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헨리쿠스(Henricus, 또는 헨리코)는 12세기 초 영국에서 태어나 사제가 되어 얼마간 활동하다가 이탈리아 로마(Roma)로 이주하였다. 그는 나중에 교황 하드리아노 4세(Hadrianus IV)가 된 교황대사 니콜라스 브레이크스피어(Nicholas Breakspear) 추기경을 수행하여 1152년경 스칸디나비아(Scandinavia)의 노르웨이와 스웨덴을 방문하였다. 브레이크스피어 추기경은 당시 한창 교구와 수도원이 설립되고 있는 스칸디나비아의 교계제도를 정비하고자 파견되었는데, 1153년 스웨덴 남부 린셰핑(Linkoping)에서 열린 교회 회의에서 성 헨리코를 웁살라의 주교로 축성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웁살라에 스웨덴 대교구를 설립하기로 했으나 귀족들 간의 갈등으로 인해 1164년에야 이루어졌다. 성 헨리코 주교는 웁살라에 거주하던 성 에리크 9세(Erik IX, 5월 18일)와 친분을 쌓았다. 당시 스웨덴 동쪽 끝에 있던 핀란드(Finland) 사람들이 침략했을 때 성 에리크 왕은 그에 맞선 원정을 준비하며 ‘십자군 전쟁’이라 명명했다. 이 원정은 핀란드 남서부 이교도 지역에서 스웨덴의 이익을 강화하는 한편 그리스도교 선교 활동을 도모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성 에리크는 자신의 충실한 협력자이자 친구였던 성 헨리코 주교와 함께 출발하였다. 성 에리크 왕은 1154년과 1156/7년에 핀란드에 맞서 십자군 전쟁을 벌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성 헨리코 주교는 성 에리크 왕이 돌아간 뒤에도 계속 남아서 핀란드 남서쪽 투르쿠(Turku)를 선교 거점으로 삼아 핀란드 복음화에 헌신하였다. 그는 투르쿠 북쪽 누시아이넨(Nousiainen)에 성당을 건축하여 선교 활동의 중심지로 삼고 많은 이교도를 개종시키는 등 가톨릭 신앙의 토대를 만들었다. 성 헨리코의 죽음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없고 13세기 말에 기록된 전설적인 성인전(Vita)이 전해주는 이야기뿐이다. 그에 따르면 성 헨리코는 1157년경 1월 20일 핀란드인 개종자인 농부 랄리(Lalli)가 스웨덴 군인을 살해한 데 대한 교회법적 제재를 받고 이에 앙심을 품어 얼어붙은 호수 위에서 도끼로 잔혹하게 살해했다고 한다. 주교를 살해 후 랄리는 주교의 모관(毛冠, Biretum)을 집어 들었으나 쉽게 벗겨지지 않고 오히려 모관에 성 헨리코의 살이 묻어났다고 한다. 그 후 성 헨리코의 무덤에서 기적이 많이 일어나면서 순교자로서 공경을 받게 되었다. 그의 유해는 1294년경 6월 18일 새로 건립된 투르쿠 대성당으로 옮겨졌고, 종교 개혁 전후에 성 헨리코는 핀란드에서 국가적 성인으로 큰 공경을 받았다. ‘스칸디나비아의 사도’, ‘핀란드의 수호성인’으로 불리는 그는 공식적으로 시성되지는 않았지만, 1296년부터 교황 문서에서 성인으로 언급되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성 헨리코의 축일은 핀란드와 스웨덴 등에서 1월 20일에 기념하다가 그날이 다른 지역에서 성 파비아노(Fabianus) 교황 또는 성 세바스티아노(Sebastianus) 순교자 기념일로 지내기에 종교 개혁 이후 핀란드에서도 1월 19일로 옮겨 지내게 되었다. 종교 개혁으로 성 헨리코에 대한 공적인 공경은 쇠퇴했으나 그에 대한 기억은 루터교 시대에도 핀란드 교회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부분으로 남았다. 1969년 전례력 개정에 따라 그의 축일은 원래 순교한 날인 1월 20일로 되돌아갔고,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1월 20일 목록에 그의 이름을 새로 추가하였다. 그러면서 영국에서 태어나 스웨덴의 웁살라 교회를 사목하는 임무를 맡은 순교자이자 주교인 성 헨리코가 핀란드인들의 복음 전파에 큰 열정을 쏟았으나 교회 규율에 따라 한 살인자를 바로 잡으려 했다가 그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당했다고 기록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