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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견진교리: 성사,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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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철희 쪽지 캡슐 작성일1998-11-05 조회수10,582 추천수4

제 1 강의 : <성사(聖事)에 관하여>

 

 1. 사도행전의 해당부분 읽기 -- 함께 읽는다.

이 부분을 함께 읽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성서에 나오는 견진성사의 의미를 보다 강하게 말해주는 곳이기 때문이다.  가톨릭 교회의 여러 가지 성사의 기원은 예수님에게 있음을 교회는 이야기한다.  그리고 오늘부터 6번의 기회에 걸쳐서 준비하는 견진성사 역시 그 기원은 예수님에게 두고 있다.  다만 견진성사의 설정 자체가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가 아닌 듯하여 사람마다 달리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성사를 통하여 받는다고 우리가 고백하는 은총은 분명 신앙과 관련된 것이고, 그 신앙은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는 일로써 시작하기 때문에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  여러분이 각자 준비해오신 성서를 앉으신 자리에 따라 함께 부분씩 읽어보겠습니다.  읽고자 하는 부분은 <사도행전 2, 1-47 >입니다.   신구약 합본성서 221면부터 시작합니다.  준비되셨으면 읽기로 하겠습니다.

 

 

 2. 견진성사란 무엇인가?,  견진성사에 대한 소개.  

견진성사란 무엇인가?  우리가 처음으로 질문하는 내용입니다. 견진성사를 한다고 하면서, 억지로 온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 말 정도는 누가 물어도 확실하게 답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아는 대로 움직입니다. 모르는 사람은 행동이 곤란하죠. 좋고 나쁜 것을 구별하지 못하니, 그 일들의 결과가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그것도 구별하지 못하게 됩니다. 세상 모든 일에 똑같은 기준을 적용시킬 수야 없겠지만, 적어도 신앙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알아야 제대로 움직입니다.

여러분에게 견진성사가 무엇인지 그 응답을 묻는다면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1) 성령의 선물을 받는 성사.   2) 우리의 믿음을 굳게 하는 성사.  3) 가톨릭교회에서 신앙의 성인이 되었음을 이야기해주는 성사.  4) 자신의 앞가림은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선언해 주는 성사...... 여러 가지 말들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1517년 종교 분열(** 종교개혁이 아니다. 개혁은 내 안에서 잘못된 점을 바로잡아 옳은 길로 나아감이다)이후, 가톨릭 교회의 대응 방법 중 하나가 공의회를 연 것이었습니다. 적극적으로 교회의 행동을 찬성하기는 하지만, 당시 가톨릭 교회가 분열에 대한 상황에서 잘못 대응한 점은 있습니다.  어쨌든 그것이야 잠시 접어두고, 공의회를 열어서 가톨릭 교회가 유지해야 할 교리의 사항을 정리합니다.  이름하여, 한때 그 교리서의 이름은 <320조목>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 교리서의 견진 편에 보면, 견진성사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견진은 성령과 그 칠은(七恩)을 주는 성사로서, 이 성사를 받는 자는 예수의 군사가 되어 말과 행실로 신앙을 증거하게 됩니다."

견진(堅振)이라는 말은 라틴어로 "CONFIRMATIO"라고 씁니다.  이 말이 성사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CON-은 ’함께...’라는 뜻을 갖고, ’FIRMATIO’라는 말은 ’강하게되다. 굳게 되다. 단단하게 되다’라는 말을 갖습니다.  그러므로 견진성사는 단단하게 굳게 되는 성사를 가리킵니다. 조금 전 말씀드린 트리덴틴 공의회에 정한 ’그리스도의 군사’가 된다는 말이 견진성사라는 말의 가장 정확한 설명이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그저 스쳐 지나가는, 웬만한 사람이며 누구나 하니 나도 덩달아서 하는 그런 의미의 성사는 아니라는 이야깁니다.

이 견진성사는 결코 단독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다른 말로 이야기하면, 이미 우리가 받아들인 세례성사의 열매를 맺는 성사가 바로 이 견진성사라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함께 주었습니다.  옛날이라고 하니까 좀 이상하긴 합니다만. 서양에서는 지금도 그렇게 한다고도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국에서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보다는 좀 더 쉽게 신앙생활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는 둘 다 <입문성사>로 구별합니다.  이 구별이야 지금도 달라진 것은 없지만, 같은 입문성사이면서도 두 성사를 구별해서 따로따로 합니다. 한국 땅에서는 말입니다.  주교님들의 회합을 통해서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세례와 견진을 따로따로 하면서 그것을 합당하게 준비하는 데 필요한 교리를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알아야 올바른 생활을 할 수 있고 그 기회를 주자는 의미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하는 신앙 재교육 때문에 이 저녁 늦은 시간에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 오신 것이기도 하고요.

 

 3. 견진성사를 통하여 받는 하느님의 선물

전통적인 가르침과 교리에 따르면, 견진성사를 받게되면 우리는 하느님의 선물을 받는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트린덴틴 공의회에서 정의한 바에 따르면, 하느님의 선물을 일곱 가지로 말합니다.  다른 이름으로는 성령칠은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성령의 일곱 가지 은총 또는 선물은 ’슬기와 통달과 의견과 굳셈과 지식과 효성과 두려워함’으로 구별합니다.  짧은 문제를 내고 답을 쓰게 하는 시험에서는 그 말이 갖는 의미 따위는 상관없이 그저 단답을 외무면 됩니다.  저도 그런 시험은 학생으로 자랄 때에 하도 많이 치루기는 했습니다만, 문제는 시험지를 내고 나면 모든 것을 깨끗이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달리 이야기하면, 우리가 참으로 우리 생활에 필요한 것을 다루지 않고 그저 순간적으로 외워서 끝내버릴 문제들에 매여있다는 생각도 가능한 소리입니다.  그런데 그런 비판을 아무리해도 그것은 어린이의 시각으로 치부되고 맙니다.  덜 중요한 것과 중요하다고 바라보는 것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제가 말씀드리는 성령의 일곱 가지 선물, 견진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선물에 대한 내용을 그저 단답을 외우는 식이 아니라 참으로 이해하셨으면 합니다.

 

 3.1 일곱 가지 하느님의 선물을 개략적으로 다시 설명하기.

(1) 첫 번째로 말할 수 있는 선물은 ’슬기’입니다.  이 슬기가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생활을 바꾸어놓는 방법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을 섬기고 영생을 얻는 모든 사정을 즐겨 찾게 하는 역할’입니다.  흔히 말하듯 세상에서 재주껏 지낼 수 있는 재치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것과 하느님의 것을 구별하는 입장에서라면, 우리가 현세의 것에 더 가치를 두고 찾는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약은 척하면서도 참으로 약지 못한 인간이 하는 일입니다.  삶의 우선적인 기준으로 하느님의 것을 먼저 생각하면 인간의 것도 그 사정에 맞게 저절로 변화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제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능력밖에는 없습니다.  경험도 대신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이처럼 하느님을 먼저 생각하게 하는 선물이 바로 슬기입니다.

 

(2) 두 번째로 말할 수 있는 선물은 ’통달(通達)’입니다.  사통팔달(四通八達)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대단히 재주있는 사람을 가리킬 때 우리가 그렇게 부르기도 합니다. 모르는 것 없고, 참으로 재주가 비상한 사람을 가리켜 그렇게 부르기도 합니다.  이것은 분명 좋은 의미로 말입니다.  견진성사를 하면서, 두 번째로 말하는 선물 통달은 ’우리의 지능을 사용하여 믿을 진리를 제대로 믿을 수 있도록 판단하게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세상에서 흔히들 머리가 좋다하면, 우리는 그런 사람은 서울대 법대(法大)에 갈 거라고, 그리고 판사나 검사가 될 거라고 미리 생각을 합니다.  사람이 만들어 놓고 서로를 이렇게 저렇게 규제하는 법을 전공하는 데는 머리가 비상한 사람이 가야하는가 봅니다.  사람이 지혜를 동원하여 복잡하게 짜 놓은 법을 연구해서 다시 인간의 생활에 적용하려면 그렇게 뛰어난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그렇게 복잡한 것을 만들어 스스로를 얽어매는 인간을 만드신 분이라는 것이 신앙에서 우리가 고백하는 한 가지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작은 인간의 머리를 가지고서는 하느님의 모든 일을 완벽하게 알아듣거나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은 아예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때 사용되는 하느님의 선물이 바로 ’통달’입니다.  따지고 연구할 수 있는 것과 믿어야 할 것을 구별하여 인간의 지혜와 재능을 적절한 곳에 다시 배분하여 쓰게하는 능력, 하느님의 선물이 바로 ’통달’입니다.

 

(3) 세 번째로 이야기할 수 있는 선물은 ’의견(意見)’입니다.  우리는 의견이라는 말을 ’어떤 특정한 일들을 잘 처리하기 위하여 제시할 수 있는 개인적인 생각’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런 설명도 가능하긴 합니다만, 견진을 통하여 받을 하느님의 선물인 의견은 그것과는 약간 차원을 달리합니다.  이 의견이 우리 생활에 미치는 효력은 ’우리가 마땅히 행할 선과 피해야 할 악을 분별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특정한 일을 제대로 처리하기 위하여 내 생각을 제시하는 것도 다른 사람이 제시한 방법을 따르는 것보다는 더 효율성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하는 행동입니다. 이런 뜻의 의견을 이야기한다면, 하느님의 일을 행하는데 참으로 필요한 지혜를 제시할 수 있는 것도 의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네 번째의 하느님 선물은 ’굳셈’입니다.  처음에 견진성사가 무엇인지를 설명할 때 ’참으로 용감한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어 사는 힘을 받는 것이라는 내용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네 번째 효력은 ’우리 영신의 힘을 증가시켜서 영생을 얻기에 방해가 되는 것을 능히 이길 수 있게 하고 순교까지라도 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내가 한번 뿌리를 내린 곳을 죽음에 이르기까지 완벽하게 지켜나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한국 땅에 그리스도교의 뿌리가 내린 것은 1784년으로 계산합니다.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 북경에 가서 이승훈 베드로라고 세례를 받고 돌아온 해이기도 합니다.  이 때 이후 약 100여 년간 1866년에 시작된 병인 대 박해가 끝나기까지 이 땅에서는 1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목숨을 바쳐 순교의 길로 갔다고 역사는 증언합니다.  우리가 아무도 그 숫자를 세어 본 사람은 없지만 말입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무슨 확신으로 그렇게 죽어가며 신앙을 증거할 수 있었을까?  요즘의 시각으로 제대로 해석할 수 없는 신비가 또한 그것이기도 합니다.  그때 순교하던 분들에게는 지금처럼 ’견진성사’를 받았다 받지 않았다 구별할 수 있는 시간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현명한 요즘 사람들보다도 훨씬 더 강한 믿음을 갖고 있었고, 환난과 위기에서 요즘 사람들보다 더 확실한 삶의 뿌리를 내리고 살았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하느님의 선물을 받은 사람들이 보이는 본보기요 모범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5) 다섯 번째 하느님의 선물은 ’지식’입니다. 우리는 공부를 통하여 지식을 쌓습니다. 무슨 필요에 의해서 우리가 그렇게 하겠습니까? 뭔가 우리 삶에 도움을 얻자는 뜻에서 그렇게 합니다. 그것이 돈 버는 수단이 될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할 수단이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지식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선물로 등장하는 지식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믿어야 할 것과 믿지 말아야 할 것을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지식은 언제나 같은 역할을 합니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방법을 찾는 것이 그 역할입니다.  하다못해 보험금을 노려서 자식의 손가락을 자르는 아버지도 짧은 생각이기는 하겠지만, 현세에서 겪는 어려움을 탈출하겠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하는 일들입니다. 우리가 하는 행동들에 대한 선악판단이야 당장 설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에 소용되는 지식이 바로 참된 지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6) 여섯 번째로 등장하는 하느님의 선물은 효도에 해당하는 ’효성(孝誠)’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에 하느님 어머니는 없지만, ’하느님을 아버지로 알아모시며 섬기는 행동’을 가리켜서 효성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효성 또는 효도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갖는 의무로써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의무의 차원을 넘는 것입니다.  연로(年老)하셔서 여기 아프고 저기 아프신 어르신들이 많이 있습니다.  의무의 차원으로 우리가 연로하신 부모님들을 공경하고 돌봐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의무로 할 수 있다면, 어디 병원에 모시고 간병인을 붙이고 ’나는 몰라라!’하면 되는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더 간단한 방법도 있습니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고려장(高麗葬)’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했다가는 법의 제제를 받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으로 제한합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들에게 벌을 가하죠.  효성이라는 것도 법으로 정해지기 이전에 정성있는 마음으로 해야하는 것이 바로 이 효도요 효성에 대한 것입니다.  똑같은 삶의 모습이 하느님에게도 적용됩니다.  인간이라는 당신의 창조물, 피조물들을 위하여 아들의 죽음을 통하여 구원의 선물을 주신 분이 하느님이라고 믿는 우리가 하느님을 향하여 마지못해 해야 할 일들만 간신히 한다면, 다른 사람에게서 욕이야 먹지는 않겠지만 모범이 되는 생활은 아닐 것입니다.

 

(7) 하느님의 선물 일곱 번째로 등장하는 것은 ’두려워함’입니다.  이 하느님의 선물은 소극적입니다.  잘못으로 우리를 이끌어갈 지도 모르는 일들을 피하라고 말하는 것이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인 설명은 이렇습니다.  ’두려워함이란 죄를 범하여 하느님께 합치하지 않을까 하여 그것을 피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고해성사를 하다보면 간간이 ’신부가 정해준 보속은 다 했습니다’하는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소극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 또는 목적은 ’죄를 피하고 죄를 짓지 않기 위하여 조심하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기 위하여 그 방법을 하느님의 지혜를 통하여 알아듣기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견진성사를 통하여 우리가 받는 하느님의 선물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어떻게 알아들으셨습니까?  견진성사를 통해서 우리가 받게 되는 선물은 그런 것입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지금까지 말씀드린 하느님의 선물은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해도 우리에게 다가오는 선물입니다.  선물이라는 말은 본래가 그렇습니다.  받아들이는 사람이 제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에 대해서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지, 겉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가치라든가 포장의 아름다움 때문에 그 의미가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도 돼지와 진주 이야기를 통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태오 복음 7,6<신약편 12면>에 보면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 그것들이 발로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귀한 것은 귀한 사람만이 알아보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이런 선물을 우리가 어떻게 깨닫고 알아듣는가에 따라 우리 생활을 통해서 맺을 삶의 열매는 달라지는 법입니다.

 

 

 4. 성령의 선물

견진성사를 통하여 받는 무형의 선물중 가장 큰 것은 성령입니다.  이 성령은 창조주 성부, 구원자 성자와 더불어 우리를 이끌고 우리가 공경하는 하느님의 한 위격입니다.  우리가 아는 지식으로 이렇게 저렇게 구별하기는 쉽지 않아도 견진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자동적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선물도 우리가 반응하고 받아들이는 방법에 따라서 그 열매나 효과가 나타나는 방법이 다르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견진성사를 통해서 받는 성령이, 우리 생활을 통해서 맺는 삶의 열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부분이 갈라디아서 5,22<신약편 365면>에 나옵니다. 그 열매들은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절제의 9가지입니다. 견진성사는 이러한 열매를 맺으실 성령을 우리가 공짜로 무료로 받는 성사입니다.  물론 우리가 함께 움직이지 않아도 우리의 몸을 성령이 사용하여 맺을 열매는 아닙니다. 우리의 적극적인 접근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성령의 열매를 보는 우리의 첫 느낌은 ’좋은 것은 다 언급하네!’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본래가 그런 것입니다. 좋은 것은 그렇게 통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앞 절인 5,21은 성령의 힘과 배치되는 욕정이 맺는 열매를 나열하고 있습니다.   ’음행, 추행, 방탕, 우상숭배, 마술, 원수 맺는 것, 싸움, 시기, 분노, 이기심, 분열, 당파심, 질투, 술 주정,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것’(15가지)을 말합니다.  이것을 읽어보는 첫 느낌은 ’좋지  않은 것은 다 몰아 놨구만!’하는 것입니다.  좋은 것에 대해서 같은 감정이 있을 수 있는 것처럼 그 반대의 것에도 우리는 같은 생각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왕이면 어감이 좋은 것, 이왕이면 우리 생활에 맺을 열매가 아름답고 좋고 나은 것을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우리가 받아들인 성령의 뜻에 올바르게 순종함으로써 맺을 열매라는 것입니다.  

 

 

 5. 사도행전 읽은 부분과 우리의 생활 관련성 찾기 -- 삶의 실천을 위하여

견진교리 시작부분에 저는 여러분과 함께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의 사람들이 성령을 받는 모습, 그렇게 성령을 받고 변화된 삶의 모습, 성령을 받은 사도들이 용감하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대중앞에서 설교하는 모습을 전하는 성서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이 내용을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고 우리 생활에서 그런 요소들을 찾아내어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은 어떤 것이 있을까 찾아봐야 하겠습니다.

 

 5.1 성령을 받다...

오순절, 예수님이 부활하신 빠스카 축제 후 50일째 되는 날 성령이 내려옵니다.

참조로 빠스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있었던 10번째 재앙인 장자들이 죽을 때에 하느님의 천사가 그냥 건너 지나갔다는 의미를 갖는 축제입니다.  이것이 좀 더 나중 사건인 홍해를 건너 죽음의 땅 이집트에서 홍해건너 광야이긴 했지만 그 땅, 생명의 지역으로 건너간 축제를 가리킵니다.  그것이 빠스카 축제입니다.  또한 오순절은 빠스카 축제 후 50일쯤 되는 날이기도 합니다만, 밀을 주식으로 삼아 먹고사는 사람들에게는 이 밀을 거두는 축제일과 연관이 된다고 합니다.  우리 땅에 비교하게 되면 ’추석 명절’에 비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기쁨의 날에 성령이 내려옵니다.  누구에게 오는가?  스승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시자 유다인들의 위협에 직면해있던 제자들, 너무나 두려워하여 12명의 제자들이 한 건물의 2층방에 모여 있었는데, 거기에 하느님의 힘이 내려오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11장에 보면, 인간들이 하느님의 영역인 하늘에 이르는 탑을 쌓다가 언어의 혼란이 생기는 벌을 자초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오순절에 나타난 성령은 제자들과 그곳에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불 혀’의 모양으로 내려옵니다.  혀는 말을 하려면 없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반드시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혀가 내려오고, 그곳에 있던 사람들에게 불길처럼 갈라져 서로 다른 능력을 주십니다.  첫 번째는 언어의 일치였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놀랍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저 사람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는 저 사람들이 하는 말을 저마다 자기 지방말로 듣고 있으니 어떻게 된 셈인가?"하고 놀랍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능력, 모든 것을 일치시키는 하느님의 능력입니다.  언어의 일치는 성령이 주신 첫 번째 선물입니다.

 

 5.2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서 어떤 방에 따로 모여 있었습니다.  당연히 중요하게 여겨야 할 인간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사람들이 성령을 받자, 죽음의 위협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들에게 목숨의 위협을 가했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대단한 변화입니다. 엄청난 변화입니다. 이제 제자들의 안중에는 자신의 목숨을 더 중요시해야 한다는 생각이 첫 번째로 자리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베드로는 용감하게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뜻과 계획에 따라 여러분의 손에 넘어간 이 예수를 여러분은 악인의 손을 빌어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2,23)고 큰소리칩니다.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삶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유다인들이 그렇게 죽인 예수를 그냥 두시지 않고 살아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이렇게 바뀝니다.  삶의 중심으로, 삶에서 우선으로 생각하는 것의 중요성이 바뀝니다.  물론 이것은 현실 인간의 생명을 무시하는 자세 위에 세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5.3 초기 신자들의 생활모습.....(2,42-43.47)

성령을 받은 사람들의 모습 때문에 주변의 ’다른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을 두려워하게 되었다’(2,43)고 전합니다.  그 효과에 만족하지 않고 삶의 모습을 달리합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이 표현했던 삶의 모습을 뒤돌아보고 우리가 거기에서 본받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5.3.1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삶의 중심은 항상 하느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우리가 마음만 먹는다면 옛날보다 훨씬 더 나은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성서를 쉽게 읽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편리하고 더 나은 시대에 살게는 되었지만 과거보다 더 낫게 행동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되는지 그것은 의문입니다.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이 따로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삶의 자세를 보며 우리는 성서말씀을 얼마나 가까이 자주 대하는지 뒤돌아 봐야 합니다. 우리가 찾아보지 않아서 하느님의 말씀을 외롭게 그대로 방치시켜 놓는다면 그것은 신앙인으로서 나아가야 할 일에 합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서는 우리가 인생사에 만나는 문제들에 대하여 수많은 응답을 주십니다.  우리가 찾으려고만 한다면 말이죠.

 

 5.3.2 형제적 친교==서로 도와주며....

삶의 중심이 자신을 떠나 하느님에게로 옮겨가면, 여러 가지 사정으로 나보다 못한 사람들이 눈에 띄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보면, 우리는 도움의 손길을 뻗치게 됩니다.   ’행복하여라,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으리니..(마태 5,7),   너희는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니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마태 25,34ㄴ)’라는 말씀을 떠올리게 하는 것입니다.

많은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웃을 향한 우리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마음과 자세로 이웃을 도와주고 있는지, 그렇게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혹시 반대로 기대하는 것은 없는지, 우리의 마음과 자세를 순화시켜야 할 것입니다.

 

 5.3.3 빵 나누고....

미사에 참여하고 같은 예수님의 몸을 나누어 먹는 일을 하는 것도 그들의 모습입니다.  ’나는 잘 사니까 내가 잘 먹고 마시는 것을 보고 그렇게 살지 못하는 너희는 바보같은 생활을 멍청하게 여겨라...’라고 했다면 그것은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는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먹는 일은 중요합니다.  성욕, 수면욕과 더불어서 인간의 3대 기본 욕망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 식욕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삶의 중심이 바뀌니 내 것을 나만의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게 되고 이웃을 향한 마음도 열리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이웃과 나누기 위하여 무엇을 내놓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며, 또한 성찬인 미사에 얼마나 자주 참여하고 기도하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물론 인간의 조건을 무조건 무시하고 덤비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중심이동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5.3.4 기도하고 자주 성전에 드나듦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보여준 또 한 가지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기도하기 위해서 성전에 자주 드나들었다는 것입니다.  성전은 하느님이 머물러 계시는 곳입니다.  세상을 조성하신 분이 인간이 만든 궁전에 산다고 생각할 것은 아니지만, 인간에게 확신을 주시기 위해서 하느님이 계신다고 하신 장소가 바로 ’지성소’입니다.

얼마나 좋은 마음으로 성전을 찾아오는지, 혹시 내게 필요한 것이 있을 때만 오지는 않는지, 무슨 불평을 하거나 원망하거나 하는 때에만 성전에 찾아오는 것은 아닌지?   또한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기 위한 기도는 얼마나 자주 하는지 초대교회 사람들의 모범을 보면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6. 기타 다른 성사에 대한 간략한 소개

견진성사는 세례성사를 좀 더 풍요롭게 하는 성사입니다.  하느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시작된 하느님의 생명을 완성 시켜주고 한번 시작한 길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있도록 해주는 성사입니다. 우리가 제대로 유지하면서 좋은 결실을 얻고자 한다면 말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교회를 통하여 인간에게 다가오는 하느님의 선물인 성사(聖事)를 제대로 받아들이고자 할 때 우리의 삶은 더 풍요롭게 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일곱 가지의 성사는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은총의 통로 또는 수로’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게 해주는 세례성사, 우리가 하느님의 몸을 깨끗한 마음으로 받아 모실 준비를 할 수 있게 해주는 고해성사, 하느님께서 몸소 인간이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있도록 당신의 몸을 나눠주시는 성체성사,  이 땅에서 하느님께 나아가는 중개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을 성별해 내는 신품성사,  인간 사이의 결합에 행복과 하느님의 은총을 주는 혼인성사,  육신이 지친 사람들에게 삶의 용기를 주는 병자성사로 구별합니다.

 

 


 

제 2 강의 : <기도(祈禱)에 관하여>

          1998. 11. 5. 목.

       ** 시작기도는 <저녁기도>

 

  0. 시작에 앞서

오늘은 견진교리의 두 번째 날입니다.

여러분들에게 견진교리에 대한 내용을 말씀드리며 걱정되는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교리의 내용에 대한 것이 아니라, 전달하는 방법에 대한 것입니다.  어제 밤에는 <구성애의 ’아우성’>이라는 프로그램을 밤늦게 보았습니다.  어제 밤(11/4. 수. MBC-TV)에 나온 내용의 제목은 ’청소년에게 성교육을 시키는 방법에 대한 7가지 제안’인가 어쨌는가 그랬습니다.  그랬는데, 거기에서 제시하는 방법과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내용을 비교해 보니 방법에 대해서 차이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1)참석자들이 원하는 것을 하고 있지 못한다는 것이고,  (2) 적당한 감정을 섞어서 흥미를 내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제 모습에 대한 두 가지를 이야기 드리며 여러분의 도움을 구하고자 합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재미있게 그리고 흥미있게 하면서 해야 할 내용에 대해서는 다 할 수 있는지 도움의 방법을 먼저 구하고 싶습니다.

 

한 주간에 두 번씩 하려니 여러분도 힘드시죠.  그러나 때로는 해야 할 일이라면 기분 좋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같은 일이라도 억지로 한다면 사고치기 십상입니다.  사고란 해야 할 일을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하면서 여러분들이 몸에 ’스트레스’가 쌓이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움직입니다.  하고 있는 일을 좋게 본다면 그가 맺을 삶의 열매는 좋은 것이 될 것이고, 억지로 하는 마음과 생각과 그리고 자세를 갖고 한다면, 겉으로 드러나는 일이야 어떻게든 되겠지만 그가 맺을 삶의 기쁨은 없을 가능성이 더 큰 것입니다.

딱딱한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며 한 가지 댈 수 있는 핑계는 ’가톨릭 교회의 교리는 신중함에서 이루어진다’는 변명을 하고 싶습니다.  제가 그런 핑계를 대지 않고 여러분에게 말씀드릴 수 있도록 여러분도 함께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지난 첫 번째에 저는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두 번째의 시간에는 ’기도에 대해서 말씀드리겠다’고 말입니다.

 

  1. 기도란 무엇인가? -- 개념

가장 먼저 시작할 말은 ’기도라는 말의 뜻’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모임에서 기도(祈禱)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그러나 ’기도의 뜻이 무엇입니까?’하고 묻는다면 ’아... 뭐 그런 거 있죠. 알면서 왜 물어요? 창피하게....’하는 정도로 정작 대답해야 할 본질을 비켜나가려고 애를 씁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정확하게 그 말의 뜻을 아는 경우도 있지만 입에서만 맴도는 말을 표현하지 못해서 우물거리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기도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답을 들어본다 *****

예전에 정리된 교리서<트린덴틴 공의회 정의 320조목>에는 ’우리 마음을 들어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안에 마음이 어디 따로 있는지는 저도 몰라도 어쨌든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마음을 든다’고 했으니, 하느님이 계시는 곳도 우리가 사는 땅과는 차원이 다른 곳이라는 첫 번째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마음을 들어올릴 수 있는지도 따로 생각해봐야 합니다.  

이 말을 이해하기가 좀 어려우니, 현대의 표현을 적용해서 말씀드리죠.  기도는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대화’입니다.  흔히 대화란 보이는 상대자끼리 오고가는, 드러나는 말을 통하여 자신의 뜻을 전달하고 다른 사람의 뜻을 알아듣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서 자신 없어 하는 사람들은 개신교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나서 한다는 소리,  ’야! 개신교 사람들은 기도 잘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기도란 ’하고 싶은 말을 폭탄을 터트리듯’ 무조건 쏟아 붓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한풀이이지, 올바른 의미의 기도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사람들끼리의 이야기에서도 그런 것이 적용됩니다.  이야기하자, 대화하자고 하면서 한쪽편의 말을 일방적으로 들으면 우리는 귀를 씻어야 할 것입니다.  내 생각을 가지고 한쪽을 세뇌(洗腦:상대자로 하여금 일종의 정신마비상태에 함입시켜 어떤 사상·주의를 주입하는 일)시키는 것을 우리는 기도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기도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굳이 기도라고 불러야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기도입니다.

하느님은 인간 사이의 대화는 그런 방법으로 되지 않습니다. 대화는 오고가는 쌍방관계입니다. 내 것을 쏟아 부었으면, 그 다음 순간에는 하느님의 소리를 들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소리는 우리가 하는 말처럼 그렇게 시끄럽게 오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는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입니다.

 

  2. 기도의 목적?  기도의 종류?  어떻게 하면 기도를 잘 할 수 있는가?  

두 번째로 말씀드릴 내용은 기도의 목적입니다. 사람이 하는 일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밥을 먹는 것은 힘을 얻어서 우리의 육신이 살게 하자는 것이고, 물을 먹는 것은 갈증을 해소하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고 강조하는 것도 다들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많은 일들은 다들 목적이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시는 일들입니다.

 

’하느님과 인간사이의 대화인 기도’에는 어떤 목적이 있는가?  ’기도의 목적’은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합니다.  하느님을 흠숭하기, 감사드리기,  용서를 청하기, 바라는 것을 말씀드리기의 네 가지입니다.  즉 흠숭, 감사, 용서를 구함, 청원이 그것입니다.

 

흠숭이란, 하느님께 인간이 드리는 공경이며 그분을 찬미하는 행위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가장 중요한 목적입니다.  감사드리는 일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셔서 지금까지 있게 해 주셨음과 나에게 필요한 여러 가지 은혜를 베풀어주셨음에 대한 마땅한 표현입니다. 용서를 청하는 것은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잘못한 일들<=죄>에 대해 뉘우치며 새로운 다짐을 바치는 일이고,  네 번째의 목적인 청원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하는 일들을 베풀어주시기를 말씀드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들 네 번째의 것만을 잔뜩 늘어놓은 다음에 ’나는 기도 다했다!!!’고 말합니다.  착각하면 하느님과 별로 기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순서를 바꾸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다음으로 기도의 종류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두 가지로 크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묵상기도와 염경기도가 그것입니다.  드러나는 말이 없는 기도가 묵상기도이고, 우리의 입으로 소리를 내어 함께 하는 기도가 염경기도입니다.  이 염경기도는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을 기도문을 사용하는 것도 포함합니다.

 

이러한 목적과 이러한 종류로 설명할 수 있는 기도를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는가?  질문은 어려운 것이지만, 대답은 간단합니다.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들어 하느님 앞에 앉아서, 그 분의 말씀을 듣고 그 분의 뜻을 실천할 테니, 힘을 달라고 우리의 시간을 바치면 됩니다." 그것 말고는 더 좋은 방법이 없지 않을까 합니다.   

 

  3. 성서에 나타난 기도의 모범들

여러분, 오늘은 성서를 가지고 오셨겠죠. 많은 분이 가져오지 않으셨더라도 오늘은 성서를 읽겠습니다.  읽고 싶은 내용은 기도에 대한 것입니다.

 

 3.1 솔로몬의 기도(1열왕기 3,6-9   => 구약성서 524 - 525면 )

다윗의 아들로 태어난 솔로몬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고 노력합니다.  완벽하지는 못했지만 말입니다. 그가 어느 날은 기브온의 산당에서 천마리나 되는 번제물을 바칩니다.  그리고 그날 밤, 솔로몬은 하느님의 소리를 듣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면 좋겠느냐?" 이에 대한 솔로몬의 응답은 한편의 기도입니다.  함께 읽으시죠.

구약성서 열왕기 상권 3장 6절-9절까지입니다.  

******  성서를 읽는다 *****

하느님 앞에서 겸손한 마음을 갖는 방법이 솔로몬의 기도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하느님을 먼저 찬미하고, 자신을 돌아보고,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이것이 기도의 모습입니다.

 

 3.2 아브라함의 기도 --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기도

다음으로 함께 읽고 싶은 부분은 창세기 12장 1-3절입니다. 구약성서 15면입니다.

 *** 성서를 읽는다 ***

아브람의 자세는 그 엄청난 일에 그저 ’분부하신 대로 길을 떠났다’고 합니다.  이것이 아브람이 보인 기도의 첫 번째 모습입니다. 이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에서 아브람은 하느님의 친구로 나옵니다.  하느님이 겸손한 아브람의 모습을 보시고 그렇게 인정하신 것입니다.

 

 3.3 기도의 올바른 자세 -- 필립비 서간의 바오로의 기도 (2,6-11)  (신약 편 378면)

이 부분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인간으로 오신 그리스도 예수를 찬미하는 노래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필립비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입니다.  

***** 성서를 읽는다 *****

이 세상에 사는 사람 그 누구도 중요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면서 어떻게 그 가치를 보여줄 수 있는가하는 것에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믿음으로 고백하는 내용은 하느님이 인간으로 오셔서 당신을 죽음에 내어놓기까지 순종하셨다는 것이고, 그 모습을 통하여 모든 이의 존경을 받고 찬양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을 지내며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나쁜 것은 아니죠.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방법은 우리가 어떤 것을 선택하는가에 따라서 선악의 가치도 달라질 것입니다.  자신만을 위해서, 자신의 안녕만을 위해서 움직이는 것이라면 ’악하다고 할 것도 없겠지만 선하다고 봐줄 일도 없을 것’입니다.

 

 3.4 하느님의 사랑은 어떠한가?  -- 요나의 이야기  < 구약편 1535면 이후>  ** 읽지 않는다 **

하느님은 누구를 사랑하시는가? 어떤 사람을 사랑하시는가? 우리가 질문하고 응답을 듣고 싶어하는 내용입니다. 구약성서 요나서를 보면, 하느님은 요나 예언자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이방인들도 사랑하신다’는 말씀을 남기십니다.

니느웨라고 하는 도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치욕을 안겨준 아시리아의 수도입니다. 거기에 살고 있던 사람들과 하느님의 피조물에 대해서 하느님은 남다른 애정을 갖고 계십니다.  또한 징벌의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이 보이시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찾고자 하는 사람이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이면 그 누구도 하느님 사랑의 대상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전하러 가야 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앞세워 다른 곳으로 도망갑니다.  그랬다가 커다란 물고기(=고래?)의 뱃속에서 삼주야를 지낸 다음 처음의 그 도시로 다시 파견됩니다. 그리고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죠.  그러나 그에게는 여전히 왜곡된 심성이 남아있었습니다.   선포한 다음, 니느웨 사람들이 구원의 길로 들어서자 뾰루퉁해져서 하느님께 항의합니다. 이렇게 자비를 보이실 하느님이 무엇 때문에 헛걸음하는 고생을 시켰냐는 것이죠.  그런 그에게 커다란 아주까리가 자라서 하루를 시원하게 지내게 해줍니다.  또 한번 탓하는 그에게 하느님은 선언하십니다.   "이 니느웨에는 앞뒤를 가리지 못하는 어린이만 해도 십이만이나 되고 가축도 많이 있다.  내가 어찌 이 큰 도시를 아끼지 않겠느냐?"(4,11)

 

  4.  우리 시대에 제시하는 가톨릭 교회의 기도들

가톨릭 기도서를 보면 많은 기도문들이 나옵니다.  요즘 새로 나온 책을 보면 예전보다 그 기도문의 수(數)가 줄어들긴 했습니다만, 여전히 여러 가지의 기도가 나옵니다.  앞서도 기도의 목적을 말씀드리기는 했습니다만, 기도는 사람의 마음을 모으게 하는 역할도 합니다.   인간이 읽을 수 있는 언어이긴 하지만, 인간의 생각과 뜻만을 담은 것은 아닌 것이 가톨릭 기도서에 나오는 것들입니다.  이 기도서에 나오는 기도들을 구별해 보겠습니다.

 가장 먼저 일상 기도가 있습니다.  성호경, 주의기도, 성모송.... 삼종기도에 이르기까지 기도문들이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반복해온 기도입니다.

다음으로 꼽을 수 있는 기도는 아침기도, 저녁기도, 묵주기도가 있습니다.  독립돼 있는 별도의 새로운 기도문은 아니고 앞에 말씀드린 일상기도문의 내용을 목적에 따라서 성격에 따라 이렇게 저렇게 순서를 정한 기도입니다.  하루의 시작을 준비하면서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 우리의 몸이 쉬기 위하여 돌아온 쉼터에서 가져야 할 감사의 자세는 어떠한지, 인간들에게 펼쳐지는 하느님 구원의 역사는 어떤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졌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이 묵주의 기도의 성격입니다.  우리 신자들이 흔히들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고 허락을 얻어내기 위한 방법으로 많이 생각하는 것도 <9일 기도>입니다.  이 <9일 기도>는 묵주기도의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인류의 구원을 이루시는 길에 신앙인으로서 함께 하여 하느님이 되시는 구원의 길에 우리도 조금이나마 동참하고자하는 기도로 십자가의 길이 있습니다.  이 십자가의 길은 사순절에 성당에서 함께 하기도 합니다.

또한 몇 가지 성월기도가 있습니다.  교회는 1년 중의 몇 달을 특별한 정신을 갖고 살기를 권고합니다.  그래서 몇몇 개월에 고유의 기도문을 정하고 함께 하기를 권고합니다.   3월에는 성요셉 성월,  5월에는 성모의 성월, 6월에는 성심 성월,  9월에는 순교자 성월, 10월에는 전교의 성월,  11월에는 위령성월이라고 부르고 각각 그에 맞는 기도문의 본보기를 기도서에 싣고 있습니다.   견진교리를 하고 있는 지금 11월은 위령성월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이 세상을 떠나신 분들을 기억하고 그분들께서 하느님이 허락하시는 안식을 누리실 수 있도록 우리가 마음을 모아 함께 기도하는 때입니다.

 

  5. 가장 완전한 기도는 미사

지금까지 기도에 대해서 몇 가지로 나누어 말씀드렸습니다.  이제는 정리하는 내용입니다.  정리하는 내용에서는 가장 완전한 기도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그리고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기도와 생활에 대한 것을 이야기 드리겠습니다.  

여러 가지 기도에 대해서,  기도의 목적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교회에서 말하는 가장 완전한 기도는 미사에 참례하는 것입니다.  이 미사는 지난 화요일에 말씀드린 성체성사를 이루는 바로 그 예절이고, 여러분들이 주일이면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러 오시는 것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주일미사는 신앙인이 신앙인의 생활을 해 나가기 위해서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속된 표현으로 주일미사만 덜렁하니 참례하거나 나오면서 난 나와야 할 미사에 다 나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어폐(語弊)있는 말입니다.  이곳 고양동 성당에는 일주일 중에 미사가 없는 날도 있긴 합니다만, 신앙생활의 증진을 위해서는 평일에도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하느님께 바쳐야 할 것입니다.  집에서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바치는 것도 가능하며 권할 만한 방법도 되지만, 이곳 성당에 오셔서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도 듣고 그분의 몸도 영하는 일도 필요한 것입니다.

 

  6. 우리는 기도를 언제 할 것인가?  

성서에는 이 질문에 응답하는 곳이 있습니다. ’언제나 기도하며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하십시오(에페6,18)’. ’늘 기도하십시오(1테살 5,17).’  사람이 언제나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마음속에 간직함으로써 이런 말씀은 실천할 수 있습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마태 26,41)"하신 말씀대로 죄로 유인하는 유혹, 죄, 사랑의 실천을 필요로 할 때, 특별한 은총을 구해야 할 때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당신의 사명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기도하셨습니다.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로 가셔서 40일 동안 무엇을 했겠습니까?(마태오복음 4,1이하)  가끔씩은 먼동이 트긴 전에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셔서 기도하시기도 하셨다는(마르 1,35) 말씀이 성서에 나옵니다.  또한 기적을 하시기 전에도 기도하셨습니다.(마태 14,19; 14,23; 15,36). 최후만찬의 순간에도 빵을 당신의 몸으로, 포도주를 당신의 피로 만드는 예절을 거행할 때도 예수님은 기도하셨습니다.(26,27)  또한 인간의 입장이라면 피하고만 싶었을 수난의 순간에도 예수님은 기도하셨습니다(마태 26,42 - 아버지, 이것이 제가 마시지 않고는 치워질 수 없는 잔이라면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이처럼 기도는 예수님의 생활과, 그리고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우리가 따로 떼어놓고 바라볼 수는 없는 아주 본질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본받을 완전한 기도는 예수님이 직접 알려주신 주의기도입니다.  마침기도는 주의기도를 두 번 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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