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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본당신부의 지상 교리: 계명과 윤리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1-09-23 조회수2,276 추천수0

[본당신부의 지상 교리] 계명과 윤리

 

 

어떤 공동체든지 나름대로 규칙이 있고, 그 규칙을 통하여 소속 구성원들에게 기준을 제시한다. 그 이유가 나름대로 있지만 대체로 공동체의 질서와 유지, 성장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러한 규칙에는 제재와 처벌의 내용도 담겨있어서 공동체 구성원에 대한 교육과 윤리적 차원도 들어있음을 볼 수 있다.

 

 

십계명

 

그리스도교 공동체도 계명과 윤리를 제시하고 그 계명과 윤리를 통하여 구성원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도록 한다.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하는 십계명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하느님 사랑’이라 일컫는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 사랑’으로 일컫는 부분이다.

 

하느님 사랑의 부분은 우리가 하느님께 드려야 하는 삶의 태도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이웃 사랑의 부분은 이웃과 물질에 대한 삶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이 십계명은 우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종교적 윤리적 생활 기준이 되었다. 이러한 종교적 윤리적 생활 기준을 떠나서 십계명은 인류 전체에 삶의 지침이 되는 자연법에 속한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십계명은 자연법에 속하는 것으로, 계명으로 명시해 주신 것은 죄로 흐트러진 사람의 마음을 일깨워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죄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계명이 있기 전에 죄가 있었다는 것이고, 계명과 윤리를 이해하려면 죄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죄가 무엇인지 이해하려면 먼저 하느님과 인간의 심오한 관계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 이유는 인간의 삶과 역사 안에서 계속 짓누르면서 하느님을 거부하고 저항하는 죄악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벗어난 것을 죄로 이해할 수 있다. 하느님과 인간의 인격적 관계는 계약의 관계이다. 이 기본적인 계약의 관계에서 이탈하였을 때, 하느님의 부재와 침묵 또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공허함 같은 것이 나타나고, 이것을 죄로 이해할 수 있다.

 

죄를 가리키는 낱말을 살펴보면, ‘목표가 없음’, ‘왜곡되고 비뚤어진 길’, ‘거역, 반항, 목이 뻣뻣함’의 뜻을 포함하고 있다. 이처럼 죄는 인간이 하느님에게서 벗어나고 하느님과 맞서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인간의 교만이고 오만이며, 이 교만과 오만이 바로 인간의 악이다.

 

죄는 인간으로 하여금 목표가 없게 하고, 빗나가게 하고, 거역하게 하고, 벗어나 떨어져 있게 한다. 인간이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고 있는 무엇인가를 빠지게 하고 없게 한다. 이처럼 목표를 잃고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소외된 인간은 공허하고 불안정하며 쓸모없는 것 같은 비참한 모습을 절감하게 된다.

 

결국 죄는 하느님을 잊는 것이고, 하느님에게서 멀어진 것이며,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거슬러 맞서는 것이고, 자신의 마음을 하느님 아닌 다른 데로 돌리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죄는 하느님을 업신여기고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모든 죄는 하느님에 대한 불순종이고, 하느님의 선하심에 대한 신뢰의 결핍이며, 자유의 남용이다.

 

 

죄에서 벗어나기 - 침묵과 들음

 

죄가 하느님과 인간의 인격적 관계에서 벗어남이라면 이제 우리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내리시기 전에 장엄하게 선포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낸 주 너의 하느님이다”(탈출 20,2).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곧 당신 백성을 해방시키고 구원하시는 분이시기에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두어라.”(신명 6,4-6) 하고 요구하신다.

 

죄에 빠지지 않으려면 들음이 필요하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복종하고 따른다는 것이다. 곧 하느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내 자신의 삶을 형성해 나아감을 의미한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고, 그 말씀을 따르는 것이며, 그 말씀을 따름으로써 나 자신이 어디에 속하는지를 드러낸다. 하느님께 속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계명과 윤리를 내리시기 이전에 복종하고 따름을 말한다.

 

들음의 전제조건은 침묵이다. 하느님께 속한 인간이 침묵을 지킨다는 것은 아무 말도 없는 것이 아니라 침묵 중에 뭔가 말씀이 나오도록 하는 것이다.

 

침묵 중에 말씀을 들으려면 하느님께 나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야 한다. 그때에 침묵은 무엇인가를 드러내는데, 그것이 바로 도덕적 양심이다.

 

이 양심은 어떤 것을 알아차리게 하고 하나의 부르심으로 다가온다. 이 부르심은 언제나 선을 사랑하고 실행하며 악을 회피하도록 한다. 그래서 인간은 양심의 깊은 곳에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인간은 노예상태에서 해방과 자유의 상태로 가는 길이 열리는데, 이것이 윤리이다. 이 길을 충실히 걸음으로써, 우리는 목표 없는 삶, 공허한 삶, 불안정하고 쓸모없어 보이는 비참한 삶에서 해방되어 다시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한다. 윤리도 말씀의 들음에서 온다. 말씀은 살아있고, 우리 자신을 바꾸는 힘이 있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구성된 복합적 존재이기에, 인간 안에는 이미 어떤 긴장이 깃들여 있으며,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 사이에 일종의 싸움이 벌어지는 경향을 보인다.

 

인간은 늘 두 가지 경향과 충동을 지니고 있는데, 하나는 좋은 경향이요, 또 하나는 나쁜 경향이다. 그러나 해방과 자유의 길을 가는 인간은 나쁜 경향을 극복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 의로운 분이시기에 우리도 그 의로움을 향해야 한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9,2).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은 서로 본질적으로 다르고 차이가 있다. 선을 행하는 것은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고, 악을 행하는 것은 그렇지 못하다.

 

 

“사랑하라. 그리고 행하라.”

 

계명과 윤리의 완성은 하느님과 친밀하고 인격적인 관계, 곧 사랑의 관계를 맺음을 뜻한다. 계명은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해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혀준다. 계명의 준수보다 하느님과 이루는 사랑의 관계가 더 우선할 때 비로소 계명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깨닫게 된다.

 

하느님은 의로우신 분, 거룩하신 분, 좋으신 분, 사랑이 지극하신 분, 신실하신 분이시다.  이러한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우리 삶에 일어나는 교만과 오만, 불신, 거역, 불의, 그리고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살인, 간음, 불륜, 도둑질, 거짓 증언, 중상이 죄임을 보게 된다.

 

하느님을 저버리고 기억하지 않는 모든 우상숭배가 죄이고, 부모에게 불효한 것, 그리고 탐욕이 바로 죄임을 깨닫게 된다.

 

세례로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는 인간 본성의 불안정함과 나약함을 없앤 것이 아니다. 전통적으로 ‘사욕’이라고 부르는, ‘죄로 기우는 나쁜 경향’을 없앤 것도 아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답게 살려고 하는 싸움에서 먼저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 안에 머무르게 될 때 승리하게 된다.

 

이 싸움은 주님께서 끊임없이 우리를 부르시는 거룩함과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회개를 위한 싸움이고, 이 싸움의 승리가 바로 계명과 윤리를 완성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계명과 윤리의 완성을 향해 걸어가는 길에서, “사랑하라. 그리고 행하라.”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 이원효 베네딕토 - 대전교구 괴정동본당 신부. 주교회의 교리교육위원회 위원이기도 하다.

 

[경향잡지, 2011년 9월호, 이원효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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