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 부 성사의 경륜
- 제 2 부 교회의 일곱 성사
- 제 2 장 치유의 성사들
제 2 부 교회의 일곱 성사
- 1420 우리는 그리스도교 입문 성사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새 생명을 받는다. 그런데 우리는 이 생명을 “질그릇 속에”(2코린 4,7) 담아 가지고 있다. 지금은 그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콜로 3,3) 숨겨져 있다. 우리는 고통과 질병과 죽음을 겪을 수밖에 없는 “지상 천막집”에(1) 아직 살고 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이 새 생명은 죄 때문에 약해지거나 잃을 수도 있다.
- 1421 우리 영혼과 육체의 의사이시며, 중풍 병자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육체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2) 교회가 성령의 힘으로 그 치유와 구원 활동을, 당신의 지체까지도 대상으로 하여, 계속해 주기를 바라셨다. 이것이 치유의 두 가지 성사, 곧 고해성사와 병자성사의 목적이다.
- 제4절 고해성사(告解聖事)
- 1422 “고해성사를 보는 신자들은 하느님께 끼친 모욕에 대하여 그분의 자비로 용서를 받으며, 또한 동시에 범죄로 상처를 입혔던 교회, 사랑과 모범과 기도로써 죄인들의 회개를 위하여 노력하는 교회와 화해를 한다.”(3)
- I. 이 성사는 어떻게 불리는가-
- 1423 이 성사는 회개하라는 예수님의 호소와(4) 죄 때문에 떠나 있던 아버지께 돌아옴을(5) 성사적으로 실현하므로 회개의 성사라고 불린다.
- 이 성사를 참회의 성사라고 부르는 까닭은, 죄인인 그리스도인의 회개와 참회와 보속(補贖)이라는 개인적이며 교회적인 과정을 하느님께 바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 1424 이 성사를 고백 성사라고 부르는 것은, 사제 앞에서 죄를 자인하고 고백하는 것이 이 성사의 핵심 요소이기 때문이다. 더 깊은 의미로는 이 성사가, 하느님의 거룩하심과 죄인에 대한 자비를 알아 뵙고 찬미하는 하나의 ‘고백’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 이 성사를 용서의 성사라고 부르는 것은, 사제의 성사적 사죄(赦罪)를 통하여, 참회하는 사람에게 하느님께서 “용서와 평화”(6) 를 주시기 때문이다.
- 이 성사는 화해시키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죄인에게 베풀어 주기 때문에 화해 성사라고 부른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2코린 5,20).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으로 사는 사람은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24) 하신 예수님의 요구에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다.
- II. 세례를 받은 뒤에 고해성사가 왜 필요한가-
- 1425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느님의 영으로 깨끗이 씻겨졌습니다. 그리고 거룩하게 되었고 또 의롭게 되었습니다”(1코린 6,11). 그리스도를 새 옷으로 입은(7) 사람들이 죄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교 입문 성사들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하느님 선물의 위대함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나 성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우리가 죄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우리 안에 진리가 없는 것입니다”(1요한 1,8). 그리고 주님께서는 “저희의 죄를 용서하소서.”(루카 11,4) 하고 기도하라고 친히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며, 서로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과 우리의 죄에 대한 하느님의 용서가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 밝히셨다.
- 1426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 자신이 그리스도 앞에 “거룩하고 흠 없는”(에페 5,27) 모습으로 서 있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께 돌아서는 회개, 세례를 통한 새로운 탄생, 성령을 받음, 양식으로 받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우리를 그리스도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하여 당신 앞에 설 수 있게”(에페 1,4)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 입문하여 받은 새 생명이 인간 본성의 불안정함과 나약함을 없앤 것은 아니며, 전통적으로 사욕이라고 부르는 죄로 기우는 경향을 없앤 것도 아니다. 세례 받은 사람에게 사욕이 남아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답게 살기 위한 싸움에서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도움을 받아 승리를 얻게 하기 위한 것이다.(8) 이 싸움은 주님께서 끊임없이 우리를 부르시는 거룩함과 영원한 생명으로 돌아가는 회개를 위한 싸움이다.(9)
- III. 세례 받은 이들의 회개
- 1427 예수님께서는 회개하라고 호소하신다. 이 호소는 하느님 나라 선포의 핵심 요소이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는 우선적으로 아직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호소한다. 그러므로 세례는 처음으로 근본적 회개가 이루어지는 으뜸 자리다. 사람들은 복음을 믿고 세례를 받음으로써(10) 악을 버리고 구원을 얻게 된다. 곧 모든 죄를 용서받고 새 생명의 선물을 받게 되는 것이다.
- 1428 회개하라는 그리스도의 호소는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안에서도 계속 들려온다. 이 제2의 회개는 “자기 품에 죄인들을 안고 있어 거룩하면서도 언제나 정화되어야 하므로 끊임없이 참회와 쇄신을 추구하는”(11) 온 교회의 부단한 임무다. 이 회개의 노력은 단순히 인간의 일만은 아니다. 이는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12)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에 응답하도록 은총으로 이끌려 고무된(13) “뉘우치는 마음”의(14) 움직임이다.
- 1429 베드로 사도가 자기 스승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다음 회개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예수님의 한없이 자비로운 눈길은 회개의 눈물을 흘리게 했으며,(15) 주님께서 부활하신 뒤에는 당신에 대한 그의 사랑을 세 번 확언하게 하신다.(16) 제2의 회개에는 공동체적 차원도 있다. 이는 어떤 교회 전체에 대해 “회개하여라!”(묵시 2,5.(16) 하시는 주님의 호소에서 드러난다.
- 암브로시오 성인은 두 가지 회개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교회 안에는 “물과 눈물이 있으니 세례의 물과 참회의 눈물이다.”(17)
- IV. 내적 참회
- 1430 이미 예언자들이 그랬듯이, 회개하고 참회하라는 예수님의 호소는 외적 행위, 곧 “자루 옷과 재”, 단식과 고행이 아니라, 마음의 회개, 내적 참회가 그 우선 목표이다. 마음의 회개 없는 참회 행위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거짓된 행위에 불과하다. 반대로 내적 회개는 이러한 태도를 가시적 표지와 속죄의 행위로 표현하게 한다.(18)
- 1431 내적 참회는 삶 전체의 근본적 방향 전환이며, 온 마음으로 하느님께 돌아오고, 회개하는 것이며, 우리가 지은 악행을 혐오하고 악에서 돌아서서 죄를 짓지 않는 것이다. 동시에 내적 회개는 하느님 자비에 대한 희망과 하느님 은총의 도움을 믿고 생활을 바꾸겠다는 의향과 결심을 포함한다. 이러한 마음의 회개에는 교부들이 “영혼의 고뇌”, “마음의 회한”이라고 했던 구원에 유익한 고통과 슬픔이 따른다.(19)
- 1432 인간의 마음은 무디고 완고하다. 하느님께서 새 마음을 주셔야 한다.(20) 회개는 무엇보다도 우리 마음을 하느님께 돌아서게 하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진다. “주님, 저희를 당신께 되돌리소서, 저희가 돌아가오리다”(애가 5,(21) .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롭게 시작할 힘을 주신다. 우리 마음은 하느님 사랑의 위대하심을 알게 됨으로써 죄의 두려움과 무게 때문에 떨게 되고, 죄를 지어 하느님을 모욕하고 그분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다. 인간의 마음은 우리의 죄로 찔리신 그분을 바라봄으로써 회개하게 된다.(21)
- 그리스도의 피를 바라보고, 그 피가 성부께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깨달읍시다.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흘리신 그 피는 온 세상에 회개의 은총을 마련해 주었기 때문입니다.(22)
- 1433 주님의 부활 후부터 성령께서는 죄에 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바로잡아 주신다. 죄는 세상이 아버지께서 보내신 분을 믿지 않는 것이다.(23) 그런데 죄를 밝혀 주시는 성령께서는 인간의 마음에 참회와 회개의 은총을 주시는 ‘변호자’(24) 이시기도 하다.(25)
- V. 그리스도인 생활의 다양한 참회 형태
- 1434 그리스도인의 내적 참회는 매우 다양하게 표현될 수 있다. 성경과 교부들은 그중에서 특히 단식, 기도, 자선의 세 가지 형태를 강조한다.(26) 이 셋은 각각 자신에 대한 회개, 하느님에 대한 회개, 다른 사람들에 대한 회개를 나타낸다. 성경과 교부들은 죄의 용서를 얻는 방법으로, 세례와 순교를 통한 근본적인 정화 외에, 이웃과 화해하려는 노력, 참회의 눈물, 이웃의 구원에 대한 관심,(27) 성인들의 전구, 그리고 “많은 죄를 덮어 주는”(1베드 4,8) 사랑의 실천 등을 들고 있다.
- 1435 일상생활에서 회개는 화해의 행위,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 정의의 실천과 타인의 권리 옹호,(28) 형제들에게 잘못을 고백함, 형제적인 충고, 생활에 대한 반성, 양심 성찰, 영적 지도, 고통을 받아들임, 정의를 위해 박해를 견딤 등으로 실현된다.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가장 확실한 회개의 길이다.(29)
- 1436 성체성사와 고해성사. 일상적인 회개와 참회는 성체성사가 그 원천이며 양식이다.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시키신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가 성체성사 안에 현존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사람들은 성체로 양육되고 굳세어진다. 성체는 “날마다 짓는 죄로부터 우리를 구해 주고 죽을죄에서 보호해 주는 해독제이다.”(30)
- 1437 성경 읽기, 시간 전례와 주님의 기도, 모든 참된 예배와 신심 행위는 우리 마음에 회개와 참회의 정신을 되살려 주고, 죄의 용서를 받는 데 도움이 된다.
- 1438 전례력에서 참회의 날과 시기(사순 시기와 주님의 죽음을 기억하는 매주 금요일)는 교회가 참회를 특별히 실행하는 때이다.(31) 이 시기는 영성 수련, 참회 예절, 참회의 표시인 순례, 단식과 자선 같은 자발적인 절제, 형제적 나눔(자선 활동과 선교 활동) 등을 위하여 특히 적절한 때이다.
- 1439 예수님께서는 ‘잃었던 아들’의 비유에서 회개와 참회의 과정을 잘 묘사하시는데, 이 비유의 중심인물은 ‘자비로운 아버지’이다.(32) 거짓 자유의 미혹, 아버지의 집을 떠남, 아들이 재산을 탕진한 다음에 빠진 극도의 비참, 돼지를 칠 수밖에 없게 된 수치, 더 나아가 돼지가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려고 했던 주림, 재산을 탕진해 버린 데 대한 반성, 뉘우침과 아버지 앞에 가서 잘못을 고백하겠다는 결심, 집으로 돌아옴, 아버지의 너그러운 환영, 아버지의 기쁨 등, 이러한 것들이 회개하는 과정의 특징적인 모습들이다. 아름다운 옷과 가락지와 즐거운 잔치는 하느님과 교회라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사람의 생명인 깨끗하고 품위 있고 기쁨 가득한 새 생활의 상징들이다. 당신 아버지의 사랑의 깊이를 아시는 그리스도의 마음만이 아버지의 끝없는 자비를 이렇게 소박하고도 아름답게 우리에게 알려 주실 수 있었다.
- VI. 참회와 화해의 성사
- 1440 죄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에 대한 모욕이고, 하느님과 이루는 친교의 단절이며 동시에 교회와 이루는 친교에도 해를 끼친다. 그러므로 회개는 하느님의 용서를 가져다주고 교회와 화해를 이루게 하며, 고해성사는 이를 전례적으로 표현하고 실현한다.(33)
- 하느님께서만 죄를 용서하신다
- 1441 하느님께서만 죄를 용서하신다.(34)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자신에 대해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마르 2,10)고 말씀하셨고,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35) 하시면서 이 신적 권한을 행사하신다. 나아가 당신의 신적 권위로 이 권한을 제자들에게 주시며(36) 당신의 이름으로 행사하게 하신다.
- 1442 그리스도께서는 온 교회가 기도와 생활과 실천으로써, 몸소 당신 피로 값을 치르고 얻어 주신 용서와 화해의 표지와 도구가 되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의 행사는 사도직을 맡은 이들에게 위임하셨다. 사도들은 “화해의 직분”(2코린 5,18)을 받았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파견되었으며, 그들을 통하여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2코린 5,20) 하고 간곡히 권유하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 자신이시다.
- 교회와 이루는 화해
- 1443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동안 죄를 용서하셨을 뿐 아니라, 이 용서의 결과도 나타내 보이셨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죄 때문에 멀어졌거나 추방되었던 그들을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 안으로 다시 받아들이셨다. 이 사실을 보여 주는 명백한 표지는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당신의 식탁에서 함께 식사하게 하시고, 더구나 그들의 식탁에 함께 앉으셨다는 사실이다. 이는 하느님의 용서와,(37) 하느님 백성의 품으로 돌아오는 복귀를(38) 동시에 표현하는 놀라운 행위이다.
- 1444 주님께서는 죄를 용서하는 당신의 고유 권한을 사도들에게 주시면서, 죄인들을 교회와 화해시키는 권한도 주신다. 사도들이 지닌 교회 차원의 이 임무는 주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하신 엄숙한 말씀에서 특히 잘 드러난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9). “베드로에게 주어진 매고 푸는 저 임무는 그 단장과 결합되어 있는 사도단에게도 부여되었음이 분명하다(마태 18,18; 28,16-20 참조).”(39)
- 1445 “매고 푼다”는 말의 의미는, 교회가 그 친교에서 제외시키는 사람은 하느님에 대한 친교에서도 제외될 것이고, 교회가 친교 안에 다시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도 당신과 이루는 친교 안에 받아들이신다는 것이다. 교회와 이루는 화해와 하느님과 이루는 화해는 분리될 수 없다.
- 용서의 성사
- 1446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교회의 모든 지체, 누구보다도 우선 세례 후 대죄에 떨어져 세례로 받은 은총을 잃고 교회의 친교에 손상을 입힌 사람들을 위하여 고해성사를 세우셨다. 고해성사는 죄인들에게 회개하고 의화의 은총을 회복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한다. 교부들은 이 성사를 “은총을 잃어버린 난파 후 두 번째 구명대”(40) 라고 소개한다.
- 1447 세월이 흐르는 동안, 교회가 주님께 받은 이 권한을 행사하는 구체적인 형태는 많이 변했다. 처음 수 세기 동안은 세례를 받은 뒤에 특수한 대죄(예를 들어 우상 숭배, 살인 또는 간통죄)를 지은 경우의 화해는 매우 엄중한 징계를 거쳐야 했다. 이에 따라, 회개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기 전에, 흔히 여러 해 동안, 공적인 보속을 해야만 했다. (몇몇 대죄에만 해당되던) 이러한 ‘참회자 부류’에 속하는 것이 허용되는 일이 드물었고, 어떤 지방에서는 일생에 단 한 번만 이러한 일이 가능했다. 7세기에 동방 수도회의 전통에서 영감을 얻은 아일랜드의 선교사들이 이른바 ‘사적인’ 속죄의 절차를 유럽 대륙에 전하였다. 이는 교회와 화해를 하기 전에 오랫동안 공적인 속죄 행위를 요구하던 종전의 관행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로부터 이 성사는 참회하는 사람과 사제 사이에서 비밀리에 행해지게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관행은 반복의 가능성을 허용하는 것이었으며, 이 성사를 정기적으로 자주 받을 수 있는 길을 터놓았다. 이는 한 번의 성사 거행으로 대죄와 소죄를 한 번에 용서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교회는 대체로 이러한 형태의 고해성사를 오늘날까지 행해 오고 있다.
- 1448 오랜 세월 동안 변화를 겪어 온 이 성사의 규칙과 거행을 통틀어 볼 때, 불변하는 기본 구조를 발견할 수 있다. 이 구조는 한결같이 두 핵심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데, 그 하나는 성령의 감도로 회개하는 사람의 행위, 곧 통회와 고백과 보속이다. 다른 하나는 교회의 중개를 통한 하느님의 행위이다. 곧 교회는 주교와 사제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해 주고, 보속의 방법을 정해 주고, 죄인을 위해 기도하며, 그와 함께 속죄한다. 이렇게 해서 죄인은 치유되고 교회와 이루는 친교를 회복하게 된다.
- 1449 서방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사죄경은 이 성사의 근본적인 요소들을 표현한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모든 용서의 근원이시다. 아버지께서는 당신 아들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그리고 성령을 보내 주심으로써, 교회의 기도와 직무 수행을 통하여 죄인과 화해를 이루신다.
- 인자하신 천주 성부께서 당신 성자의 죽음과 부활로 세상을 당신과 화해시켜 주시고,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성령을 보내 주셨으니, 교회의 직무 수행으로 몸소 이 교우에게 용서와 평화를 주소서. 나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교우의 죄를 사하나이다.(41)
- VII. 참회자의 행위
- 1450 “죄인은 회개하기 위하여 기꺼이 다음과 같은 참회의 행위가 필요하다. 마음에는 통회가, 입에는 고백이, 행위에는 온전한 겸손과 유효한 보속이 있어야 한다.”(42)
- 통회
- 1451 참회하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행위는 통회(痛悔)이다. 통회는 “지은 죄에 대한 마음의 고통이며,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그 죄를 미워하는 것이다.”(43)
- 1452 하느님을 모든 것 위에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통회를 ‘완전한’ 통회(사랑의 통회)라 한다. 이 통회는 소죄를 용서해 주며, 가능한 한 속히 고해성사를 받겠다는 굳은 결심이 포함된 경우 죽을죄도 용서받게 해 준다.(44)
- 1453 ‘불완전한’ 통회(뉘우침)도 하느님의 선물이며 성령께서 일으켜 주시는 것이다. 이 통회는 죄의 추악함이나 죄인을 위협하는 영벌과 다른 벌들에 대한 두려움에서 생긴다(두려움의 통회). 이러한 양심의 동요는 은총의 감도 아래 성사로 죄를 용서받음으로써 완성되는 내적 변화를 유발시킬 수 있다. 그러나 불완전한 통회는 그 자체로써는 대죄의 용서를 얻지 못하며, 고해성사로 용서받도록 준비시킬 뿐이다.(45)
- 1454 고해성사를 받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말씀에 비추어 양심 성찰을 해야 한다. 이를 위해 가장 적당한 성경 본문들은 십계명에서, 그리고 복음서와 사도들의 서한 가운데 윤리적인 부분, 예컨대 산상 설교와 사도들의 가르침에서 찾을 수 있다.(46)
- 죄의 고백
- 1455 죄의 고백(자백)은 단순히 인간적인 면에서도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며, 다른 사람들과 화해하도록 도와준다. 인간은 고백으로 자기가 지은 죄를 직시하고, 그에 대해 책임을 진다. 그리고 책임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느님과 교회에 대한 친교에 다시 마음을 열게 되어 새로운 미래가 가능해진다.
- 1456 사제에게 하는 고백은 고해성사의 핵심 부분이다. “참회자들이 고백할 때에는 진지하게 성찰한 뒤에 알아낸 모든 죽을죄들을 열거해야 한다. 그 죄들이 매우 은밀한 것이고 십계명의 마지막 두 계명만을 범한 것일지라도 그러하다.(47) 때로 이 죄들은 영혼에 더욱 심한 상처를 입히며, 공공연하게 지은 죄들보다 더 위험하기 때문이다.”(48)
-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기억나는 모든 죄를 고백하려고 애쓸 때, 자비로우시며 용서하시는 하느님 앞에 그 죄들을 모두 내놓는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와는 달리 그중 몇몇을 고의로 숨기는 사람들은 사제를 통하여 용서해 주실 선하신 하느님께 아무것도 제시하지 않는 것이 된다. “만일 환자가 부끄러워서 자신의 상처를 의사에게 감춘다면, 의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치료할 수 없기”(49) 때문이다.
- 1457 교회의 계명에 따라 “모든 신자는 사리를 분별할 나이에 이른 뒤에는 매년 적어도 한 번 자기의 대죄를 성실히 고백할 의무가 있다.”(50) 죽을죄를 지었음을 의식하는 사람은 크게 통회를 했다고 해도, 성체를 모셔야 할 중대한 이유가 있고 또 고해 사제에게 갈 수 없는 경우가 아니면,(51) 먼저 고해성사로 사죄를 받지 않은 채 성체를 모셔서는 안 된다.(52) 어린이들은 첫영성체 전에 고해성사를 받아야 한다.(53)
- 1458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상적인 잘못(소죄)도 고백하도록 교회는 크게 장려한다.(54) 왜냐하면 정기적으로 소죄를 고백하는 것은 양심을 기르고, 나쁜 성향과 싸우며, 그리스도를 통해 치유받고, 성령의 생명 안에서 성장하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이 성사를 통해서 자비로우신 성부의 은총을 더욱 자주 받으면 성부와 같이 자비로워지는 힘을 얻는다.(55)
-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과 함께 행동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대의 죄를 질책하시는데, 그대도 자신의 죄를 질책한다면 그대는 하느님과 결합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사람과 죄인은 별개의 존재입니다. 그대가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때, 그 사람은 하느님께서 지으신 것입니다. 그대가 “죄인”이라는 말을 들을 때, 그 죄인은 인간이 스스로 만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친히 만드신 것을 구원하시도록 그대가 만든 것을 부수십시오.……그대가 만든 것을 미워하기 시작할 때, 그대는 자신의 악행을 고발하는 것이기에, 그대의 선행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악행의 고백은 선행의 시작입니다. 그대는 진리를 행하고 빛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56)
- 보속
- 1459 많은 죄들이 이웃에게 해를 끼친다. 이를 갚기 위해서 가능한 일들을 해야 한다(예를 들어 훔친 물건을 되돌려 주는 일, 모함당한 사람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일, 손해를 배상하는 일 등). 단순한 정의도 이런 일을 요구한다. 그러나 죄는 결국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고 나약하게 하며, 하느님에 대한 관계, 이웃에 대한 관계를 해친다. 용서는 죄를 없애 주지만 죄의 결과로 생긴 모든 폐해를 고쳐 주지는 못한다.(57) 죄에서 벗어난 사람은 완전한 영적 건강을 회복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 죄를 갚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더 실행하여야 한다. 적절한 방법으로 죄를 ‘보상’하거나 ‘속죄’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갚음을 ‘보속’(補贖)이라고 부른다.
- 1460 고해 사제는 고백자에게 보속을 정해 줄 때, 그 사람의 개인적인 상황을 고려하고, 그의 영적 이익을 도모해야 한다. 보속은 가능한 한 지은 죄의 경중과 특성에 맞아야 한다. 보속은 기도일 수도 있고, 헌금, 자선 행위, 이웃을 위한 봉사, 자발적인 절제, 희생이 될 수도 있으며, 특히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를 인내로 받아들이는 일일 수도 있다. 이러한 보속들은 우리가 우리 죄 때문에 한 번에 영원히 속죄하신 그리스도를(58) 닮도록 도와준다. 보속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기”(로마 8,17)(59) 때문에 우리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 상속자가 되게 해 준다.
- 그러나 우리의 보속, 곧 우리 죄 때문에 치르는 보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우리 처지로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모든 일을 할 수 있다.”(60) 이처럼 사람은 결코 자신을 영광스럽게 할 수 없으며, 우리의 모든 ‘영광’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서”(61) 보속한다. 이 열매는 그리스도에게서 힘을 얻고, 그리스도에 의하여 성부께 바쳐지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부께 받아들여진다.(62)
- VIII. 고해성사의 집전자
- 1461 그리스도께서 당신 사도들에게 화해의 직무를 맡기셨으므로,(63) 그들의 후계자인 주교들과 주교들의 협력자인 사제들은 이 직무를 계속 수행한다. 실제로 주교와 사제들은 성품성사의 힘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모든 죄를 용서할 권한을 가지게 된다.
- 1462 죄를 용서받음으로써 하느님과 화해할 뿐 아니라 교회와도 화해한다. 그러므로 개별 교회의 볼 수 있는 으뜸인 주교는 예로부터 화해의 주된 권한과 직무를 가진 사람으로 당연히 인정되어 왔다. 주교는 고해성사 규율의 감독이다.(64) 주교의 협력자인 사제들은 교회법을 통해서 주교나 (또는 수도회 장상이나) 교황에게 위임을 받아 고해성사의 직무를 수행한다.(65)
- 1463 특히 중대한 어떤 죄들에 대해서는 가장 엄한 교회의 벌인 파문이 내려진다. 파문을 당하면 성사를 받지 못하며, 일정한 교회 활동을 하지 못한다.(66) 이러한 파문을 푸는 권한은 교회법에 따라 그 지역의 주교와 교황, 또는 이들에게서 권한을 받은 사제들만이 가지고 있다.(67) 파문된 사람이 죽을 위험에 있을 때에는, 고백을 들을 권한이 없는 사제까지도 포함하여, 모든 사제가 모든 죄와 파문에서 그를 풀어 줄 수 있다.(68)
- 1464 사제는 신자에게 고해성사를 받도록 권고해야 하며, 신자가 합리적으로 이 성사를 요청할 때마다 언제나 기꺼이 들어 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 주어야 한다.(69)
- 1465 고해성사를 거행할 때 사제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착한 목자, 상처를 싸매 주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 탕자를 기다리다 맞아들이는 아버지,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공정하고 자비로운 판결을 내리는 의로운 재판관의 직무를 다해야 한다. 한마디로 사제는 죄인에 대한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 주는 표지이며 도구이다.
- 1466 고해 사제는 하느님의 용서를 마음대로 다루는 주인이 아니라 종이다. 이 성사의 집전자는 그리스도의 뜻과 사랑에 결합되어 있어야 한다.(70) 그는 그리스도인의 행동을 잘 이해하고, 인간사에 대한 경험도 터득해야 하며, 죄에 떨어진 사람을 존중하고 배려해야 한다. 고해 사제는 진리를 사랑하고 교회의 교도권에 충실해야 하며, 고백하는 사람을 치유와 완전한 성숙으로 인내로이 인도해야 한다. 그는 고백자를 자비로우신 주님께 맡겨 드리고 그를 위해 기도하고 속죄해야 한다.
- 1467 이 직무는 미묘하고 중대한 것이며, 사람들을 존중해야 하므로, 교회는 고백을 듣는 모든 사제가 고백자에게서 들은 죄에 대해 절대 비밀을 지킬 의무가 있으며, 이를 어길 경우 매우 준엄한 벌을 받는다고 천명한다.(71) 고해 사제는 고해를 통하여 고백자들의 삶에 대해 알게 된 것을 인용해서도 안 된다.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 이 비밀을 ‘성사의 봉인’(고해 비밀)이라고 한다. 고백자가 사제에게 말한 것은 성사로 ‘봉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 IX. 고해성사의 효과
- 1468 “고해성사의 완전한 효능은 하느님의 은총을 회복시켜 주고 지고한 우정으로 하느님과 결합하게 해 주는 것이다.”(72) 그러므로 이 성사의 목적과 효과는 하느님과 이루는 화해이다. 통회하는 마음과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고해성사를 받는 사람들에게는 “양심의 평화와 안심이 따르고, 힘있는 영적 위로가 더해진다.”(73) 실로 하느님과 화해하는 고해성사는 참된 ‘영적 부활’과 하느님 자녀로서 지니는 품위와 삶의 선익을 회복시켜 주며, 그 가운데 가장 소중한 것은 하느님과 나누는 사랑이다.(74)
- 1469 이 성사는 우리를 교회와 화해시켜 준다. 죄는 형제적 친교를 약화시키거나 파괴한다. 고해성사는 그 친교를 바로잡고 회복시킨다. 이러한 의미에서 고해성사는 교회와 친교를 회복하는 그 사람만을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체가 지은 죄 때문에 손상을 입은 교회의 생명을 되살리는 효과도 있다.(75) 성도들과 친교를 회복하거나 이를 확인받은 죄인은, 아직 나그넷길에 있거나 이미 천상 고향에 있는 그리스도 신비체의 살아 있는 모든 지체와 영적인 자산을 나눔으로써 굳건해진다.(76)
- 하느님과 하는 이 화해는 죄가 만들어 냈던 균열을 다시 메우는 여러 수준의 다른 화해에까지 발전하게 됩니다. 용서받은 참회자는 자기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 자신과 화해하며, 거기서 참된 자아를 회복합니다. 그다음에, 그는 자기가 어떤 모양으로든지 상처를 주고 손해를 끼친 형제들과도 화해하게 됩니다. 그는 교회와도 화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온 창조계와도 화해하게 되는 것입니다.(77)
- 1470 이 성사에서 죄인은 자신을 하느님의 자비로운 심판에 맡겨 드림으로써, 어떤 의미에서는 이 지상의 삶이 끝날 때 받게 될 심판을 앞당겨 받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것은 이 현세 생활에서 영원한 생명과 죽음에 대한 선택권이 우리에게 주어지기 때문이며, 대죄를 지은 채로는 들어갈 수 없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은 회개밖에 없기 때문이다.(78) 죄인은 참회와 신앙을 통하여 그리스도께 돌아섬으로써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 “심판을 받지 않는다”(요한 5,24).
- X. 대사
- 1471 교회 안의 대사(大赦)에 대한 교리와 관습은 고해성사의 효과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 대사란 무엇인가-
- “대사란, 이미 그 죄과에 대해서는 용서받았지만, 그 죄 때문에 받아야 할 잠시적인 벌[暫罰]을 하느님 앞에서 면제해 주는 것인데, 선한 지향을 가진 신자가 일정한 조건을 충족시켰을 때, 교회의 행위를 통해 얻는다. 교회는 구원의 분배자로서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보속의 보물을 자신의 권한으로 나누어 주고 활용한다.”79)
- “대사는 죄 때문에 받게 될 잠시적인 벌을 부분적으로 면제하느냐, 전적으로 면제하느냐에 따라 부분 대사와 전대사로 구분된다.”80) “어느 신자든지 자기 자신을 위하여 대사를 얻을 수 있고 또는 죽은 이들을 위하여 활용할 수도 있다.”81)
- 죄에 대한 벌
- 1472 교회의 이러한 교리와 관습을 이해하려면 죄는 두 가지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대죄는 우리에게서 하느님과 이루는 친교를 박탈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없게 하는데, 이처럼 영원한 생명을 상실하는 것을 죄의 ‘영벌’이라고 한다. 한편 모든 죄는, 소죄까지도, 피조물들에 대한 불건전한 집착을 초래하는데, 이는 이 세상에서나 죽은 뒤에 연옥이라고 부르는 상태의 정화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정화로 이른바 죄의 ‘잠벌’에서 벗어난다. 이 두 가지 벌을 하느님께서 외부에서 가하시는 일종의 복수로 이해해서는 안 되며, 죄 그 자체에서 나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열렬한 사랑에서 나오는 회개는 죄인을 온전한 정화에 이르게 하여 아무런 벌도 남지 않게 할 수 있다.(82)
- 1473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과 맺는 친교를 회복하면 죄의 영벌은 면제되지만 잠벌은 남아 있다. 그리스도인은 갖가지 고통과 시련을 인내로이 견디고, 때가 되면 죽음을 차분한 마음으로 맞음으로써 죄의 잠벌들을 은총으로 받아들이도록 힘써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자비와 자선의 행위와 더불어 기도와 여러 속죄 행위로 “묵은 인간”을 완전히 벗어 버리고, “새로운 인간”으로(83) 갈아입도록 힘써야 한다.
- 성인들의 통공 안에서
- 1474 자신의 죄를 깨끗이 정화하고 하느님 은총의 도움으로 거룩하게 되려고 애쓰는 그리스도인은 외롭지 않다. “하느님 자녀 각자의 생명은, 그리스도 신비체의 초자연적 단일성 안에서, 마치 신비로운 한 인격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 형제들의 생명과 놀랍게 연결되어 있다.”(84)
- 1475 성인들의 통공 안에는 “신자들 ─ 이미 천상 고향에 이른 사람들, 연옥에서 속죄하고 있는 사람들, 아직 지상에서 순례하고 있는 사람들 ─ 사이에 변함없는 사랑의 유대와 모든 선의 풍부한 나눔이 있다.”(85) 이러한 놀라운 교류로, 어느 한 사람의 죄가 다른 사람들에게 끼칠 수 있었던 손해보다는, 한 사람의 거룩함이 다른 사람들에게 끼치는 선익이 훨씬 더 크게 된다. 따라서 성인들의 통공에 의지하면 통회하는 죄인이 죄의 벌에서 더 일찍, 더 효과적으로 정화될 수 있다.
- 1476 우리는 성인들의 통공이라는 이 영적인 재산을 교회의 보화라고 부른다. “이 보화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쌓이는 물질적인 부요와 같은 어떤 재물의 총화가 아니라, 인류가 죄에서 해방되어 하느님 아버지와 일치를 이루도록 바쳐진 우리 주 그리스도의 속죄와 공로이며,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무한하고 무궁한 가치가 있는 보화이다. 우리 구원자이신 그리스도께는 속량 공로가 충만하다.”(86)
- 1477 “이 보화에는 무엇보다도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모든 성인의 기도와 선업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참으로 하느님 앞에서 헤아릴 수 없는 무한하고 새로운 가치를 지닌다. 그들은 모두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그분의 은총으로 거룩하게 살며 성부께서 그들에게 맡기신 사명을 완수하였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의 구원을 얻었고 신비체의 일치 안에서 형제의 구원에 협력하였다.”(87)
- 교회를 통하여 하느님의 대사를 얻는다
- 1478 교회를 통하여 대사를 얻는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 받은 매고 푸는 권한으로 그리스도인을 위해 중개하여, 그의 죄로 말미암은 잠벌의 사면을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 얻도록,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공로의 보고를 그에게 열어 준다. 이처럼 교회는 그 신자를 도울 뿐 아니라, 신심 행위와 참회와 자선을 행하도록 그를 격려하기도 한다.(88)
- 1479 정화 중에 있는 죽은 신자들도 성인들과 통공을 이루는 같은 지체들이므로, 우리는 그들을 위한 다른 도움과 더불어, 특히 그들의 죄로 말미암은 잠벌을 사면해 주는 대사로써 그들을 도울 수 있다.
- XI. 고해성사의 거행
- 1480 다른 모든 성사와 마찬가지로 고해성사도 전례 행위이다. 이 전례의 거행은 보통 다음과 같은 요소들로 이루어진다. 사제의 인사와 축복, 양심을 비추고 통회를 일으키기 위해 하느님의 말씀을 읽음, 뉘우치도록 권고함, 죄를 인정하고 사제에게 밝히는 고백, 보속을 정해 주고 받음, 사제의 사죄경, 감사의 찬미, 사제가 고백자를 축복하여 돌려보냄 등.
- 1481 비잔틴 전례에서는 용서의 신비를 놀랍도록 잘 표현하는 여러 가지 탄원 형태의 사죄경이 있다. “하느님께서는 다윗이 자신의 죄를 고백했을 때 예언자 나탄을 통하여 그를 용서하셨으며, 베드로가 슬피 울었을 때 그를 용서해 주셨고, 죄 많은 여자가 당신 발에 눈물을 쏟았을 때 그를 용서해 주셨으며, 세리와 탕자를 용서해 주셨으니, 그 하느님께서 죄인인 나를 통하여 이 세상과 내세에서 그대를 용서하시어 하느님의 무서운 심판 대전에 섰을 때 그대를 단죄하지 않으시기를 빕니다. 주님께서는 영원히 찬미받으소서. 아멘.”(89)
- 1482 고해성사는 여럿이 함께 고백을 준비하고, 받은 용서에 대해 함께 감사하는 공동 거행의 형식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이때 개인적인 죄의 고백과 개별적인 사죄는, 독서와 강론, 공동의 양심 성찰, 공동의 용서 청원, 주님의 기도, 공동의 감사와 함께 이루어지는 말씀 전례 안에 삽입되어 있다. 고해성사의 이 공동 거행은 참회의 교회적 성격을 더욱 분명하게 표현한다. 고해성사는 그 거행의 방식이 어떠하든, 본질상 언제나 전례 행위이며, 교회적이고 공적인 행위이다.(90)
- 1483 중대한 필요가 있을 때에 일괄적으로 고백하고 일괄적으로 죄를 용서해 주는 고해성사의 공동 거행이 가능하다. 중대한 필요란, 죽음의 위험이 임박하여 한 사제나 여러 사제가 고백자 한 사람 한 사람의 고백을 들을 만한 충분한 시간이 없을 경우를 말한다. 중대한 필요는, 또한 고백자들의 수로 보아, 적절한 시간 안에 각자의 개별 고백을 듣기에는 고해 사제의 수가 부족하여서, 고백자들이 자기들의 탓 없이 오랫동안 성사의 은총을 받지 못하거나 영성체를 하지 못하게 될 경우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경우에 사죄가 유효하려면 신자들이 적절한 때에 자신들의 대죄를 고백하겠다는 의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91) 일괄 사죄에 요구되는 조건의 여부는 교구장이 판단한다.(92) 큰 축일이나 순례를 위해 많은 신자가 모이는 것은 이 중대한 필요성의 경우에 해당되지 않는다.(93)
- 1484 “물리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불가능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개인적으로 죄를 온전히 고백하고 사죄를 받는 개별 고백은, 신자들이 하느님과 교회와 화해하는 유일한 일반적 방식이다.”(94) 여기에는 깊은 이유가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하나의 성사 안에서 활동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말씀하신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필요로 하는 병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95) 정성을 기울여 고쳐 주시는 의사이시다. 그들을 일으켜 형제들과 다시 친교를 이루게 하신다. 그러므로 개별 고백은 하느님에 대한 화해와 교회에 대한 화해의 의미를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는 형식이다.
- 간추림
- 1485 부활하신 날 저녁, 주 예수님께서는 당신 사도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 1486 세례 받은 다음에 지은 죄의 용서는 회개의 성사, 고백 성사, 참회의 성사, 화해 성사라고 불리는 고해성사를 통하여 주어진다.
- 1487 죄를 짓는 사람은 하느님의 영예와 그분의 사랑을 손상하는 것이며, 하느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자신의 인간적 품위와, 그리스도인이 그 살아 있는 돌이 되어야 하는 교회의 영적 선익에 손상을 입히는 것이다.
- 1488 신앙의 눈으로 보면, 죄보다 더 중대한 악이 없고, 죄인 자신과 교회와 세상 전체에 이보다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없다.
- 1489 죄로 잃었던 하느님과의 친교를 회복하는 것은, 자비로우시고 인간의 구원을 염려하시는 하느님의 은총에서 생기는 변화이다. 자신과 남을 위해 이 귀중한 선물을 청해야 한다.
- 1490 회개와 참회라고 불리는, 하느님께 돌아오는 이 전향은 지은 죄에 대한 고통과 후회, 그리고 다시는 죄짓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회개는 과거와 미래에 관계되며, 자비로우신 하느님에 대한 희망으로 힘을 얻는다.
- 1491 고해성사는 고백자의 세 가지 행위와 사제의 사죄로써 이루어진다. 고백자의 세 가지 행위는 통회, 사제에게 죄를 말하는 고백, 그리고 보속하겠다는 결심과 그 이행이다.
- 1492 통회라고도 하는 참회는 신앙의 동기로 일어나야 한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통회를 하였다면 ‘완전한’ 통회라 하고, 다른 동기에 근거를 두었다면 ‘불완전한’ 통회라 한다.
- 1493 하느님과 교회와 화해하고자 하는 사람은 진지하게 양심을 성찰해서 기억해 낸, 아직 고백하지 않은 모든 대죄를 사제에게 고백해야 한다. 소죄의 고백은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교회는 이를 강력하게 권고한다.
- 1494 고해 사제는 고백자에게 죄로 생긴 손해를 갚고,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합당한 생활 태도를 다시 갖추기 위한 ‘보상’이나 ‘속죄’를 하도록 권한다.
- 1495 교회 권위로부터 사죄권을 받은 사제들만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할 수 있다.
- 1496 고해성사의 영적 효과는 다음과 같다.
- - 고백자에게 은총을 회복시켜 주는 하느님과 화해
- - 교회와 화해
- - 죽을죄로 받게 되었던 영벌의 사면
- - 죄의 결과인 잠벌의 적어도 부분적인 사면
- - 양심의 평화와 안온, 영적 위안
- - 그리스도인의 영적 싸움을 위한 힘의 증대
- 1497 개인적으로 대죄를 온전히 고백하고 그에 따른 사죄를 받는 개별 고백만이 하느님과 교회와 화해하는 유일한 통상적 방식이다.
- 1498 신자들은 대사로써 자신과 연옥 영혼들을 위하여, 죄의 결과인 잠벌을 사면받을 수 있다.
- 제5절 병자성사(病者聖事)
- 1499 “병자들의 거룩한 도유와 사제들의 기도로 온 교회는 수난하시고 영광을 받으신 주님께 병자들을 맡겨 드리며, 그들의 병고를 덜어 주시고 낫게 하여 주시도록 간청하는 한편, 병자들도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자유로이 결합시켜 하느님 백성의 선익에 기여하도록 권고한다.”(96)
- I. 구원 경륜에서 본 병자성사의 근거들
- 인생과 질병
- 1500 인생을 가장 괴롭혀 온 문제들 중에는 늘 질병과 고통이 들어 있다. 질병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무능과 한계, 유한성을 체험한다. 모든 질병은 죽음을 예감하게 한다.
- 1501 질병은 우리를 번뇌로 이끌기도 하고, 자신 안에 도피하는 사람으로 만들기도 하며, 때로는 하느님에 대한 실망과 반항으로까지 이끌 수도 있다. 반면에 질병은 사람을 더욱 성숙하게 할 수도 있고, 그의 삶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을 분별하여 본질적인 것을 향해 나아가도록 도와줄 수도 있다. 많은 경우에, 질병은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께 돌아오게 한다.
- 하느님 앞의 병자
- 1502 구약 성경의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병으로 고통당한다. 하느님께 자신의 병에 대해 하소연을 늘어놓고,(97) 삶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하느님께 치유를 애원한다.(98) 질병은 회개의 길이 되고,(99) 하느님의 용서는 치유의 시발이 된다.(100) 이스라엘은, 병이 신비하게 죄와 악과 관련되어 있으며, 율법에 따라 하느님께 충실하면 생명을 돌려받는다는 것을 체험한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를 낫게 하는 주님이다”(탈출 15,26). 예언자는 고통이 타인의 죄를 속량하는 의미도 가질 수 있음을 깨닫는다.(101) 마침내 이사야는 하느님께서 시온을 위해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병을 고쳐 주실 때가 오리라고 예고한다.(102)
- 의사이신 그리스도
- 1503 그리스도께서 병자들을 동정하시고, 여러 가지 병을 고쳐 주셨다는 것은(103)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고(104)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명백한 표징이다. 예수님께서는 치유의 능력뿐 아니라 죄를 용서하는 권한도 가지셨다.(105)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영혼과 육신을 모두 고쳐 주려고 오셨다. 그분께서는 병자들에게 필요한 의사이시다.(106) 그분께서는 고통당하는 모든 사람에 대한 연민으로 자신을 그들과 동일시하기까지 하셨다. “너희는 내가 병들었을 때에 나를 돌보아 주었다”(마태 25,36). 병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은, 영혼과 육체의 고통을 겪는 모든 사람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매우 각별한 관심을 오랜 세월 동안 불러일으켜 왔다. 이러한 특별한 관심은 고통 받는 이들의 아픔을 덜어 주고자 하는 지칠 줄 모르는 노력의 근원이다.
- 1504 예수님께서는 자주 병자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셨다.(107) 예수님께서는 침을 바르고 안수하시며,(108) 진흙을 바르고 물로 씻는(109) 표징들을 사용하여 병을 고치신다. 병자들은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준”(루카 6,19) 것을 보고 모두 예수님을 만지려고 하였다.(110) 이처럼 성사 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치유하시려고 끊임없이 우리를 ‘만지신다.’
- 1505 이렇게 많은 고통에 마음이 움직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병자들이 당신을 만지도록 허락하실 뿐 아니라, 그들의 불행을 당신의 불행으로 여기신다. “그분은 우리의 병고를 떠맡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셨다”(마태 8,17).(111) 예수님께서 모든 병자를 다 고쳐 주신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치유 행위는 하느님 나라가 도래했다는 징표들이었고, 더 근본적인 치유, 곧 당신 파스카를 통한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악의 모든 무거운 짐을 짊어지셨고,(112) “세상의 죄”(요한 1,29)를 치워 없애셨다. 병은 단지 세상의 죄의 결과일 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수난과 십자가 위의 죽음으로 고통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고통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닮고, 속량을 위한 그분의 수난에 결합될 수 있다.
- “앓는 이들은 고쳐 주어라”
- 1506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권고하신다.(113)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병과 병자를 새롭게 이해하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당신의 가난하고 봉사하는 삶에 함께하도록 하며, 연민과 치유의 직무에 참여시키신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마르 6,12-13).
- 1507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이 파견을 새롭게 하신다. (“내 이름으로……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마르 16,17-18). 그리고 주님께서는 교회가 당신의 이름으로 행하는 표징들을 통하여 이 파견을 확인해 주신다.(114) 그 표징들은 예수님께서 참으로 “구원하시는 하느님”이시라는(115) 것을 특별하게 나타낸다.
- 1508 성령께서는 어떤 이들에게 특별한 치유의 은사를 주시어,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이 지닌 힘을 나타내신다.(116)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모든 병이 다 치유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12,9)는 것을 배워야 했고, 또 고통을 견뎌 내는 것은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다.”(콜로 1,24)는 의미가 있음을 배워야 했다.
- 1509 “앓는 이들은 고쳐 주어라”(마태 10,8). 주님께 이러한 사명을 받은 교회는 병자들을 보살피고 아울러 그들을 위해 전구의 기도를 드림으로써 이 사명을 수행하고자 노력한다. 교회는 영혼과 육체의 의사이신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는 현존을 믿는다. 이 현존은 특별히 성사들 안에서 작용하며,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인(117) 성체성사 안에서는 특별한 방식으로 효과를 낸다. 바오로 사도는 성체와 육체적 건강의 관계를 암시하고 있다.(118)
- 1510 사도 시대의 교회에는 병자들을 위한 특별한 예식이 있었다. 야고보 사도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여러분 가운데에 앓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의 원로들을 부르십시오. 원로들은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십시오. 그러면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야고 5,14-15). 성전(聖傳)은 이 예식을 교회의 일곱 가지 성사 중의 하나로 인정하였다.(119)
- 병자성사
- 1511 교회는 일곱 성사 중에 특별히 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기 위한 성사가 있음을 믿고 고백한다. 병자성사가 그것이다.
- 병자의 거룩한 도유는 진실되고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신약의 성사로 세우신 것이라고 마르코 복음서에 암시되고 있으며,(120) 주님의 사도이며 형제인 야고보가 신자들에게 권고하고 선포한 것이다.(121)
- 1512 서방에서와 마찬가지로 동방에서도 전례 전승에는 예로부터 축성한 기름을 병자들에게 발라 주는 관습이 있었다는 증거들이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병자의 도유는 점차 죽을 위험이 더 큰 사람에게만 베풀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도유를 ‘마지막 도유’(종부 성사)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에도, 만일 그것이 병자의 구원을 위해 좋은 일이라면, 건강을 회복하도록 주님께 기도하는 것을 전례에서 배제한 적이 전혀 없다.(122)
- 1513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따라,(123) 교황령 “병자의 도유”(Sacram Unctionem Infirmorum, 1972년 11월 30일자)는 로마 예법에서 다음 사항을 준수하도록 규정하였다.
- 병자성사는 위독한 병자들에게 베푸는 것인데, 정식으로 축성한 올리브 기름이나 때에 따라 다른 식물성 기름을 병자의 이마와 양손에 바르며, 다음과 같은 기도문을 한 번만 외운다. “주님께서는 주님의 자비로우신 사랑과 기름 바르는 이 거룩한 예식으로 성령의 은총을 베푸시어 이 병자를 도와주소서. 또한 이 병자를 죄에서 해방시키시고 구원해 주시며 자비로이 그 병고도 가볍게 해 주소서.”(124)
- II. 누가 이 성사를 받으며, 누가 집전하는가-
- 병이 중한 경우에
- 1514 병자성사는 “생명이 위급한 지경에 놓인 사람들만을 위한 성사가 아니다. 그러므로 분명히 이 성사를 받는 적절한 시기는 이미 신자가 질병이나 노쇠로 죽을 위험이 엿보이는 때로 여겨진다.”(125)
- 1515 병자성사를 받은 병자가 건강을 회복했다가 다시 중병에 걸리게 되면 이 성사를 다시 받을 수 있다. 같은 병으로 앓다가 병이 더 중해지는 경우에도 이 성사를 다시 받을 수 있다. 중한 수술을 받기 전에 병자성사를 받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급격히 쇠약해지는 노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 “교회의 원로들을 청하십시오”
- 1516 사제들(주교와 신부들)만이 병자성사를 거행한다.(126) 신자들에게 이 성사의 선익에 대해 가르치는 것은 사목자들의 의무이다. 신자들은 이 성사를 받기 위해 사제를 청하도록 병자들을 격려해야 한다. 병자들은 그들의 목자와 온 교회 공동체의 도움을 받아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이 성사를 받도록 준비하여야 한다. 교회 공동체 전체는 병자들을 특별히 기도와 형제적인 사랑으로 감싸 주어야 한다.
- III. 병자성사는 어떻게 거행되는가-
- 1517 다른 모든 성사와 마찬가지로 병자성사도 가정에서 거행하든 병원이나 성당에서 거행하든, 한 사람의 병자를 위해 거행하든 여러 병자들을 위해 거행하든, 전례적이고 공동체적인 것이다.(127) 이 성사는 주님의 파스카를 기념하는 미사 중에 거행하는 것이 매우 합당하다. 상황이 허락하면, 고해성사를 먼저 베풀고, 병자성사 뒤에 성체성사를 줄 수도 있다. 그리스도의 파스카 성사로서 성체는 언제나 지상 순례 길의 마지막 성사,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기’ 위한 ‘노자’(路資) 성사가 되어야 한다.
- 1518 말씀과 성사는 불가분의 전체를 이룬다. 참회 기도에 이은 말씀 전례로 성사 거행이 시작된다. 그리스도의 말씀과 사도들의 증언은 병자와 공동체의 신앙을 일깨워 주님께 성령의 권능을 청하게 한다.
- 1519 성사의 거행에는 주로 다음과 같은 요소들이 포함된다. “교회의 원로들”은(128) ─ 침묵 중에 ─ 병자에게 손을 얹는다. 그리고 교회의 신앙 안에서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129) 이것이 이 성사의 고유한 성령 청원 기도이다. 이때 가능하면 주교가 축성한 기름을 발라 준다.
- 이러한 전례적 행위들은 이 성사가 병자들에게 어떤 은총을 주는지를 가리킨다.
- IV. 병자성사의 효과
- 1520 성령의 특별한 선물. 병자성사의 근본적인 은총은 중병이나 노쇠 상태의 어려움들을 이겨 내는 데에 필요한 위로와 평화와 용기의 은총이다. 이 은총은 하느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새롭게 하고, 마귀의 유혹, 곧 죽음 앞에서 번뇌와 좌절에 빠지는 유혹에 흔들리지 않게 해 주시는 성령의 선물이다.(130) 성령의 힘을 통해 주시는 주님의 이러한 도움은 병자들의 영혼을 치유하기 위한 것이지만,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면, 육체도 치유한다.(131) 그뿐 아니라, “그가 죄를 지었으면 용서를 받을 것이다”(야고 5,15).(132)
- 1521 그리스도의 수난에 결합됨. 이 성사의 은총으로 병자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수난에 더욱 가까이 결합시키는 힘과 은혜를 받는다. 어떤 의미에서 병자는 구세주의 속량하시는 수난을 닮음으로써 열매를 맺도록 축성되는 것이다. 원죄의 결과인 고통에 새로운 의미가 부여된다. 곧 고통은 예수님의 구원 사업에 참여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 1522 교회의 은총. 이 성사를 받은 “병자들도 스스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자유로이 결합하여, 하느님 백성의 선익에 기여”(133) 한다. 교회는 이 성사를 거행함으로써 성인들의 통공 안에서 병자들의 선익을 위해 전구한다. 또 병자도 나름대로 이 성사의 은총을 통해서 교회의 성화와 모든 이의 선익에 이바지한다. 교회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고통을 당하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을 하느님 아버지께 봉헌하는 것이다.
- 1523 마지막 길의 준비. 병자성사가 병으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과 중대한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 모두를 위한 것이라면, 이는 특히 “생명이 떠나려는 순간에 처한 이들”(134) 에게 베풀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성사를 “떠나는 이들의 성사”(135) 라고도 불렀다. 병자성사는 세례로 시작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동화하는 일치를 완성한다. 이 성사는 그리스도인의 일생 동안 이루어지는 거룩한 도유들을 완결 짓는다. 세례 때의 도유는 우리 안에 새 생명을 새겨 주었고, 견진의 도유는 이 생명의 싸움을 위하여 우리를 굳건하게 해 주었다. 병자성사의 마지막 도유는 하느님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기 전에 있을 마지막 싸움에 대비하여 우리 지상 생활의 마지막에 튼튼한 방패를 마련해 준다.(136)
- V. 그리스도인의 마지막 성사인 노자 성체
- 1524 교회는 죽음을 앞둔 사람들에게 병자의 도유 외에도 노자(路資)로 성체를 준다. 아버지께로 건너갈 때에 모시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특별한 의미와 중요성을 지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54) 하신 주님의 말씀과 같이, 이 성체는 영원한 생명의 씨앗이며 부활의 힘이다. 죽었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성사인 성체성사가 여기에서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 세상에서 하느님 아버지께로 건너가는 성사가 된다.(137)
- 1525 따라서 세례성사와 견진성사, 성체성사가 ‘그리스도교 입문 성사’라는 단일성을 가지듯이 고해성사와 병자성사, 그리고 노자로 모시는 성체성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종말에 이르렀을 때 ‘천상 고향에 갈 준비를 갖추는 성사’ 또는 나그넷길을 마무리하기 위한 성사들이라고 할 수 있다.
- 간추림
- 1526 “여러분 가운데에 앓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의 원로들을 부르십시오. 원로들은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십시오. 그러면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야고 5,14-15).
- 1527 병자성사의 목적은 중병이나 노쇠에 따르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푸는 것이다.
- 1528 신자가 병이나 노쇠로 죽을 위험을 맞기 시작하면 병자성사를 받을 적절한 때가 온 것이다.
- 1529 그리스도인은 중병이 들었을 때마다 병자성사를 받을 수 있으며, 이 성사를 받은 이후 병이 악화되었을 경우에도 받을 수 있다.
- 1530 사제들(주교와 신부들)만이 병자성사를 베풀 수 있다. 그들은 이 성사를 위해 주교가 축성한 기름을 사용하며, 필요한 경우에는 성사를 거행하는 사제가 축성해서 쓰기도 한다.
- 1531 이 성사 거행의 핵심은 병자의 이마와 양손(로마 예법) 또는 몸의 다른 부위(동방 예법)에 기름을 바르는 것이다. 주례 사제는 기름을 바르면서 이 성사의 특별한 은총을 청하는 전례 기도를 드린다.
- 1532 병자성사가 이루어 주는 특별한 은총은 다음과 같다.
- - 병자가 자신과 온 교회의 선익을 위해 그리스도의 수난과 결합됨
- - 병이나 노쇠의 고통을 그리스도인답게 견디는 데 필요한 위안과 평화와 용기
- - 병자가 고해성사로 죄의 용서를 받지 못한 경우 죄의 용서
- - 영적인 구원에 적합한 경우 건강의 회복
- -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는 준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