릭 신자들을 위해 교회를 세우고 언제든 가톨릭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권유하였다. 그리고 바브뤼스크에 페스트가 만연했을 때도 감염의 위험을 무릅쓰고 임종을 앞둔 이들을 찾아 정성껏 돌봐주어 많은 이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1636년부터 그는 선교사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고 20년 넘게 폴란드 동부 지역과 리투아니아 전역을 여행하며 정교회 신자들과 교황청의 화해를 위해 헌신하였다. 동시에 그의 설교와 모범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가톨릭으로 돌아서고 때로는 마을 전체가 개종하자 그에게 ‘영혼의 사냥꾼’(soul hunter)이란 별명이 붙었다. 하지만 그에게 적대적인 이들은 그를 ‘영혼의 도둑’이라고 부르며 돌을 던지거나 고함을 질러 설교를 방해하였다. 그러면서 가톨릭 신자들, 특히 예수회에 대한 적개심이 점점 커졌다. 그 당시 로마 가톨릭과 러시아 정교회 사이에는 1596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Brest-Litovsk)에서 맺은 연합 조약에 따라 평화로운 공존이 유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 정교회를 따르는 일부 호전적인 사람들은 이 조약을 파기하고 가톨릭 신자들을 해당 지역에서 몰아내고자 했다. 폴란드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킨 코사크인의 지도자인 흐멜니츠키(Chmielnicki)는 1655년 오늘날 벨라루스의 상당한 지역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그해 8월 8일 러시아 군대가 빌나로 쳐들어와 약탈할 때 그곳에서 사목 중이던 성 안드레아 보볼라와 예수회원들은 남쪽으로 피신해야 했다. 성 안드레아 보볼라는 핀스크(Pinsk)에서 선교 활동을 재개하면서 비록 전쟁 중이었지만 길 잃은 양들을 교회로 불러들였다. 그러던 중 1657년 5월에 코사크인들이 핀스크를 기습 공격해 많은 유대인과 가톨릭 신자들을 학살하였다. 성 안드레아 보볼라는 야노프(Janow, 오늘날 벨라루스의 이바나바[Ivanava]) 근처 페레딜(Peredil)로 피신했으나 그를 증오하던 반대자들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그는 5월 10일 두 명의 코사크인에게 체포되어 채찍질을 당한 후 말 안장에 연결된 밧줄에 묶여 야노프로 끌려갔다. 야노프에 도착하자 코사크인들은 그에게 신앙을 버리고 배교하도록 강요하며 온갖 고문을 자행하였다. 하지만 그의 단호한 태도에 분노한 박해자들은 점점 더 잔인한 방법으로 그를 고문하기 시작했다. 벌거벗긴 채 채찍질하고 가시관을 씌워 말에 매달아 끌고 다녔을 뿐 아니라 머리부터 손끝까지 피부를 도려내고 송곳으로 손바닥에 구멍을 내는 등 잔혹한 고문을 이어갔다. 그래도 그의 신앙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자 결국 가슴에 날카로운 송곳을 찔러넣었다. 그리고 그를 거꾸로 매달고 참수하였다. 코사크인들은 마치 돼지를 도살하듯 1657년 5월 16일 그를 살해하였다. 그 무렵 야노프로 진격 중이던 폴란드 군대가 얼마 후 도착했으나 그는 이미 순교한 뒤였다. 그들은 성 안드레아 보볼라의 시신을 수습해 핀스크에 있는 예수회 성당으로 옮겨 모셨다. 그의 유해는 1808년에 벨라루스의 폴라츠크로 이장되어 공경을 받았다. 그는 1853년 10월 30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1922년 볼셰비키 군대가 폴라츠크에 와서 성당을 포위하고 제단에 올라가 그의 시신을 꺼내 모스크바 박물관으로 가져갔다. 하지만 이듬해 러시아에서 활동하던 두 명의 예수회 신부가 교황 비오 11세의 이름으로 유해 인도를 요청해 로마로 이장하였다. 교황 비오 11세는 1938년 4월 17일 성 안드레아 보볼라를 성인품에 올리며, 그를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의 일치를 위한 중재자로 선포하였다. 그리고 그의 유해 또한 폴란드로 반환했는데, 오늘날 그의 유해는 바르샤바에 그의 이름으로 봉헌된 예수회 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그는 리투아니아의 사도이자 폴란드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5월 16일 목록에서 폴란드 프리피야트강(Pripjat R.) 기슭 핀스크 근처 야노프에서 예수회 사제인 성 안드레아 보볼라의 순교가 있었는데, 그는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다가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피를 흘림으로써 가장 높은 신앙을 기쁘게 증거했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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