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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 신암리 성당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의정부 지역 신앙의 뿌리가 된 교우촌이자 이춘근 순교자 기념 순례지
지번주소 경기도 양주시 남면 신암리 264-3 
도로주소 경기도 양주시 남면 감악산로489번길 27-32
전화번호 (031)862-3455
홈페이지

이춘근 라우렌시오 신부 약전


덕원 수도원, 1915년 3월 8일 생, 경기 양주

세례명 : 스테파노

사제서품 : 1939년 6월 24일

첫서원 : 1942년 7월 26일

경력 : 사리원 본당 보좌, 장호원 본당 보좌, 덕원 신학교 사감 및 교수, 평양 교구 서포 본당 주임 겸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원 지도 신부

체포 일자 및 장소 : 1950년 6월 25일, 순안

순교 일자 및 장소 : 1950년 10월 5일, 평양(추정)


이춘군 라우렌시오(李春根, 1915~1950) 신부는 1915년 3월 8일, 경기도 양주군 남면 신암리에서 아버지 이공명(李公明) 바오로와 어머니 홍 베로니카의 3남 4녀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나 스테파노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왜관 수도원의 이근재 부르노(李根宰, 1925-2006) 수사가 그의 동생이다. 그는 신암리에서 보통학교 4년 과정을 마친 뒤 서울 용산의 예수성심신학교에 입학했다. 1939년 6월 24일, 그는 명동 성당에서 경성대목구장인 아드리앵 조제프 라리보(Adrien Joseph Larribeau, 元享根, 1883-1974) 주교의 주례로 사제서품을 받았다. 라리보 주교는 그를 황해도 사리원본당 보좌신부로 발령했다가 1940년 7월에는 경기도 장호원(현 감곡) 본당으로 전임시켰다. 장호원에서 3년간 사목활동을 한 후, 수도생활에 매력을 느낀 그는 성 베네딕도회 덕원 수도원의 보니파시오 사우어(Bonifaz Sauer, 辛上院, 1877-1950) 주교 아빠스를 여러 차례 방문하여 입회를 청했으며, 1941년 허락을 받아냈다. 라우렌시오라는 수도명으로 수련을 시작한 그는 1942년 7월 26일, 첫서원을 했다. 덕원 수도원의 루치오 로트(Lucius Roth, 洪泰華, 1890-1950) 원장신부는 상트 오틸리엔(St. Ottilien) 수도원에 이렇게 보고했다. “지금까지 한국인 수도형제 가운데 장엄서원을 한 사제가 한 명(김치호 베네딕도 신부), 단순서원을 한 사제가 한 명(이춘근 라우렌시오 신부) 있습니다.”


해방이 되기 전까지 몇 년간 무슨 소임을 맡았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1946년 7월 성대 치료를 위해 서울에 머물던 때부터 그의 삶은 꽤 소상하게 추적할 수 있다. 그가 서울 주교관에서 그해 12월에 쓴 편지 사본이 영어로 번역되어 보존되어 있다. 이 편지는 해방 후 덕원 수도원이 처한 어려움을 그대로 말해준다. “작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여)다들 매우 기뻐했으나 지금은 이른바 삼팔선 때문에 아주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종전 직후 붉은 군대가 생필품과 가축, 작업장의 기계 등을 모조리 빼앗아 갔으며, 이른바 토지개혁에 의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수도원 땅도 몰수당했습니다. 그래서 올해 1월 이후부터 먹을 게 전혀 없습니다. (중략) 덕원 수도원에서는 레오폴도 다베르나스(Leopold Graf desEffans d’Avernas, 羅碧宰, 1887-1944) 신부가 1944년 12월에 사망했고, 알프레도 푹스(Alfred Fuchs, 陳, 1905-1945) 신부가 1945년 3월에 그리고 비트마르 파렌코프(Witmar Farrenkopf, 朴偉明, 1906-1945) 신부도 1945년 8월에 피살되었습니다. 마르코 바잉거(Markus Bainger, 方仁建, 1891- 1945) 신부는 10월에 청진을 빠져나온 후 탈진하여 사망했습니다. 우리는 미사 예물과 의약품과 의복이 필요합니다. (중략) 이제 연길 수도원 소식을 몇 가지 전해드립니다. 테오도로 브레허(Theodor Breher, 白化東, 1889-1950) 주교 아빠스를 비롯한 신부, 수사, 수녀들은 1946년 5월, 공산주의자들에게 체포되어 남평 수용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노동자로 살았습니다. 테오도로 주교 아빠스와 신부 두세 명은 1946년 9월, 질병 때문에 석방되었습니다. 연길 수도원과 딸린 재산은 모두 몰수당했습니다. (후략)” 1947년 봄, 그는 다시 38선을 넘어 덕원 수도원으로 돌아왔다. 소련 군정 아래 공산당이 정권을 장악하던 시기라 이미 종교에 대한 박해가 예견되었던 상황이었다. 동료들이 왜 다시 북한으로 돌아왔느냐는 질문에 그는 단지 “나는 오직 천주님의 안배에 따라 살 뿐이다.”라고 대답했다.


1948년 10월 평양 대목구장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洪龍浩, 1906-?) 주교가 사제들을 보내달라고 절박하게 부탁하자 루치오 로트 원장신부는 이춘근 라우렌시오 신부를 평양으로 보냈다. 그는 평양 서포 본당 주임신부 겸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지도신부로 활동했다. 그가 서포로 부임한지 반년 후 북한 정치 보위부가 덕원 수도원을 폐쇄하고 독일인 선교사들과 한국인 성직자들을 체포하여 평양 인민교화소에 구금하고 나머지 한국인 수도자와 신학생들은 쫓아냈다. 이 라우렌시오 신부는 본가로 돌아간 임근삼 곤라도(林根三, 1919-1986) 수사에게 전보를 쳐서 평양으로 오게 하여 극비리에 구금된 수도형제들의 행방을 파악하고 도움을 줄 방법을 모색했다. 또한 원산 수녀원 수녀들을 위해 주요 접선 장소를 제공했다. 평양 출신 박정덕 골룸바(朴靜德, 1906-1983) 수녀의 증언에 따르면 1949년 7월 11일에 평양 인근에 흩어져 있던 수녀들이 기림리 본당에 모여 사부 성 베네딕도 축일미사를 드리고, 이 라우렌시오 신부 앞에서 수도서원을 갱신했다고 한다.


- 1950년 6월 16일 평양 교화소에서 루치오 로트 원장신부가 이춘근 라우렌시오 신부에게 써보낸 전권 위임 편지.



루치오 로트 원장신부는 평양 인민교화소 의무담당 노재경과 이기호를 통해 이 라우렌시오 신부에게 비밀쪽지 편지를 보내 교화소 안에서 벌어진 일들을 전해주었다. 1950년 6월 16일자 쪽지에는 루치오 로트 신부가 자신이 덕원 수도원의 원장신부로서 주교 아빠스 사망 이후 전권을 위임할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하고, 김 알로이시오 수사, 김용택 필립보(金龍澤, 1916-2011) 수사, 김삼도 마인라도(金三道, 1919-2004) 수사의 3년 유기서원 기간을 연장할 수 있는 권한을 그에게 위임했다. 동생인 이 부르노 청원자가 월남을 결심하고 평양으로 가서 형에게 같이 떠날 것을 권유했으나 “저 많은 양을 두고 내가 어디로 가겠느냐”며 거절했다.


1949년 5월 14일, 홍 프란치스코 주교가 체포되었고, 해가 바뀌자 공산당의 횡포는 더욱 심해졌다. 신부들이 길에서 체포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는 본원으로 쓰고 있던 예전 메리놀회 서포 본부 건물을 양도하라는 북한 당국의 강요와 여러 어려운 상황으로 더 이상 공동생활이 힘들게 되자 수녀회를 해산하기로 결정했다. 1950년 5월 14일, 수녀회가 해산되자 이 라우렌시오 신부는 평양의 외곽에 있는 순안 공소로 피신했다. 순안에서 신자들을 돌보던 그는 6월 25일에 체포되었다. 체포현장에는 임 곤라도 수사가 있었으며 그와 마지막 대화를 나누었다. 임 곤라도 수사는 이 라우렌시오 신부가 10월 5일, 인민군이 평양에서 퇴각할 즈음에 평양에서 처형되었을 것으로 추측하는 증언을 남겼다.


* 자료 출처 덕원의 순교자들(분도출판사, 2012년), 북녘 땅의 순교자들(가톨릭출판사, 1999년), Necrologium(왜관 수도원), 평양교구사(분도출판사, 1981년)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15년 가을호(Vol.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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