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우 바르나바(金履禹, Barnabas)는 한양 명례방의 유명한 역관 집안에서 서자(庶子)로 태어났다. 유배지에서 1786년경에 사망한 김범우 토마스는 그의 맏형이자 이복형이고, 1801년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김현우 마태오(金顯禹, Matthaeus)는 그의 아우이다. 1794년 말 주문모 야고보(周文謨, Jacobus)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뒤, 김 바르나바는 아우 김 마태오와 함께 적극적으로 교회 활동에 참여하였고, 홍필주 필립보(洪弼周, Philippus)의 집으로 가서 주 야고보 신부를 만났다. 그리고 정인혁 타대오(鄭仁赫, Thaddaeus), 최필제 베드로(崔必悌, Petrus) 등 몇몇 교우들과 함께 자주 기도 모임을 갖거나 교리를 강습하였다. 김 바르나바는 주 야고보 신부가 박해의 위험 때문에 피신해야 했을 때, 자신의 집을 피신처로 제공하고 그가 집전하는 미사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주 야고보 신부가 설립한 평신도 단체 ‘명도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800년 주 야고보 신부가 다시 한 번 자신의 집을 방문하여 미사를 집전하게 되었을 때는 미사에 필요한 모든 준비를 하기도 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김 바르나바는 아우 김 마태오와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이곳에서 김 바르나바는 엄한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 배교를 강요당했는데, 특히 박해자들은 그에게 그동안의 행적을 무섭게 추궁하였다. 그의 집이 신자들의 집회 장소였고, 그가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숨겨 준 사실이 이미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김이우 바르나바는 아무것도 발설하지 않았고, 여러 차례의 형벌을 신앙의 힘으로 이겨 냈다. 그러나 형벌을 끝까지 견디어내지 못하고 결국 포도청에서 장사(杖死)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01년 음력 5월경이었다. 김이우 바르나바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 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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