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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생활 속의 사회교리: 불평등과 품삯 그리고 십자군 전쟁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7-03-31 조회수3,628 추천수0

[생활 속의 사회교리] 불평등과 품삯 그리고 십자군 전쟁

 

 

올해 그리스도교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 잘 펼쳐지고 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는 시간이 필요할 때이지요. 왜 성당에 왔는지 물어보면 가장 많은 사람들이 하는 대답은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당연한 대답입니다. 누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기 마련이고 행복한 삶을 위해서 마음의 평화가 필요하기 때문이죠. 사람들 사이에서 찾기 힘든 평화를 하느님 안에서 찾으려는 것은 당연한 종교적 심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평화를 찾아가는 것이 신앙의 여정이라면 그 긴 여정 중에 고민해야 할 주제들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교회는 그것을 정의, 평화, 창조질서보전이라는 세 단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의 마음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경제적인 불평등입니다. 이 불평등의 상황을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를 통해서 생각해 봅시다. 어떤 사람들은 이른 아침에 자기 일자리와 삯에 관한 계약을 맺고 그 권리를 얻습니다. 어떤 사람은 조금 늦은 9시쯤, 어떤 사람은 12시에나 간신히 그 권리를 얻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오후 5시가 되어서야 그 권리를 얻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오고 갔을 이 일꾼들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요? 우선은 물리적인 차이를 생각할 수 있겠죠. 몸집이 크고 힘이 센 사람은 이른 아침에 우선으로 권리를 획득했을 가능성이 높겠지요. 이 차이는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선천적인 불평등이 존재하는 것이지요. 다음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이해관계입니다. 포도원 주인의 친구의 자녀라든가 주인의 아들과 같은 학교에 다녔다든가 혹은 포도와 관련된 상품을 판매하는 곳의 친척이라든가 하는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겠네요. 이러한 사회적인 조건의 불평등도 분명하게 존재한다고 볼 수 있겠지요. 다음은 포도원 주인보다 큰 힘을 가진 영주라든가 관료가 일자리를 부탁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겠지요. 금수저라는 표현이 이런 경우를 나타내는 것이겠지요. 물론 자신의 노력 차이도 존재하겠지만 이런 불평등은 일꾼들이 자신의 권리를 획득하는 데 있어서 상당한 영향을 끼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 불평등에서부터 시작되었을 일꾼의 차이는 어느 정도의 삯의 차이로 결론지어져야 정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맨 나중에 온 저 자들에게도’ 아침부터 고생한 나와 같은 품삯을 주는 선한 포도원 주인의 결정에 대해 정의롭다고 생각하십니까?

 

아쉽게도 우리 사회는 이런 불평등들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정당화되는지에 대해서 크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다만 광야에서 예수님을 향한 악마의 유혹처럼 가장 유리한 상황을 수단을 가리지 않고 차지하려고 할 뿐이지요. 이러한 불평등의 해소와 정당한 품삯의 문제를 다루는 것을 정치라고 하는데 선거를 통해 자신의 뜻을 표현하는 대의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어려운 이웃을 위한 정책에 관심을 갖고 올바른 투표를 하는 것이 기본적인 이웃사랑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교회는 이런 경제정의에 관한 입장을 분명히 표현할 것입니다.

 

평화의 큰 축인 남북화해를 이해하기 위해 부부 사이를 생각해 봅시다. 부부 관계는 단순히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의 문제가 아닙니다. 남편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사람과 아내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사람, 그리고 남편과 아내가 동시에 관련되어 있는 모든 사람의 복합적인 관계입니다. 한쪽의 일방적인 잘못이라는 것은 거의 존재하지 않죠. 또 한쪽의 일방적인 힘과 그에 대한 복종으로 어떤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매일매일 기도하고 있는 오늘날 한반도의 평화문제는 바로 이와 같습니다. 상대방을 동등한 대화 상대로 인정하는가가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 되고, 서로에 대한 요구가 국제사회의 여러 가지 상황들을 고려한 현명하고 평화로운 방법인가가 문제 해결의 방향이 되는 것이지요.

 

1096년부터 1291년까지 거의 200년간 7회에 걸쳐 일어난 십자군 전쟁이라는 가슴 아픈 역사가 있었습니다. 십자군 전쟁은 비잔틴제국 황제의 요청으로 교황을 중심으로 서방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예루살렘 성지를 이슬람 제국으로부터 되찾기 위한 것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겉으로 내건 고상한 명분 뒤에는 말할 수 없는 온갖 탐욕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성지를 지키고자 하는 명분과는 상관없는 살육과 약탈이 수없이 일어났고 소년, 소녀들의 순수한 영혼마저 전쟁의 광기에 내몰리기도 했습니다. 그 끔찍한 전쟁을 일으켰던 것은 더 넓은 영지에 대한 귀족들의 탐욕이었고, 새로운 상권에 대한 상인들의 탐욕이었고, 강력한 왕권에 대한 군주들의 탐욕이었고, 배고픈 민중들의 장밋빛 미래에 대한 어리석은 환상이었습니다. 부끄럽게도 교회가 그 선동의 한가운데에 있었습니다. 결국, 국제적으로 얽혀있던 온갖 이해 관계들 때문에 전쟁을 일으킨 사람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곳에 살던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했던 것입니다.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실험은 매우 어리석고 위험한 행동입니다. 동시에 냉전 시대의 마지막 유물인 미사일방어체계에 우리나라를 편입시키려는 미국의 ‘사드’도 우리의 경제안보와 외교안보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행동입니다. 십자가와 전쟁이 어울리지 않듯이 평화를 위한 무기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주변 강국의 이해관계 때문에 희생당하는 것은 결국 이 땅의 백성들입니다. 죽이든지 죽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이분법적 물음을 넘어설 수 있어야 평화를 향한 여정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당장 내 손 위에 답이 놓여있는 국제문제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과거의 어리석음을 되풀이할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폭력을 용인하면서 평화에 대해 말할 수 있겠습니까? 교회는 평화를 위협하는 정책들에 맞서 세상을 향해 복음을 선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창조질서보전이라는 신앙의 주제는 우리가 안고 있는 어떤 문제와 관련이 있을까요? 핵발전소라는 전대미문의 위협에 대해서 다음에 계속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2017년 3월 26일 사순 제4주일 의정부주보 5-6면, 최재영 세례자 요한 신부(구리 Exodus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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