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수’ 혹은 ‘계온’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현계흠 플로로(玄啓欽, Florus)*는 한양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많은 역관을 배출하였으나, 그는 역관의 길을 택하지 않고 약방을 운영하며 살았다. 1846년 순교자 현석문 가롤로(玄錫文, Carolus) 성인이 그의 아들이며, 1839년 순교자 현경련 베네딕타(玄敬連, Benedicta) 성녀가 그의 딸이다. 현 플로로는, 일찍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면서 살다가, 1791년 신해박해로 체포된 다음에 석방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곧, 교회의 품으로 돌아왔고, 이후로는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1794년 말 주문모 야고보(周文謨, Jacobus)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뒤, 현 플로로는 동료 신자들과 함께 열심히 교회 일에 참여하였다. 또 손경윤 제르바시오(孫敬允, Gervasius), 김이우 바르나바(金履禹, Barnabas), 정인혁 타대오(鄭仁赫, Thaddaeus) 등과 함께 자주 신앙 집회를 가졌고, 신입 교우들을 인도하거나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주 야고보 신부가 박해로 피신을 해야 했을 때, 그는 자신의 집을 피신처로 제공하기도 했다. 당시 그의 집은 ‘6회’의 하나로 선정되어 있었다. 6회란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明道會)의 하부 조직이며 비밀 집회소였다. 현 플로로는 1797년 9월, 아우가 살고 있는 경상도 남쪽의 동래 지방에 간 적이 있었다. 이때, 그는 마침 그 지역에 나타난 영국 배를 보게 되었는데, 상경한 뒤에 황사영 알렉시오를 만나게 되자 그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해 주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서 교우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였을 때, 현 플로로는 기회를 틈타서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온 일가친척들이 시달림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는 4월경에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포도청에 자수하였다. 이후, 그는 포도청에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아무도 밀고하지 않았으며, 교회에 해가 되는 일은 조금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현계흠 플로로는 10월 초까지 포도청의 옥에 갇혀 있었다. 그러다가 황사영의 문초 과정에서 그의 이름이 나오게 되자, 상급 재판소인 의금부로 이송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신앙을 잃지 않았으며, 1801년 12월 10일(음력 11월 5일)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38세였다. 현계흠 플로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 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 현계흠의 세례명은 한자로 ‘불록’이고 여태까지 ‘바오로’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로 이는 갈리아 지방의 주교 플로로(Florus)로 밝혀졌다(방상근, “1801년 순교자 현계흠의 생애와 세례명”, “교회와 역사”, 2009년 3월호, 3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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