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는 ‘오희’(五喜)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이경도 가롤로(李景陶, Carolus)는 1780년 한양의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충청도 연기 군수를 지냈으며, 부친 이윤하 마태오는 당대의 유명한 학자로서 외조부였던 이익의 학문을 잇고 있었다. 또 그의 어머니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에 기여한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누이였다. 1802년 전주에서 순교한 이순이 루갈다(李順伊, Lutgardis)와 1827년에 전주 옥에서 순교한 이경언 바오로(李景彦, Paulus)는 그의 동생들이다. 이 가롤로는 어려서부터 부모의 가르침을 받아 열심히 천주교 교리를 실천하였다. 본디 성격이 온순하고 너그러웠던 그는, 장성하면서 학문에도 재능을 보여 교회 서적들을 연구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비록 그는 어릴 때 병을 앓아 곱사등이가 되었지만, 그 자신의 신앙과 성품으로 이러한 신체적 결함을 보완하였다. 1793년에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장남인 이 가롤로는 미신 행위에 참석할 수밖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지혜를 발휘하여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게 장례를 치렀다. 이후, 그는 되도록 비신자들과는 어울리지 않으면서 가족이 올바르게 신앙생활을 하도록 이끄는 데 정성을 다하였다. 그리고 최필공 토마스(崔必恭, Thomas), 홍재영 프로타시오(洪梓榮, Protasius) 등 몇몇 교우들과 신앙 공동체를 만들어 함께 교리를 익히곤 하였다. 이 가롤로는 1797년에 어머니와 상의한 뒤, 누이인 이순이 루갈다가 전주의 유중철 요한(柳重哲, Joannes)과 동정 부부로 언약을 하고 혼인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때 그 사실을 알게 된 비신자 친척들이 그를 비난하였으나, 그는 슬기롭게 이를 극복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이 가롤로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관장의 문초 때마다 “아는 신자들은 없으며, 교회 서적은 불태워 버려 남아 있지 않다.”고 거짓으로 자백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사형 선고문에 서명을 한 다음, 처형되기 전날 옥중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어머니에게 보냈다. “제 일생 지은 죄가 하늘까지 닿았고, 제 마음은 목석과 같아 이와 같이 뛰어난 은혜를 받으면서도 아직 눈물도 흘릴 줄을 모릅니다. 아무리 천주의 인자하심이 무한하다고는 하지만, 어찌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만일 천주께서 당신의 너그러운 손으로 저를 이끌어 주신다면, 만 번 죽는다 해도 무엇이 원통하고 무엇이 불안하겠습니까?” 이러한 편지를 남긴 이경도 가롤로는 1802년 1월 29일(음력 1801년 12월 26일)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 새남터로 끌려 나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22세였다. 이경도 가롤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 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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