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석봉 안드레아(徐碩奉, Andreas)는 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구성열 바르바라(具性悅, Barbara)의 남편이며, 1815년 대구에서 옥사로 순교한 최봉한 프란치스코(崔奉漢, Franciscus)의 장인이다. 뒷날 신자들 사이에서는 그가 ‘손골(현,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 박씨(朴氏)의 외조부’라고 전해져 왔다. 서 안드레아가 어디에서 태어나 언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과부였던 구 바르바라와 혼인한 서 안드레아는 사위인 최 프란치스코 부부와 함께 교우들이 모여 사는 경상도 청송의 노래산(현, 경북 청송군 안덕면 노래2리)으로 이주하여 그곳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1815년 예수 부활 대축일에 밀고자를 앞세우고 습격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되었다. 경주 진영에서는 서 안드레아에게 문초와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여기에 굴하지 않았고, 경주 관장은 그를 아내와 사위 등과 함께 대구 감영으로 이송토록 하였다. 대구에서도 그는 여러 차례에 걸쳐 형벌을 받았지만, 이를 백절불굴의 항구심으로 참아 내면서 신앙을 고수하였다. 서 안드레아는 동료들과 함께 1815년 11월 18일(음력 10월 18일)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형벌에 인해 쇠약해진 탓에 옥에서 사형 집행을 기다리던 중에 순교하고 말았으니, 이때가 1816년 음력 10월 21일 이전이었다. 당시 대구 감사가 서석봉 안드레아에게 내린 사형 선고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서석봉과 구성열 부부는 함께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 뉘우칠 줄을 모른다.” 서석봉 안드레아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 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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