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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비자교리.....2006-08-18
작성자이철희 쪽지 캡슐 작성일2006-09-08 조회수3,472 추천수0
 다음 세 가지 항목(63-65항)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관련된 것입니다.  부활은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63. (문) 예수 죽으신 후에 그 육신을 묻으뇨?

   (답) 그 육신을 묻으니라.

64. (문) 예수 죽으신 후에 그 영혼은 어디로 가시뇨?

   (답) 그 영혼은 림보로 가사 그 때까지 천당에 들어가지 못한 성인들을 위로하시니라.

65. (문) 예수 죽으신 후 다시 사니뇨?

   (답) 예수 미리 말씀하신 대로 죽으신 후 제 3일에 당신 전능으로 영혼과 육신이 결합하여 다시 사니니 이는 예수 부활이니라.

2006-08-18


사람은 죽으면 땅 속으로 갑니다.  예전부터 그래왔습니다.  인간이 흙에서 만들어졌기에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죽으면 무덤을 만들고 후손에게 그 관리를 맡깁니다.  죽은 사람은 모르죠. 자신의 무덤이 올바로 관리되는지 어떤지를 말입니다.  그러나 죽은 자를 무덤에 모시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이 죽은 자에 대하여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우라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무덤에 묻혔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스라엘 종교의 예절 한 가지가 적용됩니다.  당시 정치적인 체제로서 국가는 없어진지(BC 587년) 오래됐지만, 이스라엘 민족들을 지탱시켜 오던 정신에는 율법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 율법은 모세가 하느님으로부터 시나이 산 위에서 받았다(탈출기 20장)는 십계명을 시대에 따라 해석하고 해설한 내용들로 아주 구체적인 것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안식일이 시작되면 죽은 것을 손에 대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만일 손을 댄다면 부정(不淨)타는 것이므로 자기들민족의 주간 축제인 안식일 음식을 먹을 수 없다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시간 규정에 따르면, 이 안식일은 금요일 해가 지면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것은 금요일 오후 세시 경이었다고 합니다.(서기 30년 4월 7일, 금요일, 오후 3시)  죽음의 위협 때문에 상당수의 제자들은 줄행랑을 친 뒤였고, 안식일의 시작시간은 다가오고 있었으니, 예수님의 시신은 절차를 따를 시간적인 여유도 없이 서둘러 무덤에 안장됩니다.  시신이 썩을 때 나는 냄새를 중화시키기 위한 몰약(沒藥:올리브과의 관목. 아라비아와 아프리카에 분포하는데 고대로부터 방향 및 방부제로 쓰이고 즙액은 향수, 의료품, 구강, 소독 및 통경제, 건위제 등에 씀.  몰약의 즙액으로 만든 약)도 바르지 못하고 매장하게 됩니다. 서둘러 무덤에 안장하고 입구를 막아 놓습니다.  동물들이 시신을 훼손하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사람은 육신과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보이는 육신은 죽고 나면 땅 속에 묻히고, 그 영혼은 몸에서 분리됩니다.  신앙에서는 사람의 영혼은 하느님께로 올라가 ‘사람으로 살 때에 만들었던 삶의 결과에 따라 천국이나, 지옥이나, 연옥으로 간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의 영혼은 보이는 육신을 무덤에 남겨두고, 하느님의 아들이 나타나 구원을 기다리던 영혼들이 곳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의 이름을 림보(臨報. 라틴말: limbus : 지옥과 천당 사이에 있어 그리스도교에 접할 기회가 없었던 이나 세례를 받지 못한 어린이나 다른 종교인들이 머물고 있던 곳)라고 합니다. 마태오 복음 27,50-52(예수께서 다시 한번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셨다. 바로 그 때에 성전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지고 땅이 흔들리며 바위가 갈라지고 무덤이 열리면서 잠들었던 많은 옛 성인들이 다시 살아났다)에는 임보를 기억하게 하는 성경구절의 내용이 나옵니다. 지금 말씀드린 성경 구절의 내용에 나오는 성인들의 부활은 예수님이 거기에 찾아가셨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신앙에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아무도 본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음의 65항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에 대한 것입니다.  거기에 나온 내용처럼 예수 부활입니다.  이 지상의 삶이 아무리 화려하고 내가 쌓아놓은 재물이 많다고 하더라도, 만족하게 이 세상의 삶을 마치지 못한다면 별 의미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사는 것도 자녀를 이 세상에 낳고 기르고 자라게 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이외에 말로 표현하기 또 다른 무엇인가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 신앙에서는 하느님과 영원히 함께 사는 부활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사흘만에 부활하십니다.  시간상으로 따지면 그보다 못하지만 날짜 계산으론 그렇습니다.  금요일 오후 3시경에 돌아가셨고, 저녁 해가 떨어지면서 안식일 시작되었으니 이틀째이고, 다음날 해가 떨어졌을 때는 안식일이 끝난 다음날이니 세 번째 날이지만, 밤이 되었으므로 다음날 해가 뜰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음 날 해가 떴을 때, 여인들 몇 명이 시신에 몰약을 바르기 위해서 무덤에 왔다가 시신이 없어지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 다음의 두 가지 항목은 부활 후 이루어진 일에 대한 것입니다.

66. (문) 예수 부활하신 후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시뇨?

   (답) 예수 40일 동안 가끔 사도들에게 뵈사 당신 부활로 저들의 신덕(信德)을 굳게 하시고 당신 교훈을 마치시고 또한 교회 창립을 완성하시니라.

67. (문) 예수 부활하신 후 제 40일에 무엇을 하시뇨?

   (답) 예수 부활하신 후 제 40일에 당신 전능으로 하늘에 오르시니 이는 예수 승천이니라.


예수님은 부활하신 뒤, 40일간 제자들 곁에 수시로 나타나시며 이제까지 3년간에 걸쳐서 교육시켰던 제자들에게 다시 확신을 심어주시기 위해서 움직이십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만족하실 기간, 40일이 다 되도록 제자들에게 나타나고 가르치시는 일이 계속하십니다.  그 만족한 기간을 채우신 다음에 예수님은 하늘로 오르십니다. 제자들을 추가로 그 정도 교육시키고 그만큼 했으면 충분했다 싶으셨을 것입니다.  사람의 약한 입장에서 생각하면 또 다른 판단을 하겠지만 예수님은 40일만에 제자들을 떠나십니다.  육신과 영혼이 합쳐진 채로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이것을 가리켜 ‘예수 승천’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보여주는 한 가지 이야기가 요한복음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20,24-29에 나오는 ‘예수님과 토마스’(262면)라고 제목이 돼 있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발현하셨을 때에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던 토마스가 두 번째 발현하셨을 때에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은 토마에게 당신의 몸을 만져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보아라.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참으로 극적인 순간이면서, 동시에 첫 번째 발현의 시간으로부터 둘째 발현의 시간 사이에 다른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못하겠다던 신앙의 거부(25절)’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으신 것입니다.  두 번째 발현에서 나타나시자 마자, 토마스에게 그 말을 하는 것으로 요한복음사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성경에는 ‘40’과 관련된 숫자가 곳곳에 나옵니다.  설화같은 이야기이기는 합니다만, 노아의 홍수는 40일간 내린 비로 시작됩니다(창세기 7,17).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시는 자리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400년 동안 남의 나라에 가서 종으로서 압제를 받을 것이라는 말씀도 하십니다(창세기 15,13).  모세가 계약의 십계명을 받기 위하여 시나이 산에서 40일을 머뭅니다(출애굽기 24,18=126쪽).  여호수아 때에 이르러서는 12명의 선발대를 파견하여 40일간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옵니다(민수기 14,25).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대로 믿지 않았기에, 하느님은 하루를 1년으로 쳐서 40년간 광야에서 반역의 무리들이 죽을 때까지 광야를 헤매게 합니다(민수 14,34).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 유배를 떠났던 기간 또한 40년이었고, 예수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유혹을 이겨내신 기간이  40일입니다. 


예수님이 죽음에서 당신 힘으로 살아나신 뒤, 그 기간동안 예수님을 제자들을 중심으로해서 그들이 지키고 살아야 할 삶의 자세를 다시 강조하십니다.  그러나 그 제자들보다 훨씬 나중에 사는 우리는 예수님이 그 사십일동안 어떤 내용을 구체적으로 가르치셨는지 알지는 못합니다.  막연한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만, 3년동안 제자들과 더불어 살면서 가르치셨던 내용을 제자들이 좀 더 잘 알아듣게 해주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40일을 지내신 다음에, ‘그 정도면 제자들의 믿음이 단련되었을 거라고 판단하셨을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과 영원한 작별을 하십니다.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던 모습, 먹어야만 산다고 했던 사람 몸의 관계에서 떠나시는 것입니다.  이 일을 가리켜서 승천(昇天)이라고 합니다.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에 관한 이야기는 복음서에도 나오기는 합니다만, 보다 정확하게 묘사된 것은 신약성경 266쪽에 나오는 ‘예수님의 승천’이야기입니다.  성경에는 구체적으로 장소가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의 맞은편, 올리브 산 정상에서 하늘로 오르십니다.  우리 사람들이 체험하는 것처럼 육신과 영혼이 분리되어 눈에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몸과 영이 하나가 되어 하늘로 오르십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제자들은 갑자기 황당해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만 쳐다보고 어쩔 줄 몰라했을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에게 천사들이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사도행전 1,11)‘이라고 말입니다.  이래서 신앙공동체는 예수님을 하늘로 보내드리고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됩니다.


다음, 68항은 예수님의 승천과 관련된 믿음에 대한 내용입니다. 

68. (문) 예수 성부 오른편에 좌정하시다 함은 무슨 뜻이뇨?

   (답) 이는 예수 천주성으로는 성부와 같으시거니와 인성으로도 천주의 영광을 만유위에 누리신다는 뜻이니라.


세상에 그 어느 누구도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 하늘에서 성부의 오른편에 자리잡고 앉으신 것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우리가 그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마르코복음서에도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마르코 복음서는 기나안 지역에 살던 유대인들을 상대로 해서 쓰여진 책이라고 합니다.  그들에게는 따로 설명을 하지 않아도 성경에 나오는 말이나 표현은 자연스럽게 알아듣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마르코 복음서에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고 기록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오른편은 ‘힘과 권세의 상징’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상대적으로 왼쪽에 앉는다는 표현은 등장하지 않습니다만, 예수님은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으시어, 인간과 직접 연결되는 여러 가지 일들을 직접 하시는 분이라는 말로도 알아들을 있는 내용입니다.  하느님이시면서도 사람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셨고, 그렇게 33년간을 살다가 다시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시고, 이제는 당신의 제자들과 그 뜻을 따르는 공동체를 통하여 하느님과 우리를 밀접하게 연결시켜주는 일을 하게 되셨다는 의미입니다.

제 7 장   천주 성신(=성령)

이제부터는 ‘믿을 교리’ 내용의 제 7 장을 다룹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우리가 가진 오관(五官)으로는 그 하느님의 힘을 체득할 수 없기에 교리과정에서는 ‘믿을 내용’에 배열합니다.  믿을 교리의 내용으로 나오는 이 부분도 성부와 성자의 역할과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는 없는, 아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33년간 사셨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태어날 때, 어린 시절의 이야기 한 부분, 어른으로서 공생활 부분의 역사가 약 3년간 나옵니다.  이 분이 인간으로 오신 목적은 인류의 구원방법을 알려주시기 것이었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아버지의 뜻에서 벗어난 인간들이 다시 돌아설 수 있게 하려고 인간으로 오신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제자들과 더불어 3년을 지내시다가, 사회 지도자들의 손에 붙잡혀 ‘로마제국을 반대하여 혁명을 일으키려고 했다는 죄목으로 반역자로서 십자가형으로 삶을 마칩니다.  여기까지가 인간으로서 알아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삶은 그렇게 끝마친 것이 아니라고 고백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입니다.  신앙과 믿음에서는 그분이 부활하셨고, 그분이 살아나신 다음에 제자들에게 부활을 설명하는 삶을 40일간 지내셨고,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이 성령에 관한 내용중에서, 첫 번째 항목은 예수님의 승천이후에, 하느님의 다른 힘으로 사람들에게 작용하신 성령에 대한 내용입니다.  중요한 내용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69. (문) 예수 승천하신 후 제 10일후에 무슨 일이 있었느뇨?

    (답) 예수 승천하신 후 제 10일에 성신이 사도 위에 내려오시니 이는 성신강림(聖神降臨)이니라.


신약성경은 복음서 4개와 사도행전, 편지들, 요한의 묵시록으로 이루어진 27권의 책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가운데 네 번째에 등장하는 사도행전 앞부분에는 예수님의 승천과 성령의 강림 그리고 그 이후에 형성된 신앙공동체와 그 공동체가 움직인 일들데 내용을 기록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원인 없이 일어나는 결과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의 삶을 마치고, 하늘로 올라가신 다음, 하느님의 힘이 이제는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돌아오십니다.


예수님의 승천으로, 하느님의 힘이 인간을 완전히 떠나신 것이 아니라, 이제는 그 모양과 형태를 달리하여 새롭게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것을 가리켜 하느님의 힘이 오셨다는 의미, 즉 성령강림이라고 말합니다.  성신강림과 성령강림은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입니다.  영적인 존재로 다시 인간에게 오셨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시므로, 보는 것을 우선으로 여기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분에 대하여 쉽사리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성령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첫 번째 만나는 내용은 70항입니다. 

70. (문) 성신(聖神)은 누구시뇨?

    (답) 성신 천주 제 3위시니,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發)하시어 성부와 성자와 같이 참 천주시오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한 천주시니라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관계에서 출발하신 분입니다.  쉬운 말로 하면, 상호종속이라고 알아듣기 쉬운 내용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표현하는 것은 우리 사람들이 갖는 삶의 폭이 하느님의 같은 상황을 설명하기에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그리고 이 상호종속이라는 말은 한 대상이 없을 때 다른 대상의 존립(存立) 근거도 사라진다는 것인데, 하느님의 힘인 성령에 대하여 그런 말로 설명하는 것은 인간이 이해하기 쉬운 말로 하는 것이지 실제로 하느님에 대해서 인간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기에 표현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학의 정의는 이러합니다. 하느님의 위격으로 언급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각각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하느님이시고, 누구에게 종속돼 있는 분은 아닙니다.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성령의 활동과 기원은 성부와 성자의 역할과 밀접한 관련이 됩니다.  


이러한 교회의 정신을 잘못 이해하고 종속관계로 받아들여, 성령은 성부에게만 종속돼있지 인간으로 나셨던 성자 예수그리스도에게 종속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여 갈라선 신앙이 ‘동방교회’ 혹은 ‘러시아 정교회’라고 부릅니다.  갈라진 때는 854년경에서부터 그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하여, 1054년에 완전한 결별선언을 합니다. 


다른 종파에 대한 것을 이 시간에 말씀드릴 여유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 신앙을 말씀드리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같은 하느님, 서로 다르게 인간역사에 당신 힘을 드러내시지만, 그 구별은 인간이 생각하는 것처럼 가능하지 않은 삼위(三位)이시지만, 일체(一體)인 분이십니다.


다음은 성령의 작용의 한 가지입니다.  좀 더 자세한 활동의 본보기는 사도행전에 나와 있습니다.

71. (문) 성신이 강림 날에 무엇을 하시뇨?

   (답) 성신이 강림 날에 사도들의 신덕(信德)을 굳게 하시고 저들에게 은혜를 충만히 내리시어 복음을 널리 전하여 천주교회를 온 세상에 펴게 하시니라


스승 예수님이 그들이 곁을 완전히 떠난 사건이 ‘승천’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정도면 당신의 입장에서는 재교육을 할만큼 하셨다고 판단하고 하늘로 올라가셨지만, 그 기대만큼 11명의 제자들이 성숙한 사람으로 변화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형태의 하느님의 힘이 제자들에게 내려오십니다. 


예수님이 승천한지 열흘만에 성령이 내려오셨습니다.  그 축제의 이름을 오순절이라고도 합니다.  성령이 오시고 달라진 일은 제자들의 삶의 변화가 그 첫 번째였습니다.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다락방에 숨어있던 그들이 과감하게 문을 박차고 나와 복음을 전하는 대열에 앞장섭니다.  그들의 앞에는 이미 죽음의 위협이 사라진 뒤였습니다. 오히려 사도행전 3장-5장을 살펴보면, 박해와 고난을 찾아서 움직인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그만큼 성령의 힘이 강했던 것입니다.


이 성령이 제자들에게 내려오실 때 드러나신 모습은 ‘혀’모양이었습니다(사도행전2,1-3).  ‘혀’는 사람이 말을 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이 ‘불 혀’의 모양을 받은 제자들은 이방인, 다른 나라 말을 쓰는 사람들이 가득한 장소에서 하느님의 업적을 전합니다. 언어가 통일된 것입니다.  구약성경 창세기 11장에 보면, 바벨탑이야기 부분에서 세상에 살던 인간들의 말이 뒤섞이는 이야기를 볼 수도 있고, 들을 수 있습니다.  그랬던 것이 하느님의 힘이신 성령이 내려오자 그 일에 변화가 생깁니다.  이러한 일의 결과로서 제자들은 복음을 더 널리 전파할 수 있게 됩니다.  신약성경 사도행전은 그렇게 움직인 제자들의 삶을 보여줍니다.  여러분들이 참조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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