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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 황사영 생가터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푯말도 없이 갈대만 무성
지번주소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 월곳리 665-1(황형 장군 유적지 옆) 
전화번호 (032)933-2282
팩스번호 (032)934-5622
홈페이지
전자메일 kanghwa@caincheon.or.kr
관련기관 강화 성당    
관련주소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 북문길 41
황사영 백서(黃嗣永帛書)
 
백서는 비단에 씌어진 글을 뜻하는 보통명사이다. <황사영 백서>는 1801년 당시 천주교회의 박해현황과 그에 대한 대책 등을 북경의 주교에게 건의 보고하려다 사전에 발각되어 압수당한 비밀문서이다. <황사영 백서>는 가로 62cm, 세로 38cm의 흰 명주에 작은 붓글씨로 씌어진 것인데, 모두 122행 1만 3,311자에 달하는 장문으로 되어 있다.
 
이 백서는 ‘서론’, ‘본론’, ‘결론, 대안제시’ 등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서론’은 1행부터 6행까지로서, 여기에서는 1785년 이후 교회의 사정과 박해의 발생에 관해 간단히 설명하고 있다.
 
‘본론’은 7행부터 90행까지로서 전체 분량 중 거의 70%에 해당된다. 본론에서는 신유박해의 전개과정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특히 황사영은 여기에서 자신이 직접 목격했거나 전해들은 교회관계 사건들을 정리해서 보고하고 있다. 즉 그는 최필공, 이중배, 김건순, 권철신, 이안정, 이가환, 강완숙, 최필제, 오석충, 정약종, 임대인, 최창현, 홍교만, 홍낙민, 이승훈, 김백순, 이희영, 홍필주, 조용삼, 이존창, 유항검, 윤지헌 등의 체포와 죽음을 증언하고 있으며, 주문모 신부의 활동과 자수 및 죽음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밝혀 주고 있다.
 
한편, 91행 이하의 ‘결론’ 내지 ‘대안제시’의 부분에서는 먼저 박해로 인한 교회의 피폐상과 박해의 종식에 관한 강한 열망을 표현해 주었다. 그리고 청국교회와의 연락을 쉽게 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고 이에 이어서 신앙의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논하고 있다. 즉 그는 조선의 종주국인 청(淸)의 위력에 의존하여 신앙의 자유를 얻는 방안을 먼저 제시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청국이 종주권(宗主權)을 행사하여 청나라 황제의 명으로 조선이 서양인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해 주기를 요청하였고, 더 나아가서는 청국의 감호(監護)를 요청하며, 조선을 청의 한 성(省)으로 편입시킴으로써 조선에서도 북경에서처럼 선교사의 활동을 보장받아 보기를 희망하였다. 또한 그는 서양의 무력시위를 통해 신앙의 자유를 얻는 방안도 제시하였다. 즉 그는 서양의 배 수백 척과 병사 5, 6만 명을 동원하여 조선에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도록 강박해 주기를 희망하였다. 이어서 그는 박해로 인해 교회의 규칙을 지킬 수 없음을 호소하며 대소재(大小齋)의 관면을 청하는 내용의 글로 백서를 끝맺고 있다.
 
이 백서의 발신자는 황심 도마(多默)로 되어 있다. 황심은 이미 조선교회의 편지를 북경주교에게 전달한 바 있었던 인물이므로, 황사영은 그의 이름을 빌어 조선교회의 사정을 보고하고 대책의 마련을 호소하고자 하였다. 백서가 작성된 곳은 배론의 김귀동 가(家)였다. 그가 백서에 씌어진 사실들을 수집 정리하고 구상하기 시작한 때는 자신이 배론으로 피신했던 1801년 2월(음) 전후로 파악된다. 그는 피신 중 박해에 관한 사실을 김한빈 등을 통해 계속 수집하였고 이를 기록해 두었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26일(음) 황심을 만나게 되자 그날 밤 이를 최종적으로 정리하여 황심 편에 북경으로 발송하려다 미수에 그쳤던 것이다.
 
<황사영 백서>는 1801년 압수된 이후 의금부에서 계속 보관해 오다가 1894년 옛 문서들을 파기할 때 그 원본이 우연히 발견되어 당시 조선교구장이던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에게 전달되었다. 뮈텔 주교는 1925년 7월 5일(음) 로마에서 거행된 조선순교복자 79위의 시복식 때 이 자료를 교황 비오 11세에게 선물하였고, 현재 교황청 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한편 백서의 사본은 발각 당시부터 작성되기 시작해서 ≪벽위편≫(闢衛編), ≪신유사학죄인 사영 등 추안≫(辛酉邪學罪人嗣永等推案)을 비롯한 몇몇 자료에 재수록되어 있다. 한편 뮈텔 주교는 백서의 원본을 로마로 발송하기 이전 이를 실물 크기대로 동판에 담아 인쇄하여 학계에 배포하였다. 또한 한국 교회사연구소에서는 1966년 이를 활판본으로 간행하였다. <황사영 백서>의 번역본은 1925년 뮈텔의 프랑스어 역본(譯本), 1946년 야마구찌 마사유끼(山口正之)의 일본어 번역본, 1976년 정음사에서 간행한 윤재영(尹在瑛)의 한굴번역본 등이 있다.
 
황사영은 “천주교 신앙이 백성과 나라에 해가 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조정에서 이를 반드시 금지시키고자 하니, 천주교를 힘써 지켜보고자 하는 의도”(邪學罪人嗣永等推案)로 이 백서를 작성하였다. 그는 박해로 인해 죽어간 자신의 동료들에 관한 기록을 철저히 남기어 그들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기를 바랐다. 또한 그는 박해의 상황을 철저히 기록해서 전달함으로써 조선교회의 재건에 관한 관심을 환기시키고자 하였다. ‘본론’의 기록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특징 때문에 <황사영 백서>는 신유박해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한편, 그는 ‘대안제시’의 부분에서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 주었다. 1801년 당시 조선의 사회에서는 청나라의 정통성과 문화를 부인하는 북벌론적(北伐論的) 배청감정(排淸感情)과 함께, 청국의 문물을 적극적 주체적으로 수용하려는 북학론(北學論)이 공존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방안으로 조선을 청국에 종속시켜 보고자 하였다. 그의 이 발상은 북벌론자는 물론이고 북학론자에게도 수용될 수 없는 주장이었다. 또한 그는 서양선박과 병력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그의 발상을 이미 두 차례에 걸쳐 서양선박과 선교사의 파송을 요청한 바 있었던 초기 교회의 경험에, 박해라는 극한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무력의 요소가 결부되어 제시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시 사회에 널리 유행되고 있던 해상세력(海上勢力)의 조선침략에 관한 위기의식과도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발상은 달레(Dallet)의 표현대로 “지나친 상상에서 나온 유치한 계획이며, 저 시대에 있어서의 한 몽상(夢想)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는 급박한 박해의 상황 때문에, 조선왕조가 존재하는 한 신앙자유의 획득이나, 자신을 포함한 신도들의 생명유지가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조선왕조의 존재를 부정해 보려는 ‘몽상’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그의 ‘대안제시’가 ‘몽상’의 일종이었다 하더라도 그는 이 ‘몽상’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았고, 이 ‘몽상’은 그의 죽음에 있어서 직접원인으로 작용하였다. 한편,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황사영의 ‘대안제시’를 반민족적 행위로 규탄하고 있다. 그러나 근대 민족주의가 성립되지 않았던 상황 아래서 제시되었던 그의 ‘몽상’을 반민족주의로 규정하는 데에는 재고가 요청된다. 그러나 그의 ‘대안제시’는 마땅히 비판을 받아야 한다. 그는 신앙의 자유라는 좋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무력의 사용, 국가생존권의 부정이라는 좋지 못한 방법을 사용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황사영 백서사건
 
<황사영 백서>가 발각됨으로 말미암아 야기된 천주교탄압 사건으로서, 신유박해의 마지막 단계에 해당된다. 이로써 주문모 신부의 자수와 처형 이후 소강상태에 들어갔던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다시 크게 일어났다. 1801년 9월 26일(음) 황사영이 체포됨으로써 이 사건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또한 이들의 체포에 앞서 황심과 가까웠던 옥천희(玉千禧)가 체포되어 이들을 함께 국문하게 되었다. 사건이 발생한 직후 황심, 옥천희, 김한빈 등 관련인들은 형조에서 취조를 받았고, 사건의 주범인 황사영은 의금부에 구금되었다. 황사영에 대한 신문은 10월 9일(음)에 시작되었다. 그의 신문이 체포 이후 10여 일간 지체되었던 것은 사건의 중요성으로 인해 이 사건과의 관련사항을 파악하고 사건에 대한 대안을 사전에 마련하려 했기 때문이다. 신문은 주로 ‘대안제시’의 반역적 요소를 추궁하는 측면에서 진행되었다. 그리고 황사영 개인 및 그 사건과 관련된 인물들을 찾아내려 하였고, 백서의 사본이 청국에 전달되었을 가능성 등을 집중적으로 신문하였다.
 
신문의 결과 황심과 김한빈은 10월 23일(음) 서소문 밖에서 처형되었다. 황심에게 적용된 죄명은 모역동참죄(謀逆同參罪)였으며, 김한빈은 지정은장죄(知情隱藏罪)가 적용되었다. 그리고 11월 5일(음) 이사건의 중심인물인 황사영은 궁흉극악 대역부도죄(窮凶極惡大逆不道罪)로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되었다. 또한 김귀동 및 그 밖의 관계자와 가족들이 처벌됨으로써 이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한편, 조선 조정에서는 1801년 10월(음)에 파견된 동지사에게 천주교 탄압의 정당성을 설명하는 진주사(陳奏使)의 임무도 부여해주었다. 이때 파견된 진주사 조윤대(曺允大) 일행은 토사주문(討邪奏文)과 함께 <황사영 백서>의 내용을 16행 923자로 축소하여 청국의 예부(禮部)에 보고하였다. 이 축소본을 흔히 <가백서>(假帛書)라 부르고 있다. 이 가백서에는 청국의 조선 감호책(監護策)이나 종주권(宗主權) 발동 등에 관한 내용은 완전 삭제시켰으며, 서양선박의 요청사실과, 월경통신(越境通信) 등의 사실을 이조흉계(二條凶計)로 지적하였다. <황사영 백서>가 발각된 이후 청국인 주문모 신부의 처형 사실이 청국에 알려질 가능성이 높다고 조정에서는 판단하게 되었다. 이에 조선정부는 진주사를 파견하여 신유박해 전반에 관한 청국의 이해를 촉구하고, 주문모 신부의 처형에 따를 수 있는 청국측의 반발을 예방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진주사 조윤대의 파견은 <황사영 백서> 사건을 외교적 측면에서도 마무리 짓는 것이었다. (趙珖) [출처 : 이상 한국가톨릭대사전]
 
 
젊은 신앙 공동체의 고뇌 : 황사영 백서
 
머리글
 
한국 교회사를 보면 1801년 우리 교회는 정부 당국으로부터 본격적인 박해를 당했었다. 흔히 신유 교난(辛酉敎難)으로 불리는 이 박해의 과정에서 ‘황사영 백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 서양 세력의 도움을 요청하는 비밀 편지를 중국에 발송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신유 교난을 더욱 가열시킨 자극제가 되었고, 오늘에 이르러서도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교회를 비난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해 주었다.
 
오늘날 상당수의 역사 연구자들은 ‘황사영 백서 사건’에 근거를 두고 서양 제국주의의 한국 침략 과정에서 천주교 신앙이 어떻게 이용되었는가를 논증하려 한다. 그리고 이 사건 때문에 교회를 아끼는 많은 사람들은 이미 죽은 황사영을 원망하거나 사건 자체에 대한 언급을 가능한 한 회피하려 한다. 그러나 이 사건은 엄연히 우리 교회의 지난 일들 가운데 하나인 것이며, 황사영이 남긴 ‘백서’도 우리 교회사의 어둠을 밝혀 줄 수 있는 중요한 사료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백서가 작성되던 당시의 배경이나 그 내용 등에 관해 간단히 검토해 보고자 한다.
 
젊은 신앙 공동체
 
한국 천주교회는 젊은이의 종교 운동 결과로 성립될 수 있었다. 이 점은 초창기 교회에서 주요한 역할을 맡았던 사람들의 연령을 조사해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즉, 초기 교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이승훈은 28세의 젊은 나이에 세례를 받고 교회를 세워 나갔다. 명도회장 정약종은 24세 때에 입교하였고, 총회장 최창현도 교회가 창설되던 1784년에는 25세에 지나지 아니했다. 이존창이나 정약전 동 교회 지도자들도 20대 청년이었다. 이벽은 교회 창설 당시 20대를 갓 넘긴 31세의 젊은이였다. 물론 교회사 초창기의 인물들 중 영세 입교시의 연령이 40대 내외에 이르렀던 권일신(42세), 유항검(38세), 최필공(46세) 등도 있었지만 초기 교회의 중요한 특정 가운데 하나는 젊은 청년의 교회였다는 점이다.
 
‘백서’를 작성했던 황사영도 당시 26세의 젊은이였다. 이 20대 전후의 청년들이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당시의 교회를 젊은 신앙 공동체로 규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젊음은 왕성한 탐구욕을 상징하며, 새로운 사상과 문화 창조의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다. 바로 젊음의 이 특성과 관련하여 새로운 종교 운동으로서 천주교 신앙의 선포 작업도 진행되어 갔다. 그러나 젊음은 시행 착오를 통해 성장하며, 오류를 범할 수 있는 확률이 다른 어느 연령층보다도 높다고 하겠다. 젊음의 추진력이 어설픈 시행 착오로 전람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 젊은 추진력에는 원숙한 노년의 충고가 때때로 요청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우리는 황사영의 ‘백서’를 읽으면서 이와 비슷한 감상을 갖게 된다.
 
황사영은 누구인가
 
황사영은 남인 명문 출신으로 16세 나이에 진사 시험에 합격했던 청년 기예였다. 그는 다산 정약용의 맏형인 정약현의 딸 명련과 결혼했고 이때를 전후해서 천주교 교리에 접하게 되어 이후 신앙을 고백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그는 관직 진출을 완전히 포기하고 서울에서 신도 자제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생활했다. 그리고 그는 20대 전후의 젊은 시절부터 교회 활동에 투신하여 신유 교난 직전에는 교회의 중요한 지도자 가운데 하나로 부각되기에 이르렀다. 황사영의 이름은 바느질품을 팔던 교우 아녀자에게까지 알려졌으며,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당시의 한 교우도 그의 이름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데 1801년에 단행된 박해의 과정에서 교회를 이끌던 주문모 신부를 비롯한 주요 지도자들은 거의가 죽음을 강요당했다. 교회의 지도자였던 황사영도 정부 당국의 추적을 받았으나 요행히 피신할 수 있었다. 그가 피신한 곳은 제천 땅 배론[舟論]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박해 과정에서 살아 남은 유일한 교회 지도자가 자신임을 확인하고, 박해 과정에 대한 자세한 기록의 의무를 느꼈다. 그리고 그는 박해의 종식과 교회의 재건 방안에 대해서도 고뇌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비단에 편지를 작성해서 이를 북경 주교에게 전달하려 했다. 이렇게 하여 백서는 작성되었지만, 이것이 북경 주교에게 전달되기 전 발각되었고 그도 체포당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그는 1801년 11월 5일 서소문 밖에서 능지 처참을 당했고 그의 가족들은 연좌율에 의해 귀양을 가게 되었다.
 
백서란 무엇인가
 
백서는 황사영이 북경 주교에게 비단에 써서 보내려던 비밀 편지이다. 이 백서는 가로 62cm, 세로 38cm의 흰 명주에 깨알같이 작은 붓글씨로 122행, 13,311자가 채워져 있다. 이 백서의 70% 이상에 해당되는 부분은 신유 교난에 관해 자신이 직접 목격했거나 전해 들은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이 부분은 기록을 중시하던 선비 황사영이 남긴 중요한 사료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교회 지도자 황사영은 박해의 상황 보고에만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백서의 91항 이하 부분에서 교회 재건을 위한 대안을 제시했다. 여기에서 그는 청 나라의 힘에 의존하여 신앙의 자유를 얻을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해 보기도 했다. 또한 그는 서양 세력의 무력 시위를 통해 신앙의 자유를 얻는 방안도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서양 선박 수백 척과 병력 5-6만 명을 동원해서 조선에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도록 강박해주기를 요청하고자 했다. 이러한 그의 소망은 당시의 객관적 세계 정세에 비추어 보아 실현될 수 없는 허황한 것이었다. 그 허황된 생각을 담은 편지도 중국 교회에 전달되지 못한 채, 그는 체포되었고 대역부도 죄인으로 죽음을 당했다.
 
‘백서’에 대한 평가
 
‘백서’는 신유 교난의 전개 과정을 알려 주는 귀중한 문헌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황사영 알렉산델(*나중에 황사영의 세례명이 알렉시오라는 사실이 밝혀져 현재는 알렉시오로 부릅니다)의 믿음이 배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를 ‘신앙 유산’의 하나로 인정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백서’의 대안 제시 부분에는 많은 문제가 있다. 그는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외부의 무력으로 말미암을 굴종까지도 감내하려 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흔히 반민족주의적이며 제국주의 침략의 주구적 입장으로만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제국주의 침략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근대 제국주의는 1870년대 이후에야 성립된 것이기 때문이다. 제국주의가 성립되기 70여 년 전의 행동이 제국주의적 행동으로 규정되는 것은 일종의 시대 착오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그의 태도를 반민족주의적인 것으로 매도할 수만도 없다. 그 이유는 우리의 민족주의는 개항기 이후에 이르러 성립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그의 주장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시켜 줄 수 없다.”는 그리스도교 윤리의 대원칙을 어긴 것이다. 바로 이 측면에서 우리는 백서의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황사영의 ‘허황된 대안’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대한 인식의 미숙성 때문에 나온 것이다. 청년 황사영의 판단 착오로 말미암은 오류의 결과는 젊은 신앙 공동체에 더 많은 고통을 요구했다. 이 점에서 볼 때 우리는 ‘백서’를 통해 교회에 대한 한 청년의 사랑과 고뇌를, 그리고 그 청년의 추진력과 시행 착오를 동시에 확인하게 된다. [출처 : 조광 이냐시오, 고려대학교 교수, 경향잡지 1990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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