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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블랑코(2.6)

프란치스코 블랑코(2.6)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진/그림] [자료실] 인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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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명 프란치스코 블랑코 (Francis Blanco)
축일 2월 6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순교자
활동지역 일본(Japan)
활동연도 1570-1597년
같은이름 방지거, 프란체스꼬, 프란체스꾸스,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쿠스, 프란치스꼬, 프란치스꾸스, 프란치스쿠스, 프랜시스
성인 기본정보

   성 프란치스쿠스 블랑코(Franciscus Blanco, 또는 프란치스코 블랑코)는 1570년 에스파냐 갈리시아(Galacia) 지방의 오우렌세(Ourense)에서 태어나 몬테레이(Monterrei)의 예수회 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리고 카스티야 이 레온(Castilla y Leon)으로 이주한 후 비얄판도(Villalpando)에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여 수련기를 시작했다. 그는 다른 문화권에서의 선교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멕시코로 가서 사제품을 받고 1593년 필리핀의 마닐라(Manila)로 파견되었다. 그곳에서 3년 정도 활동하다가 1596년 초에 일본에서의 선교를 위해 스승인 승천의 성 마르티노(Martinus de la Ascension)와 함께 배에 올랐다. 나가사키(長崎, Nagasaki) 항구에 도착한 그는 오늘날의 교토(京都, Kyoto) 지방인 미야코(宮古, Miyako)의 수도원에서 일본어를 배우며 병자를 돌보는 등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그 무렵 일본 교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1587년에 선교사 추방령을 내린 적이 있었지만, 1590년 예수회의 순찰사 알레산드로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가 인도 부왕(副王)의 사절 자격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방문한 뒤에는 금교의 제약 속에서 조심스럽게 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1593년 에스파냐의 국왕 펠리페 2세(Felipe II)는 일본과의 평화협정을 맺기 위해 마닐라에서 활동하던 작은 형제회의 성 베드로 밥티스타(Petrus Baptista) 신부를 대사 자격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파견하였다. 성 베드로 밥티스타는 겸손하고 온화한 태도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협상을 평화롭게 이끌어 미야코에서 선교 활동에 필요한 많은 지원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런데 1596년 무렵 작은 형제회 회원들이 미야코에서 성당과 수도원과 병원을 건립하는 등 공공연한 전교 활동을 전개하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정치적 부담을 주고 일본 지배층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게다가 그해 여름 필리핀의 마닐라(Manila)를 떠나 멕시코로 가던 에스파냐 선박 산 펠리페(San Felipe)호가 태풍에 밀려 일본 해안으로 떠밀려오면서 문제가 생겼다. 선원들이 일본 관리들과 대화 중에 에스파냐의 왕권과 정복욕을 자랑하며 일본을 무시하는 말을 하고 선교사들에 대한 부정적 인상을 심어주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분노를 자아냈다.

   그 결과 1596년 12월에 게이한(京阪, 교토와 오사카) 지방에서 활동하던 작은 형제회 회원들을 체포하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이 내려지면서 본격적인 박해가 시작되었고, 성 프란치스코 블랑코도 미야코에서 체포되었다. 이 박해로 게이한 지방에서 체포된 이들은 작은 형제회의 신부와 수사 6명, 작은 형제회의 일본인 재속 3회원 15명, 예수회의 수사 3명 등 모두 24명에 달했다. 1597년 1월 3일, 미야코 감옥에 갇혔던 성 프란치스코 블랑코와 동료들은 모두 광장으로 끌려 나와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장인 나가사키까지 혹한의 추위 속에서 걸어가야 했다. 그들이 처형을 위해 나가사키까지 가는 동안 예수회 회원들을 돌보도록 오르간티노(Gnecchi-Soldo Organtino) 신부에 의해 파견된 성 베드로 스케지로(Petrus Sukejiro)와 작은 형제회 회원들을 돌보던 성 프란치스코 키치(Franciscus Kichi)도 그리스도교 신자임이 드러나 체포되었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순교의 길에 동참해 순교자는 모두 26명으로 늘어났다. 그들은 2월 5일에 나가사키 근교 우라카미(浦上, Urakami)라는 교우촌에 도착해 2명의 예수회 신부를 만나 고해성사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같은 날 성 프란치스코 블랑코와 동료들은 나가사키 해안 근처에 있던 니시자카(西坂, Nishizaka) 언덕으로 끌려가 십자가형을 받고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그때 성 프란치스코 블랑코의 나이는 27세였다.

   나가사키의 골고타 언덕으로 불리는 니시자카 언덕에서 예수님처럼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할 수 있어서 기뻐했던 성 프란치스코 블랑코와 25명의 동료는 이렇게 해서 일본 최초의 순교자들이 되었고, 그들이 순교한 언덕은 이후 ‘순교자의 언덕’으로 불리게 되었다. 성 프란치스코 블랑코와 25명의 동료 순교자들은 1627년 9월 교황 우르바노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26위의 일본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옛 “로마 순교록”은 성 바오로 미키와 25명의 동료가 순교한 2월 5일 목록에서 그들의 순교 사실을 기록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1969년의 전례력 개정과 함께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이 로마 보편 전례력 안에 추가되었다. 그러면서 성녀 아가타(Agatha, 2월 5일) 동정 순교자와의 중복을 피하려고 2월 6일로 날짜를 옮겨 기념하고 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 또한 2월 6일 목록에서 26위의 일본 성인인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에 대해 기록하였다.♣

사진/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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