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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살며 배우며 실천하는 사회교리9: 순교자, 두 개의 천국을 살다간 사람들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4-03-27 조회수2,003 추천수0

[황창희 신부의 살며 배우며 실천하는 사회교리] (9) 순교자, 두 개의 천국을 살다간 사람들

이 세상에서 이미 천국을 맛본 순교자들



아프리카 선교사 모임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케냐에서 선교사로 일하는 신부님에게 나이로비 쇼핑몰 테러사건에 대해 들었다. 테러범들은 이슬람 과격주의자들이었는데 쇼핑몰 안에 있던 인질 중에 이슬람교도와 아닌 사람들을 구별하기 위해 신앙을 물었다고 한다.

인질들에게 코란을 읽게 하고, 마호메트에 대해 질문해 제대로 답하지 못한 사람은 그 자리에서 사살했다고 한다. 생존자 증언에 따르면 희생자 중 몇몇은 테러범에게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란 사실을 떳떳이 밝히고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I'm Christian!"(나는 그리스도교인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순간이 오면 과연 가톨릭 신앙을 떳떳이 고백하며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신분 초월한 신앙 선조의 형제애

이처럼 가톨릭 신앙을 고백한 이들이 우리 신앙 선조들이다. 그들은 200년 전 수차례의 모진 박해를 통해 아무런 죄 없이 천주님을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목숨을 내어놓아야 했다. 세상 불의와 싸우며 신앙을 고백했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지난 2월 8일, 평화방송 라디오를 통해 교황청이 한국 가톨릭교회의 초기 순교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의 시복을 결정했다는 바티칸 통신의 소식을 들었다. 124위 시복 결정은 사제인 나에게도 큰 기쁨인 동시에 한국 가톨릭교회의 큰 기쁨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신앙의 자유가 오늘날 당연시되고 있지만, 순교자들은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신앙 자유를 위해 싸웠다. 무엇 때문에 목숨을 걸면서까지 신앙을 지켰을까?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가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용기는 어디서 비롯한 것일까?

초기 순교자들의 삶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천주교에 입교한 이후부터 그들의 삶은 모든 것이 달라졌다.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했지만, 하느님을 알게 됨으로써 얻게 된 기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 재산도, 가족도, 권력도 하느님을 만나서 얻게 된 진정한 기쁨을 대체하지 못했다.

124위 중 황일광(시몬)의 삶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1757년 충청도 홍주에서 천민으로 태어났고 어린 시절을 몹시 어렵게 보냈다. 그러나 1792년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을 통해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그의 모든 삶이 기쁨으로 바뀌었다.

황일광은 입교 후 상상도 못한 대접을 신자들에게 받았다. 신자들은 그가 백정임을 알았지만 똑같이 대했다. 심지어 양반 집 방안까지 초대받아 들어갔다. 신분제도가 철저했던 조선 시대에는 상상할 수 없던 일이었다. 황일광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똑같은 형제로 대해주는 교우들에게 감동해 살아생전 두 개의 천당에 대해서 말하곤 했다.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 있고, 후세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하다."

그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서울 정약종(아우구스티누스)의 집 근처에서 살다 체포됐다. 관헌들이 무자비한 형벌을 가하며 배교할 것을 강요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모진 고문에 다리가 부러져 들것에 실려 고향인 홍주로 보내졌지만 명랑함을 잃지 않았다. 결국, 1802년 1월 30일 고향인 홍주에서 참수를 당했다. 평상시 농담처럼 말했던 것처럼 두 번째 천국으로 갔다. 신분제도를 뛰어넘는 가톨릭교회의 보편적 형제애는 황일광이 이 세상에서 천국을 살게 했고, 죽어서도 천국을 살게 했다.


그리스도인, 욕심과 거짓을 버려야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신다'(사도 10,34; 로마 2,11; 갈라 2,6; 에페 6,9 참조)는 성경 가르침은 시대를 넘어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드러냈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과 닮은 모습으로 창조된 피조물이기에 동등한 존엄성을 지닌다. 따라서 하느님 앞에 모든 사람이 지닌 존엄성은 인간이 다른 사람 앞에서 갖게 되는 존엄성의 기초가 된다. 또한 인간 존엄성은 인종, 국가, 성별, 출신, 문화, 계급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 사이의 근본적인 평등과 우애의 궁극적인 바탕이 된다(「간추린 사회교리」 144항 참조).

순교자 황일광은 출신이나 계급을 뛰어넘는 보편적인 형제애를 통해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소중한 존재임을 깨닫고 살았다. 이 세상 안에서 이미 천국을 맛보았던 것이다.

초기 신앙 선조들의 사상은 돈, 신분, 학벌, 직업 때문에 차별화돼 가는 오늘 세상에 다시 한 번 일침을 놓는다. 만일 우리가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여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께 의지하여 살며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욕심과 거짓을 던져 버려야 할 것이다. 교회는 이 세상이 하느님 뜻에 맞는 세상으로 변화하길 바란다.

세상 안에서 사람들과 함께 살며 그들과 다르게 살아간다고 말했지만, 실제는 세상 여러 가지 욕심에 마음이 팔려 점점 더 세속화돼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의 모습이 무척이나 부끄럽게 다가왔다. 나도 순교자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느님을 찾는 기쁨의 삶을 지속해서 살아갈 수 있을까? 총칼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상황에서 과연 진리와 정의 편이 돼 내 전 존재를 걸 수 있을까?

[평화신문, 2014년 3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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