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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리스도인은 왜 자비로워야 하는가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0-04-19 조회수2,458 추천수0

그리스도인은 왜 자비로워야 하는가


하느님께서 베푸신 자비, 이웃에게 말과 행동으로 실천해야

 

 

- 하느님께서는 외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어 십자가 희생과 부활을 통해 당신의 완전한 자비를 드러내셨다. 그림은 15세기 플랑드르의 거장 로베르 캉팽이 그린 ‘삼위일체’ 작품.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특별히 기억하자며 새천년기를 여는 2000년 대희년 부활 제2주일에 ‘하느님의 자비 주일’을 제정했다. 교회는 이후 부활 제2주일에 하느님의 자비를 간구하며 이날을 기념하고 있다.

 

하느님의 자비 주일을 맞아 하느님께서 왜 자비하신지, 그리스도인은 왜 자비로워야 하는지를 정리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하느님은 자비로우신 분이시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잘못을 용서한다”(탈출 34,6-7)고 당신을 밝히셨다.

 

자비로우신 하느님은 울부짖는 인간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고통받는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마음이 미어지신다. 비참한 이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측은지심을 지니신다.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뒤에 인류를 죄악에 얽매인 채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역사 안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당신의 자비로우신 본성을 끊임없이 보여주셨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역사 안에서만이 아니라 영원토록 당신의 자비 아래에 두시기 위해 인류의 역사를 구원의 역사로 변화시켜 주셨다.

 

이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아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셨을 때 “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너에게 한결같이 자애를 베풀었다”(예레 31,3)고 하신 말씀으로 증명됐다. 그래서 지혜서 저자는 하느님께 “당신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시며 당신께서 만드신 것을 하나도 혐오하지 않으십니다”(지혜 11,24)라고 찬미한다.

 

이에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비를 자신의 죄와 불충을 덮어주는 하느님 본성의 사랑의 힘으로 이해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의 불성실을 자각할 때마다 하느님께 자비를 호소한 것도 바로 이러한 연유다.

 

 

하느님 자비의 계시요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께서는 ‘때가 차자’ 외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고 주님의 십자가 희생과 부활을 통해 당신의 완전한 자비를 드러내셨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예수 그리스도를 “육화되고 인격화된 자비”(「자비로우신 하느님」 2항)라고 했다.

 

인간은 자비로우신 예수님을 보고 하느님의 자비를 깨닫는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것을 통해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셨다. 주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셨다.(루카 4,18-19 참조) 또 주님께서는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루카 7,22) 구원의 삶을 주셨다. 이 모든 것이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보이는 표지이다. 눈에 보이는 이 표지 때문에 오늘을 사는 사람들도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뵈올 수 있게 됐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느님의 자비를 완성하셨다. 주님께서는 부활을 통해 죽음보다 더 강한 하느님의 자비를 체득하신 것이다. 그래서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파스카의 그리스도야말로 자비의 완결된 강생이시며 자비의 살아 있는 표지”라고 찬양했다.(「자비로우신 하느님」 8항) 또 프란치스코 교황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느님 자비는 영원하고 그의 사랑은 끝이 없다는 시편의 예언을 완전하게 실현했다”고 말했다.

 

 

하느님 자비의 관리자요 선포자인 교회

 

교회는 세상에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생생하게 보여줘야 할 책임이 있다. 자비는 신앙생활의 토대이다. 교회의 모든 사목 활동은 온유함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그 온유함을 신자들과 세상에 보여주고 증언해야 한다.

 

그래서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회는 자비를 고백하고 선포할 때에 본연의 삶을 사는 것이다. 자비가 창조주와 구세주의 가장 놀라운 속성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사람들을 구세주의 자비의 샘에 가까이 가게 만들 때에 본연의 삶을 사는 것이다. 교회는 그 자비의 관리자요 분배자이기 때문”이라고 했다.(「자비로우신 하느님」 13항) 프란치스코 교황도 “교회에 대한 신뢰도는 자비와 연민이 가득 찬 사랑에 달려 있다”(「자비의 얼굴」 10항)고 강조했다.

 

 

자비는 그리스도인의 삶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그리스도인이 왜 자비로워야 하는지 주님께서 일깨워주신 말씀이다.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 보이시면서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따라 삶을 살도록 요구하셨다.

 

주님께서는 이 요구를 두 가지로 표현하셨는데 하나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하는 것”(마태 22,37-38)이라고 하신 계명을 통해서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참행복 선언에서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태 5,7)고 선포하신 축복을 통해서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 정신’이다.

 

복음 정신은 주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이들, 즉 그리스도인에게 요구하시는 새로운 삶의 가치 질서이다. 굶주린 이, 목마른 이, 헐벗은 이 등 어려움에 처한 불행한 사람들, 특별히 가난한 사회 약자를 자비로이 보살피며 사는 삶이다. 이 자비의 삶은 그리스도인이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계명이다. 자비가 참된 하느님의 식별 기준이라는 게 이 말씀의 뜻이기 때문이다.

 

 

자비로운 삶이란

 

자비는 타인의 비참을 마음으로 아파하는 것이다. 자비라는 라틴말 ‘misericordia’(미세리코르디아)는 ‘비참’(miseria, 미세리아)과 ‘마음’(cor, 코르)을 합친 단어이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타인이 고통에 몸부림칠 때 내 가슴도 무너져 내리고, 타인이 서럽게 울고 있으면 나도 함께 울어주는 것이 자비”(「신국론」 19,7)라고 설교했다.

 

자비는 ‘용서’하고 자신을 ‘내어주는’ 삶에서 드러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우리가 먼저 하느님의 용서를 받았기에, 용서의 도구가 되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한없는 자비를 베푸셨음을 깨달아 우리도 남에게 관대하게 대하자”고 권고한다.(「자비의 얼굴」 14항)

 

자비를 실천하려면 먼저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한다. 하느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발견해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회개’가 선행돼야 자비로운 삶을 살 수 있다. 이를 교회에서는 ‘복음적 가난’이라고 표현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자비를 육체적ㆍ영적 활동으로 구분한다. 자비의 육체적 활동으로는 배고픈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이들에게 마실 것을 주며, 헐벗은 이들에게 입을 것을 주고, 나그네들을 따뜻이 맞아주며, 병든 이들을 돌보아 주고, 감옥에 있는 이들을 찾아가 주며, 죽은 이들을 묻어 주는 것이라고 했다.

 

자비의 영적 활동으로는 의심하는 이들에게 조언하고, 모르는 이들에게 가르쳐 주며, 죄인들을 꾸짖고, 상처받은 이들을 위로하며, 모욕한 자들을 용서해 주고, 괴롭히는 자들을 인내로이 견디며, 산 이와 죽은 이들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교황은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면 말과 행동으로 가난한 이들을 위로하고, 현대 사회의 새로운 노예살이에 얽매인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자신 안에 갇혀 있어 제대로 보지 못하는 이들이 다시 볼 수 있도록 하고, 존엄성을 빼앗긴 모든 이가 다시 그 존엄을 찾도록 하는 것을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자비의 얼굴」 16항)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4월 19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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