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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01 “혼인 서약은, 이로써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 그 본연의 성질상 부부의 선익과 자녀의 출산 및 교육을 지향하는 평생 공동 운명체를 이루는 것인바, 주 그리스도에 의하여 영세자들 사이에서는 성사의 품위로 올려졌다.”(93)
  • I. 하느님의 계획과 혼인
  • 1602 성경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남자와 여자의 창조로 시작하여(94) “어린양의 혼인 잔치”(묵시 19,9)에(95) 대한 환시로 끝맺는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혼인과 그 “신비”, 혼인의 제정과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의미, 그 기원과 목적, 구원의 역사를 통한 혼인의 다양한 실현, 죄로 생긴 혼인의 어려움과, 그리스도와 교회의 새로운 계약을 통하여 “주님 안에서”(1코린 7,39) 이루어진 혼인의 새로운 의미에 대해 말하고 있다.(96)
  • 창조 질서와 혼인
  • 1603 “창조주께서 제정하시고 당신의 법칙으로 안배하신, 생명과 사랑의 내밀한 부부 공동체는 인격적인 합의로 맺은 결코 철회할 수 없는 계약으로 세워진다.……하느님께서 바로 여러 가지 선과 목적을 지닌 혼인의 제정자이시다.”(97) 혼인의 소명은 창조주의 손으로 지으신 남자와 여자의 본성에 새겨져 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여러 가지 문화와 사회 구조와 사고방식으로 수많은 변화를 겪었다 하더라도, 혼인은 단순히 인간적인 제도가 아니다. 그 다양성 때문에 혼인의 공통적이고 항구 불변한 특성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제도의 존엄성이 어디에서나 똑같이 명백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98) 모든 문화는 혼인 결합의 숭고함을 인정한다. “개인의 행복, 일반 사회와 그리스도교 사회의 안녕은 부부 공동체와 가정 공동체의 행복한 상태에 직결되어 있다.”(99)
  • 1604 사랑으로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또한 사랑에로 그를 부르셨다. 사랑은 모든 인간이 타고난 근본 소명이다. 인간은 바로 “사랑이신”(1요한 4,8.16) 하느님과 닮은 모습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100)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 남녀 사이의 사랑이 당신께서 사람을 사랑하시는 절대적이고 변함없는 사랑의 표상이 되게 하신다. 이 사랑은 창조주께서 보시기에 좋은, 매우 좋은 것이다.(101) 그리고 하느님께서 축복하시는 이 사랑은 풍성한 열매를 맺고, 창조된 세상을 지키는 공동 노력으로 실현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창세 1,28).
  • 1605 성경은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창세 2,18).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그의 살에서 나온 살”(102) 곧 그와 동등하며 아주 가까운 “협력자”로(103) 여자를 주셨다. 이처럼 여자는 우리의 도움이신(104) 하느님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창세 2,24). 주님께서는 친히 “처음부터” 창조주의 계획이 무엇이었는지를 환기시키심으로써,(105) 이것이 그들 두 생명의 확고한 결합을 의미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다.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마태 19,6).
  • 죄의 지배 아래 놓인 혼인
  • 1606 사람은 누구나 자기 주변에서 또 자신 안에서 악을 체험한다. 이러한 체험은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서도 겪는 것이다. 예로부터 어느 시대에나 부부의 일치는 불화와 지배욕, 부정과 질투, 증오와 결별에까지 이를 수 있는 갈등의 위협을 받아 왔다. 이러한 혼란은 문화와 시대와 개인에 따라 더하거나 덜할 수 있고, 쉽게 극복되거나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혼란은 보편적인 것으로 보인다.
  • 1607 신앙에 따르면, 우리가 고통스럽게 확인하는 이 혼란은 남녀의 본성에서 오는 것도, 그들 관계의 본성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죄에서 오는 것이다. 하느님과 단절된 원죄의 첫 번째 결과는 부부의 원초적 친교가 단절된 것이다. 서로 비난함으로써 그들의 관계는 왜곡되었고,(106) 창조주께서 주신 본래의 선물인 상호 간의 매력은(107) 지배와 탐욕의 관계로 변하고,(108)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땅을 지배하라는,(109) 남편과 아내의 아름다운 소명에는 출산의 고통과 생계유지라는 고생이 부과되었다.(110)
  • 1608 창조 질서는 비록 몹시 손상되기는 했어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죄의 상처를 치유하려면 부부에게 하느님 은총의 도움이 필요하다. 무한히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이 은총의 도움을 한 번도 거절하지 않으셨다.(111) 이 도움이 없으면 부부는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그들을 창조하신 목적인 두 인격의 일치를 실현하지 못한다.
  • 율법으로 가르치던 시대의 혼인
  • 1609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죄지은 인간을 버리지 않으셨다. 죄에 따르는 벌인 “아기 낳는 고통”과(112) “얼굴에 땀을 흘려야 하는”(창세 3,19) 일은 죄의 피해를 줄이는 구제책이기도 하다. 타락 이후 혼인은 자기 폐쇄와 이기주의와 쾌락 추구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며, 타인에게 마음을 열고, 서로 돕고, 자기를 내어 주는 데 도움을 준다.
  • 1610 혼인의 단일성과 불가 해소성에 대한 윤리 의식은 옛 율법의 가르침에 따라 발달하였다. 성조들과 왕들의 일부다처제가 아직 명백히 배척되지는 않지만, 모세가 받은 율법은, 비록 주님의 말씀대로 사람의 “마음이 굳을 대로 굳어진” 흔적이 있고 또 그 때문에 모세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긴 했어도, 남편의 독단적 지배에서 아내를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다.(113)
  • 1611 예언자들은 이스라엘과 맺으신 하느님의 계약을 독점적이고 충실한 부부 사랑의 표상이라 보고(114) 혼인의 단일성과 불가 해소성을 깊이 이해하도록, 선택된 백성의 의식을 준비시켰다.(115) 룻기와 토빗기는 혼인과 부부의 신의와 애정이라는 고상한 의식에 대해 감동적인 증언을 담고 있다. 성전은, 아가에서 발견되는 “죽음처럼 강한” 사랑, “큰 물도 사랑을 끌 수 없고 강물도 휩쓸어 갈 수 없는”(아가 8,6-7) 사랑이라는 표현을 하느님의 사랑을 반영하는 인간 사랑의 독특한 표현으로 언제나 여겨 왔다.
  • 주님 안에서 맺는 혼인
  • 1612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 이스라엘과 맺으신 혼인 계약은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이 새로운 계약에서는,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어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으심으로써, 어떤 의미에서 당신이 구원하신 온 인류를 당신 자신과 결합시키셨으며,(116) 이로써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117) 준비하셨다.
  • 1613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혼인 잔치에서 ─ 당신 어머니의 청을 들어 ─ 첫 번째 기적을 행하신다.(118) 교회는 예수님께서 카나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신 일을 매우 중시한다. 교회는 이를 혼인의 선익에 대한 확인으로 여기며, 그때부터 혼인이 그리스도 현존의 유효한 표징이 될 것이라는 예고로 본다.
  • 1614 예수님께서는 전도하시는 동안 창조주께서 처음부터 원하신 부부 결합의 본래 의미를 분명하게 가르치셨다. 모세가 아내를 버려도 된다고 허락한 것은 사람들의 마음이 굳을 대로 굳어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양보한 것이었다.(119) 부부의 혼인 유대는 해소될 수 없다. 이는 하느님께서 친히 맺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 19,6).
  • 1615 혼인 유대의 불가 해소성에 대한 이 분명한 강조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할 수도, 또 실현할 수 없는 요구로 보일 수도 있었다.(120)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부들에게 모세의 율법보다 더 무겁고 감당하기에 벅찬 짐을 지우신 것은 아니었다.(121) 죄로 어지러워진 원래의 창조 질서를 회복시키려고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나라’라고 하는 새로운 차원에서 혼인 생활을 하도록 친히 힘과 은총을 주신다. 그리스도를 따르고, 자신을 끊어 버리며, 자신의 십자가를 짐으로써(122) 부부들은 그리스도의 도움으로 혼인의 본래 의미를 “파악하고”,(123) 이를 생활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 혼인의 이러한 은총은 모든 그리스도인 생활의 원천인 십자가의 열매이다.
  • 1616 이에 대하여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남편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교회를 말씀과 더불어 물로 씻어 깨끗하게 하셔서 거룩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에페 5,25-26). 그리고 다시 이렇게 덧붙인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됩니다.’ 이는 큰 신비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에페 5,31-32).
  • 1617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에는 부부애의 표상인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이 깃들어 있다.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세례가 이미 혼인 신비이다. 말하자면 세례는 성찬이라는 혼인 잔치의 음식을 먹기 전에 행하는 혼인을 위한 목욕인(124) 셈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혼인은 그리스도와 교회가 맺는 계약의 효과적인 표징 곧 성사가 된다. 혼인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결합에서 흘러나오는 은총을 뜻하고 또 그 은총을 나누어 주기 때문에, 세례 받은 사람들의 혼인은 신약의 참성사가 된다.(125)
  • 하늘 나라를 위한 동정
  • 1618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이시다. 그리스도와 맺는 유대는 가정이나 사회의 다른 모든 유대보다 우선한다.(126) 교회는 초기부터 어린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르고,(127) 주님의 일에 마음을 쓰며, 그분의 마음에 들고자 애쓰고,(128) 오시는 신랑을 맞으러 나가기 위하여(129) 혼인의 큰 선익을 포기한 남녀들이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모범이 되신 이러한 생활양식으로 당신을 따르도록 어떤 사람들에게 권고하셨다.
  • 사실 모태에서부터 고자로 태어난 이들도 있고, 사람들 손에 고자가 된 이들도 있으며, 하늘 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 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마태 19,12).
  • 1619 하늘 나라를 위한 동정은 세례의 은총에서 꽃피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와 맺는 유대의 우월성과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열렬한 기다림을 나타내는 강력한 표징이며, 또 혼인이 사라져 가는 현세의 실재임을(130) 상기시켜 주는 표징이다.
  • 1620 혼인성사와 하느님 나라를 위한 동정은 다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 두 가지 삶에 의미를 주시고, 당신 뜻에 맞게 살아가도록 필요한 은총을 주신다.(131) 하느님 나라를 위한 동정에 대한 평가와(132) 혼인의 그리스도교적 의미는 서로 분리될 수 없으며 상호 보완한다.
  • 혼인을 비하하는 것은 그만큼 동정의 영광을 감소시키는 것이며, 혼인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동정이 지닌 가치를 드높이는 것입니다.……요컨대 악과 비교해서만 선으로 보이게 되는 것은 참된 선이 될 수 없으니, 명백한 선보다 한층 더 나은 것이 참된 선이기 때문입니다.(133)
  • II. 혼인 예식의 거행
  • 1621 라틴 예법에서 두 가톨릭 신자 사이의 혼인은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와 모든 성사의 관련성을 고려하여 원칙적으로 미사성제 중에 거행한다.(134) 성찬례는 새 계약의 기념제인데,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목숨을 바쳐 사랑하신 신부 곧 교회와 새 계약으로 영원히 결합하셨다.(135) 그러므로 부부는 생명을 바쳐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 주겠다는 동의를, 성찬의 희생 제사 안에서 실현되는 교회를 위한 그리스도의 봉헌과 결합시킴으로써 확정하고, 영성체로 같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심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한 몸”을(136) 이루는 것 또한 마땅하다.
  • 1622 “혼인의 전례적 거행은……성화하는 성사적 행동인 까닭에, 당연히 그 자체로 유효하고 존엄하며, 열매를 맺어야 한다.”(137) 그러므로 신랑 신부는 혼인을 거행하기 위한 준비로 고해성사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
  • 1623 라틴 전통에 따르면 신랑 신부가 그리스도의 은총의 집전자로서, 교회 앞에서 혼인 합의를 표명함으로써 서로 혼인성사를 준다. 동방 교회의 전통에서는 사제 ─ 주교 또는 신부 ─ 가 신랑 신부의 상호 합의에 대한 증인이 된다.(138) 그러나 성사의 유효성을 위하여는 사제의 축복이 필요하다.(139)
  • 1624 여러 전례 전통들은 하느님께 은총을 청하는 축복 기도와 성령 청원 기도, 새 부부 특히 신부를 위한 축복 기도를 풍부하게 담고 있다. 혼인성사의 성령 청원 기도에서 신랑 신부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의 친교이신 성령을 받는다.(140) 성령께서는 친히 부부 계약의 인장이 되어 주시고, 부부의 사랑을 끊임없이 길어 내는 샘이 되시며, 부부의 신의를 늘 새롭게 하는 힘이 되어 주신다.
  • III. 혼인 합의
  • 1625 혼인 계약의 주인공은, 혼인 계약을 맺을 자유가 있으며, 자유롭게 자신들의 합의를 표명하는 세례 받은 남자와 여자이다. ‘자유가 있다’는 말은,
  • - 강요를 당하지 않고,
  • - 그 혼인이 자연법이나 교회법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 1626 교회는 신랑 신부의 합의 교환을 “혼인을 성립시키는”(141) 불가결한 요소로 간주한다. 합의가 없으면 혼인이 성립되지 않는다.
  • 1627 합의는 “부부가 자기 자신을 서로 주고받는 인간 행위”(142) 로서 “나는 당신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나는 당신을 남편으로 맞이합니다.”(143) 하고 선언함으로써 성립된다. 신랑 신부를 결합시키는 이 합의는 두 사람이 “한 몸”을 이룸으로써 완결된다.(144)
  • 1628 합의는 계약 당사자들의 의지 행위로서, 외부의 폭력이나 심한 공포로 속박을 받아서는 안 된다.(145) 어떠한 인간 권력도 혼인 합의를 대체할 수 없다.(146) 이러한 자유가 없다면 혼인은 무효다.
  • 1629 이러한 이유로 (또는 혼인을 완전히 무효화하고 성립되지 못하게 가로막는 다른 이유들 때문에(147) ) 교회는 관할 교회 법원을 통하여 상황을 조사한 후, ‘혼인 무효’, 곧 혼인이 성립된 일이 없다고 선포할 수 있다. 이 경우 당사자들은 자유롭게 혼인할 수 있다. 단 전의 결합에서 생긴 자연적 의무는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148)
  • 1630 혼인 예식을 주례하는 사제 (또는 부제)는 교회의 이름으로 신랑 신부의 합의를 받아들이고 교회의 축복을 베푼다. 교회의 성직자가 (또 증인이) 입회하는 것은 혼인이 교회적 행위라는 것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 1631 그렇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교회는 신자들에게 교회적 형식에 따라 혼인할 것을 요구한다.(149)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이유들은 일관되게 교회의 결정을 설명해 준다.
  • - 성사적인 혼인은 전례 행위이다. 따라서 혼인은 교회의 공적인 전례로 거행되는 것이 마땅하다.
  • - 혼인은 교회의 품계 안으로 들어가게 하며, 부부 사이와 자녀에 대하여 교회 내의 권리와 의무를 성립시킨다.
  • - 혼인은 교회 내의 생활 신분이므로, 혼인에 대한 확실성이 있어야 한다(그러므로 증인을 세울 의무가 따른다).
  • - 혼인 합의의 공적인 특성은, 그 합의가 표명된 뒤 이를 충실하게 지키도록 도와주고 보호한다.
  • 1632 신랑 신부의 혼인 합의가 자유롭고 책임 있는 것이 되고, 혼인 서약이 인간적이고 그리스도교적인 굳건하고 영속적인 기초를 지니려면 혼인에 대한 준비가 매우 중요하다.
  • 부모와 가정이 주는 모범과 가르침은 혼인 준비의 가장 탁월한 방법이다.
  • ‘하느님의 가족’으로서 목자들과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역할은 혼인과 가정의 인간적인 가치와 그리스도교적인 가치의 전달에 필수 불가결하다.(150) 더구나 많은 젊은이들이 이 기초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하는 결손 가정에 살고 있는 우리 시대에는 더욱 그러하다.
  • 젊은이들이 정결을 닦고 적절한 시기에 정숙한 약혼기를 거쳐 혼인에 이를 수 있도록, 부부 사랑의 존엄성과 그 임무와 행위에 대하여 특히 가정의 품 안에서 제때에 알맞은 교육을 받아야 한다.(151)
  • 혼종혼인과 비신자와의 혼인
  • 1633 혼종혼인(混宗婚姻: 가톨릭 신자와 세례 받은 비가톨릭 신자 사이의 혼인)은 많은 나라에서 흔한 일이다. 이러한 혼인에는 혼인 당사자들과 사목자들의 특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비신자와의 혼인(가톨릭 신자와 세례 받지 않은 사람 사이의 혼인)의 경우에는 더욱 신중한 주의가 필요하다.
  • 1634 부부가 각기 자신의 교단에서 받은 것을 공유하고 상대방에게서 그리스도에 대하여 충실하게 사는 방식을 배우게 된다면, 서로의 교파가 다른 것이 혼인에 극복할 수 없는 혼인 장애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혼종혼인의 어려움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이 어려움들은 그리스도인들의 분열이 아직 극복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이러한 부부들은 그리스도인들의 불화의 비극을 바로 자신들의 가정에서도 겪을 위험이 있다. 종교가 다른 경우에는 이 어려움이 한층 더 클 수 있다. 신앙의 불일치나 혼인관 자체에 대한 불일치뿐 아니라 서로 다른 종교적 사고방식은 혼인 생활, 특히 자녀 교육에서 갈등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리하여 종교적 무관심이라는 유혹이 생길 수 있다.
  • 1635 라틴 교회의 현행법에 따르면, 합법적으로 혼종혼인을 하기 위해서는 교회 관할권자의 명시적 허가가 있어야 한다.(152) 비신자 장애의 경우에 혼인의 유효성을 위해서는 장애에 대한 명시적 관면이 요구된다.(153) 이러한 허가나 관면은 쌍방이 혼인의 목적과 본질적인 특성을 거부하지 않고 인식하며, 더욱이 가톨릭 신자 편 당사자가 가톨릭 교회 안에서 자녀에게 세례를 받게 하고 교육시키며 그 신앙을 보호할 의무가 있음을 의식하고 있고, 비가톨릭 신자 편 당사자가 이를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154)
  • 1636 많은 지방에서는 그리스도교 일치 운동의 대화에 힘입어 관련 그리스도교 교단들이 혼종혼인을 위한 공동사목위원회를 조직했다. 이 공동사목위원회의 임무는 부부들이 자신들의 특수한 상황을 신앙에 비추어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다. 이 위원회는 또 배우자의 상호 의무와 자기가 속한 교회 공동체에 대한 의무, 이 두 가지 의무 사이의 긴장을 극복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위원회는 신앙에서 그들 부부가 공유한 것을 꽃피우고, 다른 점들을 존중하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어야 한다.
  • 1637 비신자와 혼인을 하는 가톨릭 신자 배우자에게는 특별한 의무가 있다. “신자 아닌 남편은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해졌고, 신자 아닌 아내는 그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해졌기 때문입니다”(1코린 7,14). 이 ‘거룩하게 하는 힘’이 배우자를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자유롭게 개종하게 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교 신자인 배우자와 교회에 큰 기쁨이 된다.(155) 부부의 진실한 사랑, 가정적 덕행의 겸손하고 참을성 있는 실천, 그리고 끊임없는 기도는 신자 아닌 배우자가 회개의 은총을 받아들일 준비를 갖추게 한다.
  • IV. 혼인성사의 효과
  • 1638 “유효한 혼인에서 부부 사이에 본성상 영구적이며 독점적인 유대가 생긴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교인 혼인에서는 부부들이 그들 신분의 의무와 품위를 위하여 특수한 성사로써 견고하게 되고 이를테면 축성된다.”(156)
  • 혼인 유대
  • 1639 하느님께서는 신랑 신부가 서로 자신을 주고받는다는 합의를 확정하신다.(157) 부부의 혼인 계약으로 “하느님께서 제정하신 견고한 제도가 사회 앞에 나타난다.”(158) 부부의 이 계약은 하느님과 사람들의 계약에 통합된다. “진정한 부부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 안으로 받아들여진다.”(159)
  • 1640 혼인 유대는 하느님께서 친히 제정하신 것으로서, 세례 받은 사람들 사이에 맺어지고 완결된 혼인은 절대로 해소될 수 없다. 부부의 자유로운 인간적 행위와 혼인을 완결 짓는 육체의 결합으로 발생되는 이 유대는 이제 취소할 수 없는 실재이며, 하느님의 성실하심으로 보장된 계약의 기원이다. 교회는 하느님 지혜의 이러한 안배를 거스를 권한이 없다.(160)
  • 혼인성사의 은총
  • 1641 그리스도교 신자 부부는 “하느님의 백성 가운데에서 자기 생활 신분과 영역에 고유한 은총을 받는다.”(161) 혼인성사의 이 고유한 은총은 부부의 사랑을 완전하게 하고, 해소될 수 없는 그들 사이의 일치를 강화한다. 이 은총으로 그들은 “부부 생활은 물론 자녀 출산과 교육을 통하여 성덕에 나아가도록 서로 도와준다.”(162)
  • 1642 그리스도께서 이 은총의 원천이시다. “일찍이 하느님께서 사랑과 신의의 계약으로 당신 백성을 만나러 오셨듯이, 이제 인간의 구원자이신 교회의 신랑께서 혼인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인 부부를 만나러 오신다.”(163) 그리스도께서는 그들과 함께 머무르시면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며, 죄에서 다시 일어서고, 서로를 용서하며, 상대의 짐을 져 주고,(164)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에페 5,21)하고, 초자연적이며 온유하고 열매 맺는 사랑으로 서로 사랑할 힘을 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부부애와 가정생활의 기쁨 속에서, 이 세상에서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 미리 맛보게 하신다.
  • 교회가 맺어 주고, 봉헌으로 확고해지며, 축복으로 확정되고, 천사가 선포하며, 하느님 아버지께서 인준하신 혼인의 행복을 무슨 말로 만족스럽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동일한 희망, 동일한 정성, 동일한 규율, 동일한 봉사로 결합된 두 신앙인의 유대는 얼마나 경탄스럽습니까! 한 성부의 자녀들이며 한 주님을 모시는 그들 사이에는 정신이나 육체에 전혀 거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참으로 한 육신 안에 둘이며, 육신이 하나이면 정신도 하나입니다.(165)
  • V. 부부애의 선익과 요구
  • 1643 “부부애는 전체성 곧 인격 전체의 모든 부분 ─ 육체와 본능의 요구, 감정과 애정의 힘, 정신과 의지의 소망 ─ 을 포함한다. 부부애는 육체의 일치를 넘어, 한마음 한 영혼을 이루는 깊은 인격적 일치를 도모하는 것이며, 저 결정적인 상호 증여의 불가 해소성과 신의를 요구한다. 그리고 부부애는 출산의 문을 열어 놓는다. 한마디로 이것은 모든 자연적 부부애의 정상적 특성들이지만, 그 특성들을 정화하고 강화할 뿐 아니라 승화시켜서 그리스도교적 가치의 표현이 되게 하는 새로운 의미가 덧붙여진다.”(166)
  • 혼인의 단일성과 불가 해소성
  • 1644 부부의 사랑은 그 본성상 삶 전체를 포괄하는 인격적 공동체의 단일성과 불가 해소성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 19,6).(167) “부부에게는 혼인에 내포된 상호 증여의 약속에 매일매일 충실하여, 끊임없이 그 일치를 성장시킬 소명이 있다.”(168) 이러한 인간적 일치는 혼인성사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함으로써 강화되고 정화되며 완성된다. 이 일치는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함께 영성체함으로써 더욱 깊어진다.
  • 1645 “서로 완전한 사랑 안에서 인정되는 아내와 남편의 평등한 인격적 존엄으로, 주님께서 확고히 세우신 혼인의 단일성이 분명하게 드러난다.”(169) 일부다처제는 이러한 동등한 존엄성과 유일하고 독점적인 부부애에 어긋난다.(170)
  • 부부애와 신의
  • 1646 부부애는 그 본질상 절대적인 신의를 요구한다. 이는 스스로 상대방의 배우자가 된 부부가 서로 상대에게 자신을 내어 준 결과이다. 사랑은 본래 결정적인 것이어야 한다. 사랑은 ‘다른 새 결정을 내릴 때까지만’이라는 한정적인 것일 수는 없다. “이 깊은 결합은 두 인격의 상호 증여로서, 자녀의 행복과 더불어 부부의 완전한 신의를 요구하며, 그들의 풀릴 수 없는 일치를 촉구한다.”(171)
  • 1647 부부 신의의 가장 심오한 동기는, 계약에 대한 하느님의 신의와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신의이다. 부부는 혼인성사를 통하여 이 신의를 나타내고 보여 줄 자격을 가진다. 혼인의 불가 해소성은 성사를 통하여 새롭고 더 깊은 의미를 받는다.
  • 1648 평생을 기약하고 한 사람과 결합하는 것은 어렵게 생각될 수도 있고, 심지어 불가능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결정적이며 돌이킬 수 없는 사랑으로 사랑하시고, 부부들은 이 사랑에 참여하며, 이 사랑이 그들을 지탱하고 힘을 주며, 또 그들이 신의를 지킴으로써 하느님의 성실한 사랑의 증인이 될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종종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이러한 증거를 보이는 부부들은 교회 공동체의 감사와 지지를 받을 만하다.(172)
  • 1649 그러나 매우 다양한 이유로 혼인에 따른 동거가 거의 불가능해지는 상황이 있다. 이 경우 교회는 부부의 실질적 별거와 동거의 종식을 인정한다. 이 부부는 하느님 앞에서 계속 남편이고 아내이다. 그들은 새로 혼인할 자유가 없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 가장 좋은 해결책은 가능한 한 화해하는 일이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그들이 인간으로서 파기할 수 없는 그 혼인 유대에 충실하며 자신들의 처지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살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173)
  • 1650 오늘날 많은 나라에서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민법에 따라 이혼하며, 교회 밖에서 새로이 혼인 관계를 맺고 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그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것이다. 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다.”, 마르 10,11-12)에 충실하여, 만일 첫 혼인이 유효했다면 새 혼인을 유효한 것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만일 이혼한 사람들이 민법에 따라 재혼한다면 그들은 객관적으로 하느님의 법에 어긋나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 상태가 지속되는 동안에는 성체를 모실 수 없다. 같은 이유로 이들은 일정한 교회 직책을 수행할 수 없다. 그리스도에 대한 계약과 충실성의 표징을 거스른 것에 대해 뉘우치며 완전히 독신으로 살아가기로 약속한 사람만이 고해성사로 화해할 수 있다.
  • 1651 이러한 처지에서 살아가면서도 신앙을 보존하고 자녀들을 그리스도교 정신에 따라 키우기를 바라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사제들과 전체 공동체는 극진한 관심을 보여 주어 자신들이 교회에서 떨어져 나갔다고 여기지 않게 해야 한다. 그들은 세례를 받은 사람으로서 교회 생활에 참여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
  •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미사성제에 참여하며, 끊임없이 기도하고, 정의를 위한 공동체 활동과 자선 사업에 기여하도록 초대받아야 하며, 그리스도교 신앙에 따라 자녀들을 양육하며, 참회의 정신을 키우고 참회의 행동을 실천하며 매일 매일 하느님의 은총을 간청하도록 격려받아야 합니다.(174)
  • 출산을 기꺼이 받아들임
  • 1652 “혼인 제도 자체와 부부 사랑은 그 본질적 특성으로 자녀의 출산과 교육을 지향하며, 그로써 마치 절정에 이르러 월계관을 쓰는 것과 같다.”(175)
  • 자녀들은 혼인의 가장 뛰어난 선물이며 부모 자신의 행복에 크게 이바지한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창세 2,18) 하시고, “처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신”(마태 19,4) 하느님께서 당신의 창조 사업에 인간을 특별히 참여시키고자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라.”(창세 1,28) 하시며 부부를 축복하셨다. “그러므로 진정한 부부 사랑의 실천과 거기에서 나오는 가정생활의 전체 구조는, 혼인의 다른 목적들을 뒤로 제쳐 두지 않고, 부부가 그들을 통하여 당신 가족을 날로 자라게 하시고 풍요롭게 하시는 창조주와 구세주의 사랑에 굳센 마음으로 협력하는 자세를 갖추도록 한다.”(176)
  • 1653 충만한 부부애는 부모가 교육으로 자녀들에게 전해 주는 도덕적이고, 영적이며, 초자연적인 생활의 결실에까지 미친다. 부모는 자녀의 첫째가는 가장 중요한 교육자이다.(177) 이러한 의미에서 혼인과 가정의 근본적인 의무는 생명에 대한 봉사이다.(178)
  • 1654 하느님께 자녀들을 선사받지 아니한 부부들은 그래도 인간으로서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충만한 의미를 가진 부부 생활을 누릴 수 있다. 그들의 혼인은 풍요로운 사랑과 친절과 희생으로 빛날 수 있다.
  • VI. 가정 교회
  • 1655 그리스도께서는 요셉과 마리아의 성가정에서 태어나 자라기를 원하셨다. 교회는 다름 아닌 ‘하느님의 가정’이다. 초기부터 교회의 핵심을 이룬 이들은 흔히 “온 집안과 함께” 믿게 된 사람들이었다.(179) 그들이 개종할 때에는 “온 가족이” 구원되기를 바랐다.(180) 신앙인이 된 이 가정들은 믿지 않는 세상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교 삶의 작은 섬들이 되었다.
  • 1656 흔히 신앙에 대해 무관심하며 적의까지도 품는 이 세상에서, 이 시대의 신앙인들의 가정은 활력이 넘치고 빛을 발하는 신앙의 요람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가정을 오래된 표현에 따라 “가정 교회”(181) 라고 부른다. 가정에서 부모들은 “말과 모범으로 자기 자녀들을 위하여 최초의 신앙 선포자가 되어야 하며, 각자의 고유한 소명을 특별한 배려로 육성하여야 한다.”(182)
  • 1657 가장과 어머니, 자녀들, 곧 온 가족이 세례로 받은 사제직은 “여러 가지 성사를 받고 기도하고 감사를 드리며 거룩한 삶을 증언하고 극기와 사랑을 실천함으로써”(183) 특히 가정 안에서 수행된다. 이렇게 가정은 그리스도교 생활의 첫 번째 학교, “더욱 풍요로운 인간성을 기르는 한 학교”(184) 이다. 인내와 노동의 기쁨, 형제애, 거듭되는 너그러운 용서, 그리고 특히 기도와 삶의 봉헌을 통하여 하느님을 경배하는 것을 배우는 곳이 가정이다.
  • 1658 우리는 또한 수많은 독신자들을 기억하여야 한다. 그들은 본의 아니게 자신이 처한 구체적 상황 때문에 예수님의 마음에 특별히 가까워진 사람들이다. 교회와 특히 사목자들은 특별한 애정과 적극적인 배려로 그들을 보살펴 주어야 한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가 가난 때문에 진정한 가정이라고 할 수 없는 여건에서 살고 있다. 그중에는 ‘참행복’의 정신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에게 봉사하면서 모범적으로 사는 이들도 있다. 이 모든 사람에게 ‘가정 교회’인 가정의 문과 ‘큰 가정’인 교회의 문을 열어 주어야 한다. “이 세상에 가정 없는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교회가 모든 이, 특히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마태 11,28) 사람들의 집이고 가정이기 때문이다.”(185)
  • 간추림
  • 1659 바오로 사도는 말한다. “남편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 이는 큰 신비입니다. 그러나 나는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에페 5,25.32).
  • 1660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생명과 사랑의 친밀한 공동체를 이루는 혼인 제도는 창조주께서 제정하셨으며, 그분께 고유한 법을 받았다. 이 결합은 본성상 부부의 행복과 자녀의 출산과 교육을 지향하고 있다. 세례 받은 사람들의 혼인은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성사의 품위로 들어 높이셨다.(186)
  • 1661 혼인성사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결합을 상징한다. 이 성사는 그리스도께서 당신 교회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는 은총을 부부에게 준다. 이 성사의 은총은 부부의 인간적 사랑을 완성하고, 해소할 수 없는 그들의 결합을 굳건하게 하며, 영원한 생명의 길에서 그들을 성화한다.(187)
  • 1662 혼인은, 성실하며 자녀를 낳는 사랑의 유대로 살아가기 위하여 서로를 결정적으로 내어 주겠다는 의지, 곧 당사자들의 합의에 근거한다.
  • 1663 혼인은 부부에게 교회 내의 공인된 신분을 부여하는 것이므로, 사제(또는 교회의 자격 있는 증인)와 증인들과 신자 회중 앞에서, 전례 거행의 틀 안에서 공적으로 거행되는 것이 마땅하다.
  • 1664 단일성과 불가 해소성과 출산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은 혼인에 필수적이다. 일부다처제는 혼인의 단일성과 양립할 수 없고, 이혼은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가르는 것이며, 출산 거부는 하느님께서 부부 생활에 주시는, 자녀라는 “가장 뛰어난 선물”(188) 을 외면하는 것이다.
  • 1665 합법적인 배우자가 살아 있는데도 이혼한 사람이 재혼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하느님의 계획과 규범에 어긋난다. 그들은 교회에서 떨어져 나간 것이 아니지만 성체를 모실 수 없다. 그들은 특히 자녀들에게 신앙 교육을 시킴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삶을 계속하여야 할 것이다.
  • 1666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자녀들이 처음으로 신앙을 배우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을 ‘가정 교회’, 은총과 기도의 공동체, 그리고 인간적인 덕행과 그리스도 사랑의 학교라고 부르는 것이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