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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 배론 성지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최초의 신학당 터이자 최양업 신부의 안식처
지번주소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 644-1 
도로주소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배론성지길 296
전화번호 (043)651-4527
팩스번호 (043)651-9317
홈페이지 http://www.baeron.or.kr
관련기관 문화영성연구소    
관련주소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배론성지길 284
문화정보 충청북도 기념물 제118호
성 장주기(張周基) 요셉(1803-1866년)
 
배론 성 요셉 신학교 옆에 세워진 성 장주기 요셉 흉상.
성 장주기 요셉(Josephus)은 경기도 수원 땅의 어느 부유한 외교인 집안에 태어났다. 한문에 유식했던 그는 열심한 자기 형수로부터 천주교 도리를 배워 23세에 영세 입교하게 되었는데, 그때 온 가족이 모두 입교하였다. 그는 학식이 있고 슬기로웠으며 신심이 두터웠기 때문에, 모방(Manbant, 羅) 신부가 입국하자마자 그를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20년 동안이나 회장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였다. 그는 거듭된 박해로 네 번씩이나 산속으로 피신해야 했으며, 살아남은 신자들을 찾아다니며 위로하고 격려해주며 신앙을 굳세게 지켜나갔다.
 
1845년경에 그는 친척들의 성화와 박해를 이기지 못해 제천 땅 배론 골짜기로 옮겨가 살았다. 1856년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가 그곳에 신학교를 세우게 되자 그는 자기 집을 신학교로 서슴지 않고 제공하였으며, 앞장서서 신학생들의 뒷바라지까지 하였고, 신학교 관리직까지 맡아보았다. 장 요셉과 부인은 합심하여 농사를 지어 신학교에 바쳤고, 자신들은 청빈과 봉사로써 11년간이나 신학교 실림을 잘 이끌어 갔다.
 
1866년 3월 1일 갑자기 포졸들이 배론 골짜기에 들이닥쳐 신부들과 함께 그 역시 체포되었으나, 장 회장의 공을 잘 알고 있는 푸르티에(Pourthie, 申妖案) 신부가 관헌하게 돈을 주며 그를 석방시켜 달라고 해서 하는 수 없이 그는 울면서 배론 신학교로 돌아왔다. 그 후 5일이 지나 식량을 장만하려고 노루골에 사는 한 신자 집에 갔다가 다시 포졸들이 그를 덮쳐서 제천 관장에게로 데려갔다. 제천 관장은 장 요셉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서울에 품신하였다. 서울에서는 “그 사람이 정말 서양인 신부들의 집주인이면 서울로 올려 보내고, 그렇지 않으면 배교하게 하여 집으로 돌려보내라”는 대답을 보냈다. 관장이 그에게 질문을 하자, 그는 자기 신앙을 고백하고 서양인 신부의 집주인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기라고 서슴없이 말하였다.
 
그는 결박을 당하지도 않은 채 짚으로 만든 가마를 타고 역적모의를 한 죄수에게 씌우는 홍포를 쓴 채 서울로 향하였는데 지나가는 길목마다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죽으러 가는 그의 얼굴에 사색이 감돌기는커녕 기쁨이 넘쳐흘러 보는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일이라 하며 수군거렸다고 한다. 그러다가 1866년 3월 24일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집행 날을 기다렸다. 그때 나라에서는 왕비가 해산할 달이었으므로 서울에서 죄인의 피를 뿌린다는 것은 불길하다 하여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보령 갈매못에서 처형하라는 분부가 내려졌다. 이에 그는 1866년 3월 30일에 보령 갈매못에서 참수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64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성인사전]
 
 
메스트르(Joseph Ambroise Maistre) 신부(1808-1857년)
 
한국성 이(李). 조선교구 선교사. 안느시(Annecy) 교구의 앙트르몽(Entremont)에서 태어나 1832년에 신부가 된 후 7년 동안 교구사제로서 활약하다가 1839년 이교인에게 복음을 전할 뜻을 품고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갔다.
 
1840년 1월 15일 프랑스를 떠나 우선 마카오로 향하였다. 마카오의 경리부장이 그의 임지를 결정하게 되어 있었다. 9월 21일 마카오에 도착한 그는 임지의 결정을 기다리면서 마침 그곳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있던 김대건과 최양업을 가르치는 한편 경리부 일을 도왔다. 1842년 2월 프랑스 군함 편으로 우리 신학생들의 귀국이 결정되자 메스트르 신부는 조선 교회 선교사로 임명되어 김대건과 함께 마카오를 떠났다. 이 때 그는 조선에 잠입하기 위해 육로로 또는 해로로 10년간의 모험을 감수해야만 하였다. 선교사의 입국이 불가능하게 보이자 그는 김대건만이라도 입국시키고자 김대건과 하직하였고, 1846년 초에는 최양업과 함께 동북 국경을 통해 입국을 시도했으나 만주 군인에게 잡히는 몸이 되었고, 간신히 풀려나 만주로 돌아왔다.
 
드디어 1852년, 1847년에 난파한 프랑스 군함들의 유물을 철거한다는 구실 아래 중국 배를 타고 조선 서해안 고군산도(古群山島)에 이르러 상륙하는 데 성공, 서울로 올라왔다. 그는 이미 중국에 있을 때 페레올(Ferreol, 高) 주교로부터 부주교로 임명되었고, 더구나 연장자였으므로 1853년 페레올 주교가 사망하자 1856년 새교구장이 입국하기까지 조선교구의 장상직을 맡아보았다.
 
그간 그는 성영회(聖孀會)의 사업을 도입하였고 또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고아나 기아를 거두어 키우는 성영회의 사업을 조선에서도 촉진시키고자 그는 성영회의 도움을 얻어 외교인들의 자녀들을 거두어 교우가정에서 양육하게 하였다. 비록 박해로 시설을 갖출 수는 없었을지라도 어쨌든 조촐하게나마 조선에서 처음으로 고아사업이 시작되었다.
 
또 그는 국내에서의 성직교육의 긴급성을 절감하고 1855년 제천(堤川) 배론에 성 요셉신학교를 개설하고 우선 그곳의 회장으로 하여금 신학생들에게 한문을 가르치고 신학교 살림을 돌보게 하였다. 새 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가 입국하자 그는 충청도로 내려와 조그마한 교우촌을 맡아 오던 중 1857년 12월 20일 과로로 쓰러졌고 인근 덕산(德山) 황무실에 묻혔다. 그는 특히 그의 착하고 양순한 성격 때문에 최양업 신부와 조선 교우들의 각별한 존경과 사랑을 받았었다.

 
푸르티에(Jean Antoine Pourthie) 신부(1830-1866년)
 
복원된 배론 성 요셉 신학교 옆에 세워진 순교자 푸르티에 신부상.
순교자.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 한국명 신요안(申妖案). 1830년 12월 20일 프랑스 알비(Albi) 교구의 ‘발랑스 앙 알비즈와(Valence en Albigeois) 지방에서 출생. 1854년 6월 11일 알비 교구 소속으로 사제서품을 받고 즉시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여 1855년 중국 귀주(貴州) 지방의 선교사로 파견되었으나 포교지가 한국으로 변경되어 1856년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 신부와 함께 상해(上海)를 거쳐 해로(海路)로 한국에 잠입, 충청도 배론[舟論]의 성 요셉신학교 교장으로 한국인 신학생 양성을 위해 일하다가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신학교 교수 프티니콜라 신부, 신학교 주임 장주기(張周基, 요셉)와 함께 체포되어 그해 3월 1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로 순교하였다. 유해는 순교 직후 교우들에 의해 왜고개에 안장되었다가 1899년 용산 예수성심 신학교로 이장되었고, 1900년 다시 명동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프티니콜라(Michel Alexandre Petitnicolas) 신부(1828-1866년)
 
복원된 배론 성 요셉 신학교 옆에 세워진 순교자 프티니콜라 신부상.
순교자.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 한국성(韓國姓)은 박(朴). 1828년 8월 21일 프랑스 생 디에(Saint Die) 교구의 코앵시(Coinches)에서 출생. 샤텔 쉬르 모젤의 소신학교를 거쳐 생 디에 교구의 대신학교에서 수학하던 중, 1850년 1월 20일, 차부제(次副祭)로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했으나 그해 10월 병 때문에 외방전교회를 나와 1852년 생 디에 교구 소속으로 사제 서품을 받고 라블린 본당 보좌신부로 1년 동안 사목하였다. 그러나 1853년 6월 다시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인도, 홍콩 등지에서 포교하다가 1856년 3월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 푸르티에(Pourtie, 申) 신부와 함께 한국에 입국, 충청도지방에서 사목하였고 1862년부터는 배론신학교의 교수로 재직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로 신학교 교장 푸르티에 신부와 함께 배론에서 체포되어 이 해 3월 1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당하여 순교하였다. 유해는 순교 직후 교우들에 의해 왜고개에 안장되었다가 1899년 용한 예수성심신학교로 이장되었고 1900년 다시 명동대성당으로 옮겨졌다. [이상 한국가톨릭대사전]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1775-1801년)
 
배론 성지에 세워진 순교자 황사영 알렉시오 동상.
황사영 백서 원본이 신유박해 순교 200 주년을 기념하여 서울의 절두산 순교박물관에 전시되었다. 그 동안 로마 교황청에 보관되어 있던 황사영 백서는 1801년 황사영이 신유박해의 참상을 기록하고 신교의 자유를 얻고 교회를 재건하려는 자신의 개인적인 방안을 건의한 편지글로 한국교회사 연구의 소중한 자료이다. 조선 조정의 잔인한 박해로 겨우 움튼 한국교회가 참혹하게 찢겨져 가는 현실을 바라보며 토굴 속에 숨어서 피눈물로 써 내려간 편지글, 가로 62㎝ 세로 38㎝의 흰 명주 천에 붓으로 쓰여진 깨알 같이 작은 해서체의 먹글씨, 122줄 1만 3384자 앞에서 200년 세월을 넘어 전해지는 황사영의 신앙적 열정을 느끼며 전율했다. 세월의 흔적이 어린 비단 위에 조금씩 번지기도 한 작은 글자들은 이제 우리들을 감격의 눈물로 역사 속에 젖어들게 하고 있다.
 
황사영(黃嗣永, 1775~1801년)은 서울 아현동에서 태어났으며 남인 시파에 속하는 양반가문 출신이다. 정5품 정랑직을 역임했던 아버지 황석범이 일찍 돌아가시어 유복자로 태어난 그는 어머니 이소사의 보살핌 속에서 자랐다. 본관은 창원이요 자를 덕소(德紹)라 한 그는 명문가의 자손답게 영특하고 학문에 뛰어났다. 그의 11대 할아버지인 황침이 한성판윤을 지낸 이래 10대에 걸쳐 벼슬이 떨어진 적이 없는 명문가 출신인 그는 수염이 아름다운 귀공자로도 주변의 환심과 기대를 받고 있었다.
 
1790년(정조 14년) 황사영은 열여섯의 어린 나이로 진사시에 급제하여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정조 임금은 특별히 그의 학문적 재능을 칭찬하며 격려하여 스무 살이 되면 탁용하겠다는 중용을 약속하여 그의 장래를 보장해 주었다. 그리고 그가 더욱 학문에 전념하도록 급양비를 하사하였는데 이 때, 임금님이 그의 손을 잡아 주어 어무가 내린 영광을 입었다. 황사영은 이 영광을 표시하기 위하여 당시의 관례에 따라 비단으로 그 손을 감고 다녔다. 이로서 절대군주제도 아래 신분계급 사회였던 당시의 황사영은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조건을 온전히 다 갖추었다.
 
황사영은 진사시에 급제했던 그 해에 혼인을 하여 정란주(보명은 명련)를 아내로 맞아 들였다. 이 결혼은 그의 인생에 있어 귀중한 전환점이 되게 하였다. 부인인 정란주는 진주목사로 선정을 베풀어 그 명성이 자자한 정재원의 네 아들 중 맏이인 정약현의 맏딸이었다. 정약현은 한국 초기교회의 뛰어난 지도자 정약종과 다산 정약용의 맏서형이 되니 황사영은 정약종과 정약용의 조카사위가 된 것이다.
 
황사영은 이 무렵인 1791년 이승훈에게서 천주교 서적을 얻어 보았으며 정약종, 홍낙민과 함께 천주교 교리에 대한 진지한 토론을 하고, 특히 처숙인 정약종 형제들로부터 교리를 익히게 되어 알렉시오란 세례명으로 영세 입교하였다.
 
천주교 신자가 된 황사영은 관직의 길을 포기하고 교리연구에 몰두했다. 세상의 온갖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조건을 다 갖춘 그는 현세의 행복을 버리고 구원의 학문이 아닌 다른 학문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1795년에는 주문모 신부를 최인길의 집에서 만난 뒤 주신부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양반인 그는 평민신분의 양인들과 어울려 남송로, 최태산, 손인원, 조신행, 이재신 등 다섯 사람과 함께 명도회 단위 조직을 구성하여 이끌었다. 그리고 1796년에는 이승훈, 홍낙민, 유관검, 권일신, 최창현 등 당시 교회의 주요 인물들과 함께 서양선교사 파견 요청을 위한 일에 동참하였다. 그는 1798년부터 자신의 고향을 떠나 서울 애오개(아현동)와 북촌에 머물며 신자들의 자제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천주교 서적을 필사하여 생계를 유지하며 교회의 중요한 지도자로 부상해 갔다.
 
마침내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황사영에 대한 체포령도 내려졌다. 그는 체포를 피해 신앙생활을 바로 할 곳을 찾아 방황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금령이 강화되니 친척과 친구들 가운데 천주교를 버리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나는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본 결과 이것이 세상을 구하는 양약이라고 판단하였기에 온갖 성의를 다하여 신봉하게 되었다"고 증언한 바와 같이 그의 신앙을 지켰다. 그는 신앙생활 그 하나를 바로 하기 위하여 스스로 이씨 성을 가진 상주로 변장하고, 김한민과 함께 서울을 벗어나 충청도 제천 땅 배론으로 숨어들어 김귀동의 집 옹기가마 토굴에 은신하였다.
 
일찍이 진사시에 급제하여 정조 임금으로부터 특별한 칭찬과 격려를 받았던 그는 이제 이름 석자도 밝히지 못한 채 토굴 속에 몸을 숨겼다. 진정 세상을 구하는 양약이 이것뿐이기에 그 구원을 위한 학문 밖에는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그의 학문과 신앙이 조선조정의 일방적인 박해로 모욕을 당하고, 신앙의 동지들은 형장의 죄수처럼 처형되고 있음을 보는 그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그는 눈물과 기도로 신앙 동지들의 장한 순교의 모습을 정리해 두었으리라. 마침내 주문모 신부마저 순교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 박해과정을 증언하고 조선교회를 재건해야 할 사명을 통감했으리라! 그는 이 역사적 소명 앞에 무릎을 꿇고 그 유명한 백서를 쓰기 시작했을 것이다. [출처 : 김길수, 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 가톨릭신문, 2001년 12월 9일]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1821-1861년)
 
탄생과 성장

배론 성지의 최양업 토마스 신부상.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는 1821년 3월, 충청남도 청양의 다락골 인근에 있는 새터 교우촌에서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과 순교자 이성례 마리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박해를 피해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던 부친을 따라다니다가 경기도 부평을 거쳐 안양에 있는 수리산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이 수리산 마을은 그 뒤 신자들이 하나둘 모여들면서 비밀 신앙 공동체로 변모하였다.

이에 앞서, 조선 대목구의 전교를 위임받은 파리 외방 전교회에서는 선교사들을 조선으로 파견하려고 여러 가지로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경 감시가 심한 데다가 박해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으므로, 서양 선교사가 조선에 들어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난관을 극복하고 처음으로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는 프랑스 출신의 성 모방 베드로 신부였다.

1835년 말, 조선 천주교회에서 파견한 밀사들의 안내로 입국한 모방 신부는 곧바로 전국의 신앙 공동체들을 순회하기 시작하였고, 이듬해 초에는 부평에 있는 최경환 프란치스코의 집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장래가 촉망되는 최양업 토마스를 한국의 첫 신학생으로 선발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15세였다.

신학생으로 선발된 최양업 토마스는 1836년 2월 6일 서울의 모방 신부 댁에 도착하여 라틴어 수업을 받았다. 이어서 모방 신부가 신학생으로 간택한 최방제 프란치스코가 3월 14일에, 김대건 안드레아가 7월 11일에 각각 도착하여 함께 생활하였다.

마카오 유학과 부제 서품

최 토마스는 1836년 12월 2일, 동료 신학생들과 함께 성경에 손을 얹고 순명을 서약하고, 다음 날 마카오 유학길에 올랐다. 그리하여 중국 대륙을 남하하여 다음 해 6월 7일 마카오에 있던 파리 외방 전교회 극동 대표부에 도착하였으며, 이때부터 그곳에 임시로 설립된 신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하였다.

마카오에서의 유학 생활은 1842년까지 계속되었는데, 1837년 11월에는 동료인 최방제 프란치스코가 열병으로 사망하는 아픔을 겪었고, 1839년에는 마카오의 소요 때문에 필리핀의 마닐라로 장소를 옮겨 수업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다가 같은 해 말에 마카오로 돌아왔다.

그러나 신학생 최 토마스는 아직 공부가 끝나기도 전인 1842년 4월에 마카오를 떠나게 되었다. 한국과 통상 조약을 원하는 프랑스 함대에서 통역자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이때 극동 대표부의 장상인 리브와(Libois) 나폴레옹 신부는 박해로 끊어진 조선 천주교회와 연락을 기대하고 최 토마스와 김 안드레아를 각각 다른 프랑스 함대에 승선토록 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가 남경에 도착한 다음에 더 이상의 북진을 원하지 않게 되자, 최 토마스와 김 안드레아는 프랑스 함대에서 내려 요동으로 가게 되었다. 조선으로 들어가고자 입국로를 탐색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최양업 토마스는 만주의 소팔가자로 거처를 옮겨 조선 대목구의 부주교인 페레올(Ferreol) 요한 주교에게 계속 수업을 받았고, 1843년에는 리브와 신부를 통해 프랑스 파리의 무염 성모 성심회에 가입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조국에서 일어난 박해와 순교자들의 소식을 들었다. 이때 그는 프랑스로 귀국해 있던 스승 르그레즈와(Legregeois) 베드로 신부에게 서한을 보내 다음과 같이 자신의 심정을 이야기하였다.

“저는 우리 부모님과 형제들을 따라서 공을 세우지 못하였으니, 저의 신세가 참으로 딱합니다. 그리스도 용사들의 그처럼 장열한 전쟁에 저는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말입니다. 정말 저는 부끄럽습니다! 이렇듯이 훌륭한 내 동포들이며, 이렇듯이 용감한 내 겨레인데, 저는 아직도 너무나 연약하고 미숙함 속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인자하신 하느님 아버지, 당신 종들의 피가 호소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어 당신의 넘치는 자비와 당신 팔의 전능을 보이소서. 언제쯤이나 저도, 신부님들의 그다지도 엄청난 노고와 저의 형제들의 고난에 참여하기에 합당한 자가 되어, 그리스도의 수난에 부족한 것을 채워, 구원 사업을 완성할 수 있을까요?”

신학 수업을 계속하던 최양업 토마스는 1844년 12월 10일경에, 동료 김대건 안드레아와 함께 페레올 주교에게 부제품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김대건 안드레아 부제가, 사제품을 받고서 페레올 주교, 성 다블뤼(Daveluy) 안토니오 신부와 함께 조선에 입국한 뒤에도, 소팔가자에 남아 있으면서 매스트르(Maistre) 요셉 신부와 함께 귀국로를 찾고자 지속적으로 노력하였다.

사제 수품과 귀국

귀국로를 탐색하는 동안 최 토마스 부제는 조선 천주교회의 밀사들을 만나, 1846년의 박해와 동료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순교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서한을 보내 조국의 애통한 소식을 알렸다.

“마침내 지루했던 기나긴 포로 생활에서 해방되고, 저의 동포들한테 영접을 받으리라 희망하면서 크게 기쁜 마음으로 용약하여 변문(한중 국경의 성문)까지 갔습니다. 그러나 변문에 도착하여 보니, 이 희망이 산산이 무너졌습니다. 너무나 비참한 소식에 경악하였고, 저와 조국 전체의 가련한 처지가 위로받을 수 없을 만큼 애통하였습니다. …… 특히 저의 가장 친애하는 동료 안드레아 신부의 죽음은 신부님께도 비통한 소식일 것입니다.”

조선 천주교회 밀사들의 만류로 귀국을 포기한 최 토마스 부제는 극동 대표부가 이전해 있던 홍콩에 도착한 뒤에 ‘한국 순교자들의 행적’을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귀국로 탐색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1847년 8월에는 프랑스 군함을 타고 조선의 해안에 도달하였지만 밀사들을 만나지 못하여 귀국에 실패하고 말았다.

다시 상해로 거처를 옮긴 최양업 토마스 부제는 1849년 4월 15일, 마침내 서가회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이때 그에게 사제품을 준 사람은 예수회원으로 강남 대목구장으로 있던 마레스카(Maresca) 주교였다.

사제품을 받은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그해 5월에 상해를 출발하여 중국 요동 지방으로 가서 성 베르뇌(Berneux) 시메온 신부 아래서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1월에 매스트르 신부를 다시 만나 귀국을 시도한 끝에, 12월 3일 조선 천주교회의 밀사들을 만나 귀국하게 되었다. 이때 매스트르 신부는 발각될 위험이 있었으므로 조선에 입국하지 못하였다.

사목 활동과 선종

귀국하자마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만난 뒤, 각처에 숨어 있는 신자들을 순방하기 시작하였는데, 1850년 초부터 6개월 동안 5개 도와 5천여 리를 걸어다니며 3,815명의 신자를 방문하였다. 이후, 진천 배티를 사목 중심지로 삼게 되었다.

이러한 사목 활동은 11년 6개월여 동안 꾸준히 계속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휴식 기간을 이용하여 한문 교리서와 기도서를 한글로 번역하였고,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을 도왔으며, 신학생들을 말레이 반도에 있는 페낭(Penang) 신학교로 보냈고,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을 수집하였다.

물론 전국에 산재해 있는 신자들을 순방하기란 쉽지 않았다. 도중에 최 토마스 신부는 서양인으로 오인을 받아 마을에서 쫓겨나기도 했고, 포졸들의 습격으로 죽을 위험에 처하기도 하였다. 특히 1859년에는 순방 도중에 발각되어 포졸과 외교인들로부터 흠씬 두들겨 맞고, 주막에서 쫓겨나 반쯤 나체가 된 몸으로 눈 쌓인 밤을 헤맨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그의 신앙과 조국애, 그리고 신자들에 대한 애정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1860년 경신박해 때,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몇 명의 신자들과 함께 경상남도의 한 모퉁이에 갇혀서 대목구장 베르뇌 주교나 다른 선교사들과 연락이 끊긴 채 지내야만 하였다. 이때 그는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다시 서한을 보내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고, 다음과 같이 조선 천주교회를 도와주십사고 부탁하였다.

“우리를 환난에서 구하소서. 엄청난 환난이 우리에게 너무도 모질게 덮쳐 왔습니다. 원수들이 우리에게 달려들고 있습니다. 당신의 보배로운 피로 속량하신 당신의 유산을 파멸시키려 덤벼들고 있습니다. 당신께서 높은 데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들을 대항하여 설 수가 없습니다.

지극히 경애하올 신부님들께서 열절한 기도로 저희를 위하여 전능하신 하느님과 성모님께 도움을 얻어 주시기를 청합니다.

이것이 저의 마지막 하직 인사가 될 듯합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지, 계속 추적하는 포위망을 빠져나갈 수 있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 불쌍하고 가련한 우리 포교지를 여러 신부님들의 끈질긴 염려와 지칠 줄 모르는 애덕에 거듭거듭 맡깁니다.”

다행히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갇혀 있던 곳을 빠져나와 경상도 남부 지방의 사목 방문을 다 마친 다음, 베르뇌 주교에게 성무 집행 결과를 보고하고자 길을 나섰다. 그러나 과로에다 장티푸스까지 덮쳐 1861년 6월 15일에 문경읍 또는 진천 배티 교우촌에서 선종하고 말았으니, 이때 그의 나이 40세였다.

이 소식을 들은 베르뇌 주교는, 파리 외방 전교회의 신학교 교장인 알브랑(Albrand)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서, 다음과 같이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신심과 열심, 그리고 평소에 보여 준 사제로서의 분별력을 칭송하고, 동시에 그를 잃은 아쉬움을 표시하였다.

“최 토마스 신부는 신심, 영혼의 구원을 위한 불과 같은 열심, 그리고 무한히 귀중한 일에서는 훌륭한 분별력으로 우리에게 그렇게도 귀중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유일한 한국인 신부 최 토마스가 구원의 열매를 풍성히 맺은 성사 집행 뒤에, 내게 자신의 업적을 보고하려고 서울에 오던 중, 지난 6월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착한 신부가 처해 있는 위험에 대한 소식을 맨 처음 받은 푸르티에(Pourthie) 신부는 그에게 마지막 성사를 줄 수 있을 만큼 일찍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그 신부는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죽어 가는 그의 입술에서 아직 새어 나오는 말이 단지 두 마디 있었으니, 그것은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이었습니다. …… 최 토마스 신부는 12년간 거룩한 사제의 모든 본분을 지극히 정확하게 지킴으로써 사람들을 감화시키고, 성공적으로 영혼 구원에 힘쓰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의 죽음은 저를 난처하게 합니다. 그가 성무를 집행하던 구역에는 커다란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는, 서양 사람이 뚫고 들어가기 어려운 많은 마을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를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이 서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배론 신학교에서 170-180리 지점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그 당시 신학교에 있던 푸르티에 신부가 이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는 곧장 최 토마스 신부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그가 들을 수 있는 말은 아주 열성적으로 부르는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뿐이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선종 뒤, 5개월이 지난 다음, 베르뇌 주교의 주례로 최 신부의 장례가 성대하게 치러졌고, 그의 시신은 배론 신학교 뒷산에 안장되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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