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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23세(10.11)

요한 23세(10.11)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진/그림] [자료실] 인쇄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성인명 요한 23세 (John XXIII)
축일 10월 11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교황
활동지역
활동연도 1881-1963년
같은이름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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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와 함께 하는 성인: 성 요한 23세 교황 - 세상을 향하여 열린 교회를 외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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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10-11 조회수429 추천수0

[나와 함께 하는 성인] 성 요한 23세 교황(1881-1963년)


세상을 향하여 열린 교회를 외치다

 

 

1958년 10월 9일 교황 비오 12세가 선종하였다. 추기경들은 다음 교황으로 안젤로 론칼리를 선택했다. 안젤로 론칼리는 교황으로서 자신의 이름을 ‘요한’이라 정했다. 요한 23세 교황은 1959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하고, 1963년에는 회칙 「지상의 평화」를 발표하였다. 그는 가톨릭교회의 쇄신과 현대와의 적응을 지향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다.

 

 

가난한 소작인의 아들로 태어나다

 

본명 안젤로 주세페 론칼리(Angelo Giuseppe Roncalli, 이하 론칼리라 칭함)는 1881년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 근처 작은 마을 소토일몬테(Sotto il Monte)라는 작은 마을에서 조반니 바티스타 론칼리와 마리안나 줄리아 마졸라의 13명의 자녀들 중 네 번째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가난한 소작인이었다. 재능이 뛰어난 그는 12살에 베르가모 신학교에 입학하고 1901년 군대에 징집되어 위생병으로 복무한다. 이후 교회사, 교부학, 호교론 등을 공부하다가 로마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1904년에 사제로 서품된다.

 

이후 1905년, 베르가모(Bergamo)의 새 교구장 주교의 비서로 임명되는데, 그는 이 시기에 노동자들의 고충을 보게 되고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1925년에는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불가리아로 파견되는데, 이때에 주교로 서품된다. 1931년부터는 교황청의 외교관으로 활동하는데 1944년, 비오 12세 교황은 그를 프랑스 주재 교황대사로 임명한다. 그는 교황대사로서 프랑스 정부와의 오해와 갈등들을 완화시키는 노력을 함으로 프랑스 정부의 신임을 얻기도 한다. 또한 1953년에는 추기경, 베네치아의 총대주교로 활약하는데, 추기경으로서 그는 권위를 앞세우기보다는 올바른 사목자로서 자신의 위상에 맞는 올바른 행동을 하는 것이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면서 낮은 자세로 임하는 모범을 보인다.

 

 

교황이 되다

 

1958년, 콘클라베가 열리기까지 어느 누구도 안젤로 론칼리가 교황이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의 나이 이미 77세의 고령인데다 건강 또한 좋지 않아 교황으로서 ‘큰일’을 할 만큼 오래 살 수 있으리라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교황이 되었고, 이후의 행보는 모든 이의 예상을 뒤집었다.

 

평소 온화하고 탈권위적이었던 그는 자신이 교황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세 가지 과업에 최선을 다한다. 첫 번째 과업은 로마를 위한 시노드의 개최로, 사목생활과 신앙생활에 새로운 자극을 주려는 시도였다. 두 번째는 교회법을 새로 편찬하는 것이었고, 세 번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소집이었다. 그는 자신의 활동에 대해 ‘오직 주님의 뜻에 따랐을 뿐’이라고 말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성공적 개최에 힘입어 가톨릭교회는 현대화에 발맞추는 기틀을 마련하기에 이르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소집

 

대부분의 사람들은 요한 23세가 연로하다는 이유로 그저 ‘과도기적 교황’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선입견을 뒤집고 1959년,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하겠다고 깜짝 발표한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가 폐막한지 대략 90년 만의 일이었다. ‘시대의 요구에 적절히 대처하기 위해 세상을 향해 열린 교회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였고, 공의회의 성격을 ‘보편 공의회’라 규정하였다.

 

공의회 개최 일주일 전, 요한 23세 교황은 로렌토와 아시시 등의 순례를 통해 공의회의 성공을 기원하기도 했다. 이 여행은 ‘바티칸 포로 생활’ 이후 처음으로 이루어진 여행이었다.

 

1962년 10월, 4년의 준비기간을 거쳐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첫 번째 회기가 개최되며, 수천 명에 이르는 주교와 학자들 그리고 대표들이 성 베드로 대성전에 모였다. 요한 23세 교황은 ‘어머니인 교회가 기뻐합니다’(Gaudet mater Ecclesia)라는 말로 개막 연설을 한다. 하지만 공의회 기간인 1962년, 요한 23세 교황은 위암선고를 받게 되고 1963년 6월 3일 오후 7시 49분(로마시각), 선종함으로 4년 7개월간의 목자로서의 소명을 다하게 된다.

 

요한 23세 교황이 남긴 업적을 이어받아 현재 전 세계 교회는 교황 프란치스코의 적극적인 권고를 통해 가톨릭 쇄신의 역사를 새로이 쓰기 위한 노력들을 하고 있다. 복음 안에서 세상과 소통하며 함께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이처럼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새로운 모습, 새로운 교회의 복음화가 필요한 때에 우리 스스로도 과연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착하신 교황 요한’이라고도 불리는 교화의 업적을 마음에 새기면서 스스로에 대해서 성찰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본다.

 

[외침, 2018년 9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김나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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