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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룸바(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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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성인명 골룸바 (Columba)
축일 6월 9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수도원장, 선교사
활동지역 이오나(Iona)
활동연도 521-597년
같은이름 골롬바, 꼴롬바, 꼴룸바, 콜럼, 콜럼 칠, 콜롬바, 콜룸바, 콜름 칠, 콜름실
성인 기본정보

   성 콜룸바(또는 골룸바)는 521년 12월 7일 아일랜드 더니골(Donegal)의 가르탄(Gartan)에서 왕가의 후예인 페들리미드(Fedlimid)와 에트느(Eithne)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콜(Colm), 콜럼(Colum), 콜럼/콜름 칠(Colum/Colm Cille) 또는 콜름실(Colmcille)로도 알려졌는데, 아마도 그 이름 가운데 하나로 세례를 받고, 모빌라(Movilla)의 수도원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후 스무 살 무렵 부제품을 받았다. 그 후 그는 렌스터(Leinster)로 가서 수학한 후 성 핀니안(Finnian, 12월 12일)이 클로나드(Clonard)에 세운 수도원에서 공부를 계속 이어갔다. 그는 여기서 성 핀니안으로부터 아일랜드와 웨일스 수도원의 전통과 가르침을 배워 ‘아일랜드의 12 사도’로 불리는 대표적인 제자 중 하나가 되어 사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그 후에는 모비(Mobhi)의 지도하에 글라스네빈(Glasnevin) 수도원에서 지내며 클론맥노이즈(Clonmacnoise)의 성 치아란(Ciaran, 9월 9일), 킬케니(Kilkenny) 성 카니코(Canicus, 10월 11일), 뱅거(Bangor)의 성 콤갈(Comgall, 5월 10일) 등과 자주 교류하였다. 그러나 544년경 아일랜드를 황폐화한 흑사병으로 인해 도시 전체가 소개되었을 때, 그는 친척이 사는 얼스터(Ulster)로 가서 아일랜드의 거의 모든 지역에 산재해 있는 성당에서 설교하고 수도원을 세우면서 약 15년을 지냈다. 그러고 나서 563년경에 이 지역을 떠났다.

   그런데 여기서 상당히 큰 사건이 있었음이 나중에 알려졌는데, 사건 발생 후 천 년이 넘은 뒤에 기록된 이야기라 그 신빙성에는 의문이 따르고 있다. 그에 따르면 성 골룸바가 얼스터에 있을 때 모빌(Moville)의 성 핀니안(Finnian, 9월 10일)의 수도원에서 그의 제자로 지낸 적이 있었다. 평소 시편 기도를 즐겨 바쳤던 그는 성 핀니안이 아일랜드로 가져온 성 예로니모(Hieronymus)의 시편 사본을 보관할 목적으로 허락 없이 모두 베꼈다. 모빌의 성 핀니안이 사본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돌려달라고 요구하면서 성 골룸바와 큰 다툼이 일어났다. 아일랜드의 디아마트(Diarmait mac Cerbaill) 왕까지 개입해서 성 골룸바의 사본을 성 핀니안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판정을 내렸고, 그 과정 중에 성 골룸바가 디아마트 왕에게 칼을 뽑아 드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는 성 골룸바를 돕기 위해 함께 성소를 찾아온 친척 코노트(Connacht)의 쿠르난(Curnan) 왕자가 디아마트 왕의 부하에 의하여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자 양가 사람들의 끝없는 혈전이 벌어졌고, 일명 ‘책의 전투’(Battle of the Book)라고 불리는 쿨 드레임네(Cul Dreimhne) 전투에서 약 3천 명의 사람이 죽었다. 텔타운(Teltown)에서 개최된 시노드(Synod)는 성 골룸바의 책임을 물어 맹렬히 비난하였다. 그러자 성 골룸바는 아일랜드를 떠나 수많은 이교도를 개종시키며 죽을 때까지 보속의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아무튼 563년경에 성 골룸바는 12명의 제자 또는 동료들과 함께 스코틀랜드 연안에 있는 이오나 섬으로 갔고, 그곳에 수도원을 세웠는데 나중에 아일랜드 교회에서 가장 큰 수도원으로 발전하였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픽트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전념하여 왕을 개종시켰고, 마침내 픽트족의 땅 전역을 복음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런 큰 성과가 나온 이면에는 놀라운 기적이 하나 있었다. 스코틀랜드 하일랜드(Highland, 산악 지대)에 있는 네스(Ness) 강 깊은 곳에 큰 괴물이 살고 있었는데, 성 골룸바가 성호를 긋고 기도함으로써 이를 물리쳐 사람들을 구했다고 한다. 그 후 그의 성덕이 널리 알려졌고, 기적에 대한 명성으로 인해 수도원을 방문하는 이들이 급격히 늘어났다. 그는 선교와 수도원 발전에 헌신하다가 597년 6월 9일 이오나의 수도원에서 선종해 그곳에 묻혔다.

   9세기 중엽 그의 유해는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로 나누어 모셨는데, 아일랜드로 간 그의 유해는 아일랜드의 사도인 성 파트리치오(Patricius, 3월 17일)와 킬데어(Kildare)의 성녀 브리지다(Brigida, 2월 1일)가 묻힌 다운패트릭(Downpatrick)에 안장되었다. 이들은 아일랜드의 세 명의 수호성인으로 큰 공경을 받고 있다. ‘픽트족의 사도’ 또는 ‘스코틀랜드의 사도’로 불리는 성 골룸바가 서방교회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그가 이오나에 설립한 수도원은 스코틀랜드의 학문과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고, 그곳 출신 수도자들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가 만든 수도 규칙은 성 베네딕토(Benedictus)의 수도 규칙이 정착하기 전까지 전 유럽에서 통용되었다. 그는 성령의 기쁨을 안고 산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다. 옛 “로마 순교록”이나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 모두 6월 9일 목록에서 스코틀랜드의 이오나 섬에 수도원을 세우고 원장으로 헌신한 성 골룸바에 대해 기록하였다.♣

사진/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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