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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10 신약 시대의 성사들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셨으며, 그것은 세례성사, 견진성사, 성체성사, 고해성사, 병자성사, 성품성사, 혼인성사의 일곱 가지이다. 이 일곱 성사는 그리스도인 생활의 중요한 모든 단계와 시기에 관계된다. 성사들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을 탄생시키고 성장시키며, 치유하고 사명을 부여한다. 이 점에서 자연적인 삶의 단계들과 영적인 삶의 단계들은 어느 정도 유사하다.(1)
  • 1211 이러한 유사성에 따라서 먼저 그리스도교 입문의 세 가지 성사를 설명하고(제1장), 그다음으로 치유를 위한 성사들을(제2장), 그리고 끝으로 신자들의 친교와 사명을 위한 성사들을 설명할 것이다(제3장). 물론 이러한 순서만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순서를 따름으로써, 성사들이 하나의 유기체를 이루며, 이 유기체 안에서 각 성사가 지극히 중요한 자신의 위치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성체성사는 이 유기체 안에서 “성사 중의 성사”로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다른 모든 성사는 마치 자신들의 목적을 향하듯 성체성사를 지향하고 있다.”(2)
  • 제 1 장 그리스도교 입문 성사들
  • 1212 그리스도교 입문의 성사인 세례성사, 견진성사, 성체성사는 그리스도교 생활의 기초를 놓는다.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사람들이 신성에 참여함은 인간의 자연적 생명의 기원, 성장, 유지와 어떤 유사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세례성사를 통해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난 신자들은 견진성사로 굳건하게 되며, 성체성사로 영원한 생명의 음식을 받는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그리스도교 입문 성사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부요한 생명을 더욱더 풍부하게 받게 되고 사랑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3)
  • 제1절 세례성사(洗禮聖事)
  • 1213 세례성사는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기초이며, 성령 안에 사는 삶으로 들어가는 문이며, 다른 성사들로 가는 길을 여는 문이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죄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며,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교회 안에서 한 몸을 이루어 그 사명에 참여하게 된다.(4) “세례는 물로써 그리고 말씀으로 다시 태어나는 성사다.”(5)
  • I. 이 성사는 어떻게 불리는가-
  • 1214 이 성사가 이루어지는 중심 예식을 따라 세례성사(Baptismus)라고 불린다. 세례를 준다(baptizein)는 말은 ‘물에 담그다’, ‘물에 잠기게 하다’라는 의미이다. 물에 ‘잠김’은 예비 신자가 그리스도의 죽음 속에 묻힘을 상징하는데, 그는 그곳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새사람”(2코린 5,17; 갈라 6,15)으로 나오게 된다.(6)
  • 1215 이 성사는 또한 “성령에 의한 재생과 경신의 목욕”(티토 3,5)이라고도 불린다. 이 성사는 물과 성령으로 태어남을 의미하고, 이를 실제로 이루어 주기 때문이다. 이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
  • 1216 “이 목욕은 조명이라고 불리는데, (교리)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마음에 빛을 받기 때문이다.”(7) 세례로써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요한 1,(9) 이신 말씀을 받은 영세자는 “빛을 받고 나서”(8) “빛의 자녀”가(9) 되고, 그 자신이 “빛”(에페 5,(8) 이 된다.
  • 세례는 하느님의 선물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가장 훌륭한 선물이다.……우리는 이것을 선물, 은총, 기름 바름, 조명, 불멸의 옷, 재생의 목욕, 인호 등 가장 귀중한 모든 명칭으로 부른다. 그것은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는 사람에게 주어지기 때문에 선물이며, 빚진 자들에게도 주어지기 때문에 은총이며, 죄가 물속에 묻히기 때문에 세례(물에 잠김)이며, 신성하고 왕다운 것이기에 도유이며(사제와 왕들은 기름부음을 받았다), 밝은 빛이기에 조명이며, 우리의 부끄러움을 가려 주기에 옷이며, 씻어 주기 때문에 목욕이며, 우리를 지켜 주며 또한 하느님의 주권에 대한 표징이기 때문에 인호라고 한다.(10)
  • II. 구원 경륜에서의 세례
  • 구약의 세례 예표
  • 1217 교회는 부활 성야의 전례 중에 세례수를 축복하면서, 세례의 신비를 예시한 구원 역사의 위대한 사건들을 장엄하게 기념한다.
  • 하느님, 성사의 표징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힘으로 구원의 신비를 이루시니, 주님께서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물이 세례성사의 표징이 되게 하셨나이다.(11)
  • 1218 이 보잘것없으면서도 놀라운 피조물인 물은 태초부터 생명과 풍요의 원천이다. 성경은 하느님의 영이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고 한다.(12)
  • 태초에 성령께서 물 위에 머무시어 거룩하게 하는 힘을 주셨나이다.(13)
  • 1219 교회는 노아의 방주를 세례를 통한 구원의 예표로 보았다. 과연 방주 덕분에 “몇몇 사람만이 물로 구원을 받았는데 여덟 명”(1베드 3,20)뿐이었다.
  • 홍수를 통하여, 죄를 씻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세례를 미리 보여 주셨나이다.(14)
  • 1220 샘물이 생명을 상징하는 반면 바닷물은 죽음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바닷물은 십자가의 신비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징체계에 따라 세례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일치함을 의미한다.
  • 1221 특히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참으로 해방된 것은 세례로 이루어지는 해방을 예고한다.
  •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홍해를 건너 파라오의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하시어, 세례 받은 새 백성의 예표로 삼으셨나이다.(15)
  • 1222 끝으로 요르단 강을 건너는 일에서 세례가 예표되었다. 요르단 강을 건넘으로써 하느님의 백성은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약속된 땅을 선물로 받는데, 이는 영원한 생명의 상징이다. 이 복된 상속의 약속은 새 계약 안에서 성취된다.
  • 그리스도의 세례
  • 1223 구약의 모든 예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취된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게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은 후 공생활을 시작하신다.(16) 부활하신 후에는 사도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명을 주신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17)
  • 1224 우리 주님께서는 모든 의로움을 이루시고자(18) 죄인들을 위한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자청하여 받으셨다. 예수님의 이 행위는 당신을 ‘비우심’을(19) 나타내는 것이다. 그때 첫 창조의 물 위에 감돌던 성령께서 새 창조의 전조로 그리스도 위에 내려오시고, 성부께서는 예수님을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밝히신다.(20)
  • 1225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파스카를 통하여 모든 사람을 위해 세례의 샘을 열어 주셨다.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렘에서 당신께서 겪으실 수난을, 받아야 할 “세례”라고 이미 말씀하신 일이 있었다.(21)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창에 찔린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은(22) 새로운 생명의 성사들인 세례와 성체성사의 예형이다.(23) 그때부터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날 수 있게 된 것이다(요한 3,5).
  • 당신이 어디에서 세례를 받았는지, 그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리스도의 죽음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디에서 세례를 받았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습니다. 십자가에 모든 신비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위해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이 속량되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이 구원되었습니다.(24)
  • 교회 안의 세례
  • 1226 오순절 바로 그날부터 교회는 거룩한 세례를 거행하고 베풀어 왔다. 그날 베드로 사도는 자신의 설교에 감동받은 군중에게 이렇게 선포한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사도 2,38). 사도들과 그들의 협력자들은 유다인이든,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든, 이방인이든,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세례를 권한다.(25) 세례는 언제나 신앙과 결부된 것으로 드러난다. 바오로 사도는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 하고 필리피의 간수에게 말했다. 이야기는 이렇게 이어진다. “그 자리에서 그와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사도 16,31-33).
  • 1227 바오로 사도에 따르면, 믿는 이는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에 일치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다가 함께 부활한다.
  •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3-4).(26)
  •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입었다.”(27) 성령을 통하여, 세례는 깨끗하게 해 주고 거룩하게 해 주고 의롭게 해 주는 목욕이다.(28)
  • 1228 그러므로 세례는 물로 씻는 목욕으로서, 이를 통해 ‘썩어 없어지지 않는 씨앗’인 하느님의 말씀은 생명을 주는 효과를 낳는다.(29)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세례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말씀이 물질적 요소와 결합되어 성사가 된다.”(30)
  • III. 세례성사는 어떻게 거행되는가-
  • 그리스도교 입문
  • 1229 사도 시대 이래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여러 단계의 입교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이 과정은 빠르거나 느릴 수는 있지만 몇 가지 필수적인 요소들, 예컨대 말씀의 선포, 회개를 수반하는 복음의 수용, 신앙의 고백, 세례, 성령을 받음, 영성체 등을 포함해야 했다.
  • 1230 이러한 입교 과정은 시대의 흐름과 상황에 따라 많은 변화를 겪어 왔다. 초기 교회의 입교는 오랜 예비 신자 기간과 더불어 긴 과정을 거쳤다. 이 예비 신자 기간은 준비 단계를 전례적으로 구분하는 일련의 예비 예식들을 거쳐, 마침내 그리스도교 입문 성사들을 거행함으로써 그 절정에 이르렀다.
  • 1231 어린이 세례가 대체로 세례성사 거행의 일반적 형태가 된 곳에서는, 이 어린이 세례가 그리스도교 입문의 예비 단계들을 하나로 축약해 놓은 단일한 예식이 되었다. 어린이 세례는 본래 세례 후 교리 교육 기간이 필요하다. 이는 세례 후 교육의 필요성만이 아니라, 사람이 성장함에 따라 반드시 세례의 은총이 피어나야 하는 필요성 때문에 교리 교육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리 교육의 고유한 자리이다.
  • 1232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라틴 교회에 “여러 단계로 나뉘어 있는 어른들의 예비 신자 기간”(31) 을 복구시켰다. 이 단계적 예식들은 어른 입교 예식서(1972년 발행)에 들어 있다. 한편 공의회는, “선교 지역에서는 그리스도교 전통에 있는 것들 외에 각 민족의 관습에서 발견되는 입문 의식의 요소들도, 그리스도교 예식에 적용될 수 있는 데까지 받아들일 수 있다.”(32) 고 밝힌다.
  • 1233 그러므로 오늘날 라틴과 동방의 모든 예법에서 어른의 그리스도교 입문은 그들이 예비 신자 기간의 교리 교육 과정에 들어오는 것으로 시작되어 세례와 견진, 성체의 세 가지 성사를 한 번에 베푸는 것으로 그 절정에 이르게 된다.(33) 동방 예법들에서 어린이의 그리스도교 입문은 세례로 시작되며, 견진과 영성체가 즉시 뒤따른다. 그러나 로마 예법에서는 어린이 세례 후 여러 해에 걸친 교리 교육이 이어지고, 그 후에 그리스도교 입문의 절정인 견진성사와 성체성사로 마무리된다.(34)
  • 성사 거행의 신비 교육
  • 1234 세례성사의 의미와 은총은 세례 거행 예식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신자들은 이 성사를 거행하는 행위와 말씀에 주의 깊게 참여하고 따름으로써, 이 성사가 갓 세례 받은 모든 사람 안에서 표시하고 이루는 풍요로움에 참여하게 된다.
  • 1235 성사 거행을 시작할 때 긋는 십자 성호는 그리스도께 속하게 될 사람이 받는 그리스도의 날인을 가리키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당신 십자가로 우리에게 얻어 주신 구원의 은총을 의미한다.
  • 1236 하느님 말씀의 선포는 계시된 진리로 예비 신자들과 회중을 비추고, 세례와 분리될 수 없는 신앙의 응답을 불러일으킨다. 사실 세례는 신앙생활로 들어가는 성사적 관문이기 때문에, 특별히 ‘신앙의 성사’이다.
  • 1237 세례는 죄와 죄를 선동하는 마귀에게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예비 신자들을 위하여 한 가지 (또는 여러 가지)의 구마 기도를 바친다. 집전자가 예비 신자 성유를 바르거나 또는 안수를 함으로써, 예비 신자는 사탄을 명백하게 끊어 버리게 된다. 이렇게 준비된 예비 신자는 교회의 신앙을 고백할 수 있으며, 그는 세례로써 이 신앙에 “맡겨지는 것이다.”(35)
  • 1238 세례수는 (세례 때 또는 부활 성야에) 성령 청원 기도로 축성된다. 교회는 성자를 통해서 성령의 능력이 그 물에 내려와 세례 받는 사람들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게”(요한 3,5) 해 주시기를 하느님께 청한다.
  • 1239 그다음에, 본래 세례라 불리는 핵심적인 예식이 뒤따른다. 그 예식은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에 일치함으로써 예비 신자가 죄에 대하여 죽고,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생명으로 들어감을 표시하고 실현한다. 이 세례는 세례수에 세 번 잠김으로써 의미 깊게 이루어진다. 그러나 오랜 관습에 따라 예비 신자의 머리에 세 번 물을 붓는 방식으로도 베풀 수 있다.
  • 1240 라틴 교회에서 집전자는 이처럼 세 번 물을 부으면서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무)에게 세례를 줍니다.” 하고 말한다. 동방 전례에서 예비 신자는 동쪽을 향하고, 사제는 “하느님의 종 (아무)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하고 말한다. 그리고 성삼위를 각각 부르면서 예비 신자를 물에 잠기게 했다가 나오게 한다.
  • 1241 축성 성유의 도유 곧 주교가 축성한 향유를 발라 주는 것은 새 영세자에게 성령을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례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인, 곧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아서, 기름부음 받은 사제이며 예언자이고 왕이신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는 것이다.(36)
  • 1242 동방 교회의 전례에서는 세례 후의 기름 바름이 ‘도유의 성사’(sacramentum Chrismationis: 견진성사)이다. 로마 전례에서 이 도유는 주교의 두 번째 도유, 곧 견진성사를 예고한다. 말하자면 이 성사는 세례의 도유를 ‘견고하게 하고’ 완성하는 것이다.
  • 1243 흰옷은 세례 받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입었다”는(37) 것과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였음을 상징한다. 부활초에서 불을 붙인 촛불은 그리스도께서 새 교우를 비추셨음을 의미한다. 세례 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의 빛”(마태 5,14)이 된다.(38)
  • 새로 세례 받은 사람은 이제 하느님의 외아들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하느님 자녀들의 기도인 주님의 기도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
  • 1244 첫영성체.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혼인 예복을 입은 새 교우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았으며, 새 생명의 양식인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을 받아 모신다. 동방 교회는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마르 10,14)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여, 어린이들까지 포함해서 새롭게 세례와 견진을 받은 모든 이에게 성체를 나누어 줌으로써, 그리스도교 입문 과정이 단일한 것임을 생생하게 의식해 왔다. 한편 세례 받은 어린이가 분별력을 가질 때까지 영성체를 미루는 라틴 교회에서는, 그 어린이를 제대 가까이 데려가 ‘주님의 기도’를 바침으로써, 세례가 성체로 가는 문을 열어 주었음을 나타낸다.
  • 1245 세례 거행은 장엄 축복으로 끝을 맺는다. 갓난아이들의 세례에서 어머니를 위한 축복은 특별한 자리를 차지한다.
  • IV. 누가 세례를 받는가-
  • 1246 “아직 세례 받지 않은 이는 누구나, 그리고 오직 그들만이 세례 받을 수 있다.”(39)
  • 어른 세례
  • 1247 초대 교회 이래로 복음이 갓 전파된 곳에서는 어른 세례가 가장 흔한 일이다. 이 경우 예비 신자 기간(세례 준비)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리스도교 신앙과 생활로 인도하는 이 과정은 세례성사, 견진성사, 성체성사로 하느님의 선물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 1248 예비 신자 기간 또는 예비 신자 교육의 목적은 예비 신자들이 하느님의 주도에 응답하고 교회 공동체와 하나 되어, 그 회개와 신앙이 성숙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 생활을 가르치는……기간이며 이때에 제자들은 자기 스승이신 그리스도와 결합된다. 그러므로 예비 신자들은 구원의 신비에 적절히 참여하고 복음 생활을 실천하며 계속 이어지는 시기에 따라 거룩한 전례를 거행하며, 하느님 백성의 신앙과 전례와 사랑의 생활로 들어서야 한다.”(40)
  • 1249 예비 신자들은 “이미 교회와 결합되어 있으므로 이미 그리스도의 집에 있고 또 드물지 않게 이미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생활을 하고 있다.”(41) “어머니인 교회는 이미 자기 자녀가 된 그들을 사랑과 배려로 감싸 안는다.”(42)
  • 어린이 세례
  • 1250 어린아이들도 원죄로 타락하고 더러워진 인간의 본성을 지니고 태어나므로, 어둠의 세력에서 해방되어, 하느님 자녀들이 누리는 자유의 영역으로 옮겨 가기 위해(43) 세례로 새로 나야 한다.(44) 모든 사람이 그러한 부름을 받는다. 구원의 은총이 완전히 무상으로 주어진다는 것은 특히 어린이 세례에서 드러난다. 그러므로 출생 후 가까운 시일에 아이에게 세례를 베풀지 않는다면, 교회와 부모는 그 아이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무한한 은총을 받지 못하게 하는 것이 된다.(45)
  • 1251 그리스도인 부모는 어린이 세례가,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맡기신 생명을 양육하는 역할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여야 한다.(46)
  • 1252 어린아이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은 오랜 옛날부터 내려오는 교회의 전통이다. 이것은 2세기부터 분명하게 확인된다. 그러나 사도들이 전도하기 시작한 때부터 온 “집안”이 세례를 받을 때(47) 어린아이들에게도 세례를 베풀었다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48)
  • 신앙과 세례
  • 1253 세례는 신앙의 성사이다.(49) 그러나 신앙을 위해서는 믿는 이들의 공동체가 필요하다. 오로지 교회의 신앙 안에서만, 신자 개개인이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세례를 위해서 완전하고 성숙한 신앙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발전할 수 있는 신앙의 출발이 필요한 것이다. 예비 신자나 대부모는 “하느님의 교회에 무엇을 청합니까-”라는 질문에 “신앙을 청합니다.” 하고 대답한다.
  • 1254 어린이든 어른이든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의 신앙은 세례 후에도 계속 성장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해마다 부활 성야에 세례 서약 갱신 예식을 거행한다. 세례를 위한 준비는 새 생활의 문턱까지 인도할 뿐이다. 세례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새 삶의 근원이며, 이 근원에서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가 솟아 나온다.
  • 1255 세례의 은총이 효력을 내기 위해서는 부모의 도움이 중요하다. 이것은 대부나 대모의 역할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대모는, 어린이든 어른이든 새로 세례 받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도록 도와줄 능력과 의향이 있는 견실한 신자라야 한다.(50) 그들의 임무는 참다운 교회적 의무이다.(51) 교회 공동체 전체는 세례에서 받은 은총을 키워 주고 지켜 줄 책임이 있다.
  • V. 누가 세례를 줄 수 있는가-
  • 1256 세례의 일반적인 집전자는 주교와 사제이며, 라틴 교회에서는 부제도 집전한다.(52) 부득이한 경우에는 모든 사람이,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까지도, 세례 집전에 합당한 의향을 지니고 있는 경우, 성삼위의 이름이 명시된 세례 양식문을 사용하여 세례를 줄 수 있다.(53) 합당한 의향이란 교회가 세례를 주면서 행하고자 하는 것을 하겠다는 것이다. 교회는 비신자라도 세례를 줄 수 있는 근거를 보편적 구원을 원하시는 하느님의 의지와(54) 구원을 위한 세례의 필요성에서(55) 찾는다.
  • VI. 세례의 필요성
  • 1257 주님께서 친히 세례가 구원을 위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고,(56) 복음을 전하고 모든 민족들에게 세례를 베풀라고 제자들에게 명하셨다.(57) 세례는 복음을 듣고 이 성사를 청할 수 있는 사람들의 구원에 필수적이다.(58) 교회는 영원한 행복에 들기 위한 확실한 보증으로 세례 이외의 다른 방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교회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는 모든 사람을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게” 하라고 주님께서 주신 사명에 소홀함이 없도록 주의한다. 하느님께서는 구원을 세례성사에 매어 놓으셨지만, 하느님 자신이 성사에 매여 있는 것은 아니다.
  • 1258 교회는 예로부터, 세례는 받지 않았으나 신앙 때문에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그 죽음을 통하여 세례를 받는다는 굳은 신념을 간직해 왔다. 이러한 혈세(血洗, Baptismus sanguinis)는 화세(火洗, Votum Baptismi)와 마찬가지로 성사가 아니면서도 세례의 효과를 낳는다.
  • 1259 세례 받기 전에 죽는 예비 신자들의 경우, 죄에 대한 회개와 사랑을 동반한 세례를 받고자 하는 그들의 분명한 원의는 성사를 통하여 받을 수 없었던 구원을 보장해 준다.
  • 1260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고 또 인간의 궁극 소명도 참으로 하나 곧 신적인 소명이므로, 우리는 성령께서 하느님만이 아시는 방법으로 모든 사람에게 이 파스카 신비에 동참할 가능성을 주신다고 믿어야 한다.”(59)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분의 교회를 모른다고 해도, 진리를 찾고 자신이 아는 대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이 세례의 필요성을 알았더라면 분명히 세례를 받고자 했을 것이다.
  • 1261 세례를 받지 않고 죽은 어린이들의 경우, 그들을 위한 장례 예식에서 하듯이 교회는 그들을 하느님의 자비에 맡길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되기를 원하시는”(1티모 2,4)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마르 10,14) 하신 예수님의 어린이들에 대한 애정으로, 우리는 세례를 받지 않고 죽은 어린이들에게 구원의 길이 열려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어린이들이 거룩한 세례의 은혜를 받아 그리스도께로 오는 것을 막지 말라는 교회의 호소는 더욱 절실한 것이다.
  • VII. 세례의 은총
  • 1262 세례의 다양한 효과들은 성사 예식의 감각적 요소들을 통하여 표시된다. 물에 잠김은 죽음과 정화의 상징이지만 재생과 갱신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두 가지 중요한 효과는 죄의 정화와 성령 안에서 새롭게 탄생하는 것이다.(60)
  • 죄의 용서
  • 1263 세례를 통하여 모든 죄, 곧 원죄와 본죄, 그리고 모든 죄벌까지도 용서받는다.(61) 세례로 새로 태어난 사람들에게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가로막을 아무런 죄도 남아 있지 않다. 곧 아담의 죄도, 본죄도, 죄의 가장 중대한 결과인 하느님과의 단절도 남아 있지 않는 것이다.
  • 1264 반면에 세례 받은 사람에게는 고통, 질병, 죽음 등 죄의 현세적 결과 그리고 연약한 기질과 같은, 인생에 내재한 나약함이 남아 있다. 그리고 교회 전통이 ‘사욕’(邪慾)이라 부르고, 은유적으로는 ‘죄의 불씨’라고 부르는, 죄로 기우는 경향도 그대로 남아 있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으로 남아 있는 사욕은, 거기에 굴복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용감히 맞서는 사람들에게는 해를 끼칠 수 없다. ‘경기를 하는 사람도 규칙대로 경기를 하지 않으면 승리의 화관을 얻지 못한다’(2티모 2,5).”(62)
  • 새사람이 됨
  • 1265 세례는 모든 죄를 정화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새 신자를 “새사람”이 되게 하며,(63)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는”(64)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65) 그리스도의 지체,(66)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67) 성령의 성전이 되게 한다.(68)
  • 1266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께서는 세례 받은 사람에게 성화하는 은총, 곧 의화하는 은총을 주신다. 이 성화 은총은,
  • - 향주덕(向主德)을 통하여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께 바라고,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게 하며,
  • - 성령의 은혜를 통하여,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살고 행동할 수 있게 하며,
  • - 윤리덕을 통하여 선이 성장하도록 해 준다.
  •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초자연적인 삶 전체가 세례에 뿌리를 두고 있다.
  •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한 몸이 됨
  • 1267 세례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신비체의 일원이 되게 한다. “우리는 서로 지체입니다”(에페 4,25). 세례는 교회와 한 몸이 되게 한다. 세례대에서 국가와 문화, 인종과 성별 등, 모든 자연적 인간적 한계를 초월하는, 신약의 유일한 하느님 백성이 탄생한다. “우리는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1코린 12,13).
  • 1268 세례 받은 사람들은 “살아 있는 돌로서 영적 집을 짓는 데에 쓰이고, 거룩한 사제단”(1베드 2,5)이 되었다. 그들은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사제직, 예언자직, 왕직에 참여한다. “여러분은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 주신 분의 위업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1베드 2,9). 세례를 받으면 신자들의 보편 사제직에 참여하게 된다.
  • 1269 교회의 일원이 된 세례 받은 사람은 이제 자신의 것이 아니고(69)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것이다.(70) 그러므로 세례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헌신하고,(71) 교회의 친교 안에서 그들에게 봉사하며,(72)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복종하고 순종하며(73) 그들을 존경하고 사랑해야 한다.(74) 세례를 받으면 이처럼 책임과 의무가 생기지만, 동시에 세례 받은 사람들은 교회의 품 안에서, 성사를 받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양육되며 교회의 다른 영적인 도움으로 지원받을 권리도 누린다.(75)
  • 1270 세례 받은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 교회를 통하여 하느님께 받은 신앙을 사람들 앞에서 고백하려고 힘쓰고”,(76) 하느님 백성의 사도적, 선교적 활동에 참여해야 한다.(77)
  • 그리스도인들을 일치시키는 성사적 유대
  • 1271 세례는 아직 가톨릭 교회와 완전히 일치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루는 일치의 기초가 된다. “그리스도를 믿고 올바로 세례를 받은 이들은 비록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가톨릭 교회와 친교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세례 때에 믿음으로 의화된 그들은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고 마땅히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지며, 가톨릭 교회의 자녀들은 그들을 당연히 주님 안에 형제로 인정한다.”(78) 그러므로 “세례는 세례를 통하여 새로 태어난 모든 사람을 묶어 주는 일치의 성사적 끈이다.”(79)
  • 지워지지 않는 영적 표지
  • 1272 세례로써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이들은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을 지니게 된다.(80) 세례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께 속해 있음을 나타내는 지워지지 않는 영적인 표지(인호)를 새겨 준다. 비록 죄 때문에 세례가 구원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라 하더라도 이 표지는 그 어떠한 죄로도 지워지지 않는다.(81) 한 번 받은 세례는 다시 받을 수 없다.
  • 1273 신자들은 세례를 통하여 교회에 합체되어 그리스도교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인호를 받았다.(82) 세례의 인호는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의 거룩한 전례에 활기 있게 참여하여 하느님을 섬기며, 거룩한 삶을 증언하고 극기와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세례에 의한 그들의 사제직을 수행할 수 있게 하며 이를 촉구한다.(83)
  • 1274 “주님의 인호”(84) 는 성령께서 “속량의 날”(에페 4,30)을 위하여 우리에게 찍어 놓으신 표지이다.(85) “과연 세례는 영원한 생명의 보증이다.”(86) 끝까지 “인호를 간직한”, 곧 자신이 받은 세례가 요구하는 것에 충실한 신자는, “신앙의 보람을 지니고”,(87) 세례 때에 고백한 그 신앙을 보존하고, 신앙의 완성인 지복 직관을 바라면서 부활에 대한 희망 속에서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 간추림
  • 1275 그리스도교 입문은 세 가지 성사가 합하여 이루어진다. 이는 새 삶의 시작인 세례성사, 새 삶을 견고하게 하는 견진성사, 제자들이 당신 모습으로 변화되도록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살과 피로 양육하시는 성체성사이다.
  • 1276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
  • 1277 세례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으로 태어나게 한다. 주님의 뜻에 따라, 교회가 구원에 필요하듯이 세례도 구원에 필요하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교회에 들어간다.
  • 1278 세례성사의 핵심적인 예식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을 부르면서 예비 신자를 물에 담그거나 머리에 물을 붓는 것이다.
  • 1279 세례의 효과 또는 세례의 은총은 풍요로운 것이다. 이 은총으로 세례 받은 사람은 원죄와 모든 본죄를 용서받고, 성부의 양자, 그리스도의 지체, 성령의 성전이 되어 새롭게 태어난다. 그 결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한 몸이 되고,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한다.
  • 1280 세례는 영혼에 지워지지 않는 영적 표지를 새겨 주는데, 이 인호는 세례 받은 사람이 그리스도교 예배를 드리도록 축성하여 준다. 이 인호 때문에 세례는 다시 받을 수 없다.(88)
  • 1281 신앙 때문에 죽임을 당한 사람들과, 예비 신자들, 그리고 교회를 모르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의 뜻을 은총의 영향 아래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세례를 받지 않았어도 구원받을 수 있다.(89)
  • 1282 아주 오랜 옛날부터 어린아이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왜냐하면 세례는 인간의 공로를 전제로 하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이며 선물이기 때문이다. 어린이들은 교회의 신앙 안에서 세례를 받는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함으로써 참된 자유에 도달하게 된다.
  • 1283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어린이들을 위하여, 교회 전례는 하느님의 자비를 신뢰하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도록 권한다.
  • 1284 부득이한 경우에는 누구든지 세례를 줄 수 있다. 다만 교회가 행하고자 하는 것을 하겠다는 의향을 가지고,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세례를 줍니다.” 하고 말하면서 세례 받을 사람의 머리에 물을 붓기만 하면 된다.
  • 제2절 견진성사(堅振聖事)
  • 1285 세례성사와 성체성사와 함께 견진성사는 ‘그리스도교 입문 성사’이며, 이 입문 성사들의 단일성은 지켜져야 한다. 그러므로 견진성사가 세례성사의 은총을 완성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것을 신자들에게 설명해 주어야 한다.(90) “견진성사로 신자들은 더욱 완전히 교회에 결합되며 성령의 특별한 힘을 받아 그리스도의 참된 증인으로서 말과 행동으로 신앙을 전파하고 옹호하여야 할 더 무거운 의무를 진다.”(91)
  • I. 구원 경륜에서의 견진성사
  • 1286 구약 성경에서 예언자들은 기다리던 메시아 위에,(92) 그 구원 사명을 위해 주님의 영이 내려오실 것이라고 예고했다.(93)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께서 그분 위에 내려오신 것은, 그분이 오시기로 되어 있던 바로 그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신 메시아라는 징표였다.(94) 성령으로 잉태되신 예수님의 전 생애와 사명은 성부께서 그분께 “한량없이 주시는”(요한 3,34) 성령과 이루는 완전한 친교 안에서 실현된다.
  • 1287 그런데 성령의 이 충만은, 오로지 메시아만이 아니라 모든 메시아 백성에게 전해질 것이었다.(95)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여러 번 약속하셨고,(96) 이 약속을 부활 날 처음으로 실현하셨으며,(97) 성령 강림 날에 더욱 분명하게 실현하셨다.(98) 성령을 충만히 받은 사도들은 “하느님의 위업”(사도 2,11)을 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베드로는 성령이 쏟아져 내려오신 것을 메시아 시대의 징표라고 선언한다.(99) 그때 사도들의 설교를 믿고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성령의 선물도 받았다.(100)
  • 1288 “그때부터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뜻을 받들어, 새 신자들에게 안수하여 세례의 은총을 완성시키는 성령의 선물을 베풀어 주었습니다.(101) 이리하여 히브리서에서 그리스도교 입문의 초보적인 교육 주제들 가운데 세례와 안수의 교리도 언급하게 된 것입니다.(102) 가톨릭 전승은 안수를 견진성사의 기원으로 당연히 인정하였으며, 이 견진으로써 성령 강림의 은총이 교회 안에 영속되고 있다 하겠습니다.”(103)
  • 1289 일찍이 성령의 부여를 더 잘 드러내기 위해 안수에 향유(축성 성유, 크리스마) 바름이 추가되었다. 이 도유는 ‘기름부음 받은 사람’을 의미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밝혀 준다. 이 이름은 “하느님께서 성령으로 기름 부으신”(사도 10,38) 분, 바로 그리스도라는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이 도유 예식은 서방 교회와 마찬가지로 동방 교회에서도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러므로 동방 교회에서는 이 성사를 ‘도유’(Chrismatio) 성사라고 부르거나 ‘축성 성유(크리스마) 도유’(myron)라고 부른다. 서방 교회에서 견진이라는 이름은 이 성사가 세례를 확정하고 동시에 세례의 은총을 견고하게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 동방과 서방의 두 전통
  • 1290 그리스도교 초기에는 보통 견진을 세례와 함께 한 번에 거행했다. 그러므로 성 치프리아노의 표현대로 견진성사는 세례성사와 함께 하나의 “이중적 성사”를 이룬다.(104)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어린아이들의 세례가 많아지면서 연중 내내 거행되고, 시골 본당의 수효가 늘어나 교구가 커지면서 주교가 모든 세례성사를 집전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서방 교회는 세례의 완성을 주교에게 유보해 두려고 이 두 성사를 시간적으로 분리시키게 되었다. 동방 교회에서는 이 두 성사를 하나로 결합시켜 왔다. 따라서 견진성사도 세례성사를 주는 사제가 베푼다. 그러나 그 사제는 견진성사를 줄 때, 반드시 주교가 축성한 ‘성유’(myron)를 사용해야 한다.(105)
  • 1291 로마 교회의 관습이 서방의 관행을 발전시켰다. 그것은 세례 후에 축성 성유를 두 번 바르는 관습이었다. 세례 받는 사람이 세례수에서 나온 직후에 사제가 발라 주는 첫 번째 도유는, 세례 받은 사람의 이마에 주교가 발라 주는 두 번째 도유로써 완결된다.(106) 사제가 축성 성유를 발라 주는 첫 번째 도유는 세례 예식에 속하는 것으로서 세례 받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예언자직, 사제직, 왕직에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른이 세례 받는 경우에 세례 후 도유는 한 번뿐인데, 이것은 견진의 도유이다.
  • 1292 동방 교회의 관습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 입문의 단일성을 더 잘 보여 준다. 라틴 교회의 예식은 새 신자들과 주교의 일치를 더욱 분명하게 표현한다. 주교는 ‘하나이며 보편되고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참교회의 보증인이고 그 봉사자이며 따라서 그리스도 교회의 사도적 기원에 연결시키는 끈이다.
  • II. 견진성사의 표징과 예식
  • 1293 이 성사의 예식 중에서 도유의 표징과, 이 도유가 가리키고 새겨 주는 것, 곧 영적 인호를 숙고해 보아야 한다.
  • 성경과 고대 사회의 상징체계에서 기름부음은 풍부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기름은 풍요와(107) 기쁨의(108) 표징이다. 기름은 정화시키고(목욕 전후에 기름 바름) 유연하게 하며(육상 경기 선수와 씨름 선수에게 기름을 바름), 깨지고 상처 난 곳을 낫게 하므로 치유를 상징하고,(109) 아름다움과 건강과 힘이 넘치게 한다.
  • 1294 기름 바름의 이 모든 의미는 성사 생활 안에서도 발견된다. 세례 전에 예비 신자에게 기름을 바르는 의식은 정화와 강화를 뜻하고, 병자들에게 기름을 바르는 것은 치유와 위안을 의미한다. 세례 직후와 견진과 서품 때에 축성 성유를 바르는 것은 축성되었다는 표징이다. 그리스도인, 곧 견진의 도유를 받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과, 그분이 가득히 지니신 성령의 충만에 더 깊이 참여함으로써, 삶 전체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110) 풍기게 된다.
  • 1295 견진성사를 받는 사람은 이 도유를 통하여 ‘표지’, 곧 성령의 인호를 받는다. 사회에서 사용하는 인장은 그 사람을 상징하며,(111) 그 사람의 권위를 나타내고,(112) 어떤 사물에 대한 소유권을 표시한다.(113) ─ 그래서 병사들에게는 대장의 인장을 찍었으며, 노예한테는 주인의 낙인을 찍었다. ─ 인장은 법률 증서나(114) 문서에(115) 권위를 부여하며, 때에 따라서는 문서의 비밀을 보장하기도 한다.(116)
  • 1296 그리스도께서는 성부께서 당신에게 날인하셨다고 선언하신다.(117) 그리스도인들 역시 날인받았다. “우리를 여러분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세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어 주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또한 우리에게 인장을 찍으시고 우리 마음 안에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습니다”(2코린 1,21-22).(118) 성령의 이 날인은 전적으로 그리스도께 속해 있고 그분을 영원히 섬기겠다는 표시인 동시에, 종말의 큰 시련 때에 하느님께서 보호해 주시겠다는 약속이기도 하다.(119)
  • 견진성사의 거행
  • 1297 축성 성유(크리스마)의 축성은 견진성사의 거행에 앞서 이루어지는 중요한 일이며, 어느 면에서는 견진성사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도 있다. 주교는 성목요일의 성유 축성 미사 중에 교구 전체에서 사용할 축성 성유(크리스마)를 축성한다. 일부 동방 교회에서는 성유 축성이 총대주교에게만 유보되어 있다.
  • 안티오키아 전례는 크리스마(그리스 말로는 myron) 축성을 위한 성령 청원 기도를 다음과 같이 한다. “(아버지……성령을) 우리와 여기 놓인 이 기름 위에 보내 주시고 이를 거룩하게 하시어, 도유와 날인을 받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거룩한 향유, 사제의 성유, 왕의 성유, 환희의 도유, 빛의 옷, 구원의 외투, 영적 선물, 영혼과 육신의 성화, 불멸의 행복, 지워지지 않는 인호, 신앙의 방패가 되고 마귀의 모든 활동에 대항하는 무서운 투구가 되게 하소서.”(120)
  • 1298 로마 예법처럼 견진성사를 세례성사와 분리해서 거행하는 경우, 견진성사 전례는 견진 받는 사람들의 세례 서약 갱신과 신앙 고백으로 시작된다. 이렇게 하여 견진성사가 그리스도교 입문 전체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121) 어른이 세례성사를 받을 경우에는 즉시 견진성사를 받고 성체성사에 참여하게 된다.(122)
  • 1299 로마 예법에서는 주교가 전체 견진자들 위에 두 손을 펴는데, 사도 시대부터 이 안수는 성령을 준다는 표징이다. 그리고 주교는 다음과 같이 성령을 부어 주시도록 청원하는 기도를 드린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전능하신 하느님, 여기 있는 이 교우들을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나게 하시고 죄에서 해방시키셨으니, 이 교우들에게 파라클리토 성령을 보내 주소서. 지혜와 통찰의 영, 의견과 용기의 영, 지식과 공경의 영, 주님을 두려워하는 경외의 영을 보내 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123)
  • 1300 그다음에 성사의 핵심 예식이 이어진다. 라틴 예법에서 “견진성사는 (주교가) 한 손을 얹고 이마에 축성 성유를 바름으로써, 그리고 ‘성령 특은의 인호를 받으시오.’(Accipe signaculum Doni Spiritus Sancti)라는 말로써 수여한다.”(124) 비잔틴 예법의 동방 교회에서는 성령 청원 기도 다음에 성유(myron)를 몸의 중요한 부분, 곧 이마, 눈, 코, 귀, 입술, 가슴, 등, 손과 발에 바르며 그때마다 “성령 특은의 인호.”(Sphragis doreas Pneumatos Hagiou)(125) 라고 말한다.
  • 1301 견진성사의 예식을 끝맺는 ‘평화의 인사’는 주교와 모든 신자들이 이루는 교회의 친교를 가리키고 표현한다.(126)
  • III. 견진성사의 효과
  • 1302 견진성사의 효과는 옛날 오순절에 사도들에게 내리셨던 그 성령의 특별한 부여라는 것이 성사의 거행에서 드러난다.
  • 1303 따라서 견진성사는 세례성사의 은총을 증가시키고 심화시킨다. 견진성사는,
  • -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더욱더 뿌리를 내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마 8,15)라고 부르게 한다.
  • - 우리를 그리스도와 더욱 굳게 결합시킨다.
  • - 우리 안에 성령의 선물을 증대시킨다.
  • - 우리와 교회의 결합을 더욱 완전하게 한다.(127)
  • - 성령의 특별한 힘을 받아 그리스도의 참된 증인으로서 말과 행동으로 신앙을 전파하고 옹호하며, 그리스도의 이름을 용감히 고백하고, 십자가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도록 해 준다.(128)
  • 그러므로 그대는 영적인 날인, 곧 지혜와 통찰의 영, 의견과 용기의 영, 지식과 공경의 영, 주님을 두려워하는 경외의 영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하고, 그대가 받은 것을 지키십시오. 하느님 아버지께서 그대에게 인장을 찍으셨고, 주 그리스도께서는 그대를 인정하셨고, 그대의 마음속에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습니다.(129)
  • 1304 세례성사를 완성하는 견진성사도 세례성사처럼 단 한 번만 베풀어진다. 왜냐하면 견진성사는 영혼에 지워지지 않는 영적 표지인 ‘인호’를 새겨 주기 때문이다.(130)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에게 성령의 인장을 찍어 주시고, 하늘의 능력을 부여하시어 당신의 증인이 되게 하셨다는 표지이다.(131)
  • 1305 견진의 ‘인호’는 신자들이 세례성사로 받은 보편 사제직을 완전하게 한다. 그래서 “견진성사를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공적으로, 마치 직분으로 하듯이, 고백할 힘을 받는다.”(132)
  • IV. 누가 이 성사를 받을 수 있는가-
  • 1306 아직 견진성사를 받지 않은 영세자들은 모두 이 성사를 받을 수 있으며, 받아야만 한다.(133) 세례성사와 견진성사와 성체성사는 일체를 이루므로 “신자들은 적절한 시기에 이 성사를 받을 의무가 있다.”(134) 물론 견진성사와 성체성사 없이도 세례성사는 유효하며 효과가 있지만, 그리스도교 입문은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 1307 수 세기에 걸쳐 라틴 전통은 견진성사를 받기 위한 기준으로 ‘분별력을 가질 나이’를 제시한다. 그러나 죽을 위험이 있는 때에는 아직 분별력을 갖지 못한 아이라도 견진성사를 주어야 한다.(135)
  • 1308 때로 견진성사를 ‘그리스도인의 성숙을 위한 성사’라고 하지만, 신앙의 성년과 자연적 성장의 성년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세례성사의 은총은 공로 없이 무상으로 선택받는 은총이어서, 그 효과가 발휘되도록 ‘인준’을 받을 필요는 없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토마스 성인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환기시키고 있다.
  • 육체의 나이로 영혼의 나이를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사람은 지혜서에서 말하고 있는 영적인 노년의 원숙함을 어린 시절에 받을 수도 있다. “영예로운 나이는 장수로 결정되지 않고 살아온 햇수로 셈해지지 않는다”(지혜 4,8). 많은 어린이들이 성령의 힘을 받아 그리스도를 위해 용감히 싸웠으며, 피를 흘리기까지 했다.(136)
  • 1309 견진성사 준비의 목적은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와 더 긴밀하게 일치하도록 이끌어 주고, 성령과 성령의 활동, 그분의 은혜와 부름에 대하여 더 생생한 친밀감을 가지도록 이끌어 줌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삶에 따르는 사도적 책임을 더 잘 감당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견진 교리 교육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곧 본당 공동체뿐 아니라 보편 교회에 대한 소속감을 일깨워 주도록 힘써야 한다. 특히 본당 공동체는 견진 받을 신자들을 준비시킬 특별한 책임을 지고 있다.(137)
  • 1310 견진성사를 받으려면 은총의 상태에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령의 선물을 받을 수 있도록 정화하기 위해 고해성사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 더욱 간절한 기도로써 온순한 마음으로 스스로를 온전히 내어 맡기면서 성령의 힘과 은총을 받고자 준비하여야 한다.(138)
  • 1311 세례성사와 마찬가지로 견진성사의 경우에도 견진자들은 대부나 대모의 영적인 도움을 청해야 한다. 두 성사의 단일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세례성사 때의 대부나 대모와 같은 사람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139)
  • V. 견진성사의 집전자
  • 1312 견진성사의 원집전자는 주교이다.(140)
  • 동방 교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세례를 준 사제가 같은 예식 중에 견진도 즉시 준다. 그러나 견진성사 때는 총대주교나 주교가 축성한 성유를 쓰는데, 이는 교회의 사도적 일치를 나타내는 것으로, 견진성사는 그 일치의 유대를 강화한다. 라틴 교회에서는 성인 세례 때에나, 또는 유효한 견진성사가 없는 다른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을 교회의 온전한 친교 안에 받아들일 때 이 규칙을 적용한다.(141)
  • 1313 라틴 예법에서 견진성사의 정규 집전자는 주교이다.(142) 필요한 경우 주교는 사제들에게 견진성사를 집전할 권한을 줄 수 있지만,(143) 자신이 직접 이 성사를 베푸는 것이 합당하며, 견진성사의 거행이 세례성사와 시간적으로 분리된 것은 이 때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주교는 사도들의 후계자이며, 충만한 성품성사를 받았다. 주교의 견진성사 집전은, 견진 받는 사람들을 교회와 교회의 사도적 기원과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사명에 더욱 긴밀히 결합시키는 것이 이 성사의 효과임을 잘 나타낸다.
  • 1314 죽을 위험에 있는 신자들에게는 아무 사제라도 견진을 줄 수 있다.(144) 참으로 교회는 그 자녀들 중의 누구라도, 아주 어린 아이까지도,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충만한 선물로 완전해지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 간추림
  • 1315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그들에게 보냈다. 베드로와 요한은 내려가서 그들이 성령을 받도록 기도하였다. 그들이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을 뿐, 그들 가운데 아직 아무에게도 성령께서 내리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때에 사도들이 그들에게 안수하자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사도 8,14-17).
  • 1316 견진성사는 세례성사의 은총을 완성한다. 견진성사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더 깊이 뿌리내리게 하고, 그리스도와 더 굳게 결합시키며, 교회와 유대를 더욱 튼튼하게 하고, 교회의 사명에 더욱 깊이 참여하게 하며, 실천이 따르는 말로써 그리스도교 신앙을 증언하도록 돕는 성사이다.
  • 1317 세례성사와 마찬가지로 견진성사도 그리스도인의 영혼에 영적인 표시, 곧 지워지지 않는 인호를 새겨 준다. 그러므로 견진성사는 일생에 한 번밖에 받을 수 없다.
  • 1318 동방 교회에서는 견진성사가 세례 직후에 집전되고 바로 성찬례 참여가 이어진다. 이 전통은 그리스도교 입문이 되는 이 세 가지 성사의 단일성을 두드러지게 나타낸다. 라틴 교회에서는 이 성사를 사리를 분별할 나이의 어린이들에게 베풀며, 일반적으로 주교만이 거행한다. 주교의 견진 집전은 이 성사가 교회의 유대를 강화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 1319 사리를 분별할 나이에 이른 견진 후보자들은 신앙을 고백해야 하며, 은총의 상태에 있고, 성사를 받을 의향이 있으며, 교회 공동체와 현세적인 일에서 그리스도의 제자와 증인의 역할을 맡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 1320 견진성사의 핵심 예식은 집전자의 안수와, 세례성사를 받은 사람의 이마에(동방 교회에서는 다른 감각 기관들에도) 축성 성유를 바르는 것인데, 로마 예법에서는 “성령 특은의 인호를 받으시오.”라고 하며, 비잔틴 예법에서는 “성령 특은의 인호.”라고 말한다.
  • 1321 견진성사가 세례성사와 분리되어 거행될 때에는 무엇보다도 세례 서약 갱신으로 세례성사와 이어진 유대를 표현한다. 성찬례 중에 견진성사를 집전하는 것은 그리스도교 입문 성사들의 단일성을 강조하는 데 도움이 된다.
  • 제3절 성체성사(聖體聖事)
  • 1322 성체성사는 그리스도교 입문 성사를 완결 짓는다. 세례성사로 왕다운 사제 품위에 올려지고, 견진성사로 그리스도를 더욱더 닮게 된 사람들은 성찬례를 통하여 온 공동체와 함께 주님의 희생 제사에 참여한다.
  • 1323 “우리 구세주께서는 팔리시던 그 밤에 최후 만찬에서 당신 몸과 피의 성찬의 희생 제사를 제정하셨다. 이는 다시 오실 때까지 십자가의 희생 제사를 세세에 영속화하고, 또한 그때까지 사랑하는 신부인 교회에 당신 죽음과 부활의 기념제를 맡기시려는 것이었다. 이 제사는 자비의 성사이고 일치의 표징이고 사랑의 끈이며,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받아 모시어, 마음을 은총으로 가득 채우고 우리가 미래 영광의 보증을 받는 파스카 잔치이다.”(145)
  • I. 교회 생활의 원천이며 정점인 성찬례
  • 1324 성찬례는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며 정점이다.”(146) “교회의 모든 직무나 사도직 활동과 마찬가지로 다른 여러 성사들은 성찬례와 연결되어 있고 성찬례를 지향하고 있다. 실제로, 지극히 거룩한 성체성사 안에 교회의 모든 영적 선이 내포되어 있다. 곧 우리의 파스카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계신다.”(147)
  • 1325 “교회의 존재 자체를 이루고 있는 하느님 생명의 친교와 하느님 백성의 일치는 성찬례로 적절히 상징되고 놀랍게 실현된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을 성화하시는 하느님의 활동과, 인간이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께 드리는 예배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부께 드리는 예배는 성찬례에서 그 정점에 이른다.”(148)
  • 1326 끝으로, 우리는 성찬례를 거행함으로써 이미 천상 전례와 결합되며, “하느님께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1코린 15,28)이 되실 그때의 영원한 생명을 미리 맛본다.
  • 1327 한마디로, 성체성사는 우리 신앙의 요약이고 집약이다. “우리의 사고방식은 성체성사와 일치하며, 성체성사는 우리의 사고방식을 확인해 준다.”(149)
  • II. 이 성사는 어떻게 불리는가-
  • 1328 성체성사의 무한한 풍요로움은 이 성사를 부르는 여러 가지의 이름들에서 나타난다. 이 이름들은 각기 성체성사의 어떤 측면들을 환기시킨다.
  • 성찬례(Eucharistia: 감사제).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 행위이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감사한다”(eucharistein, 루카 22,19; 1코린 11,24)와 “찬미한다”(eulogein, 마태 26,26; 마르 14,22)는 말은 창조와 속량과 성화의 하느님 업적을 선포하는 유다인들의 감사 기도를 상기시킨다. 이 기도는 특히 식사 중에 바치는 것이었다.
  • 1329 주님의 만찬.(150)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수난 전날 밤에 드신 최후의 만찬과 관계되며, 천상 예루살렘에서 벌어지게 될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151) 미리 맛보는 것과도 관련되기 때문이다.
  • 빵 나눔. 예수님께서 특히 최후의 만찬 때(152) 유다인 고유의 이 예식을 행하시면서, 만찬의 주재자로서 빵을 축복하여 나누어 주셨기 때문이다.(153) 예수님의 부활 후, 제자들은 이 행위 때문에 그분을 알아보게 되었고,(154)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성찬 모임을 이 명칭으로 불렀다.(155) 이렇게 부름으로써, 이 나누어진 유일한 빵 곧 그리스도를 받아 먹는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와 친교를 이루며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을(156) 나타낸다.
  • 성찬 모임(synaxis). 교회의 가시적인 표현인 신자들의 모임에서 성찬례가 거행되기 때문이다.(157)
  • 1330 주님의 수난과 부활의 기념
  • 거룩한 희생 제사. 성체성사가 구세주 그리스도의 유일한 제사를 재현하고 교회의 봉헌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또 미사성제(聖祭), “찬양 제물”(히브 13,15),(158) 영적 제물,(159) 깨끗하고(160) 거룩한 제물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제사가 구약의 모든 제사를 완성하고 이를 능가하기 때문이다.
  • 하느님의 거룩한 전례. 모든 교회의 모든 전례가 이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가장 집약적인 표현이 이 성사 거행 안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같은 의미에서 거룩한 신비들의 거행이라고도 한다. 지극히 거룩한 성사라고 부르는 것은 이 성사가 성사들 중의 성사이기 때문이다. 이 이름은 특히 감실 안에 모셔 둔 성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 1331 친교(영성체). 우리는 이 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일치하며, 그분은 우리를 당신의 몸과 피에 참여하게 하여 한 몸을 이루게 하시기 때문이다.(161) 그리고 거룩한 것(ta hagia),(162) ─ 사도신경에서 말하는 ‘성인의 통공’이 지닌 첫 번째 뜻은 이 거룩한 것의 공유(共有)이다. ─ 천사들의 양식, 하늘의 양식, 불사 약,(163) 노자(路資) 성사……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 1332 거룩한 미사(Missa). 구원의 신비를 이루는 이 전례는 일상생활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수행하도록 신자들을 파견(missio)함으로써 끝나기 때문이다.
  • III. 구원 경륜에서 본 성체성사
  • 빵과 포도주의 표징
  • 1333 성찬례 거행의 중심에 놓여 있는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령 청원 기도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된다. 주님의 명을 충실히 따르는 교회는 주님께서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때까지 주님을 기념하면서, 주님께서 수난 전날 밤에 행하신 의식을 계속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빵을 들어……”, “포도주가 담긴 잔을 들어…….” 빵과 포도주의 표징은 신비롭게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되면서도 창조계의 좋은 생산물이라는 의미도 잃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봉헌’ 때에 빵과 포도주에 대하여 창조주께 감사드린다.(164) 빵과 포도주는 땅을 가꾼 ‘인간 노동’의 결과일 뿐 아니라 창조주께서 주신 ‘땅’과 ‘포도나무’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온”(창세 14,18) 왕이며 사제인 멜키체덱의 행위를 교회는 자신이 드리는 봉헌의 예표로 본다.(165)
  • 1334 구약 시대에는 창조주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서, 땅에서 나는 맏물들 가운데 빵과 포도주를 제물로 바쳤다. 그런데 이것들이 이집트 탈출 사건에서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해마다 파스카 때에 먹는 누룩 없는 빵은 이집트 종살이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둘러 떠났음을 기념하는 것이며, 광야에서 먹은 만나에 대한 기억은 이스라엘이 하느님 말씀의 빵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늘 상기하게 한다.(166) 그들이 날마다 먹는 빵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약속에 충실하시다는 보증으로 주신 약속된 땅의 산물이다. 유다인들이 파스카 식사 끝에 마시는 “축복의 잔”(1코린 10,16)은 포도주가 지닌 축제의 기쁨에 종말론적 차원, 곧 예루살렘을 재건할 메시아에 대한 기다림이라는 소망을 더한다. 예수님께서는 빵과 포도주의 축복에 새롭고 결정적인 의미를 부여하시면서 성체성사를 세우셨다.
  • 1335 주님께서 군중을 먹이시려고 빵을 축복하시고 떼어서 제자들을 시켜 나누어 주신 빵의 기적은, 당신 성찬의 이 유일한 빵이 말할 수 없이 풍요함을 예시한다.(167) 카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한 표징은(168)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때’를 이미 예고하고 있으며,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변한 새로운 포도주를 마시게 될(169) 하느님 나라 혼인 잔치의 실현을 나타낸다.
  • 1336 수난 예고가 제자들을 혼란에 빠지게 하였듯이, 성체성사에 대한 첫 번째 예고도 제자들을 분열시켰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요한 6,60) 성체와 십자가는 걸림돌이다. 그것은 동일한 신비이며 끊임없이 분열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 6,67) 주님의 이 질문은 오랜 세월을 통해 울려 퍼지고 있다. 이 질문은 또한 당신만이 “영원한 생명의 말씀”(요한 6,68)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고, 그분이 주시는 성찬의 선물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곧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임을 깨달으라는 사랑에 찬 권유이다.
  • 성체성사의 제정
  • 1337 제자들을 사랑하신 주님께서는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돌아가실 때가 된 것을 아신 주님께서는 식사를 하시던 중에 그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사랑의 계명을 주셨다.(170) 이러한 사랑의 보증을 제자들에게 남겨 주시기 위해, 그들을 떠나지 않으시기 위해, 그들이 당신의 파스카에 참여하게 하시고자 당신의 죽음과 부활의 기념으로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셨으며, 사도들을 “신약의 사제들로 임명하시어”(171) 당신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이를 거행할 것을 명하셨다.
  • 1338 세 권의 공관 복음서와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성체성사의 제정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리고 요한 사도는 카파르나움의 회당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그 말씀은 성체성사를 제정하기 위한 준비였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셨다.(172)
  • 1339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에서 예고하신 대로, 당신의 몸과 피를 제자들에게 주시기 위해 파스카라는 때를 택하셨다.
  • 파스카 양을 잡아야 하는 무교절 날이 왔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며 “가서 우리가 먹을 파스카 음식을 차려라.” 하고 이르셨다.……그들은 가서……파스카 음식을 차렸다. 시간이 되자 예수님께서 사도들과 함께 자리에 앉아, “내가 고난을 겪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파스카 음식을 먹기를 간절히 바랐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파스카 축제가 하느님의 나라에서 다 이루어질 때까지 이 파스카 음식을 다시는 먹지 않겠다.” 하고 그들에게 이르셨다.……예수님께서는 또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사도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방식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루카 22,7-20).(173)
  • 1340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식사 중에 당신 사도들과 최후의 만찬을 거행하시면서 유다인들의 파스카에 결정적인 의미를 부여하셨다. 과연 예수님께서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성부께 건너가신 새 파스카는 최후의 만찬에서 앞당겨 이루어졌고, 성찬례 안에서 거행되었다. 성찬례는 유다인들의 파스카를 완성하고 하느님 나라의 영광 중에 이루어질 교회의 궁극적 파스카를 미리 거행한다.
  •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 1341 예수님께서 “오실 때까지”(1코린 11,26) 당신의 행위와 말씀을 계속하라고 하신 이 명령은 단순히 예수님과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을 기억하라는 요구만이 아니다. 이는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기억, 그분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 그리고 성부께 드리신 간구에 대한 기념을 전례적으로 거행하라는 명령이다.
  •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그리고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었다(사도 2,42-46).
  • 1342 교회는 처음부터 주님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해 왔다. 예루살렘 교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 1343 그리스도인들은 특히 ‘주간 첫날’, 곧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주일에 “빵을 떼어 나누려고”(사도 20,7) 한자리에 모였다. 그때부터 우리 시대까지 성찬례는 계속 거행되어, 오늘날 교회 어디에서나 근본 구조가 동일한 성찬례를 거행하고 있다. 성찬례는 언제나 교회 생활의 중심이다.
  • 1344 이처럼 순례 길의 하느님 백성은,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1코린 11,26) 계속되는 성찬례의 거행으로 예수님의 파스카 신비를 전하면서, 선택된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의 식탁에 앉게 될 천상 잔치를 향하여 “십자가의 좁은 길을 걸어간다.”(174)
  • IV. 성찬례의 거행
  • 모든 세기에 걸쳐 거행되어 온 미사
  • 1345 우리는 순교자 유스티노 성인의 증언으로 2세기 때부터의 개략적인 성찬례 거행 과정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우리 시대의 모든 전례 전통에까지 그대로 간직되어 있다. 다음은 155년경 유스티노 성인이 이교도 황제인 안토니누스(138-161년)에게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을 하는지 설명하기 위해 쓴 글이다.
  • 일요일이라고 불리는 날, 도시나 마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한곳에 모입니다.
  •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사도들의 기록과 예언자들의 글을 읽습니다.
  • 독서가 끝나면, 모임을 주재하는 사람이 그 훌륭한 일들을 본받으라고 권하고 격려하는 말을 합니다.
  • 그다음에는 모두 함께 일어나 기도를 합니다.(175) 우리가 삶과 행동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고 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사람이 되어 영원한 구원을 얻도록, 우리 자신과……다른 사람들과, 또 그 어느 곳에 있는 사람이든지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 기도가 끝나면 우리는 서로 입맞춤을 합니다.
  • 다음에 형제들의 모임을 주재하는 사람에게 빵과, 물과 포도주를 섞은 잔을 가져다줍니다.
  • 그 사람은 이것을 받아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우주의 아버지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고, 우리가 이 선물들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뽑힌 데 대하여 오랫동안 감사(그리스 말 eucharistia)를 드립니다.
  • 그 사람이 기도와 감사를 드리고 나면 모든 참가자들은 “아멘.” 하고 환호성을 올립니다.
  • 모임을 주재하는 사람이 감사 기도를 드리고 회중이 응답하고 나면, 부제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모든 참석자들에게 ‘축성된’(eucharistethentos) 빵과 물 탄 포도주를 나누어 주고, 그곳에 오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가져다줍니다.(176)
  • 1346 성찬례는 오랜 세월을 통하여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온 기본 구조에 따라 진행된다. 이 전례는 기본적으로는 하나를 이루는 두 가지의 주요 부분으로 진행된다.
  • - 모임과, 독서와 강론과 보편 지향 기도로 이루어지는 말씀 전례.
  • - 빵과 포도주의 봉헌, 축성의 감사 기도, 영성체로 이루어지는 성찬 전례.
  • 말씀 전례와 성찬 전례는 함께 “하나의 예배 행위를”(177) 이룬다. 실제로 성찬례에서 우리를 위하여 차려진 상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식탁이며 동시에 주님의 몸을 받아 먹는 식탁이기 때문이다.(178)
  • 1347 이것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 하신 파스카 식사가 아닌가-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던 도중에 제자들에게 성경을 설명해 주셨으며,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시어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루카 24,30).(179)
  • 성사 거행의 과정
  • 1348 모두 모임. 그리스도인들은 성찬례를 위하여 한곳에 모인다. 성찬례의 주인공이신 그리스도께서 몸소 이 모임을 앞장서 이끄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새 계약의 대사제이시다. 모든 성찬 거행을 보이지 않게 주재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주교나 사제는 그분을 대신하여(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in persona Christi Capitis) 모임을 주재하고, 독서 후에는 강론을 하며, 봉헌물을 받아들이고, 감사 기도를 바친다. 그리고 모두들, 곧 독서자, 예물 봉헌자, 성체 분배자, 그리고 ‘아멘’으로 참여를 표현하는 전체 회중은 각자 나름대로 전례 거행에 능동적으로 참여한다.
  • 1349 말씀 전례는 ‘예언자들의 문헌’인 구약 성경과, ‘사도들의 비망록’, 곧 서간문들과 복음서들을 포함한다. 이러한 말씀을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180) 실천하도록 권고하는 강론에 이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청원 기도를 바친다. 이것은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따른 것이다.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사람을 위해서 간청과 기도와 전구와 감사를 드리라고 권고합니다.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십시오”(1티모 2,1-2).
  • 1350 예물 봉헌. 이때, 흔히 행렬을 지어, 빵과 포도주를 제대에 바친다. 사제는 이 빵과 포도주를 성찬의 희생 제사 중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바치는데, 여기에서 이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최후의 만찬 때에 “빵과 잔을 받아 드신” 바로 그 행위이다. “오직 교회만이 창조주께 흠 없는 제물을 바친다. 창조주께서 만들어 주신 것을 감사와 더불어 바치는 것이다.”(181) 제물을 제대에 바치는 것은 멜키체덱의 행위를 떠맡아, 창조주께서 주신 선물을 그리스도의 손에 맡겨 드리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제물을 봉헌하는 인간의 모든 노력을 당신의 희생 제사 안에서 완전하게 하신다.
  • 1351 초기부터 그리스도인들은 성찬을 위한 빵과 포도주뿐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선물도 가지고 모였다.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헌금(182) 관습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려고 가난하게 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지키는 것이다.(183)
  • 부유하고 뜻이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 정한 대로 내어 놓습니다. 거두어진 것을 모임을 주재하는 사람에게 넘겨주면, 그는 고아, 과부, 질병이나 그 외에 다른 이유로 재산이 없는 사람들과, 옥에 갇힌 사람들, 이민 온 사람 등 한마디로 궁핍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입니다.(184)
  • 1352 감사 기도(anaphora), 곧 감사와 축성의 기도로 성찬례 거행이 그 핵심과 정점에 이르게 된다.
  • 교회는 감사송(praefatio)으로 그분의 모든 업적, 곧 창조, 속량, 성화에 대해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성부께 감사를 드린다. 이 때 전체 공동체는 천사들과 모든 성인의 천상 교회와 더불어 하느님께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하고 노래하면서 끊임없는 찬미를 드린다.
  • 1353 성령 청원 기도(Epiclesis)에서 교회는, 성부께서 성령(또는 성부의 강복하시는 능력(185) )을 빵과 포도주 위에 보내시어, 그 능력으로 빵과 포도주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게 하시고,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오직 한마음 한 몸이 되게 해 주시기를 간청한다(일부 전례 전통들은 이 성령 청원 기도를 ‘기념’ 다음에 하기도 한다).
  • 성찬 제정 축성문에서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위의 힘과 성령의 권능이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당신의 몸과 피, 곧 단 한 번 영원히 십자가 위에서 바쳐진 당신의 희생 제물을 성사적으로 현존하게 한다.
  • 1354 그 뒤에 이어지는 기념(anamnesis)에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과 영광스러운 재림을 기념하며, 우리를 성부와 화해시키려고 자신을 봉헌하신 성자를 성부께 드린다.
  • 전구(intercessiones)에서 교회는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이 하늘과 땅의 온 교회와 이루는 친교 안에서, 그리고 교회의 목자인 교황과 교구 주교와 사제단과 부제들, 온 세상의 모든 주교가 그들의 교회와 이루는 친교 안에서 성찬례가 거행된다는 것을 나타낸다.
  • 1355 주님의 기도와 빵을 쪼갠 뒤 영성체(Communio)에서 신자들은 ‘하늘의 빵’과 ‘구원의 잔’,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해”(요한 6,51) 당신을 내어 주신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신다.
  • 이 빵과 포도주는 옛 표현대로 “축성되었기”(186) 때문에, 우리는 이 음식을 성체라고 부르는데, 우리가 가르치는 진리를 믿고, 죄의 용서와 새로운 탄생을 위한 세례성사를 받고, 그리스도의 계명에 따라 사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여기에 참여할 자격이 없습니다.(187)
  • V. 성사적인 희생 제사: 감사, 기념, 현존
  • 1356 그리스도인들이 초기부터, 다양한 시대와 전례들을 거치면서도 본질적으로는 변하지 않는 한 가지 형태로 성찬례를 거행해 온 것은, 수난 전날 저녁에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1코린 11,24-25) 하신 주님의 명령에 우리가 매여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 1357 우리는 주님의 희생 기념제를 거행하여 이 명령을 수행한다. 이를 행함으로써 우리는 성부께서 친히 우리에게 주신 것, 곧 창조의 선물, 그리고 성령의 힘과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된 빵과 포도주를 성부께 드린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실제로 또 신비로이 현존하신다.
  • 1358 그러므로 우리는 성찬례를 다음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 - 성부께 드리는 감사와 찬미,
  • - 그리스도와 그 몸의 희생을 기념하는 제사,
  • -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령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현존.
  • 성부께 드리는 감사와 찬미
  • 1359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우리 구원의 성사인 성찬례는 창조 사업에 대한 감사로 드리는 찬미의 제사이기도 하다. 성찬의 희생 제사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모든 피조물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성부께 바쳐진다. 교회는 하느님께서 만물과 인류 안에 만드신 좋고 아름답고 올바른 모든 것에 대하여 감사하는 찬미의 제사를 그리스도를 통해 드릴 수 있다.
  • 1360 성찬례는 성부께 드리는 감사의 제사이며,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은혜와, 창조와 속량과 성화로 이루어 주신 모든 것에 대한 감사로, 교회가 드리는 찬미이다. 성찬례는 무엇보다도 ‘감사’를 의미한다.
  • 1361 성찬례는 교회가 모든 피조물을 대표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노래하는 찬미의 제사이기도 하다. 이 찬미의 제사는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과 당신의 찬미와 전구에 신자들을 결합시키신다. 이로써 성부께 드리는 찬미의 제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들여지도록 봉헌된다.
  • 그리스도와 그분의 몸인 교회의 희생을 기념하는 제사
  • 1362 성찬례는 그리스도의 파스카를 기념하며, 그분의 몸인 교회의 전례 안에서 그분의 유일한 희생 제사를 현재화하고 성사적으로 봉헌한다. ‘감사 기도’의 각 양식들 안에는 성찬 제정의 말씀 후에 아남네시스 또는 기념이라고 부르는 기도가 있다.
  • 1363 성서적 의미의 기념은 과거의 사건들을 기억하는 것뿐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해 이루신 놀라운 일들을 선포하는 것이다.(188) 이러한 사건들을 전례적으로 기념할 때, 그 사건들은 어떤 방식으로 현재 실제로 일어나게 된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로부터 탈출한 해방을 이해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파스카를 기념할 때마다 이집트 탈출 사건은 믿는 이들의 기억 속에 현존하게 되고, 그 사건에 삶을 일치시키도록 한다.
  • 1364 신약 성경에서는 이 기념이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성찬례를 거행할 때, 교회는 그리스도의 파스카를 기억하며, 이 파스카는 현재화한다.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 영원히 십자가 위에서 드리신 희생 제사는 언제나 현재적인 것으로 존속한다.(189) “‘우리의 파스카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신’(1코린 5,7) 십자가의 희생 제사가 제단에서 거행될 때마다 우리의 구원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190)
  • 1365 성찬례는 그리스도의 파스카를 기념하는 것이므로 희생제사이기도 하다. 성찬례가 지닌 제사적 성격은 성찬 제정 말씀, 곧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루카 22,19-20) 하신 말씀에 나타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신 바로 그 몸과,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피”(마태 26,28)를 성찬례에서 주신다.
  • 1366 성찬례는 십자가의 희생 제사를 재현(현재화)하고, 이를 기념하며, 그 결과를 실제로 적용시키기 때문에 희생 제사이다.
  • 우리 하느님이시며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을 위해 영원한 속량을 실현하시려고 십자가의 제단 위에서 중개자로서 돌아가심으로써, 당신 자신을 단 한 번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셨다. 그러나 그분의 죽음으로 그 사제직이 끝나서는 안 되었으므로(히브 7,24.27), “잡히시던 날 밤”(1코린 11,23) 최후의 만찬에서 사랑하는 당신 신부인 교회에게 (인간의 본성이 요구하는) 눈에 보이는 제사를 남겨 주고자 하셨다. 그 제사에서는 십자가 위에서 단 한 번 이루어진 피의 제사가 재현될 것이며, 그 기념이 세상 끝 날까지 계속될 것이고, 그 구원적 효과는 우리가 날마다 저지르는 죄의 용서에 적용될 것이었다.(191)
  • 1367 그리스도께서 바치신 희생 제사와 성찬례의 희생 제사는 동일한 제사이다. “제물은 유일하고 동일하며, 그때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바치셨던 분이 지금 사제의 직무를 통해서 봉헌하시는 바로 그분이시다. 단지 봉헌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192) “십자가 제단 위에서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피 흘려 봉헌하신’ 저 그리스도께서 그 똑같은 제사를, 미사로 거행되는 이 신적 희생 제사에서 피 흘림 없이 제헌하고 계시기 때문에……이 희생 제사는 참으로 속죄의 제사이다.”(193)
  • 1368 성찬례는 교회의 희생 제사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는 그 머리와 함께 봉헌된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함께 자신을 온전히 바친다. 교회는 성부께 드리는 그분의 전구와 결합된다. 성찬례에서 그리스도의 제사는 그 신비체의 지체들의 제사이기도 하다. 신자들의 삶, 찬미, 고통, 기도, 노동 등은 그리스도의 그것들과 결합되고 그리스도의 온전한 봉헌과 결합되며, 이로써 새로운 가치를 얻게 된다. 제대 위에서 바치는 그리스도의 제사는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분의 봉헌과 결합될 가능성을 준다.
  • 지하 묘지(카타콤바)에서 흔히 교회는 두 팔을 널리 펴 들고 기도하는 여인의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십자가 위에서 팔을 벌리신 그리스도와 같이, 교회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바치며 전구한다.
  • 1369 온 교회는 그리스도의 봉헌과 전구에 결합된다. 교회 안에서 베드로의 직무를 맡은 교황은 모든 성찬례의 거행과 결합되어, 성찬례에서 보편 교회가 지닌 일치의 표지와 봉사자라고 일컬어진다. 사제가 성찬례를 집전하더라도, 그 성찬례는 지역 주교의 책임 아래 집전되는 것이다. 주교가 사제단 안에서 부제들의 보좌를 받으며 개별 교회를 주재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성찬례 중에 주교의 이름을 부른다. 또 공동체는 그 공동체를 위하여 그 공동체와 함께 성찬의 제사를 드리는 모든 사제들을 위해서도 기도한다.
  • 주교나 주교의 위임을 받은 사람이 주재하여 행하는 성찬례만이 합법적인 것이다.(194)
  • 신자들의 신령한 제사는 사제의 직무를 통하여 유일한 중개자이신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와 결합되며 완성된다.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는 바로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사제들의 손을 통하여 온 교회의 이름으로 성찬례 안에서 피 흘림 없이 성사적으로 봉헌된다.(195)
  • 1370 아직 이 세상에 있는 지체들뿐 아니라 이미 하늘의 영광 중에 있는 지체들도 그리스도의 봉헌에 결합된다. 교회는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 마리아와 모든 성인을 기억하고 또 그분들과 일치하여 성찬의 제사를 드린다. 성찬례 중에 교회는 마리아와 함께 십자가 아래 서서 그리스도의 봉헌과 전구에 결합된다.
  • 1371 성찬의 제사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지만 아직 완전히 정화되지 못한”(196) 죽은 신자들을 위해서, 그들이 그리스도의 빛과 평화를 얻을 수 있도록 바치는 것이기도 하다.
  • 이 몸을 아무 곳에나 묻어 다오. 이 몸 때문에 조금도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부탁하는 것은 오직 너희가 있을 그곳의 주님의 제대에서 나를 기억해 달라는 것이다.(197)
  • 우리는 [감사 기도에서] 잠든 거룩한 교부들과 주교들, 그리고 우리보다 앞서 잠든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거룩하고 경외스러운 희생 제물이 여기 계시므로, 그들을 위해 바치는 간절한 기도가 영혼들에게 매우 큰 유익이 되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죄인이라고 해도, 죽은 이들을 위해서 하느님께 간구할 때, 우리는……우리 죄 때문에 희생되신 그리스도를 바치는 것입니다. 이로써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그들도, 우리도 너그럽게 대해 주시도록 청합니다.(198)
  • 1372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성찬례에서 거행하는 구세주의 제사에 점점 더 완전하게 참여하도록 우리를 독려하는 이 교리를 다음과 같이 훌륭하게 요약하였다.
  • 온전히 속량된 이 도성, 성도들의 모임과 공동체가 대사제를 통하여 보편적 희생 제물로 하느님께 봉헌된다. 이 대사제는 종의 모습을 취하시어, 우리를 위해 수난으로 자신을 바치기까지 하시어 우리를 그토록 위대한 머리의 몸이 되게 하셨다.……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제사이다. “수가 많지만 그리스도 안에 한 몸”(로마 12,5)인 것이다. 교회는 이 제사를 신자들이 잘 알고 있는 제대의 성사로 끊임없이 재현하며, 교회가 봉헌하는 그것 안에서 교회 자체가 봉헌된다는 사실이 드러난다.(199)
  • 말씀과 성령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현존
  • 1373 “돌아가셨다가 참으로 되살아나셔서 하느님 오른쪽에 앉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 주시는 그리스도 예수님”(로마 8,34)께서는 다양하게 교회에 현존하신다.(200)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말씀 안에, 교회의 기도 안에,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마태 18,20)에, 가난한 사람들, 병자들, 감옥에 갇힌 사람들 안에,(201) 몸소 세우신 성사들 안에, 미사성제와 사제의 인격 안에 계신다. 그리고 “특별히 성체의 형상 안에 현존하신다.”(202)
  • 1374 성체의 형상 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는 방식은 독특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성체성사를 모든 성사 위에 들어 높이시고 “영성 생활의 완성과 모든 성사가 지향하는 목적으로”(203) 삼으신다. 지극히 거룩한 성체성사 안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혼과 천주성과 하나 된 몸과 피가, 따라서 온전한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실재적으로, 그리고 실체적으로 담겨 계신다.”(204) “이 현존이 ‘실재적’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다른 현존 방식이 실재적이 아니라는 배타적인 의미가 아니라, 그 현존이 탁월하게 실체적이라는 의미이다. 분명코, 하느님이시며 인간이신 그리스도께서 전적으로 또 완전하게 현존하신다.”(205)
  • 1375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이 성사에 현존하시게 된다. 교부들은 이러한 변화를 이루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령의 활동이 지니는 효력에 대한 교회의 믿음을 확고하게 단언하였다. 예컨대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 봉헌물들을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게 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바로 그분이십니다.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사제가 말을 하지만, 그 말의 효력과 은총은 하느님에게서 나옵니다. “이는 내 몸이다.” 하시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봉헌물들을 변화시킵니다.(206)
  • 암브로시오 성인도 이 변화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이는 자연적으로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축복으로 축성된 것임을 믿고, 축복을 통해서 본성까지도 변하므로 축성의 힘이 자연의 힘보다 크다는 것을 믿읍시다…….(207)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무에서 만드신 그리스도의 말씀인데, 그 말씀이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던 어떤 것으로 바꿀 수 없다고 하겠습니까- 사물에 처음으로 본성을 부여하는 것이 그 본성을 바꾸는 것보다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208)
  • 1376 트리엔트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가톨릭 신앙을 요약하여 선포한다. “우리 구세주 그리스도께서 빵의 형상으로 내어 주시는 것은 참으로 당신의 몸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하느님의 교회는 항상 이러한 확신을 지녀 왔으며 본 공의회는 이를 다시금 선포하는 바이다. 빵과 포도주의 축성으로써 빵의 실체 전체가 우리 주 그리스도의 몸의 실체로, 포도주의 실체 전체가 그리스도의 피의 실체로 변화한다. 가톨릭 교회는 이러한 변화를 적절하고도 정확하게 실체 변화(transsubstantiatio)라고 불러 왔다.”(209)
  • 1377 그리스도께서는 성체가 축성되는 순간부터, 성체의 형상이 존속하는 동안 계속 그 안에 현존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성체의 두 가지 형상 안에 각각 온전히 현존하며, 또 그 각 부분에도 현존하시므로 빵을 나누어도 그리스도께서는 나뉘지 않으신다.(210)
  • 1378 성체 공경. 우리는 미사 전례 중에 특히 무릎을 꿇거나, 주님에 대한 흠숭의 표시로 깊이 몸을 숙여 절함으로써,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현존하신다는 믿음을 표현한다. “가톨릭 교회는 성체성사에 바쳐야 할 이 흠숭 예절을 미사 중에는 물론이고 미사가 끝난 뒤에도 실천하여 왔다. 교회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축성된 제병(성체)을 아주 정성스럽게 보존하고, 장엄한 흠숭을 위하여 신자들에게 현시하며, 또 백성들의 기쁨에 찬 행렬 중에 함께 모심으로써 이 흠숭 예절을 실천한다.”(211)
  • 1379 거룩한 안치소(감실)는 본래 미사에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과 병자들에게 모시고 갈 성체를 품위 있게 보관하기 위한 것이었다. 성체 안에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현존하신다는 신앙이 깊어짐에 따라, 교회는 성체 안에 계신 주님을 침묵 속에 경배하는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그러므로 감실은 성당의 특별히 품위 있는 장소에 두어야 하며, 거룩한 성사 안에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현존하신다는 진리를 강조하고 표현할 수 있도록 제작해야 한다.
  • 1380 그리스도께서 이처럼 특별하게 당신 교회에 현존하기를 원하신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일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가시적인 형상으로는 당신 제자들을 떠나실 것이었으므로, 성사적으로 당신을 우리에게 주기를 원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바치려고 하셨으므로, 당신의 목숨을 내어 주실 정도로 “끝까지 사랑하신”(요한 13,1) 그 사랑의 기념을 우리가 간직하기를 원하셨다. 과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신(212) 분으로서 성체성사 안에 현존하심으로써 우리 가운데 계속 신비롭게 머물러 계시며, 이러한 사랑을 표현하고 전해 주는 표징 안에 계신다.
  • 교회와 세상은 마땅히 성체를 공경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랑의 성사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흠숭 안에서, 신앙으로 충만하며, 중대한 잘못과 세상의 죄를 속죄하겠다는 열린 마음으로 드리는 묵상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러 가는 시간을 거부하지 맙시다. 우리의 흠숭이 중단되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213)
  • 1381 “토마스 성인은 그리스도의 참다운 몸과 그리스도의 참다운 피가 이 성사 안에 계시다는 것은 ‘오관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권위에 근거한 신앙으로써 알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치릴로 성인은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라는 루카 복음 22장 19절의 말씀을 해설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말이 참말인지를 의심하지 말고 차라리 신앙으로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십시오. 진리이신 주님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214)
  • 엎디어 절하나이다. 눈으로 보아 알 수 없는 하느님, 두 가지 형상 안에 분명히 계시오나 우러러 뵈올수록 전혀 알 길 없삽기에 제 마음은 오직 믿을 뿐이옵니다.
  • 보고 맛보고 만져 봐도 알 길 없고 다만 들음으로써 믿음 든든해지오니 믿나이다, 천주 성자 말씀하신 모든 것을. 주님의 말씀보다 더 참된 진리 없나이다.(215)
  • VI. 파스카 잔치
  • 1382 미사는 십자가의 희생 제사가 영속되는 제사적 기념이며, 동시에 또 이와 분리할 수 없이,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거룩한 친교의 잔치이다. 그러나 성찬례 거행은 영성체를 통하여 신자들과 그리스도의 내적인 친교를 전적으로 지향하고 있다. 영성체는 우리를 위해서 당신을 바치신 그리스도를 모시는 것이다.
  • 1383 성찬례를 거행하기 위하여 교회가 그 둘레에 모이는 제대는 한 신비가 지닌 두 가지 측면, 곧 주님께서 희생되신 제단과 주님의 식탁을 나타낸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제대가 상징하는 것이 그리스도 바로 그분이시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화해를 위해 바쳐진 제물로서, 그리고 우리에게 주시는 천상 음식으로서 당신 신자들의 모임 가운데 현존해 계시는 것이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사실 그리스도의 제단이란 그리스도의 몸의 형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216) 하고 말했고, “제대는 (그리스도의) 성체를 나타내고, 그리스도의 성체는 제대 위에 계신다.”(217) 고도 말했다. 전례는 수많은 기도들에서 이러한 희생 제사와 영성체의 불가분적 관계를 표현한다. 로마 교회는 감사 기도 제1양식에서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
  • 전능하신 아버지, 간절히 청하오니, 거룩한 천사의 손으로 이 제물이 존엄한 천상 제대에 오르게 하소서. 그리하여 이 제대에서 성자의 거룩한 몸과 피를 받아 모실 때마다 하늘의 온갖 은총과 축복을 가득히 내려 주소서.(218)
  •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먹어라” - 영성체
  • 1384 주님께서는 성체성사에서 당신을 받아 먹으라고 간절하게 초대하신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요한 6,53).
  • 1385 우리는 이 초대에 응하기 위해서, 이 위대하고도 거룩한 순간을 위해 우리 자신을 준비하여야 한다. 바오로 사도는 양심 성찰을 권고한다. “부당하게 주님의 빵을 먹거나 그분의 잔을 마시는 자는 주님의 몸과 피에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러니 각 사람은 자신을 돌이켜 보고 나서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셔야 합니다. 주님의 몸을 분별없이 먹고 마시는 자는 자신에 대한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1코린 11,27-29). 중한 죄를 지었다고 느끼는 사람은 성체를 모시기 전에 고해성사를 받아야 한다.
  • 1386 이 위대한 성사 앞에서 신자는 겸손하게, 열렬한 신앙으로 백인대장의 말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219)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220) 그리고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의 거룩한 전례에서 신자들은 그와 같은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
  • 오 하느님의 아드님, 오늘 당신의 신비한 만찬에서 성체를 모시게 해 주소서. 저는 주님의 비밀을 주님의 원수들에게 말하지 않을 것이며, 주님께 유다의 입맞춤도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강도처럼 그저 주님께 부르짖나이다. “주님, 당신의 나라에서 저를 기억하소서.”(221)
  • 1387 이 성사를 받기 위한 적절한 준비로 신자들은 자신들의 교회가 정한 공복재를 지켜야 한다.(222) 몸가짐(행동, 복장)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손님이 되시는 그 순간에 걸맞은 존경과 정중함과 기쁨을 나타내야 한다.
  • 1388 신자들이 마음 준비가 되어 있으면,(223) 미사에 참례할 때, 성체를 모시는 것이 성찬례의 의미에 합당한 것이다.(224) 공의회는 “사제의 영성체 후에 신자들이 같은 희생 제사에서 주님의 몸을 받아 모시는 더욱 완전한 미사 참여는 크게 권장된다.”(225) 고 말한다.
  • 1389 교회는 신자들에게 “주일과 축일에 거룩한 전례에 참여”할 의무와,(226) 적어도 일 년에 한 번, 가능한 한 부활 시기에 고해성사로 준비를 하고 성체를 모실(227) 의무를 부과한다. 그러나 교회는 신자들에게 주일과 의무 축일에, 나아가 더 자주, 매일이라도 성체를 모실 것을 간곡히 권고한다.
  • 1390 그리스도께서 성체의 두 가지 형상 안에 각각 성사적으로 현존하시기 때문에, 빵의 형상으로만 하는 영성체로도 성체성사 은총의 모든 열매를 받을 수 있다. 라틴 교회에서는 사목적인 이유로 이것이 가장 일반적인 영성체 방법으로 합법적으로 확립되었다. 그러나 “양형 영성체는 표징이라는 이유에서 가장 완전한 영성체 형태이다. 양형 영성체로써 성찬(聖餐)의 표징이 더욱 완전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228) 이것이 동방 예법의 통상적 영성체 형태이다.
  • 영성체의 효과
  • 1391 영성체는 우리와 그리스도의 일치를 증진시켜 준다. 성체를 받아 모심으로써 얻는 주요한 효과는 예수 그리스도와 긴밀하게 일치하는 것이다. 실제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의 토대는 성찬의 잔치에 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요한 6,57).
  • 신자들이 주님의 축일에 성자의 몸을 받을 때, 그들은 천사가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살아나셨다!” 하고 말했던 것처럼, 생명의 보증을 받았다는 기쁜 소식을 서로 선포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리스도를 받아 모시는 사람에게는 생명과 부활이 주어진다.(229)
  • 1392 물질적 양식이 육체에 효과를 가져오는 것처럼, 영성체는 놀라운 방식으로 우리의 영적인 생명에 그 효과를 가져온다. “성령 안에서 생명을 얻고, 또 성령 안에서 생명을 주는”(230)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살을 받아 먹는 영성체는 세례성사 때 받은 은총의 생명을 보존하고 성장시키고 새롭게 한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생명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죽을 때까지 나그넷길의 양식인 성체로 양분을 받아야 하며, 우리가 죽을 때에는 이 양식을 노자로 받게 된다.
  • 1393 영성체는 우리를 죄에서 떼어 놓는다. 영성체로 받아 모시는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신” 것이며, 우리가 마시는 피는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체성사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결합시키는 동시에, 우리가 전에 지은 죄를 정화하고 앞으로 죄를 짓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 준다.
  • 우리는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음을 선포합니다.(231) 우리가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은 곧 죄의 용서를 전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피가 흐를 때마다 그것은 죄의 용서를 위하여 흐르는 것이니, 나는 그리스도께서 늘 내 죄를 용서해 주시도록 언제나 그분을 받아 모셔야 합니다. 늘 죄를 짓는 나는 이 약을 언제나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232)
  • 1394 육체의 음식이 잃어버린 기력을 회복시키듯이, 성체는 일상생활에서 약해져 가는 사랑을 북돋아 준다. 그리고 이처럼 생기를 되찾은 사랑은 소죄를 없애 준다.(233)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을 내어 주시어 우리의 사랑을 되살아나게 하시고, 피조물에 대한 그릇된 애착을 끊고 당신 안에 뿌리내리게 하신다.
  •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미사성제 중에 그분의 죽음을 기념할 때, 성령께서 오시어 우리 안에 사랑을 부어 넣어 주시기를 청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그 사랑으로, 우리가 성령의 은총을 받아, 우리에게는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으로 되고, 우리도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기를 청합니다.……사랑의 선물을 받은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고 하느님을 위해서 삽시다.(234)
  • 1395 성체성사는 우리 안에서 불러일으키는 그 사랑으로 우리를 미래의 죽을죄에서 보호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하면 할수록, 그리스도와 우정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죽을죄를 지어 그분과 관계를 단절하기는 어렵게 된다. 그러나 성체성사는 죽을죄를 용서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죽을죄의 용서는 오로지 고해성사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성체성사의 특징은 그것이 교회와 완전하게 일치되어 있는 사람들을 위한 성사라는 점이다.
  • 1396 신비체의 일치: 성찬례는 교회를 이룬다. 성체를 받아 모시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더욱 긴밀하게 결합된다. 이로써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신자를 결합시켜 하나의 몸, 곧 교회를 이루신다. 영성체는 세례로써 이미 교회와 이룬 이 결합을 새롭게 하고, 굳건하게 하며, 깊게 한다. 세례 때 우리는 한 몸을 이루라는(235) 부름을 받았다. 성찬례는 이 부름을 이행한다. “우리가 축복하는 그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1코린 10,16-17).
  •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신비체이고 지체라면, 주님의 식탁에 놓여 있는 것은 여러분의 성사이므로 여러분의 성사를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받는 것에 대해 “아멘.”(“예, 그렇습니다.”)이라고 대답하고, 거기에 동의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에 “아멘.”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그대의 ‘아멘’이 진실한 것이 되게 하십시오.(236)
  • 1397 성체성사는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투신하게 한다.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신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참되게 받기 위해서는 그분의 형제들인 가장 가난한 사람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보아야 한다.(237)
  • 그대는 주님의 피를 맛보았으면서도 그대의 형제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대는 이 식탁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사람을 그대의 음식을 함께 나눌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여, 바로 이 식탁 자체의 명예를 손상시키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대를 모든 죄에서 구해 주시고 이 식탁에 초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대는 더 자비로워지지 않았습니다.(238)
  • 1398 성체성사와 그리스도인의 일치. 이 신비의 위대함 앞에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외친다. “오, 자비의 성사여, 오, 일치의 표징이여, 오, 사랑의 끈이여!”(239) 주님의 식탁에 함께 참여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교회의 분열이 더 고통스럽게 느껴질수록, 주님을 믿는 모든 사람이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날이 다시 오도록 주님께 드리는 기도는 더욱 간절해진다.
  • 1399 가톨릭 교회와 온전하게 일치되어 있지 않은 동방 교회들도 크나큰 사랑으로 성찬례를 거행한다. “동방 교회들은 비록 (가톨릭 교회와) 갈라져 있지만 참된 성사들을 보존하고 있다. 특히 사도 계승의 힘으로 사제직과 성찬례를 지니고 있어 아직도 우리와는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240) 따라서 “적절한 상황에서 교회 권위의 승인을 받아 이루어지는 어떤 성사 교류는 가능할 뿐만 아니라 권장되는 것이다.”(241)
  • 1400 종교 개혁으로 가톨릭 교회에서 갈라져 나간 교단들은 “특히 성품성사의 결여로 성찬 신비 본연의 완전한 실체를 보존하지 못하였다.”(242) 이러한 이유로 가톨릭 교회는 이들 교단들과 성찬례 공동 거행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교단들도 “거룩한 만찬에서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고, 그리스도와 친교를 이루는 삶을 상징한다고 고백하며,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243)
  • 1401 교구장의 판단에 따라 절박한 필요성이 생겼을 때, 가톨릭 성직자들은 가톨릭 교회와 온전한 일치를 이루고 있지 않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성사(성체성사, 고해성사, 병자성사)를 베풀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진하여 성사를 청해야 한다. 곧 이 성사들에 대하여 가톨릭적 신앙을 표명하고 올바른 마음의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244)
  • VII. 성찬례 - “다가올 영광의 보증”
  • 1402 교회는 옛 기도문에서 성찬의 신비에 대해 이렇게 환호한다. “오, 거룩한 잔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영하며, 그분의 수난을 기념하고 은총으로 가득 차며, 다가올 영광의 보증을 받는도다.”(245) 성찬례는 주님 파스카의 기념이고, 우리가 제대에서 받아 모시는 성체를 통하여 “하늘의 온갖 은총과 축복”(246) 을 가득히 받으므로, 성찬례는 천상의 영광을 미리 누리는 것이기도 하다.
  • 1403 최후의 만찬 때에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시선을 하느님 나라에서 이루어질 파스카의 완성으로 향하게 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너희와 함께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까지, 이제부터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마태 26,29).(247) 교회는 성찬례를 거행할 때마다 이 약속을 기억하며 “오실 분”(묵시 1,4)께 눈길을 돌린다. 교회는 “마라나 타!”(1코린 16,22), “오십시오, 주 예수님!”(묵시 22,20) 하고 그분께서 오시기를 청하는 기도를 드린다. “은총은 오고 이 세상은 지나가기를!”(248)
  • 1404 교회는 주님께서 지금도 당신의 성체성사 안에 오시고, 성체 안에서 우리 가운데 계심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 현존은 가려져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된 희망을 품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면서”(249) 성찬례를 거행하며 기도한다. “저희도 거기서(당신 나라에서) 주님의 영광을 영원히 함께 누리게 하소서. 저희 눈에서 눈물을 다 씻어 주실 그때에 하느님을 바로 뵈오며, 주님을 닮고 끝없이 주님을 찬미하리이다.”(250)
  • 1405 정의가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251) 이 큰 희망에 대하여 성찬례보다 더 확실한 보증과 분명한 징표는 없다. 실로 이 신비가 거행될 때마다 “우리의 구원 활동이 이루어지고”,(252) “영생을 위한 약이요 죽지 않게 하는 해독제이며 영원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하는 빵을 나누어 먹는다.”(253)
  • 간추림
  • 1406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그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1-56).
  • 1407 성찬례는 교회 생활의 핵심이며 정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성찬례를 통하여, 십자가 위에서 성부께 단 한 번 영원히 봉헌하신 찬미와 감사의 제사에 교회와 교회의 모든 지체를 참여시키시기 때문이다. 이 제사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몸인 교회에 구원의 은총을 베푸신다.
  • 1408 성찬례 거행은 언제나 하느님 말씀의 선포, 하느님 아버지의 모든 은혜와 특히 아드님을 주신 데 대한 감사, 빵과 포도주의 축성, 그리고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심으로써 전례 잔치에 참여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 요소들은 하나이며 동일한 예배 행위를 이룬다.
  • 1409 성찬례는 그리스도의 파스카를 기념한다. 곧,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로 완성된 구원 업적에 대한 기념인 것이다. 이 구원 업적은 전례 행위로 현재화한다.
  • 1410 새 계약의 영원한 대사제이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사제들의 직무를 통해서 활동하심으로써 성찬의 희생 제사를 드리신다. 그뿐만 아니라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실재하시는 바로 그 그리스도께서 성찬의 희생 제사의 제물이 되신다.
  • 1411 유효하게 성품을 받은 사제들만이 성찬례를 집전할 자격이 있고, 주님의 몸과 피로 변화되도록 빵과 포도주를 축성할 수 있다.
  • 1412 성체성사의 본질적인 표지는 빵과 포도주이다. 사제는 이 표지들에 대한 성령의 강복을 기원하며,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줄 내 몸이다.…… 이는 내 피의 잔이다.” 하신 축성의 말씀을 선포한다.
  • 1413 축성을 통해서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되는 실체 변화가 이루어진다. 축성된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는 살아 계시고 영광스럽게 되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참으로, 실재적으로 그리고 실체적으로 현존하신다. 곧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그분의 영혼과 천주성과 함께 현존한다.(254)
  • 1414 희생 제사로서 성찬례는 산 이와 죽은 이들의 죄에 대한 보상으로도 바치는 것이며, 하느님께 영적이거나 현세적인 은혜를 얻기 위해서도 바치는 것이다.
  • 1415 영성체로 그리스도를 받아 모시고자 하는 사람은 은총의 상태에 있어야 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죽을죄를 지었다고 스스로 의식한다면, 먼저 고해성사로 죄의 용서를 받고 나서야 성체를 모실 수 있다.
  • 1416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모시는 거룩한 영성체는 주님과 이루는 친교를 증대시키며, 소죄를 용서해 주고, 대죄에서 보호해 준다. 성체를 모시는 사람과 그리스도 사이에 사랑의 유대가 굳건해지므로, 영성체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의 일치도 강화한다.
  • 1417 교회는 신자들이 성찬례 거행에 참여할 때마다 성체를 모실 것을 간곡히 당부하며,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은 성체를 모실 의무를 부과한다.
  • 1418 그리스도께서 친히 성체성사 안에 계시므로 그분을 흠숭의 예로 공경해야 한다. 성체 조배를 할 때, “우리 주 그리스도에 대한 감사와 사랑을 표하고, 흠숭의 의무를 이행한다.”(255)
  • 1419 이 세상에서 성부께로 건너가신 그리스도께서는 성찬례 안에서 우리에게 당신 곁에서 누릴 영광의 보증을 주신다. 거룩한 제사에 참여하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심을 닮고, 이 세상의 순례 길에서 늘 힘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바라며, 이미 천상 교회와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모든 성인과 결합된다.
  • 제 2 장 치유의 성사들
  • 1420 우리는 그리스도교 입문 성사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새 생명을 받는다. 그런데 우리는 이 생명을 “질그릇 속에”(2코린 4,7) 담아 가지고 있다. 지금은 그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콜로 3,3) 숨겨져 있다. 우리는 고통과 질병과 죽음을 겪을 수밖에 없는 “지상 천막집”에(1) 아직 살고 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이 새 생명은 죄 때문에 약해지거나 잃을 수도 있다.
  • 1421 우리 영혼과 육체의 의사이시며, 중풍 병자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육체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2) 교회가 성령의 힘으로 그 치유와 구원 활동을, 당신의 지체까지도 대상으로 하여, 계속해 주기를 바라셨다. 이것이 치유의 두 가지 성사, 곧 고해성사와 병자성사의 목적이다.
  • 제4절 고해성사(告解聖事)
  • 1422 “고해성사를 보는 신자들은 하느님께 끼친 모욕에 대하여 그분의 자비로 용서를 받으며, 또한 동시에 범죄로 상처를 입혔던 교회, 사랑과 모범과 기도로써 죄인들의 회개를 위하여 노력하는 교회와 화해를 한다.”(3)
  • I. 이 성사는 어떻게 불리는가-
  • 1423 이 성사는 회개하라는 예수님의 호소와(4) 죄 때문에 떠나 있던 아버지께 돌아옴을(5) 성사적으로 실현하므로 회개의 성사라고 불린다.
  • 이 성사를 참회의 성사라고 부르는 까닭은, 죄인인 그리스도인의 회개와 참회와 보속(補贖)이라는 개인적이며 교회적인 과정을 하느님께 바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 1424 이 성사를 고백 성사라고 부르는 것은, 사제 앞에서 죄를 자인하고 고백하는 것이 이 성사의 핵심 요소이기 때문이다. 더 깊은 의미로는 이 성사가, 하느님의 거룩하심과 죄인에 대한 자비를 알아 뵙고 찬미하는 하나의 ‘고백’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 이 성사를 용서의 성사라고 부르는 것은, 사제의 성사적 사죄(赦罪)를 통하여, 참회하는 사람에게 하느님께서 “용서와 평화”(6) 를 주시기 때문이다.
  • 이 성사는 화해시키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죄인에게 베풀어 주기 때문에 화해 성사라고 부른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2코린 5,20).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으로 사는 사람은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24) 하신 예수님의 요구에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다.
  • II. 세례를 받은 뒤에 고해성사가 왜 필요한가-
  • 1425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느님의 영으로 깨끗이 씻겨졌습니다. 그리고 거룩하게 되었고 또 의롭게 되었습니다”(1코린 6,11). 그리스도를 새 옷으로 입은(7) 사람들이 죄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교 입문 성사들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하느님 선물의 위대함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나 성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우리가 죄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우리 안에 진리가 없는 것입니다”(1요한 1,8). 그리고 주님께서는 “저희의 죄를 용서하소서.”(루카 11,4) 하고 기도하라고 친히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며, 서로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과 우리의 죄에 대한 하느님의 용서가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 밝히셨다.
  • 1426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 자신이 그리스도 앞에 “거룩하고 흠 없는”(에페 5,27) 모습으로 서 있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께 돌아서는 회개, 세례를 통한 새로운 탄생, 성령을 받음, 양식으로 받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우리를 그리스도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하여 당신 앞에 설 수 있게”(에페 1,4)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 입문하여 받은 새 생명이 인간 본성의 불안정함과 나약함을 없앤 것은 아니며, 전통적으로 사욕이라고 부르는 죄로 기우는 경향을 없앤 것도 아니다. 세례 받은 사람에게 사욕이 남아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답게 살기 위한 싸움에서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도움을 받아 승리를 얻게 하기 위한 것이다.(8) 이 싸움은 주님께서 끊임없이 우리를 부르시는 거룩함과 영원한 생명으로 돌아가는 회개를 위한 싸움이다.(9)
  • III. 세례 받은 이들의 회개
  • 1427 예수님께서는 회개하라고 호소하신다. 이 호소는 하느님 나라 선포의 핵심 요소이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는 우선적으로 아직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호소한다. 그러므로 세례는 처음으로 근본적 회개가 이루어지는 으뜸 자리다. 사람들은 복음을 믿고 세례를 받음으로써(10) 악을 버리고 구원을 얻게 된다. 곧 모든 죄를 용서받고 새 생명의 선물을 받게 되는 것이다.
  • 1428 회개하라는 그리스도의 호소는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안에서도 계속 들려온다. 이 제2의 회개는 “자기 품에 죄인들을 안고 있어 거룩하면서도 언제나 정화되어야 하므로 끊임없이 참회와 쇄신을 추구하는”(11) 온 교회의 부단한 임무다. 이 회개의 노력은 단순히 인간의 일만은 아니다. 이는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12)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에 응답하도록 은총으로 이끌려 고무된(13) “뉘우치는 마음”의(14) 움직임이다.
  • 1429 베드로 사도가 자기 스승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다음 회개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예수님의 한없이 자비로운 눈길은 회개의 눈물을 흘리게 했으며,(15) 주님께서 부활하신 뒤에는 당신에 대한 그의 사랑을 세 번 확언하게 하신다.(16) 제2의 회개에는 공동체적 차원도 있다. 이는 어떤 교회 전체에 대해 “회개하여라!”(묵시 2,5.(16) 하시는 주님의 호소에서 드러난다.
  • 암브로시오 성인은 두 가지 회개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교회 안에는 “물과 눈물이 있으니 세례의 물과 참회의 눈물이다.”(17)
  • IV. 내적 참회
  • 1430 이미 예언자들이 그랬듯이, 회개하고 참회하라는 예수님의 호소는 외적 행위, 곧 “자루 옷과 재”, 단식과 고행이 아니라, 마음의 회개, 내적 참회가 그 우선 목표이다. 마음의 회개 없는 참회 행위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거짓된 행위에 불과하다. 반대로 내적 회개는 이러한 태도를 가시적 표지와 속죄의 행위로 표현하게 한다.(18)
  • 1431 내적 참회는 삶 전체의 근본적 방향 전환이며, 온 마음으로 하느님께 돌아오고, 회개하는 것이며, 우리가 지은 악행을 혐오하고 악에서 돌아서서 죄를 짓지 않는 것이다. 동시에 내적 회개는 하느님 자비에 대한 희망과 하느님 은총의 도움을 믿고 생활을 바꾸겠다는 의향과 결심을 포함한다. 이러한 마음의 회개에는 교부들이 “영혼의 고뇌”, “마음의 회한”이라고 했던 구원에 유익한 고통과 슬픔이 따른다.(19)
  • 1432 인간의 마음은 무디고 완고하다. 하느님께서 새 마음을 주셔야 한다.(20) 회개는 무엇보다도 우리 마음을 하느님께 돌아서게 하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진다. “주님, 저희를 당신께 되돌리소서, 저희가 돌아가오리다”(애가 5,(21) .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롭게 시작할 힘을 주신다. 우리 마음은 하느님 사랑의 위대하심을 알게 됨으로써 죄의 두려움과 무게 때문에 떨게 되고, 죄를 지어 하느님을 모욕하고 그분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다. 인간의 마음은 우리의 죄로 찔리신 그분을 바라봄으로써 회개하게 된다.(21)
  • 그리스도의 피를 바라보고, 그 피가 성부께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깨달읍시다.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흘리신 그 피는 온 세상에 회개의 은총을 마련해 주었기 때문입니다.(22)
  • 1433 주님의 부활 후부터 성령께서는 죄에 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바로잡아 주신다. 죄는 세상이 아버지께서 보내신 분을 믿지 않는 것이다.(23) 그런데 죄를 밝혀 주시는 성령께서는 인간의 마음에 참회와 회개의 은총을 주시는 ‘변호자’(24) 이시기도 하다.(25)
  • V. 그리스도인 생활의 다양한 참회 형태
  • 1434 그리스도인의 내적 참회는 매우 다양하게 표현될 수 있다. 성경과 교부들은 그중에서 특히 단식, 기도, 자선의 세 가지 형태를 강조한다.(26) 이 셋은 각각 자신에 대한 회개, 하느님에 대한 회개, 다른 사람들에 대한 회개를 나타낸다. 성경과 교부들은 죄의 용서를 얻는 방법으로, 세례와 순교를 통한 근본적인 정화 외에, 이웃과 화해하려는 노력, 참회의 눈물, 이웃의 구원에 대한 관심,(27) 성인들의 전구, 그리고 “많은 죄를 덮어 주는”(1베드 4,8) 사랑의 실천 등을 들고 있다.
  • 1435 일상생활에서 회개는 화해의 행위,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 정의의 실천과 타인의 권리 옹호,(28) 형제들에게 잘못을 고백함, 형제적인 충고, 생활에 대한 반성, 양심 성찰, 영적 지도, 고통을 받아들임, 정의를 위해 박해를 견딤 등으로 실현된다.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가장 확실한 회개의 길이다.(29)
  • 1436 성체성사와 고해성사. 일상적인 회개와 참회는 성체성사가 그 원천이며 양식이다.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시키신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가 성체성사 안에 현존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사람들은 성체로 양육되고 굳세어진다. 성체는 “날마다 짓는 죄로부터 우리를 구해 주고 죽을죄에서 보호해 주는 해독제이다.”(30)
  • 1437 성경 읽기, 시간 전례와 주님의 기도, 모든 참된 예배와 신심 행위는 우리 마음에 회개와 참회의 정신을 되살려 주고, 죄의 용서를 받는 데 도움이 된다.
  • 1438 전례력에서 참회의 날과 시기(사순 시기와 주님의 죽음을 기억하는 매주 금요일)는 교회가 참회를 특별히 실행하는 때이다.(31) 이 시기는 영성 수련, 참회 예절, 참회의 표시인 순례, 단식과 자선 같은 자발적인 절제, 형제적 나눔(자선 활동과 선교 활동) 등을 위하여 특히 적절한 때이다.
  • 1439 예수님께서는 ‘잃었던 아들’의 비유에서 회개와 참회의 과정을 잘 묘사하시는데, 이 비유의 중심인물은 ‘자비로운 아버지’이다.(32) 거짓 자유의 미혹, 아버지의 집을 떠남, 아들이 재산을 탕진한 다음에 빠진 극도의 비참, 돼지를 칠 수밖에 없게 된 수치, 더 나아가 돼지가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려고 했던 주림, 재산을 탕진해 버린 데 대한 반성, 뉘우침과 아버지 앞에 가서 잘못을 고백하겠다는 결심, 집으로 돌아옴, 아버지의 너그러운 환영, 아버지의 기쁨 등, 이러한 것들이 회개하는 과정의 특징적인 모습들이다. 아름다운 옷과 가락지와 즐거운 잔치는 하느님과 교회라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사람의 생명인 깨끗하고 품위 있고 기쁨 가득한 새 생활의 상징들이다. 당신 아버지의 사랑의 깊이를 아시는 그리스도의 마음만이 아버지의 끝없는 자비를 이렇게 소박하고도 아름답게 우리에게 알려 주실 수 있었다.
  • VI. 참회와 화해의 성사
  • 1440 죄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에 대한 모욕이고, 하느님과 이루는 친교의 단절이며 동시에 교회와 이루는 친교에도 해를 끼친다. 그러므로 회개는 하느님의 용서를 가져다주고 교회와 화해를 이루게 하며, 고해성사는 이를 전례적으로 표현하고 실현한다.(33)
  • 하느님께서만 죄를 용서하신다
  • 1441 하느님께서만 죄를 용서하신다.(34)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자신에 대해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마르 2,10)고 말씀하셨고,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35) 하시면서 이 신적 권한을 행사하신다. 나아가 당신의 신적 권위로 이 권한을 제자들에게 주시며(36) 당신의 이름으로 행사하게 하신다.
  • 1442 그리스도께서는 온 교회가 기도와 생활과 실천으로써, 몸소 당신 피로 값을 치르고 얻어 주신 용서와 화해의 표지와 도구가 되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의 행사는 사도직을 맡은 이들에게 위임하셨다. 사도들은 “화해의 직분”(2코린 5,18)을 받았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파견되었으며, 그들을 통하여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2코린 5,20) 하고 간곡히 권유하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 자신이시다.
  • 교회와 이루는 화해
  • 1443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동안 죄를 용서하셨을 뿐 아니라, 이 용서의 결과도 나타내 보이셨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죄 때문에 멀어졌거나 추방되었던 그들을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 안으로 다시 받아들이셨다. 이 사실을 보여 주는 명백한 표지는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당신의 식탁에서 함께 식사하게 하시고, 더구나 그들의 식탁에 함께 앉으셨다는 사실이다. 이는 하느님의 용서와,(37) 하느님 백성의 품으로 돌아오는 복귀를(38) 동시에 표현하는 놀라운 행위이다.
  • 1444 주님께서는 죄를 용서하는 당신의 고유 권한을 사도들에게 주시면서, 죄인들을 교회와 화해시키는 권한도 주신다. 사도들이 지닌 교회 차원의 이 임무는 주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하신 엄숙한 말씀에서 특히 잘 드러난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9). “베드로에게 주어진 매고 푸는 저 임무는 그 단장과 결합되어 있는 사도단에게도 부여되었음이 분명하다(마태 18,18; 28,16-20 참조).”(39)
  • 1445 “매고 푼다”는 말의 의미는, 교회가 그 친교에서 제외시키는 사람은 하느님에 대한 친교에서도 제외될 것이고, 교회가 친교 안에 다시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도 당신과 이루는 친교 안에 받아들이신다는 것이다. 교회와 이루는 화해와 하느님과 이루는 화해는 분리될 수 없다.
  • 용서의 성사
  • 1446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교회의 모든 지체, 누구보다도 우선 세례 후 대죄에 떨어져 세례로 받은 은총을 잃고 교회의 친교에 손상을 입힌 사람들을 위하여 고해성사를 세우셨다. 고해성사는 죄인들에게 회개하고 의화의 은총을 회복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한다. 교부들은 이 성사를 “은총을 잃어버린 난파 후 두 번째 구명대”(40) 라고 소개한다.
  • 1447 세월이 흐르는 동안, 교회가 주님께 받은 이 권한을 행사하는 구체적인 형태는 많이 변했다. 처음 수 세기 동안은 세례를 받은 뒤에 특수한 대죄(예를 들어 우상 숭배, 살인 또는 간통죄)를 지은 경우의 화해는 매우 엄중한 징계를 거쳐야 했다. 이에 따라, 회개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기 전에, 흔히 여러 해 동안, 공적인 보속을 해야만 했다. (몇몇 대죄에만 해당되던) 이러한 ‘참회자 부류’에 속하는 것이 허용되는 일이 드물었고, 어떤 지방에서는 일생에 단 한 번만 이러한 일이 가능했다. 7세기에 동방 수도회의 전통에서 영감을 얻은 아일랜드의 선교사들이 이른바 ‘사적인’ 속죄의 절차를 유럽 대륙에 전하였다. 이는 교회와 화해를 하기 전에 오랫동안 공적인 속죄 행위를 요구하던 종전의 관행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로부터 이 성사는 참회하는 사람과 사제 사이에서 비밀리에 행해지게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관행은 반복의 가능성을 허용하는 것이었으며, 이 성사를 정기적으로 자주 받을 수 있는 길을 터놓았다. 이는 한 번의 성사 거행으로 대죄와 소죄를 한 번에 용서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교회는 대체로 이러한 형태의 고해성사를 오늘날까지 행해 오고 있다.
  • 1448 오랜 세월 동안 변화를 겪어 온 이 성사의 규칙과 거행을 통틀어 볼 때, 불변하는 기본 구조를 발견할 수 있다. 이 구조는 한결같이 두 핵심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데, 그 하나는 성령의 감도로 회개하는 사람의 행위, 곧 통회와 고백과 보속이다. 다른 하나는 교회의 중개를 통한 하느님의 행위이다. 곧 교회는 주교와 사제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해 주고, 보속의 방법을 정해 주고, 죄인을 위해 기도하며, 그와 함께 속죄한다. 이렇게 해서 죄인은 치유되고 교회와 이루는 친교를 회복하게 된다.
  • 1449 서방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사죄경은 이 성사의 근본적인 요소들을 표현한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모든 용서의 근원이시다. 아버지께서는 당신 아들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그리고 성령을 보내 주심으로써, 교회의 기도와 직무 수행을 통하여 죄인과 화해를 이루신다.
  • 인자하신 천주 성부께서 당신 성자의 죽음과 부활로 세상을 당신과 화해시켜 주시고,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성령을 보내 주셨으니, 교회의 직무 수행으로 몸소 이 교우에게 용서와 평화를 주소서. 나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교우의 죄를 사하나이다.(41)
  • VII. 참회자의 행위
  • 1450 “죄인은 회개하기 위하여 기꺼이 다음과 같은 참회의 행위가 필요하다. 마음에는 통회가, 입에는 고백이, 행위에는 온전한 겸손과 유효한 보속이 있어야 한다.”(42)
  • 통회
  • 1451 참회하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행위는 통회(痛悔)이다. 통회는 “지은 죄에 대한 마음의 고통이며,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그 죄를 미워하는 것이다.”(43)
  • 1452 하느님을 모든 것 위에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통회를 ‘완전한’ 통회(사랑의 통회)라 한다. 이 통회는 소죄를 용서해 주며, 가능한 한 속히 고해성사를 받겠다는 굳은 결심이 포함된 경우 죽을죄도 용서받게 해 준다.(44)
  • 1453 ‘불완전한’ 통회(뉘우침)도 하느님의 선물이며 성령께서 일으켜 주시는 것이다. 이 통회는 죄의 추악함이나 죄인을 위협하는 영벌과 다른 벌들에 대한 두려움에서 생긴다(두려움의 통회). 이러한 양심의 동요는 은총의 감도 아래 성사로 죄를 용서받음으로써 완성되는 내적 변화를 유발시킬 수 있다. 그러나 불완전한 통회는 그 자체로써는 대죄의 용서를 얻지 못하며, 고해성사로 용서받도록 준비시킬 뿐이다.(45)
  • 1454 고해성사를 받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말씀에 비추어 양심 성찰을 해야 한다. 이를 위해 가장 적당한 성경 본문들은 십계명에서, 그리고 복음서와 사도들의 서한 가운데 윤리적인 부분, 예컨대 산상 설교와 사도들의 가르침에서 찾을 수 있다.(46)
  • 죄의 고백
  • 1455 죄의 고백(자백)은 단순히 인간적인 면에서도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며, 다른 사람들과 화해하도록 도와준다. 인간은 고백으로 자기가 지은 죄를 직시하고, 그에 대해 책임을 진다. 그리고 책임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느님과 교회에 대한 친교에 다시 마음을 열게 되어 새로운 미래가 가능해진다.
  • 1456 사제에게 하는 고백은 고해성사의 핵심 부분이다. “참회자들이 고백할 때에는 진지하게 성찰한 뒤에 알아낸 모든 죽을죄들을 열거해야 한다. 그 죄들이 매우 은밀한 것이고 십계명의 마지막 두 계명만을 범한 것일지라도 그러하다.(47) 때로 이 죄들은 영혼에 더욱 심한 상처를 입히며, 공공연하게 지은 죄들보다 더 위험하기 때문이다.”(48)
  •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기억나는 모든 죄를 고백하려고 애쓸 때, 자비로우시며 용서하시는 하느님 앞에 그 죄들을 모두 내놓는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와는 달리 그중 몇몇을 고의로 숨기는 사람들은 사제를 통하여 용서해 주실 선하신 하느님께 아무것도 제시하지 않는 것이 된다. “만일 환자가 부끄러워서 자신의 상처를 의사에게 감춘다면, 의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치료할 수 없기”(49) 때문이다.
  • 1457 교회의 계명에 따라 “모든 신자는 사리를 분별할 나이에 이른 뒤에는 매년 적어도 한 번 자기의 대죄를 성실히 고백할 의무가 있다.”(50) 죽을죄를 지었음을 의식하는 사람은 크게 통회를 했다고 해도, 성체를 모셔야 할 중대한 이유가 있고 또 고해 사제에게 갈 수 없는 경우가 아니면,(51) 먼저 고해성사로 사죄를 받지 않은 채 성체를 모셔서는 안 된다.(52) 어린이들은 첫영성체 전에 고해성사를 받아야 한다.(53)
  • 1458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상적인 잘못(소죄)도 고백하도록 교회는 크게 장려한다.(54) 왜냐하면 정기적으로 소죄를 고백하는 것은 양심을 기르고, 나쁜 성향과 싸우며, 그리스도를 통해 치유받고, 성령의 생명 안에서 성장하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이 성사를 통해서 자비로우신 성부의 은총을 더욱 자주 받으면 성부와 같이 자비로워지는 힘을 얻는다.(55)
  •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과 함께 행동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대의 죄를 질책하시는데, 그대도 자신의 죄를 질책한다면 그대는 하느님과 결합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사람과 죄인은 별개의 존재입니다. 그대가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때, 그 사람은 하느님께서 지으신 것입니다. 그대가 “죄인”이라는 말을 들을 때, 그 죄인은 인간이 스스로 만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친히 만드신 것을 구원하시도록 그대가 만든 것을 부수십시오.……그대가 만든 것을 미워하기 시작할 때, 그대는 자신의 악행을 고발하는 것이기에, 그대의 선행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악행의 고백은 선행의 시작입니다. 그대는 진리를 행하고 빛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56)
  • 보속
  • 1459 많은 죄들이 이웃에게 해를 끼친다. 이를 갚기 위해서 가능한 일들을 해야 한다(예를 들어 훔친 물건을 되돌려 주는 일, 모함당한 사람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일, 손해를 배상하는 일 등). 단순한 정의도 이런 일을 요구한다. 그러나 죄는 결국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고 나약하게 하며, 하느님에 대한 관계, 이웃에 대한 관계를 해친다. 용서는 죄를 없애 주지만 죄의 결과로 생긴 모든 폐해를 고쳐 주지는 못한다.(57) 죄에서 벗어난 사람은 완전한 영적 건강을 회복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 죄를 갚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더 실행하여야 한다. 적절한 방법으로 죄를 ‘보상’하거나 ‘속죄’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갚음을 ‘보속’(補贖)이라고 부른다.
  • 1460 고해 사제는 고백자에게 보속을 정해 줄 때, 그 사람의 개인적인 상황을 고려하고, 그의 영적 이익을 도모해야 한다. 보속은 가능한 한 지은 죄의 경중과 특성에 맞아야 한다. 보속은 기도일 수도 있고, 헌금, 자선 행위, 이웃을 위한 봉사, 자발적인 절제, 희생이 될 수도 있으며, 특히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를 인내로 받아들이는 일일 수도 있다. 이러한 보속들은 우리가 우리 죄 때문에 한 번에 영원히 속죄하신 그리스도를(58) 닮도록 도와준다. 보속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기”(로마 8,17)(59) 때문에 우리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 상속자가 되게 해 준다.
  • 그러나 우리의 보속, 곧 우리 죄 때문에 치르는 보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우리 처지로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모든 일을 할 수 있다.”(60) 이처럼 사람은 결코 자신을 영광스럽게 할 수 없으며, 우리의 모든 ‘영광’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서”(61) 보속한다. 이 열매는 그리스도에게서 힘을 얻고, 그리스도에 의하여 성부께 바쳐지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부께 받아들여진다.(62)
  • VIII. 고해성사의 집전자
  • 1461 그리스도께서 당신 사도들에게 화해의 직무를 맡기셨으므로,(63) 그들의 후계자인 주교들과 주교들의 협력자인 사제들은 이 직무를 계속 수행한다. 실제로 주교와 사제들은 성품성사의 힘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모든 죄를 용서할 권한을 가지게 된다.
  • 1462 죄를 용서받음으로써 하느님과 화해할 뿐 아니라 교회와도 화해한다. 그러므로 개별 교회의 볼 수 있는 으뜸인 주교는 예로부터 화해의 주된 권한과 직무를 가진 사람으로 당연히 인정되어 왔다. 주교는 고해성사 규율의 감독이다.(64) 주교의 협력자인 사제들은 교회법을 통해서 주교나 (또는 수도회 장상이나) 교황에게 위임을 받아 고해성사의 직무를 수행한다.(65)
  • 1463 특히 중대한 어떤 죄들에 대해서는 가장 엄한 교회의 벌인 파문이 내려진다. 파문을 당하면 성사를 받지 못하며, 일정한 교회 활동을 하지 못한다.(66) 이러한 파문을 푸는 권한은 교회법에 따라 그 지역의 주교와 교황, 또는 이들에게서 권한을 받은 사제들만이 가지고 있다.(67) 파문된 사람이 죽을 위험에 있을 때에는, 고백을 들을 권한이 없는 사제까지도 포함하여, 모든 사제가 모든 죄와 파문에서 그를 풀어 줄 수 있다.(68)
  • 1464 사제는 신자에게 고해성사를 받도록 권고해야 하며, 신자가 합리적으로 이 성사를 요청할 때마다 언제나 기꺼이 들어 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 주어야 한다.(69)
  • 1465 고해성사를 거행할 때 사제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착한 목자, 상처를 싸매 주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 탕자를 기다리다 맞아들이는 아버지,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공정하고 자비로운 판결을 내리는 의로운 재판관의 직무를 다해야 한다. 한마디로 사제는 죄인에 대한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 주는 표지이며 도구이다.
  • 1466 고해 사제는 하느님의 용서를 마음대로 다루는 주인이 아니라 종이다. 이 성사의 집전자는 그리스도의 뜻과 사랑에 결합되어 있어야 한다.(70) 그는 그리스도인의 행동을 잘 이해하고, 인간사에 대한 경험도 터득해야 하며, 죄에 떨어진 사람을 존중하고 배려해야 한다. 고해 사제는 진리를 사랑하고 교회의 교도권에 충실해야 하며, 고백하는 사람을 치유와 완전한 성숙으로 인내로이 인도해야 한다. 그는 고백자를 자비로우신 주님께 맡겨 드리고 그를 위해 기도하고 속죄해야 한다.
  • 1467 이 직무는 미묘하고 중대한 것이며, 사람들을 존중해야 하므로, 교회는 고백을 듣는 모든 사제가 고백자에게서 들은 죄에 대해 절대 비밀을 지킬 의무가 있으며, 이를 어길 경우 매우 준엄한 벌을 받는다고 천명한다.(71) 고해 사제는 고해를 통하여 고백자들의 삶에 대해 알게 된 것을 인용해서도 안 된다.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 이 비밀을 ‘성사의 봉인’(고해 비밀)이라고 한다. 고백자가 사제에게 말한 것은 성사로 ‘봉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 IX. 고해성사의 효과
  • 1468 “고해성사의 완전한 효능은 하느님의 은총을 회복시켜 주고 지고한 우정으로 하느님과 결합하게 해 주는 것이다.”(72) 그러므로 이 성사의 목적과 효과는 하느님과 이루는 화해이다. 통회하는 마음과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고해성사를 받는 사람들에게는 “양심의 평화와 안심이 따르고, 힘있는 영적 위로가 더해진다.”(73) 실로 하느님과 화해하는 고해성사는 참된 ‘영적 부활’과 하느님 자녀로서 지니는 품위와 삶의 선익을 회복시켜 주며, 그 가운데 가장 소중한 것은 하느님과 나누는 사랑이다.(74)
  • 1469 이 성사는 우리를 교회와 화해시켜 준다. 죄는 형제적 친교를 약화시키거나 파괴한다. 고해성사는 그 친교를 바로잡고 회복시킨다. 이러한 의미에서 고해성사는 교회와 친교를 회복하는 그 사람만을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체가 지은 죄 때문에 손상을 입은 교회의 생명을 되살리는 효과도 있다.(75) 성도들과 친교를 회복하거나 이를 확인받은 죄인은, 아직 나그넷길에 있거나 이미 천상 고향에 있는 그리스도 신비체의 살아 있는 모든 지체와 영적인 자산을 나눔으로써 굳건해진다.(76)
  • 하느님과 하는 이 화해는 죄가 만들어 냈던 균열을 다시 메우는 여러 수준의 다른 화해에까지 발전하게 됩니다. 용서받은 참회자는 자기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 자신과 화해하며, 거기서 참된 자아를 회복합니다. 그다음에, 그는 자기가 어떤 모양으로든지 상처를 주고 손해를 끼친 형제들과도 화해하게 됩니다. 그는 교회와도 화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온 창조계와도 화해하게 되는 것입니다.(77)
  • 1470 이 성사에서 죄인은 자신을 하느님의 자비로운 심판에 맡겨 드림으로써, 어떤 의미에서는 이 지상의 삶이 끝날 때 받게 될 심판을 앞당겨 받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것은 이 현세 생활에서 영원한 생명과 죽음에 대한 선택권이 우리에게 주어지기 때문이며, 대죄를 지은 채로는 들어갈 수 없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은 회개밖에 없기 때문이다.(78) 죄인은 참회와 신앙을 통하여 그리스도께 돌아섬으로써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 “심판을 받지 않는다”(요한 5,24).
  • X. 대사
  • 1471 교회 안의 대사(大赦)에 대한 교리와 관습은 고해성사의 효과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 대사란 무엇인가-
  • “대사란, 이미 그 죄과에 대해서는 용서받았지만, 그 죄 때문에 받아야 할 잠시적인 벌[暫罰]을 하느님 앞에서 면제해 주는 것인데, 선한 지향을 가진 신자가 일정한 조건을 충족시켰을 때, 교회의 행위를 통해 얻는다. 교회는 구원의 분배자로서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보속의 보물을 자신의 권한으로 나누어 주고 활용한다.”79)
  • “대사는 죄 때문에 받게 될 잠시적인 벌을 부분적으로 면제하느냐, 전적으로 면제하느냐에 따라 부분 대사와 전대사로 구분된다.”80) “어느 신자든지 자기 자신을 위하여 대사를 얻을 수 있고 또는 죽은 이들을 위하여 활용할 수도 있다.”81)
  • 죄에 대한 벌
  • 1472 교회의 이러한 교리와 관습을 이해하려면 죄는 두 가지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대죄는 우리에게서 하느님과 이루는 친교를 박탈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없게 하는데, 이처럼 영원한 생명을 상실하는 것을 죄의 ‘영벌’이라고 한다. 한편 모든 죄는, 소죄까지도, 피조물들에 대한 불건전한 집착을 초래하는데, 이는 이 세상에서나 죽은 뒤에 연옥이라고 부르는 상태의 정화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정화로 이른바 죄의 ‘잠벌’에서 벗어난다. 이 두 가지 벌을 하느님께서 외부에서 가하시는 일종의 복수로 이해해서는 안 되며, 죄 그 자체에서 나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열렬한 사랑에서 나오는 회개는 죄인을 온전한 정화에 이르게 하여 아무런 벌도 남지 않게 할 수 있다.(82)
  • 1473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과 맺는 친교를 회복하면 죄의 영벌은 면제되지만 잠벌은 남아 있다. 그리스도인은 갖가지 고통과 시련을 인내로이 견디고, 때가 되면 죽음을 차분한 마음으로 맞음으로써 죄의 잠벌들을 은총으로 받아들이도록 힘써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자비와 자선의 행위와 더불어 기도와 여러 속죄 행위로 “묵은 인간”을 완전히 벗어 버리고, “새로운 인간”으로(83) 갈아입도록 힘써야 한다.
  • 성인들의 통공 안에서
  • 1474 자신의 죄를 깨끗이 정화하고 하느님 은총의 도움으로 거룩하게 되려고 애쓰는 그리스도인은 외롭지 않다. “하느님 자녀 각자의 생명은, 그리스도 신비체의 초자연적 단일성 안에서, 마치 신비로운 한 인격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 형제들의 생명과 놀랍게 연결되어 있다.”(84)
  • 1475 성인들의 통공 안에는 “신자들 ─ 이미 천상 고향에 이른 사람들, 연옥에서 속죄하고 있는 사람들, 아직 지상에서 순례하고 있는 사람들 ─ 사이에 변함없는 사랑의 유대와 모든 선의 풍부한 나눔이 있다.”(85) 이러한 놀라운 교류로, 어느 한 사람의 죄가 다른 사람들에게 끼칠 수 있었던 손해보다는, 한 사람의 거룩함이 다른 사람들에게 끼치는 선익이 훨씬 더 크게 된다. 따라서 성인들의 통공에 의지하면 통회하는 죄인이 죄의 벌에서 더 일찍, 더 효과적으로 정화될 수 있다.
  • 1476 우리는 성인들의 통공이라는 이 영적인 재산을 교회의 보화라고 부른다. “이 보화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쌓이는 물질적인 부요와 같은 어떤 재물의 총화가 아니라, 인류가 죄에서 해방되어 하느님 아버지와 일치를 이루도록 바쳐진 우리 주 그리스도의 속죄와 공로이며,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무한하고 무궁한 가치가 있는 보화이다. 우리 구원자이신 그리스도께는 속량 공로가 충만하다.”(86)
  • 1477 “이 보화에는 무엇보다도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모든 성인의 기도와 선업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참으로 하느님 앞에서 헤아릴 수 없는 무한하고 새로운 가치를 지닌다. 그들은 모두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그분의 은총으로 거룩하게 살며 성부께서 그들에게 맡기신 사명을 완수하였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의 구원을 얻었고 신비체의 일치 안에서 형제의 구원에 협력하였다.”(87)
  • 교회를 통하여 하느님의 대사를 얻는다
  • 1478 교회를 통하여 대사를 얻는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 받은 매고 푸는 권한으로 그리스도인을 위해 중개하여, 그의 죄로 말미암은 잠벌의 사면을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 얻도록,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공로의 보고를 그에게 열어 준다. 이처럼 교회는 그 신자를 도울 뿐 아니라, 신심 행위와 참회와 자선을 행하도록 그를 격려하기도 한다.(88)
  • 1479 정화 중에 있는 죽은 신자들도 성인들과 통공을 이루는 같은 지체들이므로, 우리는 그들을 위한 다른 도움과 더불어, 특히 그들의 죄로 말미암은 잠벌을 사면해 주는 대사로써 그들을 도울 수 있다.
  • XI. 고해성사의 거행
  • 1480 다른 모든 성사와 마찬가지로 고해성사도 전례 행위이다. 이 전례의 거행은 보통 다음과 같은 요소들로 이루어진다. 사제의 인사와 축복, 양심을 비추고 통회를 일으키기 위해 하느님의 말씀을 읽음, 뉘우치도록 권고함, 죄를 인정하고 사제에게 밝히는 고백, 보속을 정해 주고 받음, 사제의 사죄경, 감사의 찬미, 사제가 고백자를 축복하여 돌려보냄 등.
  • 1481 비잔틴 전례에서는 용서의 신비를 놀랍도록 잘 표현하는 여러 가지 탄원 형태의 사죄경이 있다. “하느님께서는 다윗이 자신의 죄를 고백했을 때 예언자 나탄을 통하여 그를 용서하셨으며, 베드로가 슬피 울었을 때 그를 용서해 주셨고, 죄 많은 여자가 당신 발에 눈물을 쏟았을 때 그를 용서해 주셨으며, 세리와 탕자를 용서해 주셨으니, 그 하느님께서 죄인인 나를 통하여 이 세상과 내세에서 그대를 용서하시어 하느님의 무서운 심판 대전에 섰을 때 그대를 단죄하지 않으시기를 빕니다. 주님께서는 영원히 찬미받으소서. 아멘.”(89)
  • 1482 고해성사는 여럿이 함께 고백을 준비하고, 받은 용서에 대해 함께 감사하는 공동 거행의 형식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이때 개인적인 죄의 고백과 개별적인 사죄는, 독서와 강론, 공동의 양심 성찰, 공동의 용서 청원, 주님의 기도, 공동의 감사와 함께 이루어지는 말씀 전례 안에 삽입되어 있다. 고해성사의 이 공동 거행은 참회의 교회적 성격을 더욱 분명하게 표현한다. 고해성사는 그 거행의 방식이 어떠하든, 본질상 언제나 전례 행위이며, 교회적이고 공적인 행위이다.(90)
  • 1483 중대한 필요가 있을 때에 일괄적으로 고백하고 일괄적으로 죄를 용서해 주는 고해성사의 공동 거행이 가능하다. 중대한 필요란, 죽음의 위험이 임박하여 한 사제나 여러 사제가 고백자 한 사람 한 사람의 고백을 들을 만한 충분한 시간이 없을 경우를 말한다. 중대한 필요는, 또한 고백자들의 수로 보아, 적절한 시간 안에 각자의 개별 고백을 듣기에는 고해 사제의 수가 부족하여서, 고백자들이 자기들의 탓 없이 오랫동안 성사의 은총을 받지 못하거나 영성체를 하지 못하게 될 경우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경우에 사죄가 유효하려면 신자들이 적절한 때에 자신들의 대죄를 고백하겠다는 의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91) 일괄 사죄에 요구되는 조건의 여부는 교구장이 판단한다.(92) 큰 축일이나 순례를 위해 많은 신자가 모이는 것은 이 중대한 필요성의 경우에 해당되지 않는다.(93)
  • 1484 “물리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불가능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개인적으로 죄를 온전히 고백하고 사죄를 받는 개별 고백은, 신자들이 하느님과 교회와 화해하는 유일한 일반적 방식이다.”(94) 여기에는 깊은 이유가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하나의 성사 안에서 활동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말씀하신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필요로 하는 병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95) 정성을 기울여 고쳐 주시는 의사이시다. 그들을 일으켜 형제들과 다시 친교를 이루게 하신다. 그러므로 개별 고백은 하느님에 대한 화해와 교회에 대한 화해의 의미를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는 형식이다.
  • 간추림
  • 1485 부활하신 날 저녁, 주 예수님께서는 당신 사도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 1486 세례 받은 다음에 지은 죄의 용서는 회개의 성사, 고백 성사, 참회의 성사, 화해 성사라고 불리는 고해성사를 통하여 주어진다.
  • 1487 죄를 짓는 사람은 하느님의 영예와 그분의 사랑을 손상하는 것이며, 하느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자신의 인간적 품위와, 그리스도인이 그 살아 있는 돌이 되어야 하는 교회의 영적 선익에 손상을 입히는 것이다.
  • 1488 신앙의 눈으로 보면, 죄보다 더 중대한 악이 없고, 죄인 자신과 교회와 세상 전체에 이보다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없다.
  • 1489 죄로 잃었던 하느님과의 친교를 회복하는 것은, 자비로우시고 인간의 구원을 염려하시는 하느님의 은총에서 생기는 변화이다. 자신과 남을 위해 이 귀중한 선물을 청해야 한다.
  • 1490 회개와 참회라고 불리는, 하느님께 돌아오는 이 전향은 지은 죄에 대한 고통과 후회, 그리고 다시는 죄짓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회개는 과거와 미래에 관계되며, 자비로우신 하느님에 대한 희망으로 힘을 얻는다.
  • 1491 고해성사는 고백자의 세 가지 행위와 사제의 사죄로써 이루어진다. 고백자의 세 가지 행위는 통회, 사제에게 죄를 말하는 고백, 그리고 보속하겠다는 결심과 그 이행이다.
  • 1492 통회라고도 하는 참회는 신앙의 동기로 일어나야 한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통회를 하였다면 ‘완전한’ 통회라 하고, 다른 동기에 근거를 두었다면 ‘불완전한’ 통회라 한다.
  • 1493 하느님과 교회와 화해하고자 하는 사람은 진지하게 양심을 성찰해서 기억해 낸, 아직 고백하지 않은 모든 대죄를 사제에게 고백해야 한다. 소죄의 고백은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교회는 이를 강력하게 권고한다.
  • 1494 고해 사제는 고백자에게 죄로 생긴 손해를 갚고,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합당한 생활 태도를 다시 갖추기 위한 ‘보상’이나 ‘속죄’를 하도록 권한다.
  • 1495 교회 권위로부터 사죄권을 받은 사제들만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할 수 있다.
  • 1496 고해성사의 영적 효과는 다음과 같다.
  • - 고백자에게 은총을 회복시켜 주는 하느님과 화해
  • - 교회와 화해
  • - 죽을죄로 받게 되었던 영벌의 사면
  • - 죄의 결과인 잠벌의 적어도 부분적인 사면
  • - 양심의 평화와 안온, 영적 위안
  • - 그리스도인의 영적 싸움을 위한 힘의 증대
  • 1497 개인적으로 대죄를 온전히 고백하고 그에 따른 사죄를 받는 개별 고백만이 하느님과 교회와 화해하는 유일한 통상적 방식이다.
  • 1498 신자들은 대사로써 자신과 연옥 영혼들을 위하여, 죄의 결과인 잠벌을 사면받을 수 있다.
  • 제5절 병자성사(病者聖事)
  • 1499 “병자들의 거룩한 도유와 사제들의 기도로 온 교회는 수난하시고 영광을 받으신 주님께 병자들을 맡겨 드리며, 그들의 병고를 덜어 주시고 낫게 하여 주시도록 간청하는 한편, 병자들도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자유로이 결합시켜 하느님 백성의 선익에 기여하도록 권고한다.”(96)
  • I. 구원 경륜에서 본 병자성사의 근거들
  • 인생과 질병
  • 1500 인생을 가장 괴롭혀 온 문제들 중에는 늘 질병과 고통이 들어 있다. 질병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무능과 한계, 유한성을 체험한다. 모든 질병은 죽음을 예감하게 한다.
  • 1501 질병은 우리를 번뇌로 이끌기도 하고, 자신 안에 도피하는 사람으로 만들기도 하며, 때로는 하느님에 대한 실망과 반항으로까지 이끌 수도 있다. 반면에 질병은 사람을 더욱 성숙하게 할 수도 있고, 그의 삶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을 분별하여 본질적인 것을 향해 나아가도록 도와줄 수도 있다. 많은 경우에, 질병은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께 돌아오게 한다.
  • 하느님 앞의 병자
  • 1502 구약 성경의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병으로 고통당한다. 하느님께 자신의 병에 대해 하소연을 늘어놓고,(97) 삶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하느님께 치유를 애원한다.(98) 질병은 회개의 길이 되고,(99) 하느님의 용서는 치유의 시발이 된다.(100) 이스라엘은, 병이 신비하게 죄와 악과 관련되어 있으며, 율법에 따라 하느님께 충실하면 생명을 돌려받는다는 것을 체험한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를 낫게 하는 주님이다”(탈출 15,26). 예언자는 고통이 타인의 죄를 속량하는 의미도 가질 수 있음을 깨닫는다.(101) 마침내 이사야는 하느님께서 시온을 위해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병을 고쳐 주실 때가 오리라고 예고한다.(102)
  • 의사이신 그리스도
  • 1503 그리스도께서 병자들을 동정하시고, 여러 가지 병을 고쳐 주셨다는 것은(103)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고(104)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명백한 표징이다. 예수님께서는 치유의 능력뿐 아니라 죄를 용서하는 권한도 가지셨다.(105)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영혼과 육신을 모두 고쳐 주려고 오셨다. 그분께서는 병자들에게 필요한 의사이시다.(106) 그분께서는 고통당하는 모든 사람에 대한 연민으로 자신을 그들과 동일시하기까지 하셨다. “너희는 내가 병들었을 때에 나를 돌보아 주었다”(마태 25,36). 병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은, 영혼과 육체의 고통을 겪는 모든 사람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매우 각별한 관심을 오랜 세월 동안 불러일으켜 왔다. 이러한 특별한 관심은 고통 받는 이들의 아픔을 덜어 주고자 하는 지칠 줄 모르는 노력의 근원이다.
  • 1504 예수님께서는 자주 병자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셨다.(107) 예수님께서는 침을 바르고 안수하시며,(108) 진흙을 바르고 물로 씻는(109) 표징들을 사용하여 병을 고치신다. 병자들은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준”(루카 6,19) 것을 보고 모두 예수님을 만지려고 하였다.(110) 이처럼 성사 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치유하시려고 끊임없이 우리를 ‘만지신다.’
  • 1505 이렇게 많은 고통에 마음이 움직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병자들이 당신을 만지도록 허락하실 뿐 아니라, 그들의 불행을 당신의 불행으로 여기신다. “그분은 우리의 병고를 떠맡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셨다”(마태 8,17).(111) 예수님께서 모든 병자를 다 고쳐 주신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치유 행위는 하느님 나라가 도래했다는 징표들이었고, 더 근본적인 치유, 곧 당신 파스카를 통한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악의 모든 무거운 짐을 짊어지셨고,(112) “세상의 죄”(요한 1,29)를 치워 없애셨다. 병은 단지 세상의 죄의 결과일 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수난과 십자가 위의 죽음으로 고통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고통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닮고, 속량을 위한 그분의 수난에 결합될 수 있다.
  • “앓는 이들은 고쳐 주어라”
  • 1506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권고하신다.(113)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병과 병자를 새롭게 이해하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당신의 가난하고 봉사하는 삶에 함께하도록 하며, 연민과 치유의 직무에 참여시키신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마르 6,12-13).
  • 1507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이 파견을 새롭게 하신다. (“내 이름으로……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마르 16,17-18). 그리고 주님께서는 교회가 당신의 이름으로 행하는 표징들을 통하여 이 파견을 확인해 주신다.(114) 그 표징들은 예수님께서 참으로 “구원하시는 하느님”이시라는(115) 것을 특별하게 나타낸다.
  • 1508 성령께서는 어떤 이들에게 특별한 치유의 은사를 주시어,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이 지닌 힘을 나타내신다.(116)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모든 병이 다 치유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12,9)는 것을 배워야 했고, 또 고통을 견뎌 내는 것은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다.”(콜로 1,24)는 의미가 있음을 배워야 했다.
  • 1509 “앓는 이들은 고쳐 주어라”(마태 10,8). 주님께 이러한 사명을 받은 교회는 병자들을 보살피고 아울러 그들을 위해 전구의 기도를 드림으로써 이 사명을 수행하고자 노력한다. 교회는 영혼과 육체의 의사이신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는 현존을 믿는다. 이 현존은 특별히 성사들 안에서 작용하며,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인(117) 성체성사 안에서는 특별한 방식으로 효과를 낸다. 바오로 사도는 성체와 육체적 건강의 관계를 암시하고 있다.(118)
  • 1510 사도 시대의 교회에는 병자들을 위한 특별한 예식이 있었다. 야고보 사도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여러분 가운데에 앓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의 원로들을 부르십시오. 원로들은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십시오. 그러면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야고 5,14-15). 성전(聖傳)은 이 예식을 교회의 일곱 가지 성사 중의 하나로 인정하였다.(119)
  • 병자성사
  • 1511 교회는 일곱 성사 중에 특별히 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기 위한 성사가 있음을 믿고 고백한다. 병자성사가 그것이다.
  • 병자의 거룩한 도유는 진실되고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신약의 성사로 세우신 것이라고 마르코 복음서에 암시되고 있으며,(120) 주님의 사도이며 형제인 야고보가 신자들에게 권고하고 선포한 것이다.(121)
  • 1512 서방에서와 마찬가지로 동방에서도 전례 전승에는 예로부터 축성한 기름을 병자들에게 발라 주는 관습이 있었다는 증거들이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병자의 도유는 점차 죽을 위험이 더 큰 사람에게만 베풀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도유를 ‘마지막 도유’(종부 성사)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에도, 만일 그것이 병자의 구원을 위해 좋은 일이라면, 건강을 회복하도록 주님께 기도하는 것을 전례에서 배제한 적이 전혀 없다.(122)
  • 1513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따라,(123) 교황령 “병자의 도유”(Sacram Unctionem Infirmorum, 1972년 11월 30일자)는 로마 예법에서 다음 사항을 준수하도록 규정하였다.
  • 병자성사는 위독한 병자들에게 베푸는 것인데, 정식으로 축성한 올리브 기름이나 때에 따라 다른 식물성 기름을 병자의 이마와 양손에 바르며, 다음과 같은 기도문을 한 번만 외운다. “주님께서는 주님의 자비로우신 사랑과 기름 바르는 이 거룩한 예식으로 성령의 은총을 베푸시어 이 병자를 도와주소서. 또한 이 병자를 죄에서 해방시키시고 구원해 주시며 자비로이 그 병고도 가볍게 해 주소서.”(124)
  • II. 누가 이 성사를 받으며, 누가 집전하는가-
  • 병이 중한 경우에
  • 1514 병자성사는 “생명이 위급한 지경에 놓인 사람들만을 위한 성사가 아니다. 그러므로 분명히 이 성사를 받는 적절한 시기는 이미 신자가 질병이나 노쇠로 죽을 위험이 엿보이는 때로 여겨진다.”(125)
  • 1515 병자성사를 받은 병자가 건강을 회복했다가 다시 중병에 걸리게 되면 이 성사를 다시 받을 수 있다. 같은 병으로 앓다가 병이 더 중해지는 경우에도 이 성사를 다시 받을 수 있다. 중한 수술을 받기 전에 병자성사를 받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급격히 쇠약해지는 노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 “교회의 원로들을 청하십시오”
  • 1516 사제들(주교와 신부들)만이 병자성사를 거행한다.(126) 신자들에게 이 성사의 선익에 대해 가르치는 것은 사목자들의 의무이다. 신자들은 이 성사를 받기 위해 사제를 청하도록 병자들을 격려해야 한다. 병자들은 그들의 목자와 온 교회 공동체의 도움을 받아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이 성사를 받도록 준비하여야 한다. 교회 공동체 전체는 병자들을 특별히 기도와 형제적인 사랑으로 감싸 주어야 한다.
  • III. 병자성사는 어떻게 거행되는가-
  • 1517 다른 모든 성사와 마찬가지로 병자성사도 가정에서 거행하든 병원이나 성당에서 거행하든, 한 사람의 병자를 위해 거행하든 여러 병자들을 위해 거행하든, 전례적이고 공동체적인 것이다.(127) 이 성사는 주님의 파스카를 기념하는 미사 중에 거행하는 것이 매우 합당하다. 상황이 허락하면, 고해성사를 먼저 베풀고, 병자성사 뒤에 성체성사를 줄 수도 있다. 그리스도의 파스카 성사로서 성체는 언제나 지상 순례 길의 마지막 성사,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기’ 위한 ‘노자’(路資) 성사가 되어야 한다.
  • 1518 말씀과 성사는 불가분의 전체를 이룬다. 참회 기도에 이은 말씀 전례로 성사 거행이 시작된다. 그리스도의 말씀과 사도들의 증언은 병자와 공동체의 신앙을 일깨워 주님께 성령의 권능을 청하게 한다.
  • 1519 성사의 거행에는 주로 다음과 같은 요소들이 포함된다. “교회의 원로들”은(128) ─ 침묵 중에 ─ 병자에게 손을 얹는다. 그리고 교회의 신앙 안에서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129) 이것이 이 성사의 고유한 성령 청원 기도이다. 이때 가능하면 주교가 축성한 기름을 발라 준다.
  • 이러한 전례적 행위들은 이 성사가 병자들에게 어떤 은총을 주는지를 가리킨다.
  • IV. 병자성사의 효과
  • 1520 성령의 특별한 선물. 병자성사의 근본적인 은총은 중병이나 노쇠 상태의 어려움들을 이겨 내는 데에 필요한 위로와 평화와 용기의 은총이다. 이 은총은 하느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새롭게 하고, 마귀의 유혹, 곧 죽음 앞에서 번뇌와 좌절에 빠지는 유혹에 흔들리지 않게 해 주시는 성령의 선물이다.(130) 성령의 힘을 통해 주시는 주님의 이러한 도움은 병자들의 영혼을 치유하기 위한 것이지만,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면, 육체도 치유한다.(131) 그뿐 아니라, “그가 죄를 지었으면 용서를 받을 것이다”(야고 5,15).(132)
  • 1521 그리스도의 수난에 결합됨. 이 성사의 은총으로 병자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수난에 더욱 가까이 결합시키는 힘과 은혜를 받는다. 어떤 의미에서 병자는 구세주의 속량하시는 수난을 닮음으로써 열매를 맺도록 축성되는 것이다. 원죄의 결과인 고통에 새로운 의미가 부여된다. 곧 고통은 예수님의 구원 사업에 참여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 1522 교회의 은총. 이 성사를 받은 “병자들도 스스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자유로이 결합하여, 하느님 백성의 선익에 기여”(133) 한다. 교회는 이 성사를 거행함으로써 성인들의 통공 안에서 병자들의 선익을 위해 전구한다. 또 병자도 나름대로 이 성사의 은총을 통해서 교회의 성화와 모든 이의 선익에 이바지한다. 교회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고통을 당하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을 하느님 아버지께 봉헌하는 것이다.
  • 1523 마지막 길의 준비. 병자성사가 병으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과 중대한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 모두를 위한 것이라면, 이는 특히 “생명이 떠나려는 순간에 처한 이들”(134) 에게 베풀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성사를 “떠나는 이들의 성사”(135) 라고도 불렀다. 병자성사는 세례로 시작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동화하는 일치를 완성한다. 이 성사는 그리스도인의 일생 동안 이루어지는 거룩한 도유들을 완결 짓는다. 세례 때의 도유는 우리 안에 새 생명을 새겨 주었고, 견진의 도유는 이 생명의 싸움을 위하여 우리를 굳건하게 해 주었다. 병자성사의 마지막 도유는 하느님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기 전에 있을 마지막 싸움에 대비하여 우리 지상 생활의 마지막에 튼튼한 방패를 마련해 준다.(136)
  • V. 그리스도인의 마지막 성사인 노자 성체
  • 1524 교회는 죽음을 앞둔 사람들에게 병자의 도유 외에도 노자(路資)로 성체를 준다. 아버지께로 건너갈 때에 모시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특별한 의미와 중요성을 지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54) 하신 주님의 말씀과 같이, 이 성체는 영원한 생명의 씨앗이며 부활의 힘이다. 죽었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성사인 성체성사가 여기에서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 세상에서 하느님 아버지께로 건너가는 성사가 된다.(137)
  • 1525 따라서 세례성사와 견진성사, 성체성사가 ‘그리스도교 입문 성사’라는 단일성을 가지듯이 고해성사와 병자성사, 그리고 노자로 모시는 성체성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종말에 이르렀을 때 ‘천상 고향에 갈 준비를 갖추는 성사’ 또는 나그넷길을 마무리하기 위한 성사들이라고 할 수 있다.
  • 간추림
  • 1526 “여러분 가운데에 앓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의 원로들을 부르십시오. 원로들은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십시오. 그러면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야고 5,14-15).
  • 1527 병자성사의 목적은 중병이나 노쇠에 따르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푸는 것이다.
  • 1528 신자가 병이나 노쇠로 죽을 위험을 맞기 시작하면 병자성사를 받을 적절한 때가 온 것이다.
  • 1529 그리스도인은 중병이 들었을 때마다 병자성사를 받을 수 있으며, 이 성사를 받은 이후 병이 악화되었을 경우에도 받을 수 있다.
  • 1530 사제들(주교와 신부들)만이 병자성사를 베풀 수 있다. 그들은 이 성사를 위해 주교가 축성한 기름을 사용하며, 필요한 경우에는 성사를 거행하는 사제가 축성해서 쓰기도 한다.
  • 1531 이 성사 거행의 핵심은 병자의 이마와 양손(로마 예법) 또는 몸의 다른 부위(동방 예법)에 기름을 바르는 것이다. 주례 사제는 기름을 바르면서 이 성사의 특별한 은총을 청하는 전례 기도를 드린다.
  • 1532 병자성사가 이루어 주는 특별한 은총은 다음과 같다.
  • - 병자가 자신과 온 교회의 선익을 위해 그리스도의 수난과 결합됨
  • - 병이나 노쇠의 고통을 그리스도인답게 견디는 데 필요한 위안과 평화와 용기
  • - 병자가 고해성사로 죄의 용서를 받지 못한 경우 죄의 용서
  • - 영적인 구원에 적합한 경우 건강의 회복
  • -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는 준비
  • 제 3 장 친교에 봉사하는 성사
  • 1533 세례성사, 견진성사, 성체성사는 그리스도교 입문 성사들이다. 이 성사들은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에게 공통되는 소명의 기초가 된다. 그것은 우리를 성덕과 세상 복음화로 부르는 소명이다. 입문 성사들은 천상 고향을 향해 나아가는 이 순례의 생활에서 성령을 따르는 삶에 필요한 은총을 베푼다.
  • 1534 다른 두 성사, 곧 성품성사와 혼인성사는 타인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이 성사들은 개인적인 구원에도 이바지하지만, 그것은 타인들에 대한 봉사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이 성사들은 교회 안에서 특별한 사명을 부여하고, 하느님 백성의 형성에 이바지한다.
  • 1535 이 두 성사를 통하여, 이미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로 모든 신자의 보편 사제직을 위하여 축성된 사람들이(1) 특별한 축성을 받을 수 있다. 곧 성품성사를 받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과 은총으로 교회를 사목하도록”(2)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성되는 것이다. 한편 “그리스도인 부부는 그 신분의 의무와 존엄성을 위하여 특수한 성사로 견고하게 되고, 이를테면 축성된다.”(3)
  • 제6절 성품성사(聖品聖事)
  • 1536 그리스도께서 당신 사도들에게 위임하신 임무는 성품성사를 통하여 세상 마칠 때까지 교회 안에서 계속 수행된다. 그러므로 이 성사는 사도직의 성사이다. 이 성사에는 주교품, 사제품, 부제품의 세 가지 등급이 있다.
  • (그리스도께서 맡기신 사도직의 제정과 사명에 대해서는 제1편 874-896항을 보라. 여기에서는 이 직무가 전수되는 성사만 다룬다.)
  • I. 왜 성품성사라고 부르는가-
  • 1537 품계(品階, ordo)라는 단어는 고대 로마 시대에 조직된 사회 계층, 특히 통치자들의 계층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서품(敍品, ordinatio)은 그 품계에 받아들이는 것을 가리킨다. 교회에는 성경에 근거하여(4) 성전이 예로부터 품계(그리스 말로 taxis)라고 부르는 조직체들이 있었다. 오늘날 교회의 생활과 전례에 현존하는 품계에는 주교품(ordo episcoporum), 사제품(ordo presbyterorum), 부제품(ordo diaconorum)이 있다. 그리고 예비 신자, 동정녀, 부부, 과부 등의 다른 집단들에도 ‘품계’라는 명칭을 붙인다.
  • 1538 이러한 교회 집단들의 하나에 드는 예식을 서품이라고 불렀다. 이 예식은 축성이나 축복 또는 성사의 성격을 지닌 종교적이고 전례적인 행위였다. 오늘날 서품이라는 용어는 주교품, 사제품, 부제품에 받아들이는, 공동체의 단순한 선거나 지명, 위임 또는 임용을 넘어서는 성사적 행위에만 사용된다. 서품은 그리스도께서 오로지 당신에게서 나올 수 있는 “거룩한 권한”을(5) 당신 교회를 통해서 행사하게 하는 성령의 선물을 주기 때문이다. 서품은 축성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교회를 위하여 선별하여 권한을 부여하시기 때문이다. 주교의 안수와 축성 기도는 이 서품의 가시적 표징이다.
  • II. 구원 경륜에서 본 성품성사
  • 구약의 사제직
  • 1539 하느님께서는 친히 선택하신 백성을 “사제들의 나라, 거룩한 민족”(탈출 19,(6) 으로(6) 세우셨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열두 지파 중 하나인 레위 지파를 선택하시어 전례에 봉사하도록 따로 세우셨다.(7) 하느님께서는 친히 그들 몫의 유산이 되어 주셨으며,(8) 고유한 예식으로 구약 사제직의 기원을 거룩하게 하셨다.(9) 그 예식을 통해 사제들은 “사람들 가운데 뽑혀 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하도록 지정된 사람으로서 죄 때문에 예물과 제물을 바친다.”(10)
  • 1540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11) 제사와 기도로 하느님과 이루는 친교를 회복하도록 세워진 이 사제직은 끊임없이 제사를 되풀이해야 했으며, 결정적인 성화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므로(12) 구원을 이룰 수는 없었다. 결정적 성화는 그리스도의 제사만이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 1541 그렇지만 교회 전례는 아론의 사제직과 레위인들의 봉사, 칠십 명의 “장로”를 세운 일(13) 등을 신약의 서품된 직무의 예표로 여긴다. 따라서 라틴 예법의 주교 서품 기도의 감사송에서 교회는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아버지께서는 은총의 말씀으로 교회에 법도를 제정해 주셨나이다. 일찍이 아브라함과 그 의로운 후손들을 예정하시고, 제왕과 사제들을 세우시어, 성소(聖所)를 끊임없이 돌보게 하셨나이다.(14)
  • 1542 사제 서품 때 교회는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
  • 주 성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일찍이 구약 시대에도 주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을 지도자로 세우시어 백성을 다스리고 성화하게 하셨으며, 그들의 업무를 도와주도록 여러 직위의 보조자를 선발하심으로써 신비로이 성직 체계를 마련하셨나이다. 사막에서는 모세의 뜻을 칠십 인의 지혜로운 원로들을 통하여 전달하게 하시고……아론의 전권을 그 자손에게 계승시켜 주셨나이다.(15)
  • 1543 그리고 부제 서품을 위한 축성 기도에서 교회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 전능하신 하느님,……레위의 후손들을 간택하여 옛 장막의 봉사직을 수행하게 하셨듯이, 교회가 크고 훌륭한 새 성전으로 발전하도록, 주님 이름을 섬기는 봉사자의 직무를 세 품계로 세우셨나이다.(16)
  • 그리스도의 유일한 사제직
  • 1544 구약 사제직의 모든 예표는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개자”(1티모 2,5)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다. 그리스도교 전승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사제”(창세 14,18) 멜키체덱을, “거룩하시고 순수하시고 순결하시고 죄인들과 떨어져 계신”(히브 7,26), “멜키체덱의 직분을 따라” 유일한 “대사제로 임명받으신”(히브 5,10; 6,20)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대한 예표로 여긴다. 대사제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심으로써”, 곧 유일한 십자가의 제사로 “거룩해지는 이들을 영구히 완전하게 해 주신 것이다”(히브 10,14).
  • 1545 속량을 위한 그리스도의 제사는 단 한 번에 완결된 유일한 제사이다. 그러나 그 제사는 오늘날 교회의 성찬 제사 안에 현존한다. 그리스도의 유일한 사제직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의 사제직은 그 유일성이 손상되지 않으면서도 직무 사제직을 통해 현존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참사제이시고, 다른 사제들은 그리스도의 대리자일 뿐이다.”(17)
  • 그리스도의 유일한 사제직에 참여하는 두 가지 방식
  • 1546 대사제이시며 유일한 중개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교회가 “한 나라를 이루어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가(18) 되게 하셨다. 믿는 이들의 공동체 전체는 그 자체로 사제적인 공동체이다. 신자들은 각자의 소명에 따라 사제이고 예언자이며 왕이신 그리스도의 사명에 참여함으로써 세례로 받은 사제직을 수행한다. 신자들은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로 “……거룩한 사제직으로 축성되었다.”(19)
  • 1547 주교와 사제들의 직무적이고 교계적인 사제직과 모든 신자들의 보편 사제직은 “본질에서 다르기는 하지만, 서로 밀접히 관련되어 있으며”(20) “각기 특수한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유일한 사제직에 참여하고 있다.”(21)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가- 신자들의 보편 사제직은 세례의 은총과 믿음·희망·사랑의 삶, 성령에 따른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실현되는 반면, 직무 사제직은 보편 사제직을 위하여 봉사하고, 모든 그리스도인의 세례 은총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직무 사제직은 그리스도께서 끊임없이 당신 교회를 건설하고 인도하기 위한 도구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이 사제직은 특수한 성사인 성품성사를 통하여 전수된다.
  •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 1548 신비체의 머리이시고, 양 떼의 목자이시며, 속량을 위한 희생 제사의 대사제이시고, 진리의 스승이신 그리스도 자신이 성품 직무자의 교회적 봉사 안에서 당신 교회에 현존하신다. 교회는 이 사실을 사제가 성품성사에 힘입어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대신하여(in persona Christi Capitis) 행한다는 말로 표현한다.(22)
  • 사제가 참으로 대신하는 것은 바로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사실 성직자는 사제 축성을 받아 지존하신 사제와 같아지므로, 그가 대리하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행할 권한을 누린다.(23)
  •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제직의 근원이시다. 구약의 사제는 그리스도의 형상이었고, 신약의 사제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행하기 때문이다.(24)
  • 1549 성품 직무, 특히 주교와 사제들의 봉사 직무를 통하여,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현존이 신자들의 공동체 안에 가시화된다.(25)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성인의 아름다운 표현에 따르면, 주교는 “아버지의 모상”(typos tou Patros), 곧 하느님 아버지의 살아 있는 모상이다.(26)
  • 1550 성직자 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신다는 이 사실을 마치 성직자가 모든 인간적인 약점, 지배욕, 오류와, 심지어 죄에서까지도 보호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성령의 권능이 성직자들의 모든 행위를 동일하게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성사 집전에서는 이러한 보증이 주어져서 성직자의 죄가 은총의 효과를 막을 수는 없지만, 성직자의 다른 많은 행위들에서는, 그의 인간적인 약점들 때문에 복음에 대한 충성의 표지가 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행위들은 교회의 사도적 풍요로움에 해를 끼칠 수 있다.
  • 1551 이 사제직은 봉사 직무이다. “주님께서 당신 백성의 목자들에게 맡기신 저 임무는 참섬김이다.”(27) 사제직은 온전히 그리스도와 사람들과 관계되는 것이다. 사제직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와 그분의 유일한 사제직에 속한 것이며, 사람들과 교회 공동체를 위하여 제정되었다. 성품성사는 ‘거룩한 권한’, 바로 그리스도의 권한을 나누어 준다. 그러므로 이 권위의 행사는, 사랑으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시고 가장 낮은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28) “주님께서는 당신의 양 떼를 보살피는 것이 당신에 대한 사랑의 증거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29)
  • ……“온 교회의 이름으로”
  • 1552 직무 사제직은 신자들 앞에서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행하는 임무일 뿐 아니라, 교회의 기도를 하느님께 바칠 때,(30) 특히 성찬의 희생 제사를 바칠 때, 온 교회의 이름으로 행하는 임무이다.(31)
  • 1553 “온 교회의 이름으로”라는 말은 사제들이 공동체의 대표자라는 의미가 아니다. 교회의 기도와 봉헌은 그 으뜸이신 그리스도의 기도와 봉헌에서 분리될 수 없다. 교회의 기도와 봉헌은 언제나 당신 교회 안에서, 교회를 통하여 행하시는 그리스도의 예배이다.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온 교회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 되어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고 자신을 봉헌하는 것이다. 이처럼 머리와 지체로 이루어진 신비체 전체가 기도하고 자신을 바친다. 그러므로 신비체 가운데 특별한 봉사를 하는 성직자들은 그리스도의 봉사자일 뿐 아니라 교회의 봉사자라고 불린다. 직무 사제직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행하는 것이므로, 교회를 대신할 수도 있다.
  • III. 성품성사의 세 품계
  • 1554 “하느님께서 제정하신 교회 직무는 이미 옛날부터 주교, 사제, 부제라고 불리는 이들이 여러 품계로 수행하고 있다.”(32) 전례와 교도권과 항구한 교회의 관행에 표현된 가톨릭 교리는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직무적으로 참여하는 데 두 가지 품계가 있음을 인정한다. 그것은 주교품과 사제품이며, 부제품은 그들을 돕고 봉사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에 와서 사제(司祭)라는 용어는 주교와 신부만을 가리키며, 부제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나 가톨릭 교리는 사제직에 참여하는 두 품계(주교품과 사제품)와 봉사의 품계(부제품), 이 세 가지 품계는 모두 ‘서품’이라고 하는 성사적 행위, 곧 성품성사를 통하여 주어진다고 가르친다.
  • 모두들 부제를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존경하되 마치 하느님 아버지의 모상인 주교를 존경하듯 해야 하며, 사제들을 하느님의 원로원으로 마치 사도단처럼 존중해야 합니다. 그들 없이는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33)
  • 주교 서품 - 충만한 성품성사
  • 1555 “교회 안에서 맨 처음부터 수행되어 온 저 여러 봉사 직무 가운데에서, 전통이 증언하는 대로, 처음부터 이어 내려오는 계승을 통하여 주교직에 세워져, 사도의 씨앗에서 나온 포도 가지를 간직하고 있는 이들의 임무가 으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34)
  • 1556 이렇게 중대한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사도들은 그리스도에게서 내려오시는 성령의 특별한 강림으로 충만해졌다. 사도들은 자기 협조자들에게도 안수를 통하여 영적 선물을 전해 주었으며, 그것은 우리에게까지 주교 축성 안에서 전해 내려온다.”(35)
  • 1557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주교 축성으로 충만한 성품성사가 수여된다고 가르친다. 이를 교회의 전례 관습과 교부들은 분명히 대사제직, 거룩한 봉사 직무의 정점이라고 하였다.”(36)
  • 1558 “주교 축성은 거룩하게 하는 임무와 함께 가르치는 임무와 다스리는 임무도 부여한다.……안수와 축성의 말씀으로 성령의 은총이 부여되고, 거룩한 인호가 새겨져, 주교들은 탁월하고 가시적인 방법으로 바로 스승이시고 목자이시며 대사제이신 그리스도의 역할을 하고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행동하는 것이다.”(37) “그리하여 주교들은 자기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신앙의 진정한 참스승, 대사제, 목자가 되었다.”(38)
  • 1559 주교는 “누구나 성사적 축성의 힘으로 또 주교단의 단장과 그 단원들과 이루는 교계적 친교로 주교단의 구성원이 된다.”(39) 주교단의 단체적 성격과 본질은 무엇보다도 새로 선임된 주교를 축성하는 예식에 참여하도록 여러 주교들을 초청하는 옛 풍습을 통하여 드러난다.(40) 오늘날 주교가 합법적으로 서품되기 위해서는 교황의 특별한 개입이 필요한데, 이는 교황이 하나인 교회 안에서 개별 교회들의 일치에 대한 최상의 가시적 유대이며 그 교회들의 자유에 대한 보증인이기 때문이다.
  • 1560 주교는 누구나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자신에게 맡겨진 개별 교회의 사목을 책임진다. 그러면서 동시에 주교단의 모든 형제 주교들과 더불어 교회 전체에 대해서도 공동 관심을 가진다. “주교는 본래 저마다 자기에게 맡겨진 양 떼만을 보살피는 목자이지만, 하느님께서 제정한 사도들의 합법적 후계자로서 다른 주교들과 함께 교회의 사도적 임무에 대한 연대 책임도 지게 된다.”(41)
  • 1561 위에서 말한 모든 것들은, 주교가 거행하는 성찬례가 왜 특별한 의미를 갖는지 설명해 준다. 이는 착한 목자이시며 당신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볼 수 있는 대리자인 주교의 주재 아래 제대 주위에 모인 교회를 나타내는 것이다.(42)
  • 주교의 협력자인 사제의 서품
  • 1562 “성부께서 축성하시어 세상에 파견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사도들을 통하여 그 후계자들, 곧 주교들을 당신의 축성과 사명에 참여하게 하셨다. 주교들은 자기 봉사직의 임무를 여러 단계로 교회 안의 여러 아랫사람들에게 합법적으로 전수해 주었다.”(43) “주교들의 봉사 임무는 그 아래 사제들에게 위임되었다. 이로써 사제들은 그리스도께 받은 사도적 사명을 바르게 수행하기 위하여 주교품의 협력자들이 된다.”(44)
  • 1563 “사제 직무는 주교품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바로 그리스도께서 당신 몸을 세우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다스리시는 권위에 참여한다. 그러므로 사제들의 사제직은 그리스도교 입문 성사들을 전제하지만 개별 성사로 수여된다. 이 성사로써 사제는 성령의 도유로 특별한 인호가 새겨지고 사제이신 그리스도와 동화되어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행동할 수 있다.”(45)
  • 1564 “사제들은 비록 대사제직의 정점에는 이르지 못하고 권한의 행사에서 주교들에게 의존하고 있지만, 사제의 영예로는 주교들과 함께 결합되어 있으며, 성품성사의 힘으로 영원한 대사제이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따라(46) 신약의 참사제로서 복음을 선포하고 신자들을 사목하며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도록 축성된다.”(47)
  • 1565 성품성사를 통하여 사제는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맡기신 선교 사명의 세계적 차원에 참여한다. 그들이 서품으로 받은 영적 선물은 유한하고 제한된 사명이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사도 1,8) 광대하고 보편적인 구원 사명”(48) 을 위하여 그들을 준비시키고, “어디서나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갖추게”(49) 한다.
  • 1566 “사제들은 성찬의 예배 또는 집회에서 자기의 거룩한 임무를 최대한으로 수행한다. 거기에서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행동하고, 그리스도의 신비를 선포하며, 신자들의 예물을 그들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희생 제물과 결합시키고, 신약의 유일한 희생 제사를, 곧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깨끗한 제물로 성부께 단 한 번 바치신 희생 제사를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미사의 희생 제사 안에서 재현하고 봉헌한다.”(50) 이 독특한 희생 제사에서 그들은 모든 사제 직무를 수행할 힘을 얻는다.(51)
  • 1567 “사제들은 주교 품계에 섭리된 협력자들이며 주교 품계에 도움이 되는 기관으로서 하느님의 백성에게 봉사하도록 부름 받아, 맡겨진 직무는 다르지만, 주교와 더불어 한 사제단을 구성한다. 주교를 신뢰하며 넓은 마음으로 주교와 결합되어 있는 사제들은 각 지역 신자들의 회중 안에 주교를 어느 모로든 현존하게 하며, 주교의 임무와 관심사를 일부 맡아 일상 사목을 수행한다.”(52) 사제들은 오로지 주교에게 속하고 주교와 일치를 이룰 때에만 그들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다. 사제들이 서품 때 주교에게 하는 순명의 서약과, 서품 예식이 끝날 때 주교가 사제에게 하는 평화의 인사는, 주교가 그들을 협력자, 아들, 형제, 벗으로 여기는 반면, 사제들은 주교를 사랑하고 순명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 1568 “사제들은 서품을 통하여 사제직의 품계에 세워졌으므로, 모든 사제는 서로 친밀한 성사적 형제애로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특별히 자기 주교 아래에서 한 교구에 봉사하도록 배속된 사제들은 그 교구 안에서 하나의 사제단을 형성한다.”(53) 서품식에서 주교 다음에 사제들도 안수를 하는 관습은 사제단의 일치를 나타내는 전례적 표현이다.
  • 부제 서품 - “봉사를 위하여”
  • 1569 “교계의 더 낮은 품계에 부제들이 있다. 그들은 ‘사제직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봉사 직무를 위하여’ 안수를 받는다.”(54) 부제 서품 때에는 주교만 안수하는데, 이는 부제가 자신의 ‘봉사’ 임무에서 특별히 주교에게 속해 있음을 의미한다.(55)
  • 1570 부제들은 그리스도의 사명과 은총에 특별한 방식으로 참여한다.(56) 성품성사로 부제들에게 인호가 새겨지는데, 이것은 아무도 없앨 수 없으며, 이 인호는 부제들을 모든 사람들의 ‘봉사자’(diaconus), 곧 종이 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게 한다.(57) 부제들의 임무는 하느님 신비의 거행, 특히 성찬례 거행 때에 주교와 사제를 보좌하고, 성체를 분배하고, 혼인을 주례하여 축복해 주고, 복음을 선포하고, 강론을 하며, 장례식을 거행하고, 여러 가지 자선 사업에 헌신하는 것이다.(58)
  • 1571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래 라틴 교회는 “교계의 고유하고 영구적인 품계로서”(59) 부제직을 부활시켰다. 한편 동방 교회에서는 부제직을 계속 유지해 왔다. 기혼 남자들에게도 줄 수 있는 이 종신 부제직은 교회의 사명 수행에 큰 보탬이 된다. 실제로 전례적, 사목적 삶이나, 사회사업이나 자선 사업에서 사실상 부제의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을 “사도 전통에 따라 안수를 통하여 힘을 북돋아 주고 제단에 더욱 가까이 결합시켜, 부제직의 성사 은총을 통하여 자기 직무를 더욱 효과적으로 이행하게 하도록 하는 것이 유익하다.”(60)
  • IV. 성품성사의 거행
  • 1572 주교, 사제, 부제의 서품식이 개별 교회에서 갖는 중요성 때문에 가능한 한 많은 신자가 참석해야 한다. 서품식은 되도록 주일에 주교좌 성당에서 상황에 맞게 성대하게 거행되어야 한다. 주교, 사제, 부제의 이 세 품계의 서품식은 같은 순서로 진행되며, 성찬례 중에 거행된다.
  • 1573 세 가지 품계의 성품성사에 공통된 핵심 예식은, 주교가 서품될 사람의 머리에 안수하고, 그 봉사 직무에 적합한 성령의 은혜를 내려 주시도록 하느님께 청원하는 고유의 축성 기도를 하는 것이다.(61)
  • 1574 모든 성사들과 마찬가지로, 성품성사의 거행에도 전후에 부속 예식들이 있다. 여러 가지 다른 전례적 전통에 따라 매우 다양하기는 하지만, 이러한 부속 예식들은 다 함께 이 성사의 은총이 지닌 여러 측면들을 표현하고 있다. 가령 라틴 예법에서 개회식 ─ 서품 후보자의 소개와 선발, 집전 주교의 훈화, 후보자에 대한 질문, 성인 호칭 기도 ─ 은 서품 후보자의 선발이 교회의 관례에 따라 합당하게 이루어졌음을 나타내며, 엄숙한 축성식을 준비하는 것이다. 축성 후에는 몇 가지 예식으로 방금 이루어진 신비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끝마친다. 주교와 사제의 경우에는 도유 예식이 있는데, 이것은 그들의 직무를 풍요롭게 하는 성령의 특별한 도유의 표징이다. 그리고 주교에게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도적 사명과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에 대한 충성 그리고 주님의 양 떼를 사목하는 임무의 표시로 복음서와 반지, 관, 지팡이를 수여하고, 사제에게는 그가 하느님께 봉헌하게 될 거룩한 백성의 제물인(62) 성반과 성작을 수여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사명을 받은 부제에게는 복음서를 수여한다.
  • V. 누가 성품성사를 줄 수 있는가-
  • 1575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을 선택하시어 당신의 사명과 권한에 참여하게 하셨다. 성부 오른편에 오르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양 떼를 버리지 않으시고, 사도들을 통하여 끊임없이 보호하시며, 오늘도 당신의 일을 계속하는 이 목자들을 통하여 이끌고 계신다.(63) 그러므로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목자로 “세워 주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다.(64) 그리스도께서는 주교들을 통하여 계속 활동하신다.(65)
  • 1576 성품성사는 사도적 직무를 위한 성사이므로 “영적 선물”(66) 과 “사도적 씨앗”(67) 을 전승하는 것은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들의 몫이다. 유효하게 서품된, 곧 사도 계승을 한 주교는 세 가지 품계의 성품성사를 유효하게 줄 수 있다.(68)
  • VI. 누가 이 성사를 받을 수 있는가-
  • 1577 “세례 받은 남자만이 거룩한 서품을 유효하게 받는다.”(69) 주 예수님께서는 남자들을 택하시어 열두 명의 사도단을 만드셨고,(70) 사도들도 자신들의 뒤를 이어 그 임무를 수행할 협력자들을 선택할 때(71) 이와 같이 하였다.(72) 사제들이 사제직 안에서 결합되어 있는 주교단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열두 명의 사도단을 현존하도록 한다. 교회는 바로 주님의 이 선택에 매여 있음을 스스로 인식한다. 따라서 여성의 서품은 불가능하다.(73)
  • 1578 누구도 성품성사를 받을 권리는 없다. 사실 어느 누구도 스스로 이 임무를 맡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 임무로 부르시는 것이다.(74) 서품 직무로 부르시는 표징들을 깨달았다고 믿는 이는, 자신이 바라는 바를 겸손되이 교회의 결정에 맡겨야 한다. 어떤 사람을 성품을 받도록 부르는 책임과 권리는 교회가 가지고 있다. 모든 은총이 그렇듯이 이 성사도 다만 분에 넘치는 선물로 받는 것이다.
  • 1579 종신 부제들을 제외하고, 라틴 교회의 모든 서품 성직자는 원칙적으로 “하늘 나라 때문에”(마태 19,12) 독신 생활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독신 남성 신자들 가운데서 선발한다. 온전히 주님과 “주님의 일”에(75) 헌신하도록 부름 받은 이들은 자신을 전적으로 하느님과 사람들에게 바친다. 독신 생활은 교회의 성직자가 봉사하도록 축성된 새로운 삶의 표징이다.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인 독신 생활은 하느님 나라를 찬란하게 선포하는 것이다.(76)
  • 1580 동방 교회들은 오래전부터 이와는 다른 규칙을 지켜 오고 있다. 주교들은 독신자들 중에서만 선발되지만, 기혼 남자들도 부제품과 사제품을 받을 수 있다. 이러한 관습은 예로부터 정당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 사제들은 공동체 안에서 효과적으로 봉사 직무를 수행하고 있다.(77) 한편 동방 교회에서도 사제들의 독신 생활은 매우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자유로이 독신 생활을 선택한 사제들도 많다. 동방 교회에서도 서방 교회와 마찬가지로 이미 성품성사를 받은 사람은 혼인할 수 없다.
  • VII. 성품성사의 효과
  • 지워지지 않는 인호
  • 1581 성품성사는 성령의 특별한 은총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하여 그분의 도구 역할을 하도록 그리스도를 닮게 한다. 주교와 신부는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행동할 사명과 권한을 그분(그리스도)에게서 부여받는다. 그러나 부제들은 전례와 말씀과 사랑의 봉사로 하느님 백성을 돌보는 힘을 받는다.
  • 1582 세례나 견진의 경우와 같이 그리스도의 직분에 대한 이 참여도 한 번에 모두 주어진다. 성품성사도 지워지지 않는 영적 인호를 새겨 준다. 그러므로 이는 두 번 다시 받을 수 없으며 한시적으로 줄 수도 없다.(78)
  • 1583 물론 유효하게 서품된 사람이 중대한 이유로, 서품에 따르는 의무와 직책이 면제되거나 또는 그 행사를 금지당할 수도 있지만(79) 엄밀한 의미에서 평신도가 될 수는 없다.(80) 서품으로 새겨진 인호는 영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서품 때 받은 소명과 임무는 그에게 영원한 표시를 남기는 것이다.
  • 1584 결국 서품 성직자를 통하여 활동하고 구원을 이루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므로, 성직자에게 결함이 있다고 해도 그리스도의 활동이 방해받지는 않는다.(81)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힘주어 말한다.
  • 교만한 성직자는 마귀와 같은 축에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그리스도의 선물이 훼손되지는 않습니다. 그 성직자를 통하여 흘러나오는 것은 그 깨끗함을 잃지 않고, 그를 거쳐 오는 것은 맑으며, 비옥한 땅에까지 다다릅니다.……과연 성사의 영적인 힘은 빛과 같아서, 조명을 받을 사람들은 깨끗한 빛을 받으며, 더러운 사람들을 거쳐 오더라도 그 빛은 더러워지지 않습니다.(82)
  • 성령의 은총
  • 1585 성품성사에 고유한 성령의 은총은 사제이고 스승이며 목자이신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이 되는 것이며, 성품을 받은 사람은 이 은총으로 그리스도의 봉사자가 된다.
  • 1586 성품성사로 주교에게 주어지는 은총은 특히 ‘굳셈’이다(라틴 예법의 주교 축성 기도는 ‘다스리시는 성령’ 또는 지도자를 세우시는 성령께서 내리시기를 청한다.(83) ). 이는 모든 사람에게 무상으로 베푸는 사랑과, 가난한 사람들, 병자들, 빈민들을 위한 특별한 사랑으로 자기가 맡은 교회를 아버지와 목자로서 힘과 슬기로 지도하고 보호할 굳셈의 은총이다.(84) 이 은총은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 양 떼의 모범이 되도록 주교를 이끌며, 성체 안에서 사제이시고 희생 제물이신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양 떼에 앞장서 성화의 길로 나아가게 하고, 양들을 위하여 주저 없이 자신의 목숨을 바치게 한다.
  • 사람들의 마음을 아시는 하느님 아버지, 주교직을 위하여 선택하신 당신의 종이 당신의 거룩한 양 떼를 돌보고 밤낮으로 당신을 섬겨 당신 앞에서 대사제직을 나무랄 데 없이 수행하게 하시며, 당신의 인자하심을 청하게 하시고, 거룩한 당신 교회의 예물을 바치게 하소서. 대사제직의 은총을 주시는 성령을 통하여 당신의 명령대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지니게 하시고, 당신의 명령에 따라 직무를 분배하고, 당신께서 사도들에게 주신 권한에 따라 모든 묶인 것을 풀게 하소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께 향기로운 예물을 바치는 그의 온유함과 깨끗한 마음이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85)
  • 1587 사제 서품으로 받는 성령의 선물은 비잔틴 전례 고유의 기도에 표현되어 있다. 주교는 안수하며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
  • 주님, 당신께서 사제직의 반열에 올려 주신 이 사람에게 성령의 선물을 가득 채워 주시어, 나무랄 데 없이 당신 제단에 서게 하시고, 당신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당신 진리의 말씀에 대한 직무를 완수하게 하시고, 영적인 예물과 제물을 당신께 봉헌하고, 재생의 목욕으로 당신 백성을 새롭게 할 자격을 지니게 하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외아들이시며 위대한 하느님이시고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 그리스도를 맞이하러 나아가, 당신의 무한한 자비로, 자기 품계의 본분을 충실히 수행한 상을 받게 하소서.(86)
  • 1588 부제들은 “성사의 은총으로 힘을 얻고, 주교와 그의 사제단과 친교를 이루어, 전례와 말씀과 사랑의 봉사로 하느님 백성을 섬기고 있다.”(87)
  • 1589 사제직의 은총과 그 임무의 위대함을 생각하여 거룩한 교회 학자들은, 성사로써 그들을 성직자로 세우시는 주님과 온 삶을 맞추어 나가도록 끊임없이 쇄신하여야 할 소명을 절감하였다. 그러므로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 성인은 사제가 된 지 얼마 안 되어 이렇게 외쳤다.
  • 남을 깨끗하게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깨끗이 해야 하며, 가르치기 위해서는 배워야 하고, 비추기 위해서는 빛이 되어야 하며, 남을 하느님께 가까이 이끌기 위해서는 자신이 하느님께 가까이 가야 하고, 거룩하게 하고, 인도하고, 지혜롭게 충고하기 위하여 자신이 먼저 거룩해져야 합니다.(88) 나는 우리가 누구의 봉사자인지, 우리가 어느 수준에 있는지, 우리가 어떤 분을 향해 가고 있는지를 압니다. 나는 하느님의 존엄과 인간의 나약함을 알지만 인간의 힘도 압니다.(89)
  • (사제는 누구입니까- 그는) 진리의 옹호자이며, 천사들과 함께 일어서고, 대천사들과 함께 찬양하며, 하늘의 제대에 희생 제물이 오르게 하고,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하며, 인간의 면모를 새롭게 하여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내고, 저 높은 곳을 위하여 일합니다. 그리고 가장 위대한 점을 감히 말하자면, 하느님이 될 것이고 다른 이를 하느님이 되게 할 것입니다.(90)
  • 아르스의 본당 신부도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에서 구속 사업을 계속하는 것은 사제입니다.……만일 우리가 이 지상의 사제를 잘 이해한다면 두려움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죽을 것입니다.……사제직은 예수 성심의 사랑입니다.”(91)
  • 간추림
  • 1590 바오로 사도는 제자 티모테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대에게 상기시킵니다.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2티모 1,6). “어떤 사람이 감독 직분을 맡고 싶어 한다면 훌륭한 직무를 바라는 것입니다”(1티모 3,1). 티토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그대를 크레타에 남겨 둔 까닭은, 내가 그대에게 지시한 대로 남은 일들을 정리하고 고을마다 원로들을 임명하라는 것이었습니다”(티토 1,5).
  • 1591 교회 전체가 사제적 백성이다. 세례로 말미암아 모든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한다. 이러한 참여를 ‘신자들의 보편 사제직’이라고 한다. 이 사제직을 토대로 이 사제직에 봉사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사명에 달리 참여할 수 있는데, 이것이 성품성사로 수여되는 봉사 직무이다. 이 임무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공동체 안에서 봉사하는 것이다.
  • 1592 직무 사제직은 신자들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받은 거룩한 권한 때문에 신자들의 보편 사제직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성품 교역자들은 가르치고(munus docendi), 하느님께 예배드리며(munus liturgicum), 사목적 다스림(munus regendi)으로써 하느님 백성에게 봉사한다.
  • 1593 성품 직무는 처음부터 주교, 사제, 부제의 세 품계로 수여되고 행사되었다. 서품으로 수여되는 봉사 직무는 교회의 유기적 구조에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주교와 사제와 부제 없이는 교회에 대해 말할 수 없다.(92)
  • 1594 주교는 충만한 성품성사를 받는다. 그로써 주교는 주교단에 들게 되고, 그에게 맡겨진 개별 교회의 볼 수 있는 으뜸이 된다. 주교는 사도들의 후계자이며 주교단의 일원으로서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인 교황의 권위 아래, 사도적 책임과 교회 전체의 사명에 참여한다.
  • 1595 사제는 사제 품위에서는 주교와 일치하고, 사목직의 수행에서는 주교들에게 속해 있다. 사제는 주교의 성실한 협력자가 되어야 한다. 주교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사제단은 주교와 더불어 개별 교회에 대해 책임을 진다. 사제는 주교에게서 본당 공동체의 직무나 일정한 교회 임무를 부여받는다.
  • 1596 부제는 교회의 봉사 임무를 위하여 서품되는 성직자이다. 그는 직무 사제직을 받지 않지만, 서품으로 말씀과 하느님 예배, 사목적인 지도, 자선 활동의 중요한 봉사 임무를 받는다. 그는 주교의 사목적 권위 아래서 이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 1597 성품성사는 안수에 이은 장엄한 축성 기도로 베풀어진다. 이 기도는 서품 받는 자에게 그 봉사 직무에 요구되는 성령의 은총을 내려 주시도록 하느님께 청하는 것이다. 서품은 지워지지 않는 성사의 인호를 새겨 준다.
  • 1598 교회는 봉사 직무 수행을 위하여 적합하다고 정식으로 인정된 세례 받은 남자들에게만 성품성사를 준다. 성품성사를 받을 사람을 결정하는 책임과 권리는 교회의 권위에 있다.
  • 1599 서방 교회에서는 원칙적으로, 하느님 나라와 사람들에게 기꺼이 봉사하려고 자유로이 독신 생활을 하겠다는 자세가 갖추어지고 그 의지를 공적으로 표명하는 후보자들에게만 성품성사를 준다.
  • 1600 세 가지 품계의 성품성사를 주는 사람은 주교다.
  • 제7절 혼인성사(婚姻聖事)
  • 1601 “혼인 서약은, 이로써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 그 본연의 성질상 부부의 선익과 자녀의 출산 및 교육을 지향하는 평생 공동 운명체를 이루는 것인바, 주 그리스도에 의하여 영세자들 사이에서는 성사의 품위로 올려졌다.”(93)
  • I. 하느님의 계획과 혼인
  • 1602 성경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남자와 여자의 창조로 시작하여(94) “어린양의 혼인 잔치”(묵시 19,9)에(95) 대한 환시로 끝맺는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혼인과 그 “신비”, 혼인의 제정과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의미, 그 기원과 목적, 구원의 역사를 통한 혼인의 다양한 실현, 죄로 생긴 혼인의 어려움과, 그리스도와 교회의 새로운 계약을 통하여 “주님 안에서”(1코린 7,39) 이루어진 혼인의 새로운 의미에 대해 말하고 있다.(96)
  • 창조 질서와 혼인
  • 1603 “창조주께서 제정하시고 당신의 법칙으로 안배하신, 생명과 사랑의 내밀한 부부 공동체는 인격적인 합의로 맺은 결코 철회할 수 없는 계약으로 세워진다.……하느님께서 바로 여러 가지 선과 목적을 지닌 혼인의 제정자이시다.”(97) 혼인의 소명은 창조주의 손으로 지으신 남자와 여자의 본성에 새겨져 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여러 가지 문화와 사회 구조와 사고방식으로 수많은 변화를 겪었다 하더라도, 혼인은 단순히 인간적인 제도가 아니다. 그 다양성 때문에 혼인의 공통적이고 항구 불변한 특성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제도의 존엄성이 어디에서나 똑같이 명백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98) 모든 문화는 혼인 결합의 숭고함을 인정한다. “개인의 행복, 일반 사회와 그리스도교 사회의 안녕은 부부 공동체와 가정 공동체의 행복한 상태에 직결되어 있다.”(99)
  • 1604 사랑으로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또한 사랑에로 그를 부르셨다. 사랑은 모든 인간이 타고난 근본 소명이다. 인간은 바로 “사랑이신”(1요한 4,8.16) 하느님과 닮은 모습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100)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 남녀 사이의 사랑이 당신께서 사람을 사랑하시는 절대적이고 변함없는 사랑의 표상이 되게 하신다. 이 사랑은 창조주께서 보시기에 좋은, 매우 좋은 것이다.(101) 그리고 하느님께서 축복하시는 이 사랑은 풍성한 열매를 맺고, 창조된 세상을 지키는 공동 노력으로 실현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창세 1,28).
  • 1605 성경은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창세 2,18).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그의 살에서 나온 살”(102) 곧 그와 동등하며 아주 가까운 “협력자”로(103) 여자를 주셨다. 이처럼 여자는 우리의 도움이신(104) 하느님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창세 2,24). 주님께서는 친히 “처음부터” 창조주의 계획이 무엇이었는지를 환기시키심으로써,(105) 이것이 그들 두 생명의 확고한 결합을 의미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다.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마태 19,6).
  • 죄의 지배 아래 놓인 혼인
  • 1606 사람은 누구나 자기 주변에서 또 자신 안에서 악을 체험한다. 이러한 체험은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서도 겪는 것이다. 예로부터 어느 시대에나 부부의 일치는 불화와 지배욕, 부정과 질투, 증오와 결별에까지 이를 수 있는 갈등의 위협을 받아 왔다. 이러한 혼란은 문화와 시대와 개인에 따라 더하거나 덜할 수 있고, 쉽게 극복되거나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혼란은 보편적인 것으로 보인다.
  • 1607 신앙에 따르면, 우리가 고통스럽게 확인하는 이 혼란은 남녀의 본성에서 오는 것도, 그들 관계의 본성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죄에서 오는 것이다. 하느님과 단절된 원죄의 첫 번째 결과는 부부의 원초적 친교가 단절된 것이다. 서로 비난함으로써 그들의 관계는 왜곡되었고,(106) 창조주께서 주신 본래의 선물인 상호 간의 매력은(107) 지배와 탐욕의 관계로 변하고,(108)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땅을 지배하라는,(109) 남편과 아내의 아름다운 소명에는 출산의 고통과 생계유지라는 고생이 부과되었다.(110)
  • 1608 창조 질서는 비록 몹시 손상되기는 했어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죄의 상처를 치유하려면 부부에게 하느님 은총의 도움이 필요하다. 무한히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이 은총의 도움을 한 번도 거절하지 않으셨다.(111) 이 도움이 없으면 부부는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그들을 창조하신 목적인 두 인격의 일치를 실현하지 못한다.
  • 율법으로 가르치던 시대의 혼인
  • 1609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죄지은 인간을 버리지 않으셨다. 죄에 따르는 벌인 “아기 낳는 고통”과(112) “얼굴에 땀을 흘려야 하는”(창세 3,19) 일은 죄의 피해를 줄이는 구제책이기도 하다. 타락 이후 혼인은 자기 폐쇄와 이기주의와 쾌락 추구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며, 타인에게 마음을 열고, 서로 돕고, 자기를 내어 주는 데 도움을 준다.
  • 1610 혼인의 단일성과 불가 해소성에 대한 윤리 의식은 옛 율법의 가르침에 따라 발달하였다. 성조들과 왕들의 일부다처제가 아직 명백히 배척되지는 않지만, 모세가 받은 율법은, 비록 주님의 말씀대로 사람의 “마음이 굳을 대로 굳어진” 흔적이 있고 또 그 때문에 모세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긴 했어도, 남편의 독단적 지배에서 아내를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다.(113)
  • 1611 예언자들은 이스라엘과 맺으신 하느님의 계약을 독점적이고 충실한 부부 사랑의 표상이라 보고(114) 혼인의 단일성과 불가 해소성을 깊이 이해하도록, 선택된 백성의 의식을 준비시켰다.(115) 룻기와 토빗기는 혼인과 부부의 신의와 애정이라는 고상한 의식에 대해 감동적인 증언을 담고 있다. 성전은, 아가에서 발견되는 “죽음처럼 강한” 사랑, “큰 물도 사랑을 끌 수 없고 강물도 휩쓸어 갈 수 없는”(아가 8,6-7) 사랑이라는 표현을 하느님의 사랑을 반영하는 인간 사랑의 독특한 표현으로 언제나 여겨 왔다.
  • 주님 안에서 맺는 혼인
  • 1612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 이스라엘과 맺으신 혼인 계약은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이 새로운 계약에서는,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어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으심으로써, 어떤 의미에서 당신이 구원하신 온 인류를 당신 자신과 결합시키셨으며,(116) 이로써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117) 준비하셨다.
  • 1613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혼인 잔치에서 ─ 당신 어머니의 청을 들어 ─ 첫 번째 기적을 행하신다.(118) 교회는 예수님께서 카나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신 일을 매우 중시한다. 교회는 이를 혼인의 선익에 대한 확인으로 여기며, 그때부터 혼인이 그리스도 현존의 유효한 표징이 될 것이라는 예고로 본다.
  • 1614 예수님께서는 전도하시는 동안 창조주께서 처음부터 원하신 부부 결합의 본래 의미를 분명하게 가르치셨다. 모세가 아내를 버려도 된다고 허락한 것은 사람들의 마음이 굳을 대로 굳어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양보한 것이었다.(119) 부부의 혼인 유대는 해소될 수 없다. 이는 하느님께서 친히 맺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 19,6).
  • 1615 혼인 유대의 불가 해소성에 대한 이 분명한 강조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할 수도, 또 실현할 수 없는 요구로 보일 수도 있었다.(120)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부들에게 모세의 율법보다 더 무겁고 감당하기에 벅찬 짐을 지우신 것은 아니었다.(121) 죄로 어지러워진 원래의 창조 질서를 회복시키려고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나라’라고 하는 새로운 차원에서 혼인 생활을 하도록 친히 힘과 은총을 주신다. 그리스도를 따르고, 자신을 끊어 버리며, 자신의 십자가를 짐으로써(122) 부부들은 그리스도의 도움으로 혼인의 본래 의미를 “파악하고”,(123) 이를 생활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 혼인의 이러한 은총은 모든 그리스도인 생활의 원천인 십자가의 열매이다.
  • 1616 이에 대하여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남편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교회를 말씀과 더불어 물로 씻어 깨끗하게 하셔서 거룩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에페 5,25-26). 그리고 다시 이렇게 덧붙인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됩니다.’ 이는 큰 신비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에페 5,31-32).
  • 1617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에는 부부애의 표상인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이 깃들어 있다.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세례가 이미 혼인 신비이다. 말하자면 세례는 성찬이라는 혼인 잔치의 음식을 먹기 전에 행하는 혼인을 위한 목욕인(124) 셈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혼인은 그리스도와 교회가 맺는 계약의 효과적인 표징 곧 성사가 된다. 혼인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결합에서 흘러나오는 은총을 뜻하고 또 그 은총을 나누어 주기 때문에, 세례 받은 사람들의 혼인은 신약의 참성사가 된다.(125)
  • 하늘 나라를 위한 동정
  • 1618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이시다. 그리스도와 맺는 유대는 가정이나 사회의 다른 모든 유대보다 우선한다.(126) 교회는 초기부터 어린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르고,(127) 주님의 일에 마음을 쓰며, 그분의 마음에 들고자 애쓰고,(128) 오시는 신랑을 맞으러 나가기 위하여(129) 혼인의 큰 선익을 포기한 남녀들이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모범이 되신 이러한 생활양식으로 당신을 따르도록 어떤 사람들에게 권고하셨다.
  • 사실 모태에서부터 고자로 태어난 이들도 있고, 사람들 손에 고자가 된 이들도 있으며, 하늘 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 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마태 19,12).
  • 1619 하늘 나라를 위한 동정은 세례의 은총에서 꽃피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와 맺는 유대의 우월성과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열렬한 기다림을 나타내는 강력한 표징이며, 또 혼인이 사라져 가는 현세의 실재임을(130) 상기시켜 주는 표징이다.
  • 1620 혼인성사와 하느님 나라를 위한 동정은 다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 두 가지 삶에 의미를 주시고, 당신 뜻에 맞게 살아가도록 필요한 은총을 주신다.(131) 하느님 나라를 위한 동정에 대한 평가와(132) 혼인의 그리스도교적 의미는 서로 분리될 수 없으며 상호 보완한다.
  • 혼인을 비하하는 것은 그만큼 동정의 영광을 감소시키는 것이며, 혼인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동정이 지닌 가치를 드높이는 것입니다.……요컨대 악과 비교해서만 선으로 보이게 되는 것은 참된 선이 될 수 없으니, 명백한 선보다 한층 더 나은 것이 참된 선이기 때문입니다.(133)
  • II. 혼인 예식의 거행
  • 1621 라틴 예법에서 두 가톨릭 신자 사이의 혼인은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와 모든 성사의 관련성을 고려하여 원칙적으로 미사성제 중에 거행한다.(134) 성찬례는 새 계약의 기념제인데,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목숨을 바쳐 사랑하신 신부 곧 교회와 새 계약으로 영원히 결합하셨다.(135) 그러므로 부부는 생명을 바쳐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 주겠다는 동의를, 성찬의 희생 제사 안에서 실현되는 교회를 위한 그리스도의 봉헌과 결합시킴으로써 확정하고, 영성체로 같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심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한 몸”을(136) 이루는 것 또한 마땅하다.
  • 1622 “혼인의 전례적 거행은……성화하는 성사적 행동인 까닭에, 당연히 그 자체로 유효하고 존엄하며, 열매를 맺어야 한다.”(137) 그러므로 신랑 신부는 혼인을 거행하기 위한 준비로 고해성사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
  • 1623 라틴 전통에 따르면 신랑 신부가 그리스도의 은총의 집전자로서, 교회 앞에서 혼인 합의를 표명함으로써 서로 혼인성사를 준다. 동방 교회의 전통에서는 사제 ─ 주교 또는 신부 ─ 가 신랑 신부의 상호 합의에 대한 증인이 된다.(138) 그러나 성사의 유효성을 위하여는 사제의 축복이 필요하다.(139)
  • 1624 여러 전례 전통들은 하느님께 은총을 청하는 축복 기도와 성령 청원 기도, 새 부부 특히 신부를 위한 축복 기도를 풍부하게 담고 있다. 혼인성사의 성령 청원 기도에서 신랑 신부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의 친교이신 성령을 받는다.(140) 성령께서는 친히 부부 계약의 인장이 되어 주시고, 부부의 사랑을 끊임없이 길어 내는 샘이 되시며, 부부의 신의를 늘 새롭게 하는 힘이 되어 주신다.
  • III. 혼인 합의
  • 1625 혼인 계약의 주인공은, 혼인 계약을 맺을 자유가 있으며, 자유롭게 자신들의 합의를 표명하는 세례 받은 남자와 여자이다. ‘자유가 있다’는 말은,
  • - 강요를 당하지 않고,
  • - 그 혼인이 자연법이나 교회법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 1626 교회는 신랑 신부의 합의 교환을 “혼인을 성립시키는”(141) 불가결한 요소로 간주한다. 합의가 없으면 혼인이 성립되지 않는다.
  • 1627 합의는 “부부가 자기 자신을 서로 주고받는 인간 행위”(142) 로서 “나는 당신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나는 당신을 남편으로 맞이합니다.”(143) 하고 선언함으로써 성립된다. 신랑 신부를 결합시키는 이 합의는 두 사람이 “한 몸”을 이룸으로써 완결된다.(144)
  • 1628 합의는 계약 당사자들의 의지 행위로서, 외부의 폭력이나 심한 공포로 속박을 받아서는 안 된다.(145) 어떠한 인간 권력도 혼인 합의를 대체할 수 없다.(146) 이러한 자유가 없다면 혼인은 무효다.
  • 1629 이러한 이유로 (또는 혼인을 완전히 무효화하고 성립되지 못하게 가로막는 다른 이유들 때문에(147) ) 교회는 관할 교회 법원을 통하여 상황을 조사한 후, ‘혼인 무효’, 곧 혼인이 성립된 일이 없다고 선포할 수 있다. 이 경우 당사자들은 자유롭게 혼인할 수 있다. 단 전의 결합에서 생긴 자연적 의무는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148)
  • 1630 혼인 예식을 주례하는 사제 (또는 부제)는 교회의 이름으로 신랑 신부의 합의를 받아들이고 교회의 축복을 베푼다. 교회의 성직자가 (또 증인이) 입회하는 것은 혼인이 교회적 행위라는 것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 1631 그렇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교회는 신자들에게 교회적 형식에 따라 혼인할 것을 요구한다.(149)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이유들은 일관되게 교회의 결정을 설명해 준다.
  • - 성사적인 혼인은 전례 행위이다. 따라서 혼인은 교회의 공적인 전례로 거행되는 것이 마땅하다.
  • - 혼인은 교회의 품계 안으로 들어가게 하며, 부부 사이와 자녀에 대하여 교회 내의 권리와 의무를 성립시킨다.
  • - 혼인은 교회 내의 생활 신분이므로, 혼인에 대한 확실성이 있어야 한다(그러므로 증인을 세울 의무가 따른다).
  • - 혼인 합의의 공적인 특성은, 그 합의가 표명된 뒤 이를 충실하게 지키도록 도와주고 보호한다.
  • 1632 신랑 신부의 혼인 합의가 자유롭고 책임 있는 것이 되고, 혼인 서약이 인간적이고 그리스도교적인 굳건하고 영속적인 기초를 지니려면 혼인에 대한 준비가 매우 중요하다.
  • 부모와 가정이 주는 모범과 가르침은 혼인 준비의 가장 탁월한 방법이다.
  • ‘하느님의 가족’으로서 목자들과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역할은 혼인과 가정의 인간적인 가치와 그리스도교적인 가치의 전달에 필수 불가결하다.(150) 더구나 많은 젊은이들이 이 기초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하는 결손 가정에 살고 있는 우리 시대에는 더욱 그러하다.
  • 젊은이들이 정결을 닦고 적절한 시기에 정숙한 약혼기를 거쳐 혼인에 이를 수 있도록, 부부 사랑의 존엄성과 그 임무와 행위에 대하여 특히 가정의 품 안에서 제때에 알맞은 교육을 받아야 한다.(151)
  • 혼종혼인과 비신자와의 혼인
  • 1633 혼종혼인(混宗婚姻: 가톨릭 신자와 세례 받은 비가톨릭 신자 사이의 혼인)은 많은 나라에서 흔한 일이다. 이러한 혼인에는 혼인 당사자들과 사목자들의 특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비신자와의 혼인(가톨릭 신자와 세례 받지 않은 사람 사이의 혼인)의 경우에는 더욱 신중한 주의가 필요하다.
  • 1634 부부가 각기 자신의 교단에서 받은 것을 공유하고 상대방에게서 그리스도에 대하여 충실하게 사는 방식을 배우게 된다면, 서로의 교파가 다른 것이 혼인에 극복할 수 없는 혼인 장애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혼종혼인의 어려움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이 어려움들은 그리스도인들의 분열이 아직 극복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이러한 부부들은 그리스도인들의 불화의 비극을 바로 자신들의 가정에서도 겪을 위험이 있다. 종교가 다른 경우에는 이 어려움이 한층 더 클 수 있다. 신앙의 불일치나 혼인관 자체에 대한 불일치뿐 아니라 서로 다른 종교적 사고방식은 혼인 생활, 특히 자녀 교육에서 갈등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리하여 종교적 무관심이라는 유혹이 생길 수 있다.
  • 1635 라틴 교회의 현행법에 따르면, 합법적으로 혼종혼인을 하기 위해서는 교회 관할권자의 명시적 허가가 있어야 한다.(152) 비신자 장애의 경우에 혼인의 유효성을 위해서는 장애에 대한 명시적 관면이 요구된다.(153) 이러한 허가나 관면은 쌍방이 혼인의 목적과 본질적인 특성을 거부하지 않고 인식하며, 더욱이 가톨릭 신자 편 당사자가 가톨릭 교회 안에서 자녀에게 세례를 받게 하고 교육시키며 그 신앙을 보호할 의무가 있음을 의식하고 있고, 비가톨릭 신자 편 당사자가 이를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154)
  • 1636 많은 지방에서는 그리스도교 일치 운동의 대화에 힘입어 관련 그리스도교 교단들이 혼종혼인을 위한 공동사목위원회를 조직했다. 이 공동사목위원회의 임무는 부부들이 자신들의 특수한 상황을 신앙에 비추어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다. 이 위원회는 또 배우자의 상호 의무와 자기가 속한 교회 공동체에 대한 의무, 이 두 가지 의무 사이의 긴장을 극복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위원회는 신앙에서 그들 부부가 공유한 것을 꽃피우고, 다른 점들을 존중하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어야 한다.
  • 1637 비신자와 혼인을 하는 가톨릭 신자 배우자에게는 특별한 의무가 있다. “신자 아닌 남편은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해졌고, 신자 아닌 아내는 그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해졌기 때문입니다”(1코린 7,14). 이 ‘거룩하게 하는 힘’이 배우자를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자유롭게 개종하게 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교 신자인 배우자와 교회에 큰 기쁨이 된다.(155) 부부의 진실한 사랑, 가정적 덕행의 겸손하고 참을성 있는 실천, 그리고 끊임없는 기도는 신자 아닌 배우자가 회개의 은총을 받아들일 준비를 갖추게 한다.
  • IV. 혼인성사의 효과
  • 1638 “유효한 혼인에서 부부 사이에 본성상 영구적이며 독점적인 유대가 생긴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교인 혼인에서는 부부들이 그들 신분의 의무와 품위를 위하여 특수한 성사로써 견고하게 되고 이를테면 축성된다.”(156)
  • 혼인 유대
  • 1639 하느님께서는 신랑 신부가 서로 자신을 주고받는다는 합의를 확정하신다.(157) 부부의 혼인 계약으로 “하느님께서 제정하신 견고한 제도가 사회 앞에 나타난다.”(158) 부부의 이 계약은 하느님과 사람들의 계약에 통합된다. “진정한 부부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 안으로 받아들여진다.”(159)
  • 1640 혼인 유대는 하느님께서 친히 제정하신 것으로서, 세례 받은 사람들 사이에 맺어지고 완결된 혼인은 절대로 해소될 수 없다. 부부의 자유로운 인간적 행위와 혼인을 완결 짓는 육체의 결합으로 발생되는 이 유대는 이제 취소할 수 없는 실재이며, 하느님의 성실하심으로 보장된 계약의 기원이다. 교회는 하느님 지혜의 이러한 안배를 거스를 권한이 없다.(160)
  • 혼인성사의 은총
  • 1641 그리스도교 신자 부부는 “하느님의 백성 가운데에서 자기 생활 신분과 영역에 고유한 은총을 받는다.”(161) 혼인성사의 이 고유한 은총은 부부의 사랑을 완전하게 하고, 해소될 수 없는 그들 사이의 일치를 강화한다. 이 은총으로 그들은 “부부 생활은 물론 자녀 출산과 교육을 통하여 성덕에 나아가도록 서로 도와준다.”(162)
  • 1642 그리스도께서 이 은총의 원천이시다. “일찍이 하느님께서 사랑과 신의의 계약으로 당신 백성을 만나러 오셨듯이, 이제 인간의 구원자이신 교회의 신랑께서 혼인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인 부부를 만나러 오신다.”(163) 그리스도께서는 그들과 함께 머무르시면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며, 죄에서 다시 일어서고, 서로를 용서하며, 상대의 짐을 져 주고,(164)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에페 5,21)하고, 초자연적이며 온유하고 열매 맺는 사랑으로 서로 사랑할 힘을 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부부애와 가정생활의 기쁨 속에서, 이 세상에서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 미리 맛보게 하신다.
  • 교회가 맺어 주고, 봉헌으로 확고해지며, 축복으로 확정되고, 천사가 선포하며, 하느님 아버지께서 인준하신 혼인의 행복을 무슨 말로 만족스럽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동일한 희망, 동일한 정성, 동일한 규율, 동일한 봉사로 결합된 두 신앙인의 유대는 얼마나 경탄스럽습니까! 한 성부의 자녀들이며 한 주님을 모시는 그들 사이에는 정신이나 육체에 전혀 거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참으로 한 육신 안에 둘이며, 육신이 하나이면 정신도 하나입니다.(165)
  • V. 부부애의 선익과 요구
  • 1643 “부부애는 전체성 곧 인격 전체의 모든 부분 ─ 육체와 본능의 요구, 감정과 애정의 힘, 정신과 의지의 소망 ─ 을 포함한다. 부부애는 육체의 일치를 넘어, 한마음 한 영혼을 이루는 깊은 인격적 일치를 도모하는 것이며, 저 결정적인 상호 증여의 불가 해소성과 신의를 요구한다. 그리고 부부애는 출산의 문을 열어 놓는다. 한마디로 이것은 모든 자연적 부부애의 정상적 특성들이지만, 그 특성들을 정화하고 강화할 뿐 아니라 승화시켜서 그리스도교적 가치의 표현이 되게 하는 새로운 의미가 덧붙여진다.”(166)
  • 혼인의 단일성과 불가 해소성
  • 1644 부부의 사랑은 그 본성상 삶 전체를 포괄하는 인격적 공동체의 단일성과 불가 해소성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 19,6).(167) “부부에게는 혼인에 내포된 상호 증여의 약속에 매일매일 충실하여, 끊임없이 그 일치를 성장시킬 소명이 있다.”(168) 이러한 인간적 일치는 혼인성사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함으로써 강화되고 정화되며 완성된다. 이 일치는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함께 영성체함으로써 더욱 깊어진다.
  • 1645 “서로 완전한 사랑 안에서 인정되는 아내와 남편의 평등한 인격적 존엄으로, 주님께서 확고히 세우신 혼인의 단일성이 분명하게 드러난다.”(169) 일부다처제는 이러한 동등한 존엄성과 유일하고 독점적인 부부애에 어긋난다.(170)
  • 부부애와 신의
  • 1646 부부애는 그 본질상 절대적인 신의를 요구한다. 이는 스스로 상대방의 배우자가 된 부부가 서로 상대에게 자신을 내어 준 결과이다. 사랑은 본래 결정적인 것이어야 한다. 사랑은 ‘다른 새 결정을 내릴 때까지만’이라는 한정적인 것일 수는 없다. “이 깊은 결합은 두 인격의 상호 증여로서, 자녀의 행복과 더불어 부부의 완전한 신의를 요구하며, 그들의 풀릴 수 없는 일치를 촉구한다.”(171)
  • 1647 부부 신의의 가장 심오한 동기는, 계약에 대한 하느님의 신의와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신의이다. 부부는 혼인성사를 통하여 이 신의를 나타내고 보여 줄 자격을 가진다. 혼인의 불가 해소성은 성사를 통하여 새롭고 더 깊은 의미를 받는다.
  • 1648 평생을 기약하고 한 사람과 결합하는 것은 어렵게 생각될 수도 있고, 심지어 불가능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결정적이며 돌이킬 수 없는 사랑으로 사랑하시고, 부부들은 이 사랑에 참여하며, 이 사랑이 그들을 지탱하고 힘을 주며, 또 그들이 신의를 지킴으로써 하느님의 성실한 사랑의 증인이 될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종종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이러한 증거를 보이는 부부들은 교회 공동체의 감사와 지지를 받을 만하다.(172)
  • 1649 그러나 매우 다양한 이유로 혼인에 따른 동거가 거의 불가능해지는 상황이 있다. 이 경우 교회는 부부의 실질적 별거와 동거의 종식을 인정한다. 이 부부는 하느님 앞에서 계속 남편이고 아내이다. 그들은 새로 혼인할 자유가 없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 가장 좋은 해결책은 가능한 한 화해하는 일이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그들이 인간으로서 파기할 수 없는 그 혼인 유대에 충실하며 자신들의 처지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살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173)
  • 1650 오늘날 많은 나라에서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민법에 따라 이혼하며, 교회 밖에서 새로이 혼인 관계를 맺고 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그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것이다. 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다.”, 마르 10,11-12)에 충실하여, 만일 첫 혼인이 유효했다면 새 혼인을 유효한 것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만일 이혼한 사람들이 민법에 따라 재혼한다면 그들은 객관적으로 하느님의 법에 어긋나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 상태가 지속되는 동안에는 성체를 모실 수 없다. 같은 이유로 이들은 일정한 교회 직책을 수행할 수 없다. 그리스도에 대한 계약과 충실성의 표징을 거스른 것에 대해 뉘우치며 완전히 독신으로 살아가기로 약속한 사람만이 고해성사로 화해할 수 있다.
  • 1651 이러한 처지에서 살아가면서도 신앙을 보존하고 자녀들을 그리스도교 정신에 따라 키우기를 바라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사제들과 전체 공동체는 극진한 관심을 보여 주어 자신들이 교회에서 떨어져 나갔다고 여기지 않게 해야 한다. 그들은 세례를 받은 사람으로서 교회 생활에 참여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
  •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미사성제에 참여하며, 끊임없이 기도하고, 정의를 위한 공동체 활동과 자선 사업에 기여하도록 초대받아야 하며, 그리스도교 신앙에 따라 자녀들을 양육하며, 참회의 정신을 키우고 참회의 행동을 실천하며 매일 매일 하느님의 은총을 간청하도록 격려받아야 합니다.(174)
  • 출산을 기꺼이 받아들임
  • 1652 “혼인 제도 자체와 부부 사랑은 그 본질적 특성으로 자녀의 출산과 교육을 지향하며, 그로써 마치 절정에 이르러 월계관을 쓰는 것과 같다.”(175)
  • 자녀들은 혼인의 가장 뛰어난 선물이며 부모 자신의 행복에 크게 이바지한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창세 2,18) 하시고, “처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신”(마태 19,4) 하느님께서 당신의 창조 사업에 인간을 특별히 참여시키고자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라.”(창세 1,28) 하시며 부부를 축복하셨다. “그러므로 진정한 부부 사랑의 실천과 거기에서 나오는 가정생활의 전체 구조는, 혼인의 다른 목적들을 뒤로 제쳐 두지 않고, 부부가 그들을 통하여 당신 가족을 날로 자라게 하시고 풍요롭게 하시는 창조주와 구세주의 사랑에 굳센 마음으로 협력하는 자세를 갖추도록 한다.”(176)
  • 1653 충만한 부부애는 부모가 교육으로 자녀들에게 전해 주는 도덕적이고, 영적이며, 초자연적인 생활의 결실에까지 미친다. 부모는 자녀의 첫째가는 가장 중요한 교육자이다.(177) 이러한 의미에서 혼인과 가정의 근본적인 의무는 생명에 대한 봉사이다.(178)
  • 1654 하느님께 자녀들을 선사받지 아니한 부부들은 그래도 인간으로서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충만한 의미를 가진 부부 생활을 누릴 수 있다. 그들의 혼인은 풍요로운 사랑과 친절과 희생으로 빛날 수 있다.
  • VI. 가정 교회
  • 1655 그리스도께서는 요셉과 마리아의 성가정에서 태어나 자라기를 원하셨다. 교회는 다름 아닌 ‘하느님의 가정’이다. 초기부터 교회의 핵심을 이룬 이들은 흔히 “온 집안과 함께” 믿게 된 사람들이었다.(179) 그들이 개종할 때에는 “온 가족이” 구원되기를 바랐다.(180) 신앙인이 된 이 가정들은 믿지 않는 세상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교 삶의 작은 섬들이 되었다.
  • 1656 흔히 신앙에 대해 무관심하며 적의까지도 품는 이 세상에서, 이 시대의 신앙인들의 가정은 활력이 넘치고 빛을 발하는 신앙의 요람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가정을 오래된 표현에 따라 “가정 교회”(181) 라고 부른다. 가정에서 부모들은 “말과 모범으로 자기 자녀들을 위하여 최초의 신앙 선포자가 되어야 하며, 각자의 고유한 소명을 특별한 배려로 육성하여야 한다.”(182)
  • 1657 가장과 어머니, 자녀들, 곧 온 가족이 세례로 받은 사제직은 “여러 가지 성사를 받고 기도하고 감사를 드리며 거룩한 삶을 증언하고 극기와 사랑을 실천함으로써”(183) 특히 가정 안에서 수행된다. 이렇게 가정은 그리스도교 생활의 첫 번째 학교, “더욱 풍요로운 인간성을 기르는 한 학교”(184) 이다. 인내와 노동의 기쁨, 형제애, 거듭되는 너그러운 용서, 그리고 특히 기도와 삶의 봉헌을 통하여 하느님을 경배하는 것을 배우는 곳이 가정이다.
  • 1658 우리는 또한 수많은 독신자들을 기억하여야 한다. 그들은 본의 아니게 자신이 처한 구체적 상황 때문에 예수님의 마음에 특별히 가까워진 사람들이다. 교회와 특히 사목자들은 특별한 애정과 적극적인 배려로 그들을 보살펴 주어야 한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가 가난 때문에 진정한 가정이라고 할 수 없는 여건에서 살고 있다. 그중에는 ‘참행복’의 정신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에게 봉사하면서 모범적으로 사는 이들도 있다. 이 모든 사람에게 ‘가정 교회’인 가정의 문과 ‘큰 가정’인 교회의 문을 열어 주어야 한다. “이 세상에 가정 없는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교회가 모든 이, 특히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마태 11,28) 사람들의 집이고 가정이기 때문이다.”(185)
  • 간추림
  • 1659 바오로 사도는 말한다. “남편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 이는 큰 신비입니다. 그러나 나는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에페 5,25.32).
  • 1660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생명과 사랑의 친밀한 공동체를 이루는 혼인 제도는 창조주께서 제정하셨으며, 그분께 고유한 법을 받았다. 이 결합은 본성상 부부의 행복과 자녀의 출산과 교육을 지향하고 있다. 세례 받은 사람들의 혼인은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성사의 품위로 들어 높이셨다.(186)
  • 1661 혼인성사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결합을 상징한다. 이 성사는 그리스도께서 당신 교회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는 은총을 부부에게 준다. 이 성사의 은총은 부부의 인간적 사랑을 완성하고, 해소할 수 없는 그들의 결합을 굳건하게 하며, 영원한 생명의 길에서 그들을 성화한다.(187)
  • 1662 혼인은, 성실하며 자녀를 낳는 사랑의 유대로 살아가기 위하여 서로를 결정적으로 내어 주겠다는 의지, 곧 당사자들의 합의에 근거한다.
  • 1663 혼인은 부부에게 교회 내의 공인된 신분을 부여하는 것이므로, 사제(또는 교회의 자격 있는 증인)와 증인들과 신자 회중 앞에서, 전례 거행의 틀 안에서 공적으로 거행되는 것이 마땅하다.
  • 1664 단일성과 불가 해소성과 출산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은 혼인에 필수적이다. 일부다처제는 혼인의 단일성과 양립할 수 없고, 이혼은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가르는 것이며, 출산 거부는 하느님께서 부부 생활에 주시는, 자녀라는 “가장 뛰어난 선물”(188) 을 외면하는 것이다.
  • 1665 합법적인 배우자가 살아 있는데도 이혼한 사람이 재혼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하느님의 계획과 규범에 어긋난다. 그들은 교회에서 떨어져 나간 것이 아니지만 성체를 모실 수 없다. 그들은 특히 자녀들에게 신앙 교육을 시킴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삶을 계속하여야 할 것이다.
  • 1666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자녀들이 처음으로 신앙을 배우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을 ‘가정 교회’, 은총과 기도의 공동체, 그리고 인간적인 덕행과 그리스도 사랑의 학교라고 부르는 것이 당연하다.
  • 제 4 장 그 밖의 전례 거행
  • 제1절 준성사(sacramentalia)
  • 1667 “어머니인 교회는 준성사(準聖事)들을 제정하였다. 준성사는 어느 정도 성사들을 모방하여 특히 영적 효력을 교회의 간청으로 얻고 이를 표시하는 거룩한 표징들이다. 이를 통하여 사람들은 성사들의 뛰어난 효과를 받도록 준비되고, 생활의 여러 환경이 성화된다.”(1)
  • 준성사의 특징
  • 1668 교회는 특정 직무와 신분, 신자 생활의 매우 다양한 상황과, 사람들에게 유익한 물건 등을 성화하고자 준성사를 제정했다. 준성사는 주교들의 사목적 결정에 따라 한 지방이나 한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고유한 필요와 문화, 역사에도 부응할 수 있다. 준성사에는 언제나 기도가 포함되며, 흔히 안수, 십자 성호, (세례를 상기시키는) 성수 뿌림 같은 일정한 표징이 따른다.
  • 1669 준성사의 거행은 세례로 받은 보편 사제직에 속한다. 세례 받은 사람은 모두 그 자신이 ‘복’이 되어야 하며(2) 남을 축복해야 한다.(3) 그러므로 평신도들이 집전할 수 있는 축복 예식들도 있다.(4) 그러나 교회 생활과 성사 생활에 더 밀접한 관계를 가진 축복은 서품 성직자들(주교, 사제, 부제)만 할 수 있다.(5)
  • 1670 준성사는 성사가 베푸는 것과 같은 성령의 은총을 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교회의 기도를 통하여 은총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고 은총에 협력하도록 결심하게 한다. “성사와 준성사의 전례는 잘 준비된 신자들에게 생활의 거의 모든 사건이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파스카 신비에서 흘러나오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성화되게 한다. 이 신비에서 모든 성사와 준성사가 그 효력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또한 거의 모든 사물을 목적에 맞게 올바로 사용하면 인간 성화를 이루고 하느님을 찬양하게 되어 있다.”(6)
  • 준성사의 여러 형태
  • 1671 준성사 중에는 우선 (사람, 음식, 물건, 장소 등에 대한) 축복이 있다. 모든 축복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이며 하느님의 선물을 청하는 기도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온갖 영적인 복”(에페 1,3)을 받는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또 보통은 그리스도의 십자 성호를 그어 축복한다.
  • 1672 어떤 축복들은 지속적인 효력을 가진다. 그 축복들은 사람들을 하느님께 봉헌(축성)하고, 물건과 장소를 전례적 용도로 사용할 수 있게 한다. 사람들에게 주는 축복 중에는 ─ 이것을 성사인 서품과 혼동하면 안 된다 ─ 수도원장이나 수녀원장의 축복, 동정녀들과 과부들의 봉헌, 수도 서원 예식, 그리고 교회 직무(독서직, 시종직, 교리 교사 등)를 위한 축복이 있다. 물건에 대한 축복의 예로는 성당이나 제대의 봉헌 또는 축복, 성유와 제기와 제의와 종 등의 축복을 들 수 있다.
  • 1673 교회가 어떤 사람이나 물건이 마귀의 세력으로부터 보호되고 마귀의 지배력에서 벗어나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공적인 권위를 가지고 청하는 것을 구마(驅魔)라고 한다. 예수님께서 이를 행하셨으며(7) 교회는 마귀를 쫓아내는 권능과 의무를 예수님께 받았다.(8) 세례를 거행할 때 간단한 형식의 구마를 행한다. ‘장엄 구마’(magnus exorcismus)라고 하는 마귀 쫓는 예식은 주교의 허가를 받아서 사제만이 행할 수 있으며, 교회에서 정한 규칙을 정확하게 지키면서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한다.(9) 구마는 마귀를 쫓아내거나 마귀의 지배력에서 구해 내는 것이 목적이며, 예수님께서 교회에 주신 영적 권한으로 행하는 것이다. 질병, 특히 정신 질환은 마귀 들린 것과는 전혀 다르며, 의학이 치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마를 행하기 전에 질병이 아니라 마귀 들린 것임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 대중 신심
  • 1674 교리 교육에서는 성사 전례와 준성사 외에도 신자들의 신심 형태와 대중 신심이 고려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 대중의 신앙심은 언제나 유해 공경, 성당 방문, 순례, 행렬, 십자가의 길, 종교 무용, 묵주 기도, 메달 등과 같은 교회의 성사 생활을 둘러싼 다양한 형태의 신심 행위로 표현되어 왔다.(10)
  • 1675 이러한 표현들이 교회 전례 생활의 연장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대체하지는 못한다. “전례는 그 본질상 이러한 신심 행위를 훨씬 앞서 가는 것이므로, 전례 시기를 고려하여, 그러한 행위들은 어느 모로든 전례에서 이끌어 내고 백성을 이끌어 들여 전례와 조화를 이루도록 마련되어야 한다.”(11)
  • 1676 대중 신심을 지키고 후원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이 신심의 기초가 되는 신앙심을 정화하고 바로잡아 그리스도의 신비를 더 잘 깨닫게 하기 위하여 사목적인 식별이 필요하다. 이러한 행사는 주교들의 감독과 판단, 그리고 교회의 일반적 규범을 따라야 한다.(12)
  • 대중 신심은 본질적으로, 삶의 중요한 물음들에 대해 그리스도교적 지혜로 대응하는 가치들의 총화이다. 가톨릭 대중의 지혜는 삶의 통합 역량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그리스도와 마리아, 정신과 육체, 친교와 제도, 개인과 공동체, 신앙과 조국, 지성과 감성을 창조적으로 조화시킨다. 이 지혜는 그리스도교 인본주의로서,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존엄성을 지녔음을 근본적으로 확언하고, 기초적인 형제애를 건설하며, 자연을 만나고 노동을 이해하도록 가르치며, 어려운 삶에서도 기쁘고 유쾌하게 살아가기 위한 동기들을 부여한다. 이 지혜는 대중에게 식별의 원칙과 복음적 직관이 되기도 한다. 이 복음적 직관은 복음이 과연 교회에서 가장 우선적인 위치에 서게 되는지, 아니면 어떤 이해관계 때문에 복음의 내용이 사라지고 질식하게 되는지를 식별하게 해 준다.(13)
  • 간추림
  • 1677 준성사는 성사들의 효과를 받도록 사람을 준비시키고, 삶의 여러 상황을 성화하고자 교회가 제정한 거룩한 표징이다.
  • 1678 준성사 중에서도 축복(benedictio)은 중요한 것이다. 축복은 하느님의 업적과 선물에 대한 찬미와, 사람들이 하느님의 선물을 복음 정신에 따라 사용할 수 있도록 드리는 교회의 전구를 포함한다.
  • 1679 전례 이외에도 그리스도인의 삶은 여러 가지 문화에 뿌리박은 다양한 형태의 대중 신심 행위로 길러진다. 교회는 신심 행위의 여러 형태들을 신앙의 빛으로 주의깊게 밝혀 주면서, 복음적 직관과 인간의 지혜를 드러내고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대중 신심의 형태들을 권장한다.
  • 제2절 그리스도교 장례
  • 1680 모든 성사, 특히 그리스도교 입문 성사들은 하느님 자녀의 마지막 파스카가 그 목적이다. 마지막 파스카는 죽음을 통해 하느님 나라의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때에는 “죽은 이들의 부활과 내세의 삶을 기다리나이다.”(14) 하고 신앙과 희망으로 고백하던 것이 이루어진다.
  • I. 그리스도인의 마지막 파스카
  • 1681 죽음의 그리스도교적 의미는, 우리 희망의 유일한 근거이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파스카 신비의 빛으로 드러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그리스도인은 육체를 떠나 주님과 함께 평안히 산다.(15)
  • 1682 죽는 날에 그리스도인은 성사적인 삶의 끝을 맞이하여, 세례로 시작된 그의 새 생명이 완성되며, 성령의 기름 바름으로 “성자의 모습”을 결정적으로 “닮게” 된다. 비록 혼인 잔치 예복을 입기 전에 아직 최후의 정화가 필요하더라도, 성찬례에서 미리 맛본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게 된다.
  • 1683 이 세상의 순례 길을 가는 동안 성사로써 그리스도인을 품에 안아 온 어머니처럼, 교회는 그를 “아버지의 손에” 맡겨 드리기 위하여 끝까지 그와 동행한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부께 당신 은총의 자녀를 바쳐 드리고, 영광 중에 다시 살아날 육체의 씨앗을, 희망을 가지고 땅에 묻는다.(16) 이 봉헌은 성찬의 희생 제사로 충만하게 거행되며, 그 전후에 행하는 축복은 준성사이다.
  • II. 장례 거행
  • 1684 그리스도교의 장례는 교회의 전례 거행이다. 이 경우에 교회의 직무는 이 전례에서 죽은 이와 이루는 효과적 통공을 표현하는 동시에 장례식에 모인 공동체를 그 통공에 참여하게 하며,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예고하는 목적도 지니고 있다.
  • 1685 여러 가지 장례 예식들은 그리스도인의 죽음이 지닌 파스카 성격을 드러내며, 각 지방의 상황과 전통에 부응한다. 전례적(제의의) 색깔도 그래야 한다.(17)
  • 1686 로마 전례의 장례 예식서는, 장례식을 치르는 세 장소(집, 성당, 묘지)에 부합하는 장례 거행의 세 양식을 제시하고 있으며, 또한 가족과 그 지방의 풍습, 대중문화와 신심이 부여하는 특성을 따르고 있다. 이러한 장례식 순서는 모든 전례 전통에 공통된 것이며,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중요한 부분이 있다.
  • 1687 공동체의 맞아들임. 장례식은 신앙의 인사로 시작된다. 교회 공동체는 고인의 친척들을 “격려하는”(신약 성경의 의미로는 ‘희망을 주시는 성령의 힘’)(18) 말로 맞이한다. 기도하러 모인 공동체도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기대한다. 공동체 일원의 죽음(또는 기일이나 죽은 후 7일, 30일)은 “이 세상”의 관점들을 초월하게 하고, 신자들을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참다운 관점으로 끌어들이는 사건이다.
  • 1688 말씀 전례.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 전례에 별로 열심히 참석하지 않는 신자들과,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닌 죽은 이의 친지들이 있을 수 있으므로 말씀 전례는 더 주의 깊게 준비해야 한다. 특히 강론에서는 장례식 조사류의 연설은 피하고,(19) 그리스도의 부활에 비추어 본 그리스도인의 죽음의 신비를 설명해야 한다.
  • 1689 성찬의 희생 제사. 장례식이 성당에서 거행될 때, 성찬례는 그리스도인의 죽음이 지닌 파스카 실재의 핵심이 된다.(20) 이때 교회는 죽은 이와 이루는 효과적인 통공을 표현한다. 교회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제사를 성부께 봉헌함으로써, 그 자녀의 죄와 죄의 결과가 정화되어 하늘 나라 식탁에서 완전한 파스카에 참여하게 해 주시기를 성부께 청한다.(21) 이렇게 거행된 성찬례를 통하여 신자 공동체 특히 죽은 이의 가족은, 죽은 이가 한 지체로서 살아 있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와 통공을 이룸으로써, 또 죽은 이를 위하여 죽은 이와 함께 기도함으로써, “주님 안에 잠든” 이와 친교를 이루며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 1690 고별식은 교회가 죽은 이를 “하느님께 맡겨 드리는 것”이다. (작별 인사는 불어로 adieu, 이태리어로 addio, 스페인 어로 adi-s인데, 이는 ad Deum 곧 ‘하느님께’라는 뜻이다.) 이것은 “시신을 묘지로 운반하기 전에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마지막으로 가는 형제에게 하는 인사”이다.(22) 비잔틴 전통에서는 죽은 이에게 작별의 입맞춤을 한다.
  • 이 마지막 인사로 “그가 이 세상을 떠나고 그와 헤어짐을, 그리고 친교와 재회가 있음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죽어서도 서로 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길을 걸어가 같은 곳에서 다시 만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기 때문에 결코 헤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 안에 결합되어 그분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며……모두 그리스도 안에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