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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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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성인명 토마스 (Thomas)
축일 7월 3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사도, 순교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세기경
같은이름 도마, 토머스
성지와 사적지 게시판
제목 인도 첸나이(옛 마드라스)에서 만난 성 토마스 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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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9-01-07 조회수37 추천수0

인도를 떠나며…

 

 

첸나이(옛 마드라스)에서 만난 성 토마스 사도

 

한국으로 돌아갈 날이 다가오고 있을 때 마리오 수사님이 “인도에 왔는데, 토마스 사도의 무덤은 보고 가야 되는 것은 아니냐”며 제안을 했다. 내가 머무는 비자야와다의 막시밀리안 마리아 콜베 수도원과 성 토마스 사도의 무덤이 있는 첸나이는 비교적 가까운 편이었다.

 

다른 수사님들도 동의했기에 마리오 수사님이 이동할 때 나도 함께 기차를 타기로 하였다. 성 토마스 성당이 있는 첸나이에서 수사님이 소개해준 숙소에 머물 예정으로 성지순례의 길에 올랐다.

 

아침 일찍 비자야와다 기차역으로 향했고, 9시에 첸나이로 향하는 기차를 탈 수 있었다. 내가 탄 기차는 좌석 칸이었다. 지정된 자리 없이 나무로 된 의자에 앉아 가는 것인데, 그것도 선착순이라 의자를 차지하지 못한 사람들은 바닥이나 기차 통로에 자리를 깔고 가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보통 2~3일에 걸친 기차여행을 해왔기에 6시간이라는 이동 거리는 아주 짧게 느껴졌다. 딱딱한 나무 의자에 엉덩이가 아프다는 것 말고는 순례의 여정은 순탄하였다.

 

첸나이역에 도착하여 제일 먼저 향한 곳은 사도의 무덤 위에 세워졌다는 성 토마스 성당이다.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과 스페인 산티아고 성 야고보 성당과 더불어 사도의 무덤 위에 세워진 세계 3대 성전 중 하나인 이곳으로 가는 내내 마음이 들떴다.

 

지상 전철을 타고 주변 풍경을 보면서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 또한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었다. 인도로 선교 왔었던 토마스 사도가 이곳에서 복음을 전하였다고 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토마스 사도는 예수님의 제자 중 가장 멀리까지 선교를 왔다. 의심 많던 제자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행하여 이곳 인도까지 온 것이다.

 

토마스 사도는 이곳 인도에서 순교하였다. 이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그 중 하나를 소개하겠다.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점차 늘어나자, 토착종교 사제계층의 브라만들이 위기를 느끼게 되었고, 그들은 토마스 사도를 죽이려 하였다. 토마스는 동굴로 피신해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했지만, 창에 찔려 치명상을 입게 되었다. 죽음을 앞에 둔 사도가 마지막 힘을 쏟아 올라간 곳이 지금의 성 토마스 언덕이다.

 

 

성 토마스 성당, 토마스 동굴, 토마스 언덕

 

첸나이 곳곳을 다니면서 토마스 사도의 행적을 실감할 수 있었다. 성 토마스 성당 지하에는 지금까지도 잘 보존된 토마스 사도의 손가락이 모셔져 있다. 많은 사람이 그곳에서 기도하고 있었는데, 토마스 사도의 전승을 믿고 따르는 인도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성지순례를 하면서도 신학교에서 배우지 못하였던 교회 역사의 한 부분을 비롯해서 여러 의구심을 떨칠 수 없었다. 마치 토마스 사도가 부활한 예수님을 눈앞에서 보고도 믿지 못해 손가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만져보았듯이, 그러한 의구심들은 성지를 순례할 때 나로 하여금 더욱더 자세히 관찰하고 기도하게 만들었다.

 

이곳 첸나이 지역은 16세기에는 포르투갈인의 식민지였다. 그 당시 포르투갈인이 이곳에 와서 보았던 가톨릭의 모습은 전혀 새로운 형태였다고 전해진다.

 

인도 교회 역사 안에서는 55년경 토마스 사도가 인도 남부 케랄라의 해안에 도착하였는데, 이때 케랄라에 세워진 교회를 사도 토마스 기독교인들이라고 한다. 현지에서는 ‘나스라니’라고 부른다. 이 말은 나자렛 예수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내가 처음 이곳 인도에 와서 보았던 로마 가톨릭과는 다른 전례의 모습 그리고 정교회처럼 성호경을 긋는 모습이 모두 인도교회 역사의 과정 중에서 형성되었다.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로 초세기부터 유대인 정착촌이 형성되었고, 시리아인이 박해를 피해 이곳에 정착하면서 이런 전례 양식이 자연스레 스며들었던 것이다.

 

긴 역사를 가진 인도 교회의 시발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토마스 사도의 성지를 순례하면서 인도인의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순례를 마치고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숙소로 향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는 바람에 교통이 마비되고 말았다. 꼼짝없이 그곳에 갇히고 만 것이다.

 

도시 전체가 순식간에 내린 폭우로 아수라장이 된 것 같았다. 어찌할 수 없어 성당 지하에 마련된 경당에 앉아 한참을 머물렀다.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그러다 문득 토마스 사도가 예수님께 드렸던 성경 구절의 기도가 떠올랐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가슴에서부터 올라 오르는 벅찬 감정으로 인해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기도가 계속해서 내 마음속에 울려 퍼졌다.

 

이윽고 비가 그쳐서 숙소로 향할 수 있었다. 토마스 언덕에 있는 이곳 첸나이 교구에서 운영하는 순례자 숙소였다. 늦은 시간에 들어갔기에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미사를 드리기 위해 다시 성당을 찾았다. 주일에만 영어 미사가 있어 타밀어로 드리는 미사를 했다. 순례자들은 제대 뒤편까지 들어갈 수 있었기에, 사도들의 유해와 수많은 성인 성녀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제대 뒤편을 미사 후에 구경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사부 성 프란치스코의 유해도 찾아볼 수 있었다. 한참을 앉아 기도를 드리면서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를 통해 나를 이곳 인도로 불러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렸다.

 

‘하느님 당신 품에서 저에게 허락되는 하루하루 모든 여정을 보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도에서의 마지막 여정

 

순례를 마치고 다시 비자야와다에 있는 콜베 수도원으로 돌아왔다. 떠나기 전에 그곳에서 만나는 형제들 모두와 작별인사를 하였다. 다시 본원으로 돌아와서 유기서원 형제들과 전 수련기 형제들을 오랜만에 만나 반갑게 기쁨을 나누었다. 그중에는 내가 이전에 다쳤던 발을 아직도 걱정해주는 형제들도 있었다.

 

‘자비의 해’를 맞이하는 피정 기간이라서 많은 형제가 본원에 모여 있었다. 평신도, 수도자, 사제들 모두가 본원 옆에 있는 프란치스코 센터에서 피정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리조 수사님이 내게 이곳에서 겪은 체험담을 말해달라고 요청했다. 흔쾌히 수락한 후 짧게나마 발표문을 준비해서 형제들에게 인도에서의 경험과 소감을 말했다.

 

프란치스칸 가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하느님께서 선사하신 형제자매로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프란치스칸들은 참으로 다양하면서도 경계가 없는 한가족인 것이다. 이는 모든 피조물에게도 적용되며, 사부 프란치스코께서 살아가신 모습 그 자체이기도 하다.

 

귀국한 후 인도에서의 여정을 돌아보았다. 많은 사람을 만났고, 많은 일을 겪었다. 그 중 가장 소중하고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

 

삶에 있어 중요한 것은 무언가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사랑하는 것임을…

 

* 그동안 부족한 제 인도 이야기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도를 떠나온 후, 지금은 강화도 유대철 베드로 신학원에서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제가 되기 위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주님을 모르는 이들을 위해 토마스 사도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부디 기도 중에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성모기사, 2018년 12월호, 신재희 베드로(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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