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사티루스(또는 사티로)는 밀라노의 성녀 마르첼리나(Marcellina, 7월 17일)와 성 암브로시오(Ambrosius, 12월 7일) 주교와 형제 사이로 334년경 당시 서로마 황제가 머물던 오늘날의 독일 남서부 트리어(Trier)에서 태어났다. 로마 귀족 가문에 속한 아버지는 근위대 대장이자 갈리아 지방의 총독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경건한 과부였던 어머니는 자녀들과 함께 로마(Roma)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는 맏이였던 성녀 마르첼리나의 돌봄을 받으며 자랐다. 성녀 마르첼리나는 353년경 주님 공현 축일(또는 주님 성탄 대축일)에 성 베드로(Petrus) 대성당에서 교황 리베리오(Liberius)에게 동정녀로 축성을 받고 기도와 참회의 생활을 시작했다. 성 사티로와 성 암브로시오 형제는 로마에서 수사학과 법학을 공부했고, 가문의 전통에 따라 국가 관리의 길을 택해 뛰어난 실력과 좋은 가문을 배경으로 출세의 길을 걸었다. 374년 12월 밀라노의 집정관이던 성 암브로시오가 급작스럽게 밀라노 교구의 주교로 선출되고 주교 축성을 받았을 때, 지방 정부의 지사로 있던 성 사티로는 모든 공직에서 사임한 후 밀라노로 가서 교구의 세속적 행정 업무를 돕고 가문의 유산을 관리하며 동정녀인 성녀 마르첼리나를 보호하는 데 힘썼다. 그럼으로써 동생인 성 암브로시오 주교가 영적인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보좌했다. 그는 가문의 재산을 관리하기 위해 여러 차례 북아프리카에 다녀왔는데, 377년경 항해 중에 배가 난파해 헤엄쳐서 겨우 해안가에 도착하였다. 기력을 다해 병이 난 그는 아직 예비신자였기에 기회가 닿는 대로 세례성사 받기를 청했다. 죽기 얼마 전에 세례를 받은 그는 밀라노에서 성녀 마르첼리나와 성 암브로시오의 품에 안겨 선종하였다. 미혼이었던 성 사티로는 자신의 재산을 필요한 곳에 사용해달라고 형제들에게 맡겼다. 성 암브로시오 주교는 유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주었고, 형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추모하는 “형제 사티로의 죽음에 관하여”(De extrau fratris Satyri)라는 장례미사 강론을 작성했다. 그 글에서 성 암브로시오는 형제의 죽음에 대한 애통한 마음과 자신을 위해 희생한 형제의 사랑과 덕을 칭송하며 그런 형제를 보내주신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성 사티로는 오늘날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오 대성당 확장 부분에 있는 성 빅토로 경당의 성 빅토르 마우로(Victor Maurus, 5월 8일) 순교자 무덤 옆에 묻혔다. 872년경 밀라노의 안스베르토(Ansbertus) 주교는 밀라노의 베네딕토회 수도원 안에 성 사티로와 성 암브로시오와 성 실베스테르에게 헌정하는 성당을 건립해 봉헌하였다. 1478년 확장 이후 이 성당은 산타 마리아 프레소 산 사티로(Santa Maria presso San Satiro) 성당으로 불리고 있다. 옛 “로마 순교록”은 9월 17일 목록에서 성 사티로가 밀라노에서 세상을 떠났고, 그의 형제인 성 암브로시오가 그의 뛰어난 덕을 추모했다고 전해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같은 날 목록에서 아직 세례를 받지 않았던 성 사티로가 배가 난파한 상황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남아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교회에 동참했는데, 그와 친밀한 형제애로 결합한 성 암브로시오 주교가 그의 덕을 추모하며 거룩한 순교자 성 빅토르 옆에 묻었다고 기록하였다. 일부 전승은 성 사티로와 성 암브로시오를 쌍둥이 형제로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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