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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략설명 한국교회 최초 수덕자 홍유한 선생과 후손 순교자들의 안식처
지번주소 경상북도 봉화군 봉성면 우곡리 151-2 
도로주소 경상북도 봉화군 봉성면 시거리길 397
전화번호 (054)673-4152
팩스번호 (054)673-70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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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주소 경상북도 봉화군 봉성면 시거리길 397
성지와 사적지 게시판
제목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권철신과 이기양이 지은 홍유한 제문의 행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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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0-05-17 조회수215 추천수0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2) 권철신과 이기양이 지은 홍유한 제문의 행간


「칠극」의 가르침 오롯이 실천한 한국 가톨릭교회 첫 수덕자

 

 

농은 유고에 수록된 권철신이 쓴 홍유한 선생 제문의 전문. 중간에 빨간색으로 표시한 부분이 「칠극」의 덕목에 맞춰서 농은 선생의 생애를 회고한 대목이다.

 

 

농은 홍유한(洪儒漢, 1726~1785)은 한국 가톨릭 최초의 수덕자(修德者)로 일컬어지는 분이다. 성호 이익의 제자로, 30대 초반이던 1757년 천주교 교리서를 처음 접한 뒤 서학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특별히 그의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든 것은 「칠극(七克)」이었다. 스승 성호 이익의 인가도 있었지만, 진리를 담은 층층의 가르침이 내면에서 깊은 감동을 일으켰다. 그는 이 책을 바탕으로 수계 생활을 몸소 실천에 옮겼다. 그는 「직방외기」와 「천주실의」 같은 책도 구해서 읽었다. 「직방외기」 서문을 독특한 필치로 베껴 써둔 친필이 남아있다.

 

조선 천주교회는 1784년 초에 이승훈이 북경에서 최초로 세례를 받고 돌아옴으로써 시작되었다. 이듬해인 1785년 3월에는 명례방에서 푸른 두건을 쓰고 얼굴에 분을 바른 이벽이 미사를 집전하다가, 노름판이 벌어진 것으로 착각한 순라꾼의 급습으로 천주교 집회가 적발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홍유한은 그 일이 있기 두 달 전인 1785년 1월에 세상을 떴다.

 

김대건 신부는 조선 교회 창립에 대해 쓴 제17신에서 “이때 홍유한이라는 선비는 만물의 창조주이신 천주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고 가톨릭교회의 서적과 행적을 연구하여, 세례를 받지는 않았지만, 천주교 신자의 예에 따라 천주님을 공경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천주교회에 대한 기초 지식이 없었고 교회의 법규도 몰랐던 것입니다. 단지 매달 일곱째 날을 지킬 정도였습니다”라고 그의 초보적 신앙생활에 대해 이야기했다.

 

농은 홍유한 선생 묘지가 있는 우곡성지(경북 봉화군 봉성면 우곡리)에 있는 홍유한 선생의 동상. 손에는 「칠극」이 들려있다. 우곡성지 황영화 신부 제공.

 

 

칠극의 7죄종 극복하는 덕목과 정확히 일치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 1736~1801)은 홍유한 누님의 사위였고, 성호 이익의 문하에서 함께 공부한 인연이 있었다. 홍유한이 세상을 뜨자 그를 위해 제문을 지었다. 이기양(李基讓, 1744~1802)도 같은 남인으로 역시 제문을 지어 보냈다. 「풍산세승(豊山世乘)」 제10책에 수록된 홍유한의 제문과 만시는 당시 내로라하던 남인 학자들이 총망라되어 있었다. 특별히 두 사람의 제문이 눈길을 끄는 것은 제문에서 한결같이 홍유한의 일생 행적을 「칠극」의 7가지 죄악을 이기는 7덕목에 대응시켜 설명한 점이다.

 

권철신은 서두에서 자신과 홍유한이 성호 이익의 제자로 동문의 우의가 있었고, 그를 사모하여 온 집안을 이끌고 가서 그를 좇으려 했었다고 말했다. 권철신은 “공께서 대월(對越)의 공부에 잠심하여 이미 그 사사로움을 능히 다 없앤 줄을 알지 못하였으니, 이른 바 지나치다고 했던 것은 나의 아집을 지닌 견해로 공의 사사로움 없는 마음을 가늠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라고 적었다. ‘잠심대월(潛心對越)’은 주자가 「경재잠(敬齋箴)」에서 “마음을 가라앉혀 지내면서, 상제(上帝)를 마주해 찬양하라(潛心以居, 對越上帝)”고 한 데서 따온 말이다. 상제 즉 하느님을 찬양한다는 ‘대월(對越)’이란 표현을 썼다. 권철신은 홍유한의 행동에서 지나친 점을 느꼈는데, 그것이 실은 그의 신앙심에서 나온 것인 줄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고 쓴 것이다.

 

권철신이 지적한 홍유한의 지나침은 그 명목이 이러하다. 구분의 편의상 번호를 붙였다. “아! 공께서 [1] 식사하실 때는 반드시 그 절반을 더셨고, 어쩌다 맛난 음식과 만나면 더더욱 그 즐김을 절제하였습니다. 덜어내고 줄이기를 지극히 하여 피부에 윤기가 나지 않았으니, 저는 공께서 음식을 절제함이 지나치다고 생각했습니다. [2] 젊어서부터 내실에서 지내는 경우가 지극히 드물었고, 서른 살 이후로는 다시는 자식을 낳아 기르지 않았으므로, 저는 공께서 여색을 절제함이 지나치다고 여겼습니다. [3] 몸에 고질이 있어, 기거가 몹시 힘들었는데도 잠자리에 들 때가 아니고는 일찍이 기대거나 눕지 않으셨으니, 저는 공께서 자신을 규율함이 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4] 뜻하지 않게 나쁜 일이 생겨도 조용히 즐겁게 받아들여, 남을 비난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자신이 바르다고 변명하지도 않았으니, 저는 공께서 머금어 참는 것이 지나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5] 신분이 낮은 사람이 마루 아래에서 절을 올리면 반드시 몸을 움직여서 답례하였고, 평소에 말을 쉽게 하지 않아 일찍이 몸으로 맹세하지 않았으니, 저는 공이 겸손을 고집함이 과하다고 여겼습니다. [6] 길을 가다가 늙고 병든 이와 만나면 말에서 내려 그에게 주고는, 백리의 불볕더위 길을 아픈 몸을 무릅쓰고 걸어갔으니, 저는 공께서 남에게 베푸는 것이 심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嗚呼! 公當食, 必舍其半, 若遇美味, 尤節其嗜. 省減之極, 肥膚不豊, 則小子以公之節食爲過矣. 自少處內絶稀, 三十以後, 不復生育, 則小子以公之節色爲過矣. 身有痼疾, 起居甚難, 而非就寢, 未嘗?臥, 則小子以公之律己爲過矣. 非意橫逆, 恬然樂受, 恥發人非, 不辨己直, 則小子以公之含忍爲過矣. 下賤堂下之拜, 必動身而答之. 平常不易言, 未嘗以身爲質, 則小子以公之執謙爲過矣. 道遇老病, 下馬授之, 百里炎程, 力疾徒步, 則小子以公之施人爲過矣.)

 

권철신은 홍유한의 과도한 점을 여섯 가지로 지적했다. 첫째는 절식(節食), 둘째가 절색(節色), 셋째는 율기(律己), 넷째는 함인(含忍), 다섯째가 집겸(執謙), 여섯째는 시인(施人)이다. 이 여섯 가지는 「칠극(七克)」의 7죄종(罪宗)을 극복하는 덕목과 정확히 맞대응 된다.

 

첫째, 음식에 대한 절제는 「칠극」 ‘색도(塞)’ 곧 탐욕스레 먹는 것을 막는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둘째, 절색은 ‘방음(坊淫)’, 즉 음란함을 막는 것과 호응한다. 셋째, 자기 규율은 ‘책태(策怠)’, 게으름에 대한 채찍질과 맞통한다. 넷째, 함인은 ‘식분(熄忿)’에 연결되니 인내로 분노를 가라앉히라는 것이다. 다섯째, 집겸은 ‘복오(伏傲)’ 즉 교만을 눌러 겸손하라는 가르침과 같다. 여섯째, 시인(施人)은 남에게 베푸는 것으로, ‘해탐(解貪)’, 곧 탐욕을 풀라는 것과 관련이 있다. 남은 것은 ‘평투(平妬)’ 뿐이다. 질투를 가라앉히라는 말이다. 홍유한 본인에게는 애초에 해당할 일이 없었기도 하지만, 굳이 일곱 가지로 나열하지 않은 것은 「칠극」과의 연관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일곱 가지 죄종(罪宗)을 극복하는 일곱 덕목 중에 권철신은 여섯 조목을 대응시켜, 홍유한의 삶이 「칠극」의 가르침을 오롯이 실천에 옮긴 역정이었음을 설명했다.

 

 

칠극 바탕으로 수덕의 삶 실천한 농은

 

이기양은 아들 이총억이 주어사 공부 모임과 명례방 모임에 참석했던 천주교 신자였다. 천주교를 배척하는 안정복과 크게 논쟁을 벌인 일도 있다. 이기양이 쓴 홍유한 제문의 한 대목은 이렇다.

 

“아! [1]식욕과 [2]색욕은 사람이 크게 욕망하는 바이다. 하지만 선생은 자신에게 있어 담박하기가 고목과 같았고, 막아 억제함은 원수와 적을 대하듯 했다. [3]해침과 [4]요구함은 사람이 누구나 병통으로 여기는 바이다. 하지만 선생은 남에 대해 혹 다치기라도 할까 봐 아껴 보호하였고, 능히 하지 못하는 듯이 베풀어 주었다. 치우치기 쉬운 것이 [5]오만인데, 선생은 스스로를 볼 때 언제나 남과 어울리기에 부족한 듯이 한 사람이다. 가라앉히기 어려운 것이 [6]분노이지만, 선생은 남을 살핌에 있어, 항상 어디를 가든 덕이 아님이 없는 것처럼 한 분이다. 잠시 동안은 능해도 오래가는 이가 드문 것은 [7]게으름이 틈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선생은 세상에 사는 60년 동안 여기에 한결같아서 줄을 그은 것처럼 반듯하였다.” (嗚呼! 食色, 人之所大欲也. 而先生之於身, 淡泊如枯木, 防制如仇敵. ?求, 人之所同病也, 而先生之於人, 愛護如恐傷, 施與如不克. 易?者傲也, 而先生自視, 常如無足以齒人者. 難平者怒也, 而先生視人, 常如無往而非德者. 能於暫而鮮於久者, 惰乘之也. 而先生之於生世六十年, 一於是而如畵也.)

 

편의상 번호를 매겼는데, 이 일곱 가지 또한 「칠극」의 7죄종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글 끝에서 이기양은 ‘겸손[謙]’이란 한 글자가 공이 평생 수용한 것이라면서, “진실로 도가 존재한다면, 또한 그 사람이 죽고 살고가 무엇이 안타깝겠는가?”라는 말로 글을 마무리 지었다.

 

요컨대 권철신과 이기양 두 사람은 홍유한의 삶이 「칠극」을 바탕으로 욕망과 죄악을 몰아내는 수덕(修德)의 삶 그 자체였고, 그가 사실은 천주교의 참 신앙을 실천했던 신앙인이었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이 글을 쓴 1785년 즈음은 천주교 신앙이 조선 땅에서 꿈틀하며 태동의 몸짓을 이어가던 때였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5월 17일,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학 교수)]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3) 권철신의 남행 계획과 그들이 꿈꾼 공동체


성호학파, 서학의 사유 받아들이는 전위적 학술집단 꿈꾸다

 

 

1785년 홍유한의 부고를 듣고 권철신(암브로시오)이 지은 제문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아! 한 구역의 땅에 터를 잡고 손을 잡고서 함께 돌아가는 것은 제가 예전부터 품었던 소원이었습니다. 또한, 동지 몇 사람이 십수 년 동안 꼼꼼히 얽어 준비한 계획은 마침내 일과 마음이 어긋나 중도에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홀로 천리 밖 영남에서 공이 홀로 지내면서 한 사람도 따름이 없어, 살아서는 서로 힘이 되지 못했고, 죽어서도 서로 알지 못했으니 제가 공을 저버림이 크다 하겠습니다.(嗚呼! 擬卜一區, 携手同歸, 是小子夙昔之志願, 亦同志數人, 十數年綢繆謀畵者, 而畢竟事與心違, 中道解散. 獨僑公於千里嶺外, 而無一人相隨, 生不相將, 死不相知, 小子之負公大矣.)”

 

 

홍유한, 1775년 영주 구구리로 터전 옮겨

 

동지 몇 사람과 영남 지역으로 이주해서 함께 살며 공부하기로 한 계획을 생전에 이루지 못해 안타까워한 내용이다. 홍유한은 충청도 예산 여사울에 살다가 1775년에 영주의 구구리로 터전을 옮겼다. 그의 이주는 스승 성호가 오래전부터 꿈꾸었던 유학의 본고장 영남으로의 이주를 결행한 것이어서, 동료 선후배 학자들의 지지와 선망을 한몸에 받았다. 하지만 그의 이주는 그 혼자만이 아닌, 권철신과 이기양 등 뜻맞는 후배들과의 공동 이주 계획에 바탕을 둔 것이었고, 이 공동 이주의 첫 단추를 홍유한이 앞장서서 실행에 옮긴 것이었다.

 

1763년 성호 이익의 사망 후에 성호학파의 중심은 경기도 안산에서 충남 예산으로 옮겨갔다. 성호의 조카였던 정산(貞山) 이병휴(李秉休, 1710~1776)가 그 중심에 있었다. 그는 성호의 영향으로 진작부터 「칠극」 같은 서학서를 접하고 있었고, 홍유한이 예산 땅으로 이주를 결심한 것도 성호학파의 재편 구도와 맞물려 있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당시 권철신이 이병휴에게 보낸 편지에는 성호의 유집을 어서 정리해 정본을 만들어야 한다고 거듭 재촉하고 있었다. 이병휴는 자신의 건강과 집안일로 인해 이 작업에 온전히 몰두하지 못하는 사정을 전하며 답답해 했다.

 

1776년 10월 15일에 쓴 이벽의 이병휴 제문. 이벽의 유일한 친필이다. 이병휴의 사랑을 받은 내용이 자세하게 나온다.(소장처 불분명)

 

 

하지만 이병휴의 양명학적 사고와 서학에 대한 개방적 태도는 성호학파 소장 그룹들을 열광시켰다. 그의 문집 「정산고」에는 서양 선교사와 서학서에 대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권철신, 이기양, 그리고 이벽(요한 세례자) 등 차세대 성호학파를 대표하는 신진기예들이 예산을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이들은 독특한 색깔을 띤 한 흐름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주자학에 대한 비판적 관점이 양명학의 수용으로 이어졌고, 이것이 다시 서학으로 경사(傾斜)되는 선상에 이들은 서 있었다. 이벽만 해도 1774년 예산까지 직접 내려가 6, 7개월간 이병휴를 스승으로 모시고 착실하게 공부했다. 이벽이 집으로 돌아간 뒤 이병휴는 세 번이나 편지를 보내 그의 공부를 독려했다. 이 내용은 이병휴를 조문한 이벽의 유일한 친필 제문 속에 남아있다. 이 제문은 1776년 10월 15일에 쓴 것이다.

 

 

남행 계획, 여러 가지 암초 만나며 무산

 

1775년 홍유한과 권철신 그룹의 돌연한 영남 이주 계획은 이병휴의 학문 자장에서 한 번 더 벗어나, 서학의 사유를 받아들이는 좀더 전위적인 학술집단의 실험을 꿈꾼 것이었듯 하다. 이병휴는 1775년 3월, 「영남으로 가는 홍사량을 전송하며(送洪士良之嶺南序)」에서 성호가 일찍이 말한, “지금 세상에 인륜이 있는 고장을 구하려 한다면 영남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라고 한 말을 제시하며, 그 꿈을 홍유한이 마침내 이루게 된 것을 축하하고 부러워한다고 적었다. 이병휴는 이듬해 세상을 떴다.

 

하지만 이들의 남행 계획은 실행 단계에서 여러 가지 암초를 만났다. 천진암 성지에는 홍유한 집안의 편지 수백 통이 보관되어 있다. 이중 당시 권철신이 홍유한에게 보낸 편지 수십 통이 남아있다. 1776년 2월 24일의 편지는 홍유한이 영남으로 이주한 이듬해인 1776년 초에 홍유한의 부인이 갑작스레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듣고 쓴 글이다. 그중 한 대목을 소개한다.

 

1776년 2월 24일, 권철신이 홍유한에게 보낸 편지. 중간에 밑줄 친 부분에 남쪽으로 내려가는 계획에 대한 내용이 보인다.(원본 천진암 성지 소장)


 

“우리가 남쪽으로 넘어가려는 계획(南踰之計)은 실은 곤궁하여 스스로 밥을 먹지 못하는 데서 나왔으니, 하늘의 궁액이 족히 미치지 않을 것 같았지요. 올해 형께서 배필을 잃은 것은 형 집안의 흥망과 관계된 것일 뿐 아니라 우리도 대부분 낭패스럽습니다. 이기양은 중도에 머물고 있는데다, 야능(也能) 또한 7분(分)은 물러선 상태여서, 마침내는 어찌 될지 모르겠습니다.(吾南踰之計, 實出於窮不自食. 而天之厄, 足如不及焉. 今年兄之喪配, 不但兄家興亡所關, 吾輩擧皆狼狽. 士興中路滯留, 也能亦七分退步, 未知畢竟之如何.)”

 

당시 이기양은 영남으로 이주하던 도중에 이 소식을 듣고, 어찌할 바를 몰라 중간의 남천(南川)이라는 곳에서 임시로 체류하고 있었다. 글 속의 야능(也能)은 권철신의 형제 중 한 사람이었던 듯한데, 다른 자료를 더 살펴봐야 확인이 가능할 것 같다. 다만 족보에는 홍유한의 부인 평강 채씨가 1792년에 세상을 뜬 것으로 나와, 편지 속 상배(喪配)의 앞뒤 사정이 궁금해진다.

 

이어 1776년 4월 24일의 편지에서는, “우리가 남쪽으로 내려가려던 계획은 하늘이 틀림없이 이를 막아 희롱함이 이 지경에 이르려 하니, 참으로 또한 이상합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진실로 물리기는 어려워서, 가을이 지나 안식구라도 짐을 싸서 보내려고 합니다(吾輩南計, 天必欲沮戱之至此, 誠亦異矣. 然鄙意誠難退步, 秋後欲治送內行)”라고 썼다. 이들의 남행 계획은 이미 취소하기 어려울 정도로 구체화돼 있었다.

 

다시 한 달 뒤인 5월 24일의 편지에서는 “남쪽으로 이사하는 문제는 지금 다시 의논함이 없지만, 이곳의 집과 땅은 지금은 조금도 아까운 마음이 없습니다.(南丘搬移, 今無更議. 此處庄土, 今則少無惜之心)”라고 했다. 남행 계획을 완전히 접게 된 사정이 감지된다.

 

그런데 이 편지의 끝에 묘한 사연이 덧붙었다. “이기양 또한 무사하고, 그 아들 총억이 이제 막 와서 저 있는 곳에서 배우고 있습니다. 존창이라는 자가 또한 따라와서 고풍(古風)의 체제로 지었는데, 자못 재주가 있어서 기뻐할 만합니다. 아드님은 글로 말할 수 없어 이 뜻으로 내려서 폅니다.(士興亦無事, 其子方來, 學鄙所耳. 存昌者亦隨來, 做古風製, 才頗有之, 可喜. 令胤許不能有書, 此意下布焉.)”

 

 

‘내포의 사도’ 이존창도 남천에서 합류

 

여기서 난데없이 ‘내포의 사도’로 초기 천주교회의 주역 중 한 사람이었던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 1759~1801)의 이름이 불쑥 튀어나온다. 이존창은 알려진 대로 이전 홍유한이 살았던 예산 여사울 사람이다. 당시 18세였던 이존창이 권철신에게 가서 공부한 것은 홍유한의 뜻이었을 것이다. 홍유한은 서울서 과거 시험 준비를 하던 자신의 아들 홍낙질(洪樂質)까지 그리로 보내 공부 모임에 합류시켰다.

 

이존창의 이름은 1777년의 편지에서도 “여행 중에 이기양과 함께 이존창의 집을 빌려 유숙하였다”고 한 것에서 한 번 더 확인된다. 이때 두 사람이 예산을 다시 찾은 것은 이병휴가 마무리하지 못한 성호 유고의 정리와 수습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성호의 원고는 난필의 초고 뭉치여서, 1774년 이병휴가 1차 정리를 마친 뒤에도, 질서류(疾書類) 저작은 손조차 못 대고 있었다. 이것이 일부나마 본격적으로 정리된 것은 다시 근 스무 해가 더 지난 1795년 다산 정약용(요한 사도)이 이삼환을 좌장으로 모시고 모임을 주도했던 온양 봉곡사의 서암강학회에서였다.

 

오래 꿈꾸었던 남도(南渡) 계획이 최종 무산되자, 권철신은 다음 행동으로 자신이 살던 양근에서 이 같은 학문 공동체의 꿈을 실행에 옮기고자 했다. 권철신, 이총억, 이존창, 그리고 홍유한의 아들까지 10여 명의 젊은이가 합류한 상태에서 그들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공부를 시작했다. 이때 그들이 했던 공부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단순한 과거 시험 공부뿐이었을까?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5월 24일,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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