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제르트루다(Gertrudis)는 626년경 벨기에의 브뤼셀(Brussel)과 리에주(Liege) 사이에 있는 란덴(Landen)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는 프랑크 왕국의 북동쪽 지역을 지배하던 아우스트라시아(Austrasia) 왕국의 살림을 책임지는 궁전장(宮殿長)인 복자 페핀(Pepin the Elder, 2월 21일)과 메스(Metz, 오늘날 프랑스의 도시)의 귀족 가문 출신인 성녀 이타(Itta, 5월 8일)이다. 그리고 그녀의 언니는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이자 왕의 고문으로 나중에 메스의 주교가 된 성 아르눌포(Arnulphus, 7월 18일)의 아들 안세기젤(Ansegisel)과 결혼한 앙덴(Andenne)의 성녀 베가(Begga, 12월 17일)로,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조카가 바로 메로빙거 왕조를 이어 프랑크 왕국의 후반을 지배한 카롤링거 왕조(Carolingian dynasty)의 시조가 된 에르스탈의 피핀(Pepin of Herstal 또는 Pepin II)이다. 성녀 제르트루다는 어려서부터 부모의 경건한 생활을 본받으며 자랐고, 왕가와 귀족 간의 혼담과 정략결혼이 자연스러운 현실에서 오직 그리스도만을 신랑으로 섬기겠다며 스스로 동정 서원을 하고 수도 생활을 동경했다. 640년에 아버지가 선종하자 어머니인 성녀 이타는 마스트리흐트(Maastricht)의 성 아만도(Amandus, 2월 6일) 주교의 도움을 받아 니벨레스(오늘날 벨기에의 브뤼셀[Brussel] 남쪽에 있는 도시)에 성 베네딕토(Benedictus)의 규칙을 따르는 수도원을 설립하고 막내딸인 성녀 제르트루다와 함께 들어가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성녀 제르트루다는 니벨레스 수도원에서 수도 서원을 하고 성 아만도 주교에게 수도복을 받았다. 그리고 스무 살 정도의 젊은 나이에 초대 수녀원장이 되어 슬기롭게 공동체를 이끌었다. 성녀 제르트루다는 성경과 전례에 큰 관심을 두었고, 막대한 비용을 들여서 수도원에 도서관을 세우려고 노력했다. 또한 순례자와 인근에서 선교 활동을 펼치는 수도승들을 환대하고 성심껏 지원하였다. 656년에 수녀원장에서 물러난 성녀 제르트루다는 성경 연구와 기도와 단식 등 엄격한 고행을 실천하는데 몰두하였다. 또한 생애의 마지막 몇 년 동안 환시의 은혜를 많이 받았다. 그녀는 659년 3월 17일 성 파트리치오(Patricius) 축일에 30대의 젊은 나이로 선종해 인근 성당에 묻혔다. 그녀의 유해를 모시기 위해 11세기에 새로 건립된 성당은 1940년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의 폭격으로 파괴되었고, 성녀의 유해함도 많이 훼손되어 새로운 유해함으로 복원하였다. 성녀 제르트루다는 가난한 병자와 과부, 순례자와 여행자, 정원사와 방적공의 수호성인으로 중세 시대부터 많은 공경을 받았다. 벨기에와 네덜란드, 독일 등 북유럽의 많은 병원과 성당이 그녀의 이름으로 봉헌되었다. 교회 미술에서 성녀 제르트루다는 성 베네딕토회 수도복을 입고 책이나 배(폭풍과 바다 괴물로부터 선원들을 구해준 기적에서 유래)를 들고 있거나 수녀원장을 상징하는 지팡이를 쥐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전염병을 가져오는 들쥐로부터 보호자로 여겨지면서 들쥐와 함께 그려지곤 한다. 옛 “로마 순교록”은 3월 17일 목록에서 니벨레스의 성녀 제르트루다가 고귀한 가문 출신의 동정녀로서 세상을 미워하고 평생 선행을 실천했기에 하늘에서 그리스도를 배우자로 모실 자격이 있다고 전해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같은 날 목록에서 귀족 집안 출신으로 성 아만도 주교에게 동정녀의 베일을 받고 어머니가 세운 수도원을 현명하게 다스린 니벨레스의 성녀 제르트루다 수녀원장이 열심히 성경을 읽고 밤샘 기도와 단식 등 엄격한 금욕을 실천했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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