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사적지 목록

교구 성지명     지역명     내용 검색

안동교구 > 우곡 성지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한국교회 최초 수덕자 홍유한 선생과 후손 순교자들의 안식처
지번주소 경상북도 봉화군 봉성면 우곡리 151-2 
도로주소 경상북도 봉화군 봉성면 시거리길 397
전화번호 (054)673-4152
팩스번호 (054)673-7094
홈페이지
관련기관 홍유한 피정집(청소년 수련원)    
관련주소 경상북도 봉화군 봉성면 시거리길 397

홍정호(洪正浩, ?∼1801년)

순교자. 홍필주(洪弼周, 필립보)의 가까운 친척으로 가족과 함께 주문모(周文謨) 신부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고 1801년 신유(辛酉)박해로 체포되어 7월 2일(음 5월 22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斬首)형으로 순교하였다. [출처 : 한국가톨릭대사전]


복자 홍낙민 루카(1751-1801년)

홍낙민(洪樂敏) 루카는 1751년에 충청도 예산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충주와 한양으로 이주해 살았다. 그리고 1776년에는 양근의 유명한 학자 권철신 암브로시오의 제자가 되었으며, 4년 뒤에는 진사가 되고, 1788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들어서게 되었다. 1839년의 순교자 홍재영 프로타시오는 그의 아들이며, 1840년의 순교자 홍병주 베드로 · 홍영주 바오로 형제 성인과 1866년의 순교자 홍봉주 토마스는 그의 손자이다.

그에 앞서 홍 루카는,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이승훈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았다. 또 한때는 가성직 제도의 신부로서 다른 신자들에게 성사를 집전한 적도 있었다. 이는 당시의 신자들이 성직자가 없는 상황에서, 그리고 교리와 교회법을 잘 알지 못하던 상황에서 행한 잘못이었다. 다행히 이러한 행위는 오래 가지 않았다.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난 뒤, 홍 루카는 임금의 명에 따라 천주교 신앙을 멀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일 뿐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는 기도 생활을 계속하였고, 교리의 가르침에 따라 재(齋)를 지키기도 하였다.

1794년 말 주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다음 해, 홍 루카는 성사 받을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을묘박해가 일어나 체포되자, 두려운 나머지 천주교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다. 여기에서 그는 “천주교의 폐해는 홍수나 맹수보다 심하므로 철저하게 금지해야 한다.”고 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홍 루카는 다시 교리를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1799년에 모친상을 당해서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신주(神主)도 모시지 않았다. 그러나 겉으로는 여전히 천주교를 멀리한 것처럼 보였다.

그로부터 2년 뒤에 신유박해가 일어나자마자, 홍 루카는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의금부로 끌려가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때 그는 두려운 나머지 처음부터 나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십계에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라고 가르친 것은 옳다.”고 대답하였으며, 결코 동료들을 밀고하지 않았다.

혹독한 문초와 형벌이 계속되는 동안 홍 루카는 여전히 용기를 내지 못하여 유배형을 받게 되었다. 그러다가 점차 이전에 보이지 않던 용덕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재판관들 앞에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답변하였다.

“저는 천주교 신앙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억지로 사악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10년 동안 이를 멀리하였으니 죄를 받아 마땅합니다. 이제는 천주교를 버릴 수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욕하지도 않겠습니다.”

이처럼 굳게 신앙을 증언한 홍낙민 루카는 마침내 사형 판결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1년 4월 8일(음력 2월 26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홍낙민 루카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강완숙 골룸바(1761-1801년)

강완숙(姜完淑) 골룸바는 1761년 충청도 내포 지방에서 양반의 서녀(庶女)로 태어났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지혜로움이 뛰어나고 정직하여 옳지 않은 일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1801년에 순교한 홍필주 필립보는 그녀의 아들이다.

장성한 뒤 덕산 지방에 살고 있던 홍지영의 후처로 들어간 강 골룸바는, 혼인한 지 얼마 안 되어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게 되었다. 그런 다음 이에 관한 책을 얻어 읽는 가운데 그 신앙의 위대함을 깨닫게 되었다. 당시 그녀는 “천주는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고, 그 종교의 이름이 의미하는 바가 올바르니, 그 도리가 반드시 참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후 강 골룸바는 신앙에 대한 열정과 극기를 바탕으로 교리를 실천해 나갔으며, 이러한 그녀의 행동은 누구나 감탄할 정도가 되었다. 1791년의 신해박해 때에는 위험을 무릅쓰고 옥에 갇힌 신자들을 보살펴 주다가 자신이 도리어 옥에 갇힌 적도 있었다. 또 그녀는 시어머니와 전처의 아들인 홍 필립보에게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온갖 노력을 다하였음에도 남편만은 입교시킬 수가 없었고, 오히려 신앙 때문에 남편에게 시달림을 받아야만 하였다. 이후 남편은 첩을 얻어 따로 생활하였다.

어느 날, 강 골룸바는 한양의 신자들이 교리에 밝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에 그녀는 시어머니와 아들 홍 필립보와 의논한 뒤 함께 상경하였고, 이후로는 신자들과 오가면서 생활하였다. 또 성직자 영입 운동이 시작되자, 이를 위해 노력하는 교우들에게 경제적인 뒷받침이 되어 주었다.

1794년 말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그녀는 주 야고보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그를 도와 활동하였다. 이때 주 신부는 강 골룸바의 인품을 알아 여회장으로 임명하여 신자들을 돌보도록 하였다.

1795년 을묘박해가 일어나자, 강 골룸바는 자신의 집을 주 야고보 신부의 피신처로 내놓았다. 여성이 주인으로 있는 양반 집은 관헌이 들어가 수색할 수 없다는 조선 사회의 풍습을 이용하였던 것이다. 이후 그녀는 주 야고보 신부의 안전을 위해 자주 이사를 하였으며, 그때마다 그 집은 신자들의 집회 장소로 이용되었다. 윤점혜 아가타가 동정녀 공동체를 이끌어 나간 곳도 강 골룸바의 집이었다.

강 골룸바는 지식과 재치를 겸비하였으므로, 여러 사람들을 권유하여 입교시킬 수 있었다. 그들 가운데에는 지체 높은 양반 부녀자들도 있었고, 과부, 머슴, 하녀도 있었다. 왕실 친척인 송 마리아와 며느리 신 마리아가 주 야고보 신부에게 세례를 받게 된 것도 강 골룸바 덕택이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한결같이 “골룸바는 슬기롭게 모든 일을 권고하였으며, 열심인 남자 교우들도 기꺼이 그의 교화를 받았다. 그것은 마치 망치로 종을 치면 소리가 따르는 것과 같았다.”고 말하였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강 골룸바는 그동안의 활동들 때문에 곧바로 관청에 고발되었고, 4월 6일(음력 2월 24일) 집 안에 함께 있던 사람들과 같이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끌려갔다. 그 와중에서도 그녀는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잊지 않았다.

박해자들은, 강 골룸바에게서 주 야고보 신부의 행방을 알아내려고 여섯 차례나 혹독한 형벌을 가하였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녀의 굳은 신앙심은 형리들조차 “이 여인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다.”라고 감탄할 정도였다. 3개월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강 골룸바는 신심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함께 갇혀 있는 동료들을 권면하면서 순교의 길로 나아갔다. 그런 다음 사형 판결을 받고,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 그녀의 나이는 40세였다.

형조에서는 사형 선고를 내리면서 이렇게 죄목을 붙였다. “강완숙은 천주교에 깊이 빠져 이를 널리 전파하였고, 6년 동안 주문모를 숨겨 주면서 남녀와 신분을 가리지 않고 불러들여 천주교에 물들게 하였다.” 이에 대해 강완숙 골룸바는 다음과 같이 최후 진술을 하였다.

“이미 천주교를 배웠고 스스로 ‘죽으면 즐거운 세상(곧 천당)으로 돌아간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형벌을 받아 죽을지라도, 신앙의 가르침을 믿는 마음을 고칠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강완숙 골룸바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홍필주 필립보(1774-1801년)

홍필주(洪弼周) 필립보는 충청도 덕산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1790년경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에게 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아명은 ‘문갑’(文甲)이다.

홍 필립보의 아버지는 처음부터 천주교 신앙을 아주 싫어하였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교리를 배워 입교한 계모 강완숙 골룸바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신앙을 실천해 나갔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는 아들 홍 필립보가 입교한 뒤로는 자신이 이해한 교리를 아들에게 가르쳐 주었으며, 홍 필립보 또한 어머니의 열렬한 덕행을 모범으로 삼았다.

이듬해에 신해박해를 겪고 나서, 홍 필립보는 할머니와 어머니를 따라 한양으로 이주하였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여전히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따라서 고향 집에서는 신앙생활을 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한양으로 올라온 홍 필립보는 가족과 함께 아주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1795년 5월에 어머니 강 골룸바가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자신의 집으로 피신시키자, 이때부터 신부의 복사가 되어 여러 가지 일을 돕기 시작하였다. 또 홍익만 안토니오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함께 교회 일을 도왔다.

이후, 홍 필립보는 자신의 집이 조선 교회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되자, 주 야고보 신부와 신자들의 안전을 위해 어머니와 함께 이곳 곳으로 집을 옮겨 다녔다. 또 한편으로는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회장을 비롯하여, 교회 지도층 신자들과 교류하면서 신심을 쌓아 갔다. 이러한 이유로 그의 이름은 어머니 강 골룸바와 함께 점차 교회 안에 드러나게 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홍 필립보의 이름은 일찍부터 박해자들의 명단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므로 박해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 포졸들이 그의 집으로 들이닥쳤고, 곧바로 그와 그의 어머니와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을 체포하였다.

포도청으로 끌려간 홍 필립보는, 형벌을 받으면서도 주문모 야고보 신부의 행방과 그동안의 행위를 조금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러나 혹독한 형벌이 계속되면서 그의 마음은 차츰 약해지게 되었다. 이때 조사를 받으러 가던 어머니 강 골룸바가 그를 보고는 “필립보야, 너는 어찌 예수 그리스도께서 네 머리 위에 임하시어 비추고 계심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그릇된 길로 가려고 하느냐?” 하고 권면하였다. 이에 그는 곧장 마음을 돌이켜 박해자들을 향해 ‘절대로 신앙을 버릴 수 없다.’고 고백하였다.

이후 그의 어머니는 먼저 순교하였지만, 홍 필립보는 오랫동안 옥에 갇혀 고통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조금도 마음이 약해지지 않았으며, 마침내는 동료들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게 되었다. 그런 다음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1년 10월 4일(음력 8월 27일)로, 그의 나이는 27세였다.

홍필주 필립보가 사형 선고를 받기 전에 형조에서 말한 최후 진술은 다음과 같았다.

“계모와 한마음으로 천주교에 깊이 빠졌으며, 외국 사람(주문모 야고보 신부)을 기이한 재물과 같이 생각하여 아버지처럼 모셨으니, 그 죄가 대단히 큽니다. 그뿐만 아니라 남녀가 함께 모여 비밀 공동체를 이루고, 어리석은 백성들을 유혹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에게서 손가락질을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는 것이라면 비록 사형을 받을지라도 달게 여기겠습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홍필주 필립보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홍낙임(洪樂任, 1741-1801년)

문신. 천주교인, 세례명은 미상. 자는 숙도(叔道), 본관은 풍산(豊山), 영의정 봉한(鳳漢)의 아들. 1769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 홍문관(弘文館)에 등용되었고 그 뒤 정언(正言), 문학(文學), 사서(司書)를 거쳐 승지(承旨)를 역임하였다. 윤행임(尹行恁)의 권유로 입교,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체포되어 제주도(濟州島)로 유배되었으나 곧 사사(賜死)되었다. [출처 : 한국가톨릭대사전]


복자 홍재영 프로타시오(1780-1840년)

홍재영(洪梓榮) 프로타시오는 충청도 예산의 유명한 양반 집안 출신으로, 충주에서 태어나 한양에서 성장하였다. 1801년에 순교한 홍낙민 루카는 그의 부친이요, 1866년에 순교한 홍봉주 토마스는 그의 아들이다.

홍 프로타시오는 어렸을 때부터 부친에게 교리를 배웠다. 또 장성한 뒤에는 동료들과 함께 교회 활동에 참여하거나, 신앙 공동체를 만들어 함께 교리를 연구하였다. 그러나 1801년의 신유박해로 체포된 뒤에는 부친과 같이 신앙을 지키지 못하고, 배교한 뒤 전라도 광주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도 홍 프로타시오는 한동안 냉담 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어느 날, 은총의 힘으로 다시 신앙을 찾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이전의 잘못을 보속하려는 생각에서 더욱 열심히 교리를 실천해 나갔다. 천주의 가르침에 따라 자녀들을 교육시키고, 기도와 묵상 생활에도 열중하였다. 어떤 때는 너무나 오랫동안 꿇어앉아 기도를 한 탓에 걷기 어려울 정도가 된 적도 있었다. 또 일주일에 금식재를 세 차례나 지켰고, 어려운 교우들을 위해 열심히 자선을 베풀었다.

1832년 조정에서 유배자들에게 대대적인 사면령을 내리자, 광주 관장은 홍 프로타시오를 불러다 “이제 마음을 고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라.’며 설득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유혹을 물리쳤으며, 이후에도 그대로 광주에서 살았다.

이로부터 7년 뒤인 1839년에 이르러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홍 프로타시오의 마음에는 순교자들의 뒤를 따름으로써, 이전에 잃은 기회를 다시 찾겠다는 욕망이 가득하게 되었다. 또 그는 피신해 다니는 여러 교우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집을 내어 주고, 그들을 한 가족처럼 대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전주에서 파견된 포졸들이 그의 집을 찾아와, 함께 있던 천주교 신자들을 모두 체포하였다.

광주 관장은, 홍 프로타시오를 한 번 문초하고 나서, 다른 교우들과 함께 전주로 이송하라고 명하였다. 그때 읍내의 주민들 3-4백 명이 나와 “어떻게 의로운 사람을 이렇게 벌한단 말인가.” 하면서, 어떤 이들은 그를 붙잡고, 어떤 이들은 괴로움으로 울부짖기까지 하였다.

전주에 도착한 날부터 홍 프로타시오는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는 밀고하는 것도, 주님을 배반하는 것도 모두 거부하였다.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가 형벌을 당하면서도 그의 신앙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제 전주 감사는 홍 프로타시오를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에게 사형을 선고한 뒤, 옥에 가두도록 하였다. 그 뒤 조정에서 사형 판결이 내려오자, 감사는 다시 한 번 홍 프로타시오를 불러내 유혹해 보았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의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홍재영은 근본이 흉악한 종자로서 대대로 천주교를 신봉해 왔으며, 선교사를 청해 올 때에 힘을 기울였고, 천주교 서적을 베낀 것이 110여 권에 이르며, 수십 명의 천주교 신자들을 숨겨 주었다. 이처럼 죄악이 으뜸이 되므로 사형에 처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에 따라 홍재영 프로타시오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 형장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40년 1월 4일(음력 1839년 11월 30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60세였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홍재영 프로타시오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심조이 바르바라(1813-1839년)

심조이(沈召史) 바르바라는 인천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20세 무렵에 홍봉주 토마스와 혼인하였다. 1801년의 순교자 홍낙민 루카는 그녀의 시조부였으며, 그녀와 같이 체포되어 1840년에 순교한 홍재영 프로타시오는 그녀의 시아버지였다. 남편 홍 토마스도 1866년에 순교하였다.

심 바르바라는 지능이 아주 낮았다. 그러므로 아무리 노력을 해도 중요한 교리 외에는 배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신앙은 말할 수 없이 굳었으며, 자선하려는 마음 또한 열렬하였다.

1839년에 기해박해가 일어났을 때에, 심 바르바라는 전라도 광주에서 살았다. 시아버지가 그곳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자기 집으로 피신해 오자, 심 바르바라는 그들을 헌신적으로 거두어 주었다. 그녀는 조금도 짜증을 내지 않았고, 음식을 아까워하지 않았으며, 그들이 자신에게 짐이 된다는 눈치를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얼마 후에 심 바르바라는, 시아버지를 비롯하여 함께 살던 교우들과 같이 체포되어 전주 감영으로 끌려갔다. 그녀는 체포될 때나 문초를 받는 가운데서도, 얼굴빛 하나 바꾸지 않고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였다. 뿐만 아니라 건강이 나쁘고 체질이 약하였음에도, 앞에 늘어놓은 형구를 볼 때나 관장들의 고함 소리를 들을 때도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심 바르바라는 여러 차례 고문을 당한 뒤 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신음 소리 하나 내지 않고 고통을 참아 내었다. 왜냐하면 그 고통은 천주를 위해 당하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가장 무서운 형벌은 한 살이 된 막내아들이 굶주림과 병으로 천천히 죽어 가는 것을 보는 일이었는데, 그녀는 신앙의 힘으로 이를 극복하였다.

마침내 전라 감사는 심 바르바라의 마음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사형을 선고하였다. 그러나 천주께서는 심 바르바라에게 처형 때까지 사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녀는 형벌의 고통과 더불어 이질까지 걸렸으며, 스스로 죽음이 가까워진 것을 알게 되자 타당하게 준비한 뒤에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처럼 심조이 바르바라가 옥중에서 순교한 날은 1839년 11월 11일(음력 10월 6일)로, 당시 그녀의 나이는 26세였다. 그 뒤를 이어 그녀의 아들도 몇 시간 뒤에 숨을 거두었다. 이에 앞서 전라 감사가 조정에 올린 그녀의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심조이는 시아버지에게서 천주교 신앙을 배웠는데, 부부 사이의 정을 끊으면서까지 천주교를 올바른 도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녀는 육신이 죽기를 원하면서 이를 ‘영혼이 승천하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미 7년 동안이나 천주교의 가르침을 배워 왔으니, 십자가 앞에서 서약한 것을 결코 바꿀 수 없으며, 죽어도 (천주교를 믿은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조이 바르바라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성 홍병주(洪秉周) 베드로(1798-1840년)

성 홍병주 베드로(Petrus)와 성 홍영주 바오로(Paulus)는 형제지간이고, 매우 유명한 가문의 자손들이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에 순교한 홍낙민 루카(Lucas)는 그들의 조부이고, 1840년 전주에서 참수당한 홍재영 프로타시우스는 그들의 삼촌이다. 그리고 아버지 홍빈영은 1801년의 지긋지긋한 난을 치르고 나서 충청도 내포평야에 있는 서산 고을 여사울이란 곳에 살고 있었다. 이 형제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은 신앙과 견실한 학식뿐이었는데, 이들은 그것을 잘 이용하여 후일 천주교의 명성을 크게 높였다.

그들의 학덕과 모범적인 신자생활을 익히 알던 전교 신부들은 그들 형제를 지방의 회장으로 임명하니, 그들은 남을 가르치는 일과 약한 자를 격려하는 일과 병자를 간호하는 일 그리고 자선 사업에서 자신의 직분을 성실히 수행했다. 그러므로 모방(Manbant, 羅) 신부와 샤스탕(Chastan, 鄭) 신부도 교회의 여러 가지 증대한 일을 처리하게 했고, 또 그들은 기대에 맞게 잘 처리하여 교회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839년의 기해박해가 시작되어 성직자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면 목숨을 잃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들 형제는 선교사들을 용감하게 집에 모시고 접대하였으니, 이미 그들은 순교를 각오하고 준비하고 있었음이 분명하였다.

한편 조정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김여상은 체포자 명단에 그들의 이름도 올려놓고 있다가 그해 9월에 홍 베드로와 바오로를 붙잡았다. 그러나 형제는 똑같이 순교자의 자손답게 하느님을 증거하고 다른 신자들을 고발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포장은 이들 형제의 배교를 단념하고 형조로 이송하였는데, 당시 형조판서 홍명주는 이들의 친척이었다. 그는 이들 형제 때문에 자신에게 무슨 해가 미칠까 두려워한 나머지 부하들에게 모든 수단을 다 써서 그들을 배교시키되 사형언도는 내리지 말라고 명하였다. 이에 그 부하들은 상관에게 잘 보일 생각으로 그들을 배교시키지 위해 모든 방법을 다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쓸데없는 일이었으니, 이 형제는 끝까지 마음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입장이 되자 마침내 그들에 대한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형인 홍 베드로는 박종원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와 같이 참수되었고, 동생인 홍 바오로는 그 이튿날에 형을 따라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는 그 당시 법에서 형제를 같은 날 죽이지 못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따로따로 형을 집행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형은 42세의 나이로 1840년 1월 31일에 순교하였으며, 동생은 39세의 나이로 그 이튿날에 참수당하여 영광스런 월계관을 함께 받았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홍영주(洪永周) 바오로(1801-1840년)

성 홍병주 베드로(Petrus)와 성 홍영주 바오로(Paulus)는 형제지간이고, 매우 유명한 가문의 자손들이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에 순교한 홍낙민 루카(Lucas)는 그들의 조부이고, 1840년 전주에서 참수당한 홍재영 프로타시우스는 그들의 삼촌이다. 그리고 아버지 홍빈영은 1801년의 지긋지긋한 난을 치르고 나서 충청도 내포평야에 있는 서산 고을 여사울이란 곳에 살고 있었다. 이 형제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은 신앙과 견실한 학식뿐이었는데, 이들은 그것을 잘 이용하여 후일 천주교의 명성을 크게 높였다.

그들의 학덕과 모범적인 신자생활을 익히 알던 전교 신부들은 그들 형제를 지방의 회장으로 임명하니, 그들은 남을 가르치는 일과 약한 자를 격려하는 일과 병자를 간호하는 일 그리고 자선 사업에서 자신의 직분을 성실히 수행했다. 그러므로 모방(Manbant, 羅) 신부와 샤스탕(Chastan, 鄭) 신부도 교회의 여러 가지 증대한 일을 처리하게 했고, 또 그들은 기대에 맞게 잘 처리하여 교회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839년의 기해박해가 시작되어 성직자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면 목숨을 잃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들 형제는 선교사들을 용감하게 집에 모시고 접대하였으니, 이미 그들은 순교를 각오하고 준비하고 있었음이 분명하였다.

한편 조정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김여상은 체포자 명단에 그들의 이름도 올려놓고 있다가 그해 9월에 홍 베드로와 바오로를 붙잡았다. 그러나 형제는 똑같이 순교자의 자손답게 하느님을 증거하고 다른 신자들을 고발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포장은 이들 형제의 배교를 단념하고 형조로 이송하였는데, 당시 형조판서 홍명주는 이들의 친척이었다. 그는 이들 형제 때문에 자신에게 무슨 해가 미칠까 두려워한 나머지 부하들에게 모든 수단을 다 써서 그들을 배교시키되 사형언도는 내리지 말라고 명하였다. 이에 그 부하들은 상관에게 잘 보일 생각으로 그들을 배교시키지 위해 모든 방법을 다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쓸데없는 일이었으니, 이 형제는 끝까지 마음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입장이 되자 마침내 그들에 대한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형인 홍 베드로는 박종원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와 같이 참수되었고, 동생인 홍 바오로는 그 이튿날에 형을 따라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는 그 당시 법에서 형제를 같은 날 죽이지 못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따로따로 형을 집행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형은 42세의 나이로 1840년 1월 31일에 순교하였으며, 동생은 39세의 나이로 그 이튿날에 참수당하여 영광스런 월계관을 함께 받았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이상 가톨릭 성인사전]


홍봉주(洪鳳周) 토마스(?-1866년)

순교자. 세례명 토마스. 충청도 예산(禮山) 출신. 1866년 병인(丙寅)박해 때의 순교자 홍낙민(洪樂民)의 손자이며, 부친 홍재영(洪梓榮) 역시 기해(己亥)박해로 순교하였다. 모친 정소사(丁召史)는 초대 명도회장(明道會長)이며 신유박해 때의 순교자 정약종(丁若鍾)의 맏형인 약현(若鉉)의 딸로 기해박해로 남편과 함께 순교하였다.

이렇듯 대대로 열렬히 천주교를 신봉해온 가정에 태어났으므로 어려서부터 교리를 배워 세례를 받은 홍봉주는 요행이도 박해를 피해 살아남을 수 있어, 1852년 메스트르(Maistre, 李) 신부가 입국하자, 그를 서울 전동(典洞)에 있는 이군심(李君心)의 집에 기거하게 하면서 그의 전교활동을 도왔다. 1852년 2월에 메스트르 신부의 명을 받고 선편으로 중국 상해(上海)에 건너가 조선교구의 제4대 주교로 임명된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를 만나, 그와 푸르티에(Pourthie, 申) 신부, 그리고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 신부를 함께 무사히 서울까지 인도하여, 태평동(太平洞)에 집 한 채를 마련해서 주교의 포교활동을 도왔다.

그러던 중 1865년 러시아의 국경침범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나 정국(政局)이 시끄러워지자, 홍봉주는 평소 러시아의 침공을 우려한 주교의 의중을 감지하고, 이 기회를 이용해서 종교의 자유도 얻고 자신의 입신출세도 도모할 목적으로 김면호(金冕浩), 이유일(李惟一) 등과 상의하여 러시아 사람을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프랑스 및 영국과 조약을 맺는데 있으며, 이 조약을 맺는 데는 조선에 거주하고 있는 주교를 통해서 교섭하는 것이 좋다는 방아책(防俄策)을 쓴 서한을 대원군의 딸의 시아버지인 조기진(趙基晋)을 통해서 대원군에게 제출하였다. 그러나 별다른 반응이 없자 이번에는 천주교인으로서 높은 관직에 있는 승지(承旨) 남종삼(南鍾三)에게 그간의 경위를 설명하고 이 같은 방아책을 다시 청원토록 종용하였다. 이에 남종삼은 자신이 직접 작성한 청원서를 대원군에게 제출하였는데, 북경에서의 양인학살 등 사태의 변화로 오히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주교를 비롯한 많은 성직자와 신자들이 잡혀 순교하는 병인박해를 몰고 왔다.

홍봉주도 1866년 2월 23일 베르뇌 주교와 함께 잡혀, 3월 7일 주교가 새남터에서 순교하던 날, 남종삼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달레는 홍봉주의 순교사실을 상당히 의심하고 있으나 관변 측 기록에 의하면 그가 배교를 취소하고 자기 신앙을 고백한 것이 거의 확실하다. [출처 : 한국가톨릭대사전]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