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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교리 해설: 그 외아들을 믿나이다 (1)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05 조회수2,190 추천수0

[교리 해설] 그 외아들을 믿나이다 (1)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예수님이 명동성당에 나타나셔서 이렇게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당신은 나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오히려 정신나간 사람 취급이나 하지 않을지! 나는 과연 어떤 대답을 할까?

 

 

예수는 ‘하느님의 외아들’

 

사도 신경의 두 번째 조항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한다.

 

참으로 알아듣기 힘든 내용이다. 그 어려움이야 어디 오늘만의 얘기이겠는가! 이미 초세기 때부터 그 내용을 이해하고 해석해 보려고 무진장 애썼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그리스도교 이단들이 이 문제에 걸렸다. 하느님께서는 유일하신 분이신데, 예수님이 하느님이시라면 하느님이 두 분이라는 모순에 빠지든지, 유일 신관(唯一神觀)을 포기하든지 해야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고, 결국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거부하는 이단들이 많았다. 그런가 하면 반대로 영지주의에 물든 이단자들 가운데는 예수님의 신성은 인정하나 하느님께서 악한 물질 세계에 속한 우리와 같은 육체를 취할 수는 없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인성(人性)을 부인하였다.

 

예수님은 ‘참 하느님이신 동시에 참 인간’이라는 신앙 고백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뛰어넘기 힘든 커다란 걸림돌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존폐는 바로 이 신앙 고백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독일 신학자 발터 카스퍼 주교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은 전그리스도교적 신앙의 본질적인 것과 특수한 것을 표현하는 하나의 약식 고백(略式告白)이다. 하느님의 아들로서 예수께 대한 고백에 그리스도교적 신앙의 사활과 존폐가 달려 있다.”(“예수 그리스도”, 박상래 역, 분도 출판사, 1977, 288쪽)고 말한다.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되고, 그 칭호도 예수 그리스도께만 적용된다. 그런데도 예수님 자신은 메시아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명백하게 사용하지 않으셨다. 이러한 사실이 우리를 더욱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이 지상에 계셨을 때 자신의 전생애를 사로잡았던 자아 의식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신앙 고백의 신학적 의미는 무엇인가?

 

 

구약에서의 ‘하느님의 아들’
 

사실 고대 신화에서는 대개 제신들을 이야기할 때 출산 관계를 이야기하였고, 또 그런 사회에선 자주 통치자들을 신의 아들로 얘기한다. 예를 들어 에집트에선 지배자들을 태양신의 아들로 보면서, 지배자의 권위를 절대화 · 신격화시키려 했다. 로마 제국에서도 황제를 ‘신의 아들’이란 칭호로 불렀다. 구약에서도 이 ‘하느님의 아들’이란 명칭이 여러 번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출애 4,22-23; 호세 11,1), 이스라엘의 직분자들과 왕(1사무 7,14; 시편 2,7), 혹은 후기 유다교에선 경건하고 의로운 이들(시편 73,15; 잠언 14,26; 집회 4,10)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렀다. 그러나 구약에서 그렇게 불렀다 해서 당시 고대 사회에 널리 통용되었던 신화적 사고나 정치적 종교적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아니다.

 

구약에서 ‘하느님의 아들’이란 명칭을 다양하게 사용하였다 해도 언제나이는 엄격한 유일신 사상에 바탕을 둔 신정(神政) 사상에 근거한다. 야훼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 세상에 전하고 당신이 뜻하신 사명을 수행할 이들을 선택하셨는데 바로 이들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렀고, 이들을 통하여 인간의 역사에 깊숙이 개입하셨다. 즉 구약에서 ‘하느님의 아들’이 담고 있는 의미는 어떤 위대한 인물을 신격화시키기 위한 것이 하느님의 아니라, 구원 개입과 하느님과 선택된 이가 가지는 관계를 설명하는 맥락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느님의 아들’(아버지와 아들)

 

신약에서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위에서 간략하게 설명한 구약의 역사에 대한 이해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다시 말해 하느님과 그분의 구원 개입에서 우선 ‘하느님의 아들’이란 칭호를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제자들이 예수님만을 ‘하느님의 아들’로 인식하게 되는데, 그 근거는 바로 파스카 사건이다. 제자들이 고백하는 신앙은, 예수님은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시며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다. 또한 이는 신약의 신앙 고백의 중심축이다. 이때 신약의 의미는 구약에서와 완전히 다른 의미로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메시지를 통하여 해방자이신 하느님을 선포하시고 하느님의 구원 개입을 보증하시면서 그분을 자신의 아버지 · 압바라 주장하셨다. ‘하느님의 아들’이란 칭호가 드러내는 신앙 고백의 내용은 아버지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갖는 유일한 관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이 본질적인 일치를 이룬다는 것을 표현한다. 마태오 복음의 ‘감사의 기도’에서는 바로 이 점이 강조된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내게 모든 것을 넘겨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아니면 누구도 아들을 알아보지 못합니다”(11,27).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안다는 것은 결국 같은 본성을 지닌다는 표현으로서, 예수님의 신성을 긍정하는 중요한 대목이다. 또한 아버지와 아들이 갖는 본질적인 일치에 관한 주제는 요한 복음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나를 본 사람은 이미 아버지를 보았습니다.”(14,9)는 구절이나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당신은 믿지 않습니까?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내 (말)을 믿으시오.”(14,10-11) 등의 구절들이 그 대표적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갖는 본질적인 일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전생애를 통해 드러난다. 이는 예수께서 바로 하느님의 결정적인 구원 개입 그 자체임을 말하는 것이고. 예수 자신은 이를 확신하였다. 세례 장면이나 베드로의 고백(마태 16,13 이하), 그리고 거룩한 변모의 장면에서 공적으로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로 선포될 뿐만 아니라, 이는 복음서가 전반에 걸쳐 제공하는 예수님의 자아 의식이기도 하다. 예수께서 가지신 ‘하느님의 아들’이란 자아 의식은 그분 안에서 하나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하느님의 아들’(구원 역사)

 

또한 구원 역사의 측면에서 생각해 볼 때, ‘하느님의 아들’이란 칭호가 담고 있는 신학적인 내용은,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 역사 속으로 들어오시는 하느님의 Exodus(여기서 말하는 엑소더스는 ‘~을 향하여 떠나감’을 뜻한다.)이다. “그분은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노획물인 양 중히 여기지 않으시고, 도리어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셨으니 사람들과 비슷하게 되시어 여느 사람 모양으로 드러나셨도다.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 곧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도다”(필립 2,6-8). 당신을 비우시고,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당신을 낮추시는 그리스도의 자기 비하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엑소더스이며, 동시에 ‘하느님의 아들’을 이해하는 바탕이 된다. 사랑하는 벗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의 아들’은, 사랑 때문에 당신을 철저히 비우시고 ‘내려오시는’ 하느님의 엑소더스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이토록 사랑하시어 외아들을 주시기까지”(요한 3,16) 하셨던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엑소더스에 철저히 응답하시기 위해, 예수께서는 당신이 몸소 이룩하신 파스카의 사건을 통하여 하느님을 향한 또 하나의 엑소더스를 이룩하셨다. 사실 예수의 영광스런 변모의 장면에서 루가 복음 사가는 예수님의 죽음을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의 엑소더스에 관해 이야기한다고 말한다(루가 9,31 참조).

 

나자렛 예수의 역사, 특히 그의 죽음과 부활 사건 안에서 이루어진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엑소더스와 하느님을 향한 인간의 엑소더스는 바로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사도 신경이 고백하는 신앙의 바탕이 된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이해는 사변적인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과 해방의 차원에서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고백의 내용이다. 만일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오신 하느님이 아니시고 하느님과 유사한 분이실 뿐이라면, 예수의 역사는 결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엑소더스가 될 수 없으며,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진정한 엑소더스가 없었다면 하느님을 향한 인간의 진정한 엑소더스도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이 두 방향의 엑소더스를 확인시켜 주셨으며 자신의 신성을 탁월하게 입증하셨다.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이해는 구원 역사를 해석해 주는 시금석이 됨과 동시에 우리의 구원 운명과 직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 칭호를 전용하신 그분은 바로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시고 염려하시며, 인간을 온전히 받아들이시고 인간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시기 위하여 하느님의 유일하신 아들로서 우리에게 오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공관 복음서는 그분이 아버지로부터 파견되어 오신 사명을 이렇게 전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마르 10,45).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이 속죄의 희생 제물이 되심으로써 당신께서 누리시던 ‘하느님의 아들’의 지위에 모든 이를 초대하신다. 그럼으로써 우리 인간들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새로이 창조된 삶을 살게 된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우리에게 당신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갈라 4,5) 주시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파견하셨다고 말한다. 또한 이러한 의미에서 니케아 신경은 “우리를 위하여 또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내려오시어”라는 표현을 쓴다. 이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이 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 인간을 위해 내려오셨듯이, 우리도 하느님께로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경향잡지, 1994년 2월호, 하성호 요한(주교회의 사무차장 · 본지 주간 ·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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