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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 황사영 생가터(추정)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푯말도 없이 갈대만 무성
지번주소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 월곳리 665-1(황형 장군 유적지 옆) 
전화번호 (032)933-2282
팩스번호 (032)934-5622
홈페이지
전자메일 kanghwa@caincheon.or.kr
관련기관 강화 성당    
관련주소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 북문길 41
순교자 황사영 초상화.강화읍 월곳리 대금동에는 1801년 신유박해의 상황을 적은 백서(帛書)의 주인공인 황사영 알렉시오의 생가터로 추정되는 곳이 있다. 강화 읍내에서 강화 경찰서 방향으로 큰길을 따라 2km쯤 가서 강화 농협창고가 있는 갈림길에서 왼쪽 길로 들어서 700m쯤 가다가 대월초등학교 전에서 다시 오른쪽으로 700m쯤 가면 ‘장무공 황형 장군 유적지’가 나온다. 그곳 사당 재실 뒤편 공터가 황사영의 생가터로 추정되는 곳이다.
 
생가터로 추정되는 곳으로 가는 길에 마지막으로 넘는 언덕 위에 서면 멀리 아련하게 산들이 내려다보인다. 그중에서 가장 먼 산이 북녘땅이다. 먼 시간의 간격을 넘어 신앙의 선조와 만나는 자리이지만 가깝고도 먼 북한 땅의 형제들은 역사의 시간보다도 오히려 먼 듯한 슬픔을 느끼게 한다.
 
황사영은 그의 선조 10여 대가 판서 벼슬을 지낸 명문가 태생으로 부친 황석범 역시 진사 시험에 합격해 한림학사로 있었다. 하지만 황석범은 1774년 병사하고 사영은 유복자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신동(神童)으로 불릴 만큼 영리해 1791년 16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에 합격해 정조(正祖)는 그를 친히 궁으로 불러 손을 어루만지며 치하했다. 그래서 그는 국왕이 만진 손목에 풍속에 따라 붉은 비단을 감고 다니기도 했다.
 
조선 교회의 상황을 북경 교회에 알리고 도움을 청하기 위해 황사영이 제작한 백서.황사영은 당대의 석학들을 만나 학문을 넓히던 중 다산 정약용 일가를 만나고 마침내 정약현의 사위가 되었다. 처가인 마재 정씨 집안으로부터 천주교의 교리에 대해 전해 들은 황사영은 그 오묘한 진리에 깊이 매료되어 입교를 청하게 되고 알렉시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 후 그는 활짝 열려 있던 출셋길을 마다하고 조선에 입국한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도와 전교에 전력했으며 그와 함께 동숙하며 전교 길에 올랐다.
 
그 후 10년 후인 1801년, 전국에는 신유박해의 모진 회오리가 몰아쳤다. 주문모 신부가 순교하고 이승훈, 정약종 등 조선 교회의 핵심 지도자들이 순교했다. 황사영 역시 몸을 피하고자 서울을 떠나 충북 배론에 있는 한 토굴에 몸을 숨겼다.
 
조정에서는 그를 서학의 주요 지도자로 간주했고 박해의 주역이라 할 수 있는 김 대왕대비는 특별히 그를 10일 내 시한부로 잡아들이라는 특별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이로 인해 조선 교회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를 지켜보며 안타까운 마음을 가까스로 추스르던 황사영은 마침내 조선의 상황을 북경 교회에 알리고 도움을 청하는 백서를 썼다. 가로 38cm, 세로 62cm의 흰 명주 천에 깨알 같은 글씨로 한 줄에 1백 10여 자씩, 1백 21행, 모두 1만 3천 3백 11자를 써서 교회에 대한 박해와 앞으로의 전교를 위한 근본 대책 등을 적었다.
 
장무공 황형 장군 유적지의 황씨 문중 사당인 장무사.이렇게 쓰인 백서는 같은 해 10월 동지사 편으로 북경 주교에게 전달될 계획이었다. 그러나 밀서를 지니고 가던 황심(黃沁)이 사전에 관헌에게 체포되면서 황사영 역시 관헌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즉시 의금부에 끌려갔고 그가 쓴 백서는 조정으로 전해졌다. 이를 받아 읽은 조정 대신과 임금은 매우 놀라 그를 극악무도한 대역 죄인이라 하여 참수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시신을 여섯으로 토막 내는 처참한 육시형을 내렸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모친은 거제도로, 부인인 정난주 마리아는 제주도 모슬포 대정골로, 그의 두 살배기 아들 황경한(黃景漢)은 추자도로 유배 가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황사영의 탄생지이자 소년 시절을 보냈다고 알려진 대금동 마을은 대대로 창원 황씨의 세도가 크게 떨치던 곳으로 말끔하게 단장된 황씨 문중 사당은 이를 잘 보여 준다. 바로 그 문중 사당 옆이 황사영의 생가터로 추정된다. 하지만 슬프게도 사당 옆에 황사영의 생가는 흔적도 없고 다만 길게 자란 잡초와 갈대 사이로 약간의 공터만이 그 자취를 짐작하게 할 뿐이다.
 
그런데 황사영의 생가터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1990년 말 일부 교회사학자들은 강화도가 아니라 서울 서부 아현동이라는 주장을 제기했다. 즉 강화도의 집은 황씨 문중이 대대로 살아온 종가일 뿐이며 황사영이 1790년 진사에 합격했을 당시 기록인 “사마방목(司馬榜目)”에도 태생지가 아현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반면 기존의 견해는 강화도에 터전을 둔 황씨 문중이 박해 당시 피해를 극소화하기 위해 생가터를 변경했을 뿐 황사영은 강화도 태생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장무공 황형 장군 유적지의 황씨 문중 사당 재실. 이 재실 뒤편이 황사영의 생가터로 추정되는 곳이나 현재는 서울 아현 생가설이 학계에서 더 인정을 받고 있다.이러한 논쟁이 발생하게 된 원인은 황사영 생가터와 관련된 문헌의 기록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아현 생가설’은 이기경(李基慶)의 “벽위편(闢衛編)”에 기록되어 있는 ‘서부 아현 태생’(胎生於西部阿峴)에 근거한다. 벽위편에 수록된 황사영의 결안(結案)은 이미 의금부에서의 추국 과정을 거치면서 확인된 후에 작성된 것으로, 황사영이 명문거족 출신이라 출생지를 속이려 해도 속일 수 없다는 것이다. 반면 ‘강화 생가설’은 1932년 간행된 “속수증보 강도지(續修增補 江都誌)”, “창원황씨족보” 회산공파보와 구전을 기초로 황사영의 한 후손이 1981년에 “강화도 대묘동 창원 황씨 사당 앞자리가 바로 황사영의 집터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죽은 뒤 여기에 연못이 파였다”라는 증언을 토대로 생겨났다.
 
현재는 서울 아현 생가설이 교회사학계에서 더 인정을 받고 있다. 그러면 여기서 언급된 ‘서부 아현’은 지금의 어느 지역인가? 영 · 정조 때의 ‘서부 아현’은 지금의 마포구 아현동 지역으로 이 마을에는 현 아현중학교(전 경기공업 전문대가 있던 곳)가 있는 자리에 환자를 치료하던 서활인서(西活人署)가 위치했으며(아현 3동), 고개 아랫마을에는 복조리 상인들과 놋그릇을 파는 바리전, 유기 제조 공장들이 많았다(북아현동 입구에서 아현동 사이). 반면에 활인서 뒤편과 유기 상점 뒤로는 일반인들의 거주지였다. 황사영의 생가도 바로 이 지역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3년 5월 20일)]

황씨 문중 사당 재실 뒤편 공터가 황사영의 생가터로 추정되는 곳이나 현재는 서울 아현 생가설이 학계에서 더 인정을 받고 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모바일용 요약 설명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강화읍 월곳리 대금동은 1801년 신유박해의 상황을 적은 백서(帛書)의 주인공 황사영 알렉시오의 생가터로 추정되는 곳입니다. 황사영은 명문가 태생으로 어려서 신동으로 불릴 만큼 영리해 1791년 16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해 정조(正祖)는 그를 친히 궁으로 불러 손을 어루만지며 치하했습니다. 당대의 석학들을 만나 학문을 넓히던 중 다산 정약용 일가를 만나 정약현의 사위가 되었고, 처가인 마재 정씨 집안으로부터 천주교의 교리에 대해 전해 듣고 입교하여 알렉시오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1801년 전국에 신유박해의 모진 회오리가 몰아쳐 주문모 신부가 순교하고 이승훈, 정약종 등 조선 교회의 핵심 지도자들이 순교하자 황사영 역시 충북 배론으로 몸을 숨겼습니다. 조선 교회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자 황사영은 토굴에서 조선의 상황을 북경 교회에 알리고 도움을 청하는 백서를 썼습니다. 그러나 밀서를 지니고 가던 황심이 사전에 관헌에게 체포되어 황사영도 관헌에게 붙잡혔습니다. 결국 황사영은 대역 죄인으로 참수되었고, 그의 가족들 역시 흩어져 유배되는 비운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황사영의 생가터에 대해서는 기존의 ‘강화도 생가설’과 ‘서울 아현 생가설’로 서로 다른 견해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황사영 생가터와 관련된 문헌의 기록이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현재는 이기경(李基慶)의 “벽위편(闢衛編)”에 기록되어 있는 서울 ‘서부 아현 태생’(胎生於西部阿峴)이 더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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