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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란치스쿠스 솔라노(Franciscus Solano, 또는 프란치스코 솔라노)는 1549년 3월 10일 에스파냐 남부 안달루시아(Andalusia) 지방 코르도바(Cordoba) 남쪽의 몬티야(Montilla)에서 부유하고 신심 깊은 부모인 마테오 산체스 솔라노(Mateo Sanchez Solano)와 아나 히메네스(Ana Jimenez)의 셋째 아이로 태어났다. 그는 고향에 있는 예수회에서 교육받았으나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의 가난하고 참회하는 삶에 이끌려 20살 때인 1569년 몬티야에서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수련소에서 개혁 규칙을 철저히 따르며 엄격한 고행을 실천하였다. 서원 후에 그는 세비야(Sevilla)의 로레토 수도원에서 신학과 철학 공부하고 1576년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북아프리카에 선교사로 파견되기를 원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수도원의 전례 담당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면서 주변 마을을 순회하며 설교하는 데도 소홀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선종하자 시각 장애인인 어머니를 뵈러 잠시 몬티야에 들렀는데, 역병이 창궐하여 환자들을 돌보느라 좀 더 오래 머물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는 여러 번 치유의 기적을 행하여 사람들로부터 기적을 행하는 사람으로 불리기도 했다. 1581년에 그는 코르도바의 아루자파(Arruzafa) 수도원의 수련원장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젊은 수도자들을 교육하면서도 자주 병자들을 방문하고 많은 이들을 개종시키는 설교자로서 활동하였다. 1589년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Felipe II, 1556~1598년 재위) 국왕은 프란치스코회에 신생 식민지인 남아메리카에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였다. 그는 식민지 지배자들과 원주민들을 위한 사목 담당자로 임명되어 아르헨티나 북부 지역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배를 타고 에스파냐를 떠나 신대륙의 파나마에 상륙한 후 목적지로 항해하던 중 폭풍우를 만나 배가 난파하는 위기를 겪기도 했다. 선원과 승객들은 배를 버리고 유일한 구명보트에 올라 탈출했지만, 성 프란치스코 솔라노는 버려진 흑인 노예들과 함께 배에 남겠다고 고집했다. 그는 그들에게 신앙을 가르치고 세례를 주었다. 그리고 몇몇 노예들이 익사하는 위험 속에서 그들의 도움으로 모래톱에 올라 구조될 때까지 함께 머물렀다. 며칠 뒤 무사히 구조된 성 프란치스코 솔라노는 동료 수도자들과 함께 목적지인 투쿠만(Tucuman, 오늘날의 아르헨티나 중부와 북서부 지역)으로 가는 긴 여정을 시작하였다. 그는 1595년 중반까지 투쿠만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고, 이어서 페루의 팜파스(Pampas)와 파라과이 차코 지역(Paraguayan Chaco, 파라과이 서부 지역) 및 우루과이까지 여행하며 수많은 에스파냐 정착민과 원주민들을 개종시켰다. 그는 유럽의 다른 성직자들과는 달리 각 지방의 토착 언어를 열심히 배웠고,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부족들에게 한 가지 언어로 설교할 수 있는 언어의 은사를 입은 사람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또한 음악적 재능이 풍부했던 그는 원주민들을 위해 자주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어느 날 산미겔 마을에서 투우 경기가 열렸을 때 사나운 황소가 탈출하여 사람들을 해치는 일이 발생했는데, 성 프란치스코 솔라노가 나타나 그 앞을 막자 사나운 황소가 온순하게 그의 손에 이끌려 우리로 들어갔다고 한다. 1601년에 그는 페루 리마(Lima)에 있는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금욕적인 삶을 실천하며 거리에서 설교하고 자주 병자들을 방문하였다. 1604년 그는 리마의 어느 시장에서 그 도시의 부패상을 폭로하는 설교를 했는데, 그 설교가 너무나 강력해 주민들이 크게 동요하였다. 시 당국은 그 지방의 대주교에게 공식 항의했고, 그는 군중들을 진정시켜야만 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거의 20년 동안 인디언 원주민과 에스파냐 정복자 사이를 오가며 피나는 노력을 기울여 훌륭한 수도자 상을 후손들에게 남겨 주었다. 생애 마지막 몇 년은 심한 위장병으로 병상에서 고생했지만, 1609년 대지진이 발생했을 때는 몸조차 가누기 힘든 상태에도 불구하고 생존자들을 위로하며 격려하였다. 그는 1610년 7월 14일 리마에서 선종하였다. 그에 대한 공경은 남아메리카와 에스파냐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고, 1675년 6월 교황 클레멘스 10세(Clemens X)에 의해 시복되었다. 그리고 1726년 12월 27일 교황 베네딕토 13세(Benedictus XI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옛 “로마 순교록”에서 그의 이름을 찾을 수는 없지만,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3월 6일 목록에서 페루의 리마에서 프란치스코회 소속 사제였던 성 프란치스코 솔라노가 영혼 구원을 위해 남아메리카 전역을 여행하며 설교와 증언을 통해 원주민과 에스파냐 식민지 주민들에게 그리스도교 생활의 새로운 면모를 가르쳤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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