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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 신나무골 성지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이선이 엘리사벳의 묘를 품은 영남지방 선교의 요람지
지번주소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연화리 20 
도로주소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칠곡대로 2189-20
전화번호 (054)974-3217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sinnamugol
대구 교회 첫 본당터 마당에 건립된 로베르(김보록) 신부 흉상.
아실 폴 로베르(Achille Paul Robert, 1853-1922년).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한국 선교사. 세례명은 바오로. 한국명은 김보록(金保祿). 1853년 프랑스 오트 손(Haute-Saone) 지방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소신학교를 거쳐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그곳에서 두세(Doucet, 丁加彌) 신부와 뮈텔(Mutel, 閔德孝) 신부와 함께 공부하였으며, 1876년 12월 23일 사제로 서품된 뒤, 이듬해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1월 25일에 동료 두세 신부와 파리를 출발, 베트남과 상해를 거쳐 그 해 3월 만주에 도착하였다. 그곳 차쿠(岔溝)에 머물러 있으면서 여러 차례 한국 입국을 시도하고 있던 리델(Ridel, 李福明) 주교를 만나, 9월 11일 다시 한국 입국을 시도하다, 많은 위험을 겪은 끝에 9월 23일에서야 황해도 장연(長淵) 앞바다에 도착하였다. 이후 리델 주교는 서울로, 로베르 신부와 두세 신부는 황해도 배천[白川] 지방으로 가서 전교하게 되었는데, 로베르 신부는 배천 새터의 한 교우 집에 은거하면서 한국어와 관습을 익히고, 전교 활동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였다.
 
1878년 리델 주교의 명령에 따라 강원도 이천(伊川) 고메골로 이주하여 예비 신학생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치면서, 성사 집행에도 매우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한편 1878년 1월 28일, 서울에서 리델 주교가 투옥되었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로베르 신부는, 신학생들을 해산시키고 황해도 산악 지대인 곡산(谷山)의 버들골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그곳 역시 많은 위험이 뒤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 함경도 안변(安邊) 지방으로 이주하여, 그곳의 한 교우 집에서 은거하였다.
 
리델 주교가 추방된 뒤에 블랑 신부의 명령에 따라 1879년 경기도 삭령(朔寧)의 오리골로 가서 다시 신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 후 몇 년 동안 은둔하며 전교 활동을 펼친 로베르 신부는 강원도 홍골, 경기도 지평(砥平) 고시울, 강원도 원주(原州) 부엉골 등지에서 1883년까지 전교하며 신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때부터 1885년까지 경기도와 강원도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며 전교하였다. 그 후 선교사의 수가 늘어나 로베르 신부가 관할하는 사목 담당 구역이 경상도와 그 인근 지역으로 한정되었지만, 순회 전교 때의 고된 성사 집행으로 결국 장티푸스에 걸려 거의 두 달 동안이나 병석에 눕게 되었다.
 
1886년 초 블랑 주교가 경상도 지역의 사목 중심지로 대구 본당을 설정하고 초대 본당 신부로 로베르 신부를 임명하였다. 이에 로베르 신부는 당시 다른 지역에서의 교안(敎案) 문제에 영향을 받아 대구 읍내가 아닌 근교에 있는 신나무골(현 경북 칠곡군 지천면 연화리)에 임시 거처를 정하고 한티 교우촌(현 경북 칠곡군 동명면 득명리 소재)을 포함해 거제도까지 이르는 넓은 지역을 관할하였다. 1888년부터는 대구 부근의 죽전(竹田) 새방골로 옮겨 대구 읍내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집행하고 교세를 확장해 나갔다. 그러나 1891년 교안(敎案) 사건이 발생하여, 로베르 신부가 대구에서 추방되어 서울로 이송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른바 ‘로베르 신부 추방 사건’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그 해 2월 대구의 불량배들이 집단으로 몰려와 사제관을 포위하고 위협을 가하자 로베르 신부는 지방 관청을 찾아가 그가 당한 모욕과 협박을 고발하였다. 그러나 로베르 신부는 경상도 밖으로 추방당하였으며 그의 수행원은 심하게 구타당하고 사제관은 약탈당했다. 이 사건을 보고받은 뮈텔 주교는 프랑스 공사에게 연락하여 경상 감사를 고발하였고, 교회 당국과 외무 독판(外務督辦) 사이에 협상이 진행되어 새 감사가 임명되었다. 또한, 이 사건과 연루된 사람들이 귀양보내졌고, 로베르 신부는 경상 감사가 보낸 호위인의 보호를 받으며 다시 대구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대구 외곽의 대아벌[待御臺]에 정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오랜 박해로 이단시하던 인근 주민들의 태도를 완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1891년부터 전교에 힘쓰면서 본당 건립을 추진하던 로베르 신부는 1897년 3월부터 루르드의 성모 성당을 계산동에 짓기 시작하여 1898년 12월 25일에 한식 목조 십자형 성당을 완공 · 축성하였다. 그러나 1901년 1월 말에 원인 모를 화재로 성당을 잃자 1902년에 고딕식으로 벽돌 성당을 지었는데, 이 성당은 1911년 대구대목구의 설정과 함께 주교좌 성당이 되었다. 로베르 신부는 대구 대목구의 주교로서 드망즈(Demange, 安世華) 신부가 부임하자 그를 보좌하는 일과 함께 계산동 본당의 사목 활동도 책임지게 되었다. 로베르 신부는 성영회(聖嬰會)를 운영하면서 많은 고아들을 돌보았고, 초등학교를 세워 남학생들과 여학생들을 가르쳤으며, 명도회라 불리는 청년들을 위한 가톨릭 단체도 만들었다.
 
수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대구교구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쉬지 않고 노력하던 로베르 신부는 마침내 몸이 극도로 쇠약해지고 병이 심해져 1911년에 프랑스로 돌아가 탈장 수술을 받고 요양하다가 1913년에 재입국하여 전교 활동을 재개하였다. 그러나 1919년에 병이 재발해 9월에 홍콩으로 떠나 휴양하다가 이듬해 5월 귀국하였으나 드망즈 주교에게 은퇴를 요청하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은퇴 후 대구 주교관에 머무르면서 한국에서의 오랜 전교 활동에 대한 회고록을 집필하던 중 1922년 1월 2일 사망하여, 교구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었다. [출처 : 이유림, 한국가톨릭대사전 제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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