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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밥티스타(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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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명 베드로 밥티스타 (Peter Baptist)
축일 2월 6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순교자
활동지역 일본(Japan)
활동연도 1549?-1597년
같은이름 밥티스따,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성인 기본정보

   성 페트루스 밥티스타(Petrus Baptista, 또는 베드로 밥티스타)는 1549년경 에스파냐의 아빌라(Avila) 교외에 있는 산 에스테반 델 발레(San Esteban del Valle)에서 태어났다. 그는 몸벨트란(Mombeltran)에서 라틴어와 우주론을 공부하고, 오로페사(Oropesa)의 예수회에서 학업을 이어간 후 아빌라에서 음악을 공부했다. 그는 아빌라 주교좌성당에서 2년 정도 성가대원으로 활동했고, 1560년 살라망카(Salamanca)에서 6년 동안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는 동안 사제 성소를 느껴 아빌라에서 부제품을 받았다. 그는 1567년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여 수련을 받고 다음 해에 서원한 후 사제품을 받았다. 관구에서 설교와 수도자 양성에 힘쓰던 그는 선교 사업에 헌신하고자 선교사를 지원해 1581년 멕시코로 떠났다. 그는 그곳에서 3년 정도 선교한 후 1584년에 에스파냐의 식민지배를 받고 있던 필리핀의 마닐라(Manila)에 도착해 학교와 병원을 짓고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돌보는 데 힘썼다. 그는 마을과 본당에서 음악을 가르치고 성가대를 조직해 활동하며 신자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 노력했을 뿐 아니라 선교사들을 위한 피정 센터를 마련하기도 했다.

   당시 일본 해적들이 마닐라까지 위협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팽창주의로 인해 에스파냐와 일본의 관계는 그리 좋지 않았다. 일본 교회 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87년에 선교사 추방령을 내려 선교 활동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런데 1590년 예수회의 순찰사 알레산드로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가 인도 부왕(副王)의 사절 자격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방문한 뒤에는 금교의 제약 속에서 조심스럽게 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1593년 에스파냐의 국왕 펠리페 2세(Felipe II)는 일본과의 평화협정을 맺기 위해 마닐라에서 활동하던 성 베드로 밥티스타 신부를 대사 자격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파견하였다. 성 베드로 밥티스타는 겸손하고 온화한 태도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협상을 평화롭게 이끌어 오늘날의 교토(京都, Kyoto) 지방인 미야코(宮古, Miyako)에서 선교 활동에 필요한 많은 지원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런데 1596년 무렵 작은 형제회 회원들이 일정한 제한을 무시하고 미야코 일대에 성당과 수도원과 병원을 건립하는 등 공공연한 전교 활동을 전개하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정치적 부담을 주고 일본 지배층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게다가 그해 여름 필리핀의 마닐라를 떠나 멕시코로 가던 에스파냐 선박 산 펠리페(San Felipe)호가 태풍에 밀려 일본 해안으로 떠밀려오면서 문제가 생겼다. 선원들이 일본 관리들과 대화 중에 에스파냐의 왕권과 정복욕을 자랑하며 일본을 무시하는 말을 하고 선교사들에 대한 부정적 인상을 심어주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분노를 자아냈다.

   그 결과 1596년 말부터 게이한(京阪, 교토와 오사카) 지방에서 활동하던 작은 형제회 회원들을 체포하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과 함께 박해가 시작되었고, 성 베드로 밥티스타도 미야코에서 체포되었다. 이 박해로 게이한 지방에서 체포된 이들은 작은 형제회의 신부와 수사 6명, 작은 형제회의 일본인 재속 3회원 15명, 예수회의 수사 3명 등 모두 24명에 달했다. 1597년 1월 3일, 미야코 감옥에 갇혔던 성 베드로 밥티스타와 동료들은 모두 광장으로 끌려 나와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장인 나가사키(長崎, Nagasaki)까지 혹한의 추위 속에서 걸어가야 했다. 그들이 처형을 위해 나가사키까지 가는 동안 예수회 회원들을 돌보도록 오르간티노(Gnecchi-Soldo Organtino) 신부에 의해 파견된 성 베드로 스케지로(Petrus Sukejiro)와 작은 형제회 회원들을 돌보던 성 프란치스코 키치(Franciscus Kichi)도 그리스도교 신자임이 드러나 체포되었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순교의 길에 동참해 순교자는 모두 26명으로 늘어났다. 그들은 2월 5일에 나가사키 근교 우라카미(浦上, Urakami)라는 교우촌에 도착해 2명의 예수회 신부를 만나 고해성사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같은 날 성 베드로 밥티스타와 동료들은 나가사키 해안 근처에 있던 니시자카(西坂, Nishizaka) 언덕으로 끌려가 십자가형을 받고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대략 48세였다.

   나가사키의 골고타 언덕으로 불리는 니시자카 언덕에서 예수님처럼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할 수 있어서 기뻐했던 성 베드로 밥티스타와 25명의 동료는 이렇게 해서 일본 최초의 순교자들이 되었고, 그들이 순교한 언덕은 이후 ‘순교자의 언덕’으로 불리게 되었다. 성 베드로 밥티스타와 25명의 동료 순교자들은 1627년 9월 교황 우르바노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26위의 일본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옛 “로마 순교록”은 성 바오로 미키와 25명의 동료가 순교한 2월 5일 목록에서 그들의 순교 사실을 기록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1969년의 전례력 개정과 함께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이 로마 보편 전례력 안에 추가되었다. 그러면서 성녀 아가타(Agatha, 2월 5일) 동정 순교자와의 중복을 피하려고 2월 6일로 날짜를 옮겨 기념하고 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 또한 2월 6일 목록에서 26위의 일본 성인인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에 대해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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