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 부 성사의 경륜
- 제 2 부 교회의 일곱 성사
- 제 1 장 그리스도교 입문 성사들
- 제3절 성체성사(聖體聖事)
- V. 성사적인 희생 제사: 감사, 기념, 현존
제 2 부 교회의 일곱 성사
- 1356 그리스도인들이 초기부터, 다양한 시대와 전례들을 거치면서도 본질적으로는 변하지 않는 한 가지 형태로 성찬례를 거행해 온 것은, 수난 전날 저녁에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1코린 11,24-25) 하신 주님의 명령에 우리가 매여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 1357 우리는 주님의 희생 기념제를 거행하여 이 명령을 수행한다. 이를 행함으로써 우리는 성부께서 친히 우리에게 주신 것, 곧 창조의 선물, 그리고 성령의 힘과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된 빵과 포도주를 성부께 드린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실제로 또 신비로이 현존하신다.
- 1358 그러므로 우리는 성찬례를 다음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 - 성부께 드리는 감사와 찬미,
- - 그리스도와 그 몸의 희생을 기념하는 제사,
- -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령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현존.
- 성부께 드리는 감사와 찬미
- 1359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우리 구원의 성사인 성찬례는 창조 사업에 대한 감사로 드리는 찬미의 제사이기도 하다. 성찬의 희생 제사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모든 피조물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성부께 바쳐진다. 교회는 하느님께서 만물과 인류 안에 만드신 좋고 아름답고 올바른 모든 것에 대하여 감사하는 찬미의 제사를 그리스도를 통해 드릴 수 있다.
- 1360 성찬례는 성부께 드리는 감사의 제사이며,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은혜와, 창조와 속량과 성화로 이루어 주신 모든 것에 대한 감사로, 교회가 드리는 찬미이다. 성찬례는 무엇보다도 ‘감사’를 의미한다.
- 1361 성찬례는 교회가 모든 피조물을 대표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노래하는 찬미의 제사이기도 하다. 이 찬미의 제사는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과 당신의 찬미와 전구에 신자들을 결합시키신다. 이로써 성부께 드리는 찬미의 제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들여지도록 봉헌된다.
- 그리스도와 그분의 몸인 교회의 희생을 기념하는 제사
- 1362 성찬례는 그리스도의 파스카를 기념하며, 그분의 몸인 교회의 전례 안에서 그분의 유일한 희생 제사를 현재화하고 성사적으로 봉헌한다. ‘감사 기도’의 각 양식들 안에는 성찬 제정의 말씀 후에 아남네시스 또는 기념이라고 부르는 기도가 있다.
- 1363 성서적 의미의 기념은 과거의 사건들을 기억하는 것뿐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해 이루신 놀라운 일들을 선포하는 것이다.(188) 이러한 사건들을 전례적으로 기념할 때, 그 사건들은 어떤 방식으로 현재 실제로 일어나게 된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로부터 탈출한 해방을 이해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파스카를 기념할 때마다 이집트 탈출 사건은 믿는 이들의 기억 속에 현존하게 되고, 그 사건에 삶을 일치시키도록 한다.
- 1364 신약 성경에서는 이 기념이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성찬례를 거행할 때, 교회는 그리스도의 파스카를 기억하며, 이 파스카는 현재화한다.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 영원히 십자가 위에서 드리신 희생 제사는 언제나 현재적인 것으로 존속한다.(189) “‘우리의 파스카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신’(1코린 5,7) 십자가의 희생 제사가 제단에서 거행될 때마다 우리의 구원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190)
- 1365 성찬례는 그리스도의 파스카를 기념하는 것이므로 희생제사이기도 하다. 성찬례가 지닌 제사적 성격은 성찬 제정 말씀, 곧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루카 22,19-20) 하신 말씀에 나타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신 바로 그 몸과,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피”(마태 26,28)를 성찬례에서 주신다.
- 1366 성찬례는 십자가의 희생 제사를 재현(현재화)하고, 이를 기념하며, 그 결과를 실제로 적용시키기 때문에 희생 제사이다.
- 우리 하느님이시며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을 위해 영원한 속량을 실현하시려고 십자가의 제단 위에서 중개자로서 돌아가심으로써, 당신 자신을 단 한 번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셨다. 그러나 그분의 죽음으로 그 사제직이 끝나서는 안 되었으므로(히브 7,24.27), “잡히시던 날 밤”(1코린 11,23) 최후의 만찬에서 사랑하는 당신 신부인 교회에게 (인간의 본성이 요구하는) 눈에 보이는 제사를 남겨 주고자 하셨다. 그 제사에서는 십자가 위에서 단 한 번 이루어진 피의 제사가 재현될 것이며, 그 기념이 세상 끝 날까지 계속될 것이고, 그 구원적 효과는 우리가 날마다 저지르는 죄의 용서에 적용될 것이었다.(191)
- 1367 그리스도께서 바치신 희생 제사와 성찬례의 희생 제사는 동일한 제사이다. “제물은 유일하고 동일하며, 그때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바치셨던 분이 지금 사제의 직무를 통해서 봉헌하시는 바로 그분이시다. 단지 봉헌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192) “십자가 제단 위에서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피 흘려 봉헌하신’ 저 그리스도께서 그 똑같은 제사를, 미사로 거행되는 이 신적 희생 제사에서 피 흘림 없이 제헌하고 계시기 때문에……이 희생 제사는 참으로 속죄의 제사이다.”(193)
- 1368 성찬례는 교회의 희생 제사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는 그 머리와 함께 봉헌된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함께 자신을 온전히 바친다. 교회는 성부께 드리는 그분의 전구와 결합된다. 성찬례에서 그리스도의 제사는 그 신비체의 지체들의 제사이기도 하다. 신자들의 삶, 찬미, 고통, 기도, 노동 등은 그리스도의 그것들과 결합되고 그리스도의 온전한 봉헌과 결합되며, 이로써 새로운 가치를 얻게 된다. 제대 위에서 바치는 그리스도의 제사는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분의 봉헌과 결합될 가능성을 준다.
- 지하 묘지(카타콤바)에서 흔히 교회는 두 팔을 널리 펴 들고 기도하는 여인의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십자가 위에서 팔을 벌리신 그리스도와 같이, 교회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바치며 전구한다.
- 1369 온 교회는 그리스도의 봉헌과 전구에 결합된다. 교회 안에서 베드로의 직무를 맡은 교황은 모든 성찬례의 거행과 결합되어, 성찬례에서 보편 교회가 지닌 일치의 표지와 봉사자라고 일컬어진다. 사제가 성찬례를 집전하더라도, 그 성찬례는 지역 주교의 책임 아래 집전되는 것이다. 주교가 사제단 안에서 부제들의 보좌를 받으며 개별 교회를 주재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성찬례 중에 주교의 이름을 부른다. 또 공동체는 그 공동체를 위하여 그 공동체와 함께 성찬의 제사를 드리는 모든 사제들을 위해서도 기도한다.
- 주교나 주교의 위임을 받은 사람이 주재하여 행하는 성찬례만이 합법적인 것이다.(194)
- 신자들의 신령한 제사는 사제의 직무를 통하여 유일한 중개자이신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와 결합되며 완성된다.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는 바로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사제들의 손을 통하여 온 교회의 이름으로 성찬례 안에서 피 흘림 없이 성사적으로 봉헌된다.(195)
- 1370 아직 이 세상에 있는 지체들뿐 아니라 이미 하늘의 영광 중에 있는 지체들도 그리스도의 봉헌에 결합된다. 교회는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 마리아와 모든 성인을 기억하고 또 그분들과 일치하여 성찬의 제사를 드린다. 성찬례 중에 교회는 마리아와 함께 십자가 아래 서서 그리스도의 봉헌과 전구에 결합된다.
- 1371 성찬의 제사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지만 아직 완전히 정화되지 못한”(196) 죽은 신자들을 위해서, 그들이 그리스도의 빛과 평화를 얻을 수 있도록 바치는 것이기도 하다.
- 이 몸을 아무 곳에나 묻어 다오. 이 몸 때문에 조금도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부탁하는 것은 오직 너희가 있을 그곳의 주님의 제대에서 나를 기억해 달라는 것이다.(197)
- 우리는 [감사 기도에서] 잠든 거룩한 교부들과 주교들, 그리고 우리보다 앞서 잠든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거룩하고 경외스러운 희생 제물이 여기 계시므로, 그들을 위해 바치는 간절한 기도가 영혼들에게 매우 큰 유익이 되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죄인이라고 해도, 죽은 이들을 위해서 하느님께 간구할 때, 우리는……우리 죄 때문에 희생되신 그리스도를 바치는 것입니다. 이로써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그들도, 우리도 너그럽게 대해 주시도록 청합니다.(198)
- 1372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성찬례에서 거행하는 구세주의 제사에 점점 더 완전하게 참여하도록 우리를 독려하는 이 교리를 다음과 같이 훌륭하게 요약하였다.
- 온전히 속량된 이 도성, 성도들의 모임과 공동체가 대사제를 통하여 보편적 희생 제물로 하느님께 봉헌된다. 이 대사제는 종의 모습을 취하시어, 우리를 위해 수난으로 자신을 바치기까지 하시어 우리를 그토록 위대한 머리의 몸이 되게 하셨다.……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제사이다. “수가 많지만 그리스도 안에 한 몸”(로마 12,5)인 것이다. 교회는 이 제사를 신자들이 잘 알고 있는 제대의 성사로 끊임없이 재현하며, 교회가 봉헌하는 그것 안에서 교회 자체가 봉헌된다는 사실이 드러난다.(199)
- 말씀과 성령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현존
- 1373 “돌아가셨다가 참으로 되살아나셔서 하느님 오른쪽에 앉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 주시는 그리스도 예수님”(로마 8,34)께서는 다양하게 교회에 현존하신다.(200)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말씀 안에, 교회의 기도 안에,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마태 18,20)에, 가난한 사람들, 병자들, 감옥에 갇힌 사람들 안에,(201) 몸소 세우신 성사들 안에, 미사성제와 사제의 인격 안에 계신다. 그리고 “특별히 성체의 형상 안에 현존하신다.”(202)
- 1374 성체의 형상 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는 방식은 독특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성체성사를 모든 성사 위에 들어 높이시고 “영성 생활의 완성과 모든 성사가 지향하는 목적으로”(203) 삼으신다. 지극히 거룩한 성체성사 안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혼과 천주성과 하나 된 몸과 피가, 따라서 온전한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실재적으로, 그리고 실체적으로 담겨 계신다.”(204) “이 현존이 ‘실재적’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다른 현존 방식이 실재적이 아니라는 배타적인 의미가 아니라, 그 현존이 탁월하게 실체적이라는 의미이다. 분명코, 하느님이시며 인간이신 그리스도께서 전적으로 또 완전하게 현존하신다.”(205)
- 1375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이 성사에 현존하시게 된다. 교부들은 이러한 변화를 이루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령의 활동이 지니는 효력에 대한 교회의 믿음을 확고하게 단언하였다. 예컨대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 봉헌물들을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게 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바로 그분이십니다.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사제가 말을 하지만, 그 말의 효력과 은총은 하느님에게서 나옵니다. “이는 내 몸이다.” 하시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봉헌물들을 변화시킵니다.(206)
- 암브로시오 성인도 이 변화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이는 자연적으로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축복으로 축성된 것임을 믿고, 축복을 통해서 본성까지도 변하므로 축성의 힘이 자연의 힘보다 크다는 것을 믿읍시다…….(207)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무에서 만드신 그리스도의 말씀인데, 그 말씀이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던 어떤 것으로 바꿀 수 없다고 하겠습니까- 사물에 처음으로 본성을 부여하는 것이 그 본성을 바꾸는 것보다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208)
- 1376 트리엔트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가톨릭 신앙을 요약하여 선포한다. “우리 구세주 그리스도께서 빵의 형상으로 내어 주시는 것은 참으로 당신의 몸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하느님의 교회는 항상 이러한 확신을 지녀 왔으며 본 공의회는 이를 다시금 선포하는 바이다. 빵과 포도주의 축성으로써 빵의 실체 전체가 우리 주 그리스도의 몸의 실체로, 포도주의 실체 전체가 그리스도의 피의 실체로 변화한다. 가톨릭 교회는 이러한 변화를 적절하고도 정확하게 실체 변화(transsubstantiatio)라고 불러 왔다.”(209)
- 1377 그리스도께서는 성체가 축성되는 순간부터, 성체의 형상이 존속하는 동안 계속 그 안에 현존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성체의 두 가지 형상 안에 각각 온전히 현존하며, 또 그 각 부분에도 현존하시므로 빵을 나누어도 그리스도께서는 나뉘지 않으신다.(210)
- 1378 성체 공경. 우리는 미사 전례 중에 특히 무릎을 꿇거나, 주님에 대한 흠숭의 표시로 깊이 몸을 숙여 절함으로써,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현존하신다는 믿음을 표현한다. “가톨릭 교회는 성체성사에 바쳐야 할 이 흠숭 예절을 미사 중에는 물론이고 미사가 끝난 뒤에도 실천하여 왔다. 교회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축성된 제병(성체)을 아주 정성스럽게 보존하고, 장엄한 흠숭을 위하여 신자들에게 현시하며, 또 백성들의 기쁨에 찬 행렬 중에 함께 모심으로써 이 흠숭 예절을 실천한다.”(211)
- 1379 거룩한 안치소(감실)는 본래 미사에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과 병자들에게 모시고 갈 성체를 품위 있게 보관하기 위한 것이었다. 성체 안에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현존하신다는 신앙이 깊어짐에 따라, 교회는 성체 안에 계신 주님을 침묵 속에 경배하는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그러므로 감실은 성당의 특별히 품위 있는 장소에 두어야 하며, 거룩한 성사 안에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현존하신다는 진리를 강조하고 표현할 수 있도록 제작해야 한다.
- 1380 그리스도께서 이처럼 특별하게 당신 교회에 현존하기를 원하신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일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가시적인 형상으로는 당신 제자들을 떠나실 것이었으므로, 성사적으로 당신을 우리에게 주기를 원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바치려고 하셨으므로, 당신의 목숨을 내어 주실 정도로 “끝까지 사랑하신”(요한 13,1) 그 사랑의 기념을 우리가 간직하기를 원하셨다. 과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신(212) 분으로서 성체성사 안에 현존하심으로써 우리 가운데 계속 신비롭게 머물러 계시며, 이러한 사랑을 표현하고 전해 주는 표징 안에 계신다.
- 교회와 세상은 마땅히 성체를 공경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랑의 성사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흠숭 안에서, 신앙으로 충만하며, 중대한 잘못과 세상의 죄를 속죄하겠다는 열린 마음으로 드리는 묵상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러 가는 시간을 거부하지 맙시다. 우리의 흠숭이 중단되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213)
- 1381 “토마스 성인은 그리스도의 참다운 몸과 그리스도의 참다운 피가 이 성사 안에 계시다는 것은 ‘오관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권위에 근거한 신앙으로써 알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치릴로 성인은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라는 루카 복음 22장 19절의 말씀을 해설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말이 참말인지를 의심하지 말고 차라리 신앙으로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십시오. 진리이신 주님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214)
- 엎디어 절하나이다. 눈으로 보아 알 수 없는 하느님, 두 가지 형상 안에 분명히 계시오나 우러러 뵈올수록 전혀 알 길 없삽기에 제 마음은 오직 믿을 뿐이옵니다.
- 보고 맛보고 만져 봐도 알 길 없고 다만 들음으로써 믿음 든든해지오니 믿나이다, 천주 성자 말씀하신 모든 것을. 주님의 말씀보다 더 참된 진리 없나이다.(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