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무장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최여겸 마티아(崔汝謙, Matthias)는, 일찍이 윤지충 바오로(尹持忠, Paulus)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웠다. 또 혼인한 뒤에는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를 만나, 다시 교리를 배우고 아주 열심인 신자가 되었다. 당시 그의 처가는 충청도 한산에 있었는데, 그가 이 루도비코 곤자가를 만난 것도 바로 이곳이었다. 이후, 무장으로 돌아온 최 마티아는 교리를 실천하는 데 열중하였다. 또 자신이 깨달은 신앙의 진리를 이웃에게 전파하는 데 힘써 많은 사람들을 입교시켰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최 마티아는 일단 한산 처가로 피신하였다. 이때 무장에서는 그가 입교시킨 신자들을 포함하여 수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으며, 그들을 문초하는 과정에서 그의 이름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 결과, 최 마티아는 4월 13일 한산에서 체포되어 일단 그곳에서 문초를 받고, 감사의 명에 따라 무장으로 이송되었다. 최 마티아가 무장 관아에 이르자, 관장은 곧장 그에게 형벌을 가하면서 문초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어떠한 형벌로도 그의 신앙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를 다시 전주 감영으로 이송하도록 하였다. 이곳에서도 최 마티아는,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옥중에서 열렬한 신자인 한정흠 스타니슬라오(韓正欽, Stanislaus)와 김천애 안드레아(金千愛, Andreas)를 만나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다. 최 마티아와 동료들은, 그 후 한양으로 압송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형조에서는 1801년 8월 21일, 그들에게 사형을 선고하였고, 각각 고향으로 보내 처형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따라 마티아는 고향인 무장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며칠 후에 그곳 개갑 장터(현, 전북 고창군 공음면 석교리)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1년 8월 27일(음력 7월 19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38세였다. 형조에서 최여겸 마티아에게 내린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최여겸은 처음 윤지충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웠으며, 이후로는 이존창을 따르면서 교리를 독실히 믿고 익혔다. 또 그 교리로 남들을 속여 미혹시키고, 널리 사람들을 가르침으로써, 자신도 망치고 남들도 망치게 하였으니, 만 번 죽여도 아깝지 않다.” 최여겸 마티아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 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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