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철’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유문석 요한(柳文碩, Joannes)은, 전라도 전주의 초남이(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에 거주하던 부유한 양반 집안에서 1784년에 태어났다. 1801년 신유박해 순교자인 유항검 아우구스티노(柳恒儉, Augustinus)가 그의 부친이고, 유중철 요한(柳重哲, Joannes)은 그의 형이며, 이순이 루갈다(李順伊, Lutgardis)는 그의 형수가 된다. 유 요한의 집안에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부친 유항검 아우구스티노가 경기도 양근에 살던 인척인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면서부터였다. 이후 유 아우구스티노는 가족과 친지들에게 널리 교리를 전하였고, 그의 집은 전라도 신앙 공동체의 중심지가 되었다. 따라서 유문석 요한은 어릴 때부터 신앙 안에서 자라날 수 있었다. 1795년, 주문모 야고보(周文謨, Jacobus) 신부가 초남이 마을을 방문하였을 때, 유문석 요한의 나이는 열한 살이었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그의 형인 유중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가 동정 부부가 되기로 서약하고 혼인을 하였다. 1801년 박해가 일어났을 때, 초남이 마을에서는 유문석 요한의 부친 유항검 아우구스티노가 가장 먼저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고, 이어 유중철 요한과 친척들이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혔다. 이때 유문석 요한은 다행히 체포되지 않았으므로 여름 내내 전주 옥을 오가며 형에게 음식을 전해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해 9월 중순 무렵에는 유 요한도 남은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히고 말았다. 그는 이때 가족과 함께 순교를 약속하면서 굳게 마음을 다졌는데, 그 내용은 그의 형수 이순이 루갈다가 옥중에서 쓴 편지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 다섯 사람은 모두 이구동성으로 천주를 위해 순교하자고 언약하고, 철석같이 굳은 결심을 했습니다. 이렇게 서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한 결과, 우리의 뜻이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므로 …… 자연히 온갖 후회와 근심 걱정이 사라졌습니다. 날이 갈수록 천주의 은혜와 은총은 쌓이고, 우리 마음에는 신락(神樂)이 더해지며, 아무 걱정도 남아 있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이어 전주 관장은 유문석 요한과 그의 가족에 대한 판결을 조정에 요청하였고, 조정에서는 곧장 이를 담당할 관리를 전주로 파견하였다. 그 결과 유 요한은 11월 14일(음력 10월 9일)에 옥에서 끌려 나와 형 유중철 요한과 함께 교수형을 받았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17세였다. 이때까지 그는 혼인을 하지 않았었다. 유문석 요한은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 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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