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일’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고성운 요셉(高聖云, Josephus)은, 충청도 덕산의 별암(현,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상장리)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부모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는 본디 성격이 착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으며, 신앙생활도 아주 열심히 하였다. 고 요셉은 부모에 대한 효성도 지극하였다. 또한 고 요셉과 고성대 베드로(高聖大, Petrus) 형제는 언제나 합심하여 성경을 읽고 다른 사람들을 권면하는 데 열심이었으므로, 모든 신자에게 모범이 되었다. 고 요셉은 형과 함께 경상도의 청송 노래산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그는 1815년 2월 22일경, 교우들과 함께 예수 부활 대축일을 지내다가 경주 포졸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을해박해의 시작이었다. 이때 노래산 교우촌 신자들은 도적이 온 줄로 알고는 몸이 날쌔고 기운이 세었던 고 요셉의 지휘에 따라 힘으로 대적하였다. 그러나 이내 신자들은 그들이 도적이 아니라 관청에서 파견된 포졸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신자들은 모든 저항을 멈추었고, 고 요셉은 어린양처럼 양순해져서 제일 먼저 포승을 받았다. 고 요셉은 형과 함께 경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고, 감사가 주재하는 대구로 이송되었다. 거기에서도 고 요셉은 모든 고통을 참아 내면서 한결같이 신앙을 증언하였다. 그런 다음 사형 판결을 받고,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 형과 함께 대구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까지 그는 혼인을 하지 않았다. 고성운 요셉의 시신은 형장 인근에 매장되었다가 이듬해 3월 2일, 친척과 교우들에 의해 그 유해가 거두어져 적당한 곳에 안장되었다. 고성운 요셉은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 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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