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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 당고개 순교성지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따뜻한 어머니의 품으로 거듭난 순교성지
지번주소 서울시 용산구 신계동 56 
도로주소 서울시 용산구 청파로 139-26
전화번호 (02)711-0933
팩스번호 (02)711-0935
홈페이지 http://danggogae.org
성녀 권진이(權珍伊) 아가타(1819-1840년)
 
성녀 권진이 아가타는 당대에 문장과 명필로 뛰어났던 학자이며 몰락 양반인 권 진사와 한영이 막달레나(Magdalena)의 딸로 태어났다. 권 진사는 중년에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외교인 아내인 한영이에게도 가르쳐 입교시켰으나, 그 당시 조선에는 성직자가 없었으므로 임종 때 가서야 영세를 받고 가족들도 함께 세례를 받게 했던 것이다. 어머니 한영이 막달레나는 과부가 된 후 가진 것이 없어 무척이나 고생을 하였으나, 남편의 간곡한 유언에 따라 수절함과 동시에 정성을 다하여 권 아가타를 양육하였다.
 
그러나 권 아가타는 차차 성숙하면서 미모가 빼어났고 굳은 신앙심을 가진 아름다운 규수로 꼽혔기에 교우들 중에서 많은 칭찬을 받았다. 권 아가타는 13세에 결혼을 하였는데 모든 예절을 갖추어 식은 올렸지만, 시골에 살던 그의 남편이 너무 가난하여 집에 데려갈 수 없었으므로, 남편의 친척인 정하상 바오로(Paulus) 집에 기거하면서 집안 살림을 맡아보게 되었다.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 신부가 조선에 왔을 때 아가타는 그의 처소에 살림꾼으로 들어갔는데, 아가타는 타고난 미모와 민첩한 지혜와 여러 가지 재주를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영리하고 온화한 여자였으므로 신부는 그를 매우 귀여워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아가타가 동정을 지킬 의향이 있음을 말하자, 혼인식만 하고 동거하기 이전임으로 혼인을 무효화시켜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도록 주선해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위험에로 들어가는 첫 걸음이 되어 한 동안은 좋지 않은 소문으로 사람들의 걸림돌이 되었다. 이때 모방 나 신부가 입국하여 모든 소문을 없앴음으로 아가타는 모방 신부의 어버이다운 권고와 충고를 듣고 용기를 내어 새 출발을 하였다. 아가타는 친정어머니에게로 돌아가 신자의 본분을 지키는데 전심하고, 보속과 열렬한 기도로 과거의 자기 행동으로 말미암아 걸려 넘어졌던 이들을 오히려 덕의 길로 권유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기워 갚고 하느님께 그 죄의 용서를 얻기 위하여 아가타는 순교하기를 간절히 원하였다. 어머니와 함께 이러한 속죄와 신심생활을 하던 중 어떤 배교자의 밀고로 포졸들이 아가타를 잡으려고 몰려들었다.
 
1839년 7월 17일 밤 어머니와 이 아가타 그리고 권 아가타가 붙잡혔는데, 관원은 어머니만 옥에 가두고 두 아가타는 사관청에 두고 옥졸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이때 배교자 김여상이 아가타를 꾀면서 그와 함께 도망치자고 하였으나 아가타는 멸시하는 말로 대답할 뿐이었다. 그러나 다시 포교들이 아가타의 젊음과 아름다움에 마음이 움직여 그녀의 탈출을 도와주었다. 그리하여 아가타는 며칠 후 이 아가타와 함께 도망하였다. 결국 이 사건이 탄로되자 포장이 파직되고 군졸 하나는 사형을 당했으며 둘은 귀양을 갔다. 이윽고 권 아가타는 재차 체포되어 온갖 형벌을 받을 수 없이 받았지만 그녀의 신앙은 끝내 흔들리지 않았다.
 
그 후 형조로 옮겨져 3차에 걸쳐 심문과 고문을 당하였지만, 최초의 마음을 꾸준히 지켜 사형선고를 받았다. 사도를 봉행하는 것이 뼈 속에까지 배었고 귀신을 공경하는 것이 본성이 되어 여자 중에 놀랄만한 요술쟁이라는 죄목으로 사형이 언도되었다. 그녀는 1840년 1월 31일 먼저 순교한 어머니의 뒤를 따라 당고개에서 피를 흘리게 되었으니 그녀의 나이는 21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박종원(朴宗源) 아우구스티노(1793-1840년)
 
성 박종원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또는 아우구스티노)는 서울에 살던 중인 계급의 신자 집에서 태어났으며 ‘이선’이라고도 불렀다. 그는 성품이 온화하고 친절하였으며, 학문에도 뛰어나고 박학하였으므로 주변의 칭찬을 들으며 자랐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극빈한 가운데서 살았으나 자신의 처지를 불평 없이 참아 받았고, 어머니께 지극히 효성스러웠으며, 교회의 계명도 충실히 지켜나갔다고 한다. 나이가 들자 그는 순교자의 딸인 고순이 바르바라(Barbara)를 아내로 맞이하여 열심한 신앙생활로 모범 가정을 이루는 한편, 그의 박애심과 교리 지식을 활용하여 사람의 영혼을 구하는 데 전심하였다.
 
그는 가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우리 주 예수께서 나를 사랑하셨으니 불쌍한 죄인인 나도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괴로움을 당하고 죽으셨으니, 나도 그분을 위하여 괴로움을 받고 죽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면서 순교하려는 뜻을 마음에 새겼다. 또 그는 신자들 중에서 무슨 악습이나 부당한 일이나 중대한 과실을 발견하면 상냥한 말로 그 사람을 회개시키려고 노력하였는데. 감동할 만큼 사랑으로 권고했기 때문에 그의 충고에 거역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리고 그의 온화함이 널리 알려져 신자들은 웃으며 “대관절 아우구스티누스가 성을 내는 것을 언제 보게 될까?” 하고 말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덕과 재능을 즉시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에게 알려졌다. 따라서 주교는 그를 서울의 회장직에 임명하였고, 그는 이 위험한 직책을 열성적으로 수행하여 그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1839년에 기해박해가 시작되자 포청에서는 그를 첫 번째 체포 대상자로 지목했음으로 그는 자기 집을 떠나 친구의 집에 피신하였으나, 회장의 직분을 다하려는 마음에서 밤에는 위험을 무릅쓰고 옥에 갇힌 신자들을 찾아보고 그들을 위로하며 용기를 북돋아주기도 하였다. 이렇게 8개월을 지내던 중 마침내 10월 26일에 아내와 함께 체포되었다.
 
형조판서는 부부를 함께 심문하며 여섯 차례나 계속하여 잔인하게 고문하여 그들의 팔 다리를 못 쓰게 만들었다. 10일 후에 형조로 끌려간 그는 다리에 매를 맞아 살점이 떨어져 나갔으나 그의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리하여 그는 마침내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그의 죄목은 “천당과 지옥을 마치 확실한 사실같이 말하고, 제사는 헛된 예식이라 하여 저버렸으며, 천주를 충심으로 믿고 공경하여 차라리 죽을지언정 마음을 돌리지 않은 죄”였다. 그는 1840년 1월 31일, 서울에 있는 당고개에서 참수를 당하여 순교하였고, 이때 그의 나이는 48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녀 손소벽(孫小碧) 막달레나(1801-1840년)
 
성녀 손소벽 막달레나(Magdalena)는 1839년 12월 29일에 순교한 최창흡 베드로(Petrus)의 아내요, 최영이 바르바라(Barbara)의 어머니이며, 조신철 카롤루스(Carolus)의 장모이다. 그녀는 신앙 때문에 먼 곳으로 귀양을 간 어느 열심한 신자의 딸로,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할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그러나 그녀는 오랫동안 신자가 없는 지방에서 살았고 또 견디기 힘든 박해를 당했기 때문에 감히 교우들과 상종하지 못하다가, 늦게야 성교회의 참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그녀는 17세 때에 당시 유명한 교우이던 최창흡 베드로에게 시집을 갔다. 그 후 막달레나는 자녀 11명을 낳았으나, 대부분이 어려서 죽고 맏딸 바르바라와 두 살짜리 작은 딸만 남았다. 손 막달레나 가족은 콜레라가 창궐하던 1821년경에 세례를 받았고, 선교사들이 입국한 후부터는 더욱 신앙생활에 열심하여 성사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던 중 기해년 7월에 박해가 극에 달하여 많은 교우들이 체포될 때, 그녀는 포교의 손을 피하기 위하여 여러 친척들과 같이 숨어 있었으나 결국 남편과 딸과 함께 잡혔다. 그런데 사위인 조 카롤루스가 중국에서 가져온 교회 물건들이 그녀의 집에서 압수되었기 때문에 포장은 7회에 걸쳐 엄한 심문과 형벌을 가하였다. 포장은 태장 260대를 때리고, 여러 번 주리를 틀어보았으나 그녀의 마음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또다시 포장이 배교를 강요하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제 목숨은 제 것이 아니고 그것을 제게 주신 천주의 것이니 그분만이 아무 때라도 그것을 도로 가져가실 수 있습니다. 삶과 죽음을 주재하시는 천주를 위해서 죽어야 한다면 죽겠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
 
이때 막달레나는 두 살짜리 젖먹이 막내딸을 옥에까지 데리고 갔었는데, 그 가엾은 어린 것이 공기도 부족하고 햇볕도 먹을 것도 없는 곳에 있는 것이 어머니 된 마음에 언짢고 또 용기가 꺾일지 몰라 어린 딸을 품에서 떼어내어 읍내에 있는 친척집에 보냈다고 한다. 막달레나는 형조로 이송되어 또다시 심문과 고문을 받았으나, 그 전과 같이 변함없는 용기를 보여 바로 그날 사형이 언도되었다. 이리하여 그녀는 남편이 순교한 지 1개월 정도 후인 1840년 1월 31일에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당하여 순교하였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40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녀 이경이(李瓊伊) 아가타(1813-1840년)
 
성녀 이경이 아가타는 원래 천주교를 믿는 시골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고, 장성한 후에는 궁녀를 감독하던 내시에게 속아서 출가하였지만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로부터 그 결혼은 교회법상 무효라는 선언을 받았다. 그래서 남편과 헤어졌지만 친정어머니가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한영이 막달레나(Magdalena)와 그녀의 딸인 권진이 아가타의 집에 의지해 함께 살았다. 이 아가타는 같은 처지이던 그들과 함께 항상 기도하며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았다.
 
기해박해가 극에 달했던 1839년 7월 17일 어떤 배교자의 밀고로 잡혔는데, 포장은 그들의 성명을 물은 다음 같이 잡힌 한 막달레나만 옥에 가두고 권 아가타와 이 아가타는 이웃집에 남겨두고 지키게 하였다. 오래지 않아 그들을 감옥에 가두지 않은 이유가 밝혀졌는데, 배교자 김여상이 찾아가서 권 아가타를 감언이설로 꾀어 함께 도망치려 했기 때문이었다. 포졸들은 이러한 사실을 막기 위하여 이 이가타를 풀어주었다.
 
한편 조정에서도 이 사건의 자초지종을 알고 난 다음 관원을 파면시키고, 여러 포졸들을 귀양 보내고, 그들을 다시 체포하도록 명령하였다. 이 아가타와 권 아가타는 서울의 어느 초라한 신자 집에 숨어 있었는데, 함께 탈출했던 여종이 먼저 잡혀서 그들이 숨어 있는 곳을 알려주어 다시 붙잡히게 되어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포청으로 압송된 이 아가타는 무서운 형벌을 받았지만 불굴의 인내심으로 형벌을 극복하면서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그리고 형조로 옮겨져서도 새로운 심문과 고문을 당하였지만 순교의 의지를 더욱 굳혔을 따름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사형선고를 받고, 1840년 1월 31일 서울 당고개에서 27세를 일기로 순교하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이문우(李文祐) 요한(1809-1840년)
 
성 이문우 요한(Joannes)은 경기도 이천 동산 밑 마을의 양반 교우 집에 태어났으며 경천이라고도 불렸다. 그러나 5살 때에 고아가 되어 어떤 여신자가 서울로 데려가 양자로 삼았는데, 그는 어려서부터 그 양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비록 그는 독신생활을 소원하였으나 양모의 원을 겸손하게 받아들여 결혼하는데 동의하였고 가장으로서 좋은 모범을 보였다.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이 세상을 일찍 떠나자, 다시는 혼인하지 않고 수덕생활을 실천하는데 전념하며 신자들을 도와주는 데 헌신할 따름이었다.
 
요한은 1년 이상 모방(Manbant, 羅) 신부를 따라 지방으로 다니며 복사의 일을 했고, 1839년의 박해로 옥에 갇힌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모금활동을 하였으며, 또한 주교와 신부들이 숨어 있는 이곳저곳으로 찾아가 형편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여러 차례 알려드렸다. 그리고 선교사들이 순교한 후에는 교우들과 함께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를 지냈다. 그는 이름이 알려져 있어 체포될 위험이 많았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고 자기가 하던 일을 계속하였다.
 
한은 7명의 신자와 더불어 위험을 무릅쓰고 성직자들의 시체를 찾아 노고산에 모신 다음에 시골로 피신하기 위하여 친구 집에서 나오다가 붙잡혔다. 처음에는 그 역시 한동안 당황하였지만,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는 “천주께서 나를 부르신다. 천주께서 특별한 은혜로 나를 부르시니 어찌 그분의 부르시는 소리에 대답을 아니 할 수 있겠는가?” 하며 오라를 받고 포도청으로 끌려갔다. 포장의 온갖 회유와 계략적이 말에 대하여 요한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어떻게 죽음을 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임금님의 명령에 복종하려면 만물의 조물주이신 대군대부를 배반해야 할 것인데, 죽어야 한다 해도 그렇게는 할 수 없습니다. 관장님이 말씀하신 바는 모두 오래 전에 생각한 것이오니, 더 이상 강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얼마 후 술과 음식을 주는 등 또다시 여러 방법으로 설득해 보았으나 소용이 없으므로 도둑들이 갇혀 있는 감방으로 들여보냈다. 요한은 도둑들의 감방에서 지냈는데 그들 중에는 배교자들도 더러 있었다. 그들을 보고 그는 이렇게 기도하였다.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저 불쌍한 사람들이 전에는 어쩌면 나보다 더 착하게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은 저렇게 멸망하지 않았는가! 천주여, 제 마음 약함을 도와주소서.”
 
이윽고 형조로 이송된 요한은 그곳에서도 굳센 마음으로 신앙을 증거했으며, 마침 그곳에 있던 12명의 용감한 형제자매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그리고 그는 양부모와 교우들에게 편지를 썼다. 이 편지에서 그는 옥중 교우들의 신앙생활, 자신의 지난날에 대한 반성과 주님께 대한 사랑, 교우들이 주님 사랑을 저버리지 않도록 권고하였다. 그는 옥에 들어온 지 거의 3개월이 되던 1840년 2월 1일, 다른 두 동료와 함께 서울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31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녀 이인덕(李仁德) 마리아(1818-1840년)
 
성녀 이인덕 마리아(Maria)는 1839년 12월 29일에 순교한 이영덕 막달레나(Magdalena)의 동생으로 할머니 조 바르바라(Barbara)에게서 천주교의 진리를 배워 어머니와 언니와 함께 입교하였다. 이들 세 사람은 그녀의 부친이 너무나 완고하고 또 천주교를 적대시했기 때문에, 부친이 지방으로 여행을 떠난 틈을 이용하여 세례를 받았다. 그 후 이 사실을 안 부친은 더욱 엄해졌고, 더욱이 언니 이 막달레나의 혼인 문제로 심각한 상태에 이르자, 어머니와 언니와 함께 집을 뛰쳐나와 어느 신자 집에 숨어 살게 되었다.
 
처음에 이 소식을 들은 주교는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하였으나, 양반집 주인과 처녀들이 도망을 쳤다가 집으로 다시 들어간다는 것은 거의 확실한 죽음의 길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고는 더 이상 강요하지 않고, 그들에게 약간의 도움을 주고 회장들에게 부탁하여 그들을 보살펴 주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그들은 조금마한 집 한 칸을 얻어 거기서 살게 되었으나 굶주림과 추위로 많은 고생을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마음 놓고 천주교를 신봉하게 되었으므로 곤궁과 고통은 별로 염두에 두지 않고 오로지 수계생활에만 전념하였다. 또 그들은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자 하는 한결같은 마음과 원의로 주교가 체포되면 함께 자수키로 하였으나, 자수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말았다. 기해년 7월 어느 날 포졸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붙잡혔기 때문이다.
 
포청에 잡혀온 이 마리아는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무척 고생하였음은 물론이요, 잔악한 고문을 당하였으나 뜻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형조로 이송된 후 또다시 그녀의 항구심을 꺾어보려고 새로운 고문을 가했으나 모두가 쓸데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교우요, 죽는 날까지 교우로 있겠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형조판서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녀는 언니인 이 막달레나가 사형선고를 받고 순교한 1개월 후인 1월 31일, 서울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아 치명하여 언니와 함께 동정과 순교의 두 가지 영광을 얻었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22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녀 최영이(崔榮伊) 바르바라(1818-1840년)
 
성녀 최영이 바르바라는 순교자인 아버지 최창흡 베드로(Petrus)와 어머니 손소벽 막달레나(Magdalena) 사이에서 태어났다. 원래는 11남매의 맏딸이었으나, 다른 형제는 어려서 모두 죽고 나이 어린 여동생 하나만 남았다고 한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부모의 모범을 본받아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려는 열의로 가득 찼으며, 또 본성이 순량하고 총명하였다. 그녀가 스물 살에 접어들어 부모들이 출가시키려 하였을 때 바르바라는 부모님에게 “이렇게 중요한 일에 있어서 지위가 높다든지 낮다든지 부자라든지 가난하다든지 하는 것은 상관없습니다. 저는 그저 열심하고 글을 많이 배운 교우와 혼인했으면 좋겠어요.” 하고 말하였다고 한다.
 
이리하여 나이와 문벌에 격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부이던 조신철 카롤루스(Carolus)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때 바르바라의 나이는 스무 살이고, 조 카롤루스의 나이는 마흔 네 살이었다. 그러나 바르바라는 열성적인 교우를 남편으로 맞이하게 된 것을 하느님께 감사하였으며, 서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깊이 하고 선행을 하도록 격려하였다. 또한 그들의 결합은 이듬해에 태어난 아들의 출생으로 축복을 받았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더 덕을 닦았으며 신자의 본분을 충실하게 지켜나갔다.
 
1839년 5월 바르바라는 친정 부모인 최 베드로와 손 막달레나와 함께 잡혀 포도대장 앞에 끌려가 7회에 걸쳐 지극히 엄한 신문과 형벌을 받았다. 특히 남편 조 카롤루스가 중국에서 가져온 교회 물건이 집에서 압수되었기 때문에 그녀는 사정없이 매를 맞았다. 최 바르바라는 어머니와 함께 태장 2백 60대를 맞고, 여러 번 주리를 틀렸으나 그녀의 굳건한 마음은 변함이 없었으며, 매를 맞아 살이 헤어져 떨어지고 상처에서는 피가 흘렸지만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더욱 불타올랐다.
 
당시 바르바라가 옥에 들어갈 때 어린 아들이 있었는데, 그 어머니 손 막달레나가 그랬듯이 자기도 어머니 된 마음에서 정에 나약해질까봐 귀여운 아들을 친척 집으로 보내야만 했다. 이런 큰 희생을 치른 뒤 포장이 배교하고 신자들의 이름을 대라고 했을 때 그녀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차라리 죽을지언정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아직 나이가 어려서 아는 사람도 많지 않으니 동범자도 없습니다. 물건으로 말씀드리면 누가 그것을 사라고 하였는지도 모릅니다.” 바르바라는 일곱 번의 문초 중에 두 번의 주리와 곤장 250대를 맞았다.
 
형조로 옮겨진 바르바라는 고문을 또 받았지만 그 전과 같은 용기를 보여 마침내 12월 19일에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녀는 옥중에서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남겼다. “부모와 남편과 베네딕타(성 현경련)가 모두 순교하였으니 내 마음이 어찌 안온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천국을 생각하면 스스로 위로를 받고 이 은혜를 천주께 감사하게 됩니다. 나는 기쁨이 넘쳐흐르고 마음이 흔희작약합니다.” 이리하여 마침내 그녀는 서울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고 치명하였다. 이때가 1840년 2월 1일이며, 그녀의 나이는 22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홍병주(洪秉周) 베드로(1798-1840년)
 
성 홍병주 베드로(Petrus)와 성 홍영주 바오로(Paulus)는 형제지간이고, 매우 유명한 가문의 자손들이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에 순교한 홍낙민 루카(Lucas)는 그들의 조부이고, 1840년 전주에서 참수당한 홍재영 프로타시우스는 그들의 삼촌이다. 그리고 아버지 홍빈영은 1801년의 지긋지긋한 난을 치르고 나서 충청도 내포평야에 있는 서산 고을 여사울이란 곳에 살고 있었다. 이 형제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은 신앙과 견실한 학식뿐이었는데, 이들은 그것을 잘 이용하여 후일 천주교의 명성을 크게 높였다.
 
그들의 학덕과 모범적인 신자생활을 익히 알던 전교 신부들은 그들 형제를 지방의 회장으로 임명하니, 그들은 남을 가르치는 일과 약한 자를 격려하는 일과 병자를 간호하는 일 그리고 자선 사업에서 자신의 직분을 성실히 수행했다. 그러므로 모방(Manbant, 羅) 신부와 샤스탕(Chastan, 鄭) 신부도 교회의 여러 가지 증대한 일을 처리하게 했고, 또 그들은 기대에 맞게 잘 처리하여 교회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839년의 기해박해가 시작되어 성직자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면 목숨을 잃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들 형제는 선교사들을 용감하게 집에 모시고 접대하였으니, 이미 그들은 순교를 각오하고 준비하고 있었음이 분명하였다.
 
한편 조정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김여상은 체포자 명단에 그들의 이름도 올려놓고 있다가 그해 9월에 홍 베드로와 바오로를 붙잡았다. 그러나 형제는 똑같이 순교자의 자손답게 하느님을 증거하고 다른 신자들을 고발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포장은 이들 형제의 배교를 단념하고 형조로 이송하였는데, 당시 형조판서 홍명주는 이들의 친척이었다. 그는 이들 형제 때문에 자신에게 무슨 해가 미칠까 두려워한 나머지 부하들에게 모든 수단을 다 써서 그들을 배교시키되 사형언도는 내리지 말라고 명하였다. 이에 그 부하들은 상관에게 잘 보일 생각으로 그들을 배교시키지 위해 모든 방법을 다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쓸데없는 일이었으니, 이 형제는 끝까지 마음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입장이 되자 마침내 그들에 대한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형인 홍 베드로는 박종원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와 같이 참수되었고, 동생인 홍 바오로는 그 이튿날에 형을 따라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는 그 당시 법에서 형제를 같은 날 죽이지 못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따로따로 형을 집행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형은 42세의 나이로 1840년 1월 31일에 순교하였으며, 동생은 39세의 나이로 그 이튿날에 참수당하여 영광스런 월계관을 함께 받았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홍영주(洪永周) 바오로(1801-1840년)
 
성 홍병주 베드로(Petrus)와 성 홍영주 바오로(Paulus)는 형제지간이고, 매우 유명한 가문의 자손들이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에 순교한 홍낙민 루카(Lucas)는 그들의 조부이고, 1840년 전주에서 참수당한 홍재영 프로타시우스는 그들의 삼촌이다. 그리고 아버지 홍빈영은 1801년의 지긋지긋한 난을 치르고 나서 충청도 내포평야에 있는 서산 고을 여사울이란 곳에 살고 있었다. 이 형제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은 신앙과 견실한 학식뿐이었는데, 이들은 그것을 잘 이용하여 후일 천주교의 명성을 크게 높였다.
 
그들의 학덕과 모범적인 신자생활을 익히 알던 전교 신부들은 그들 형제를 지방의 회장으로 임명하니, 그들은 남을 가르치는 일과 약한 자를 격려하는 일과 병자를 간호하는 일 그리고 자선 사업에서 자신의 직분을 성실히 수행했다. 그러므로 모방(Manbant, 羅) 신부와 샤스탕(Chastan, 鄭) 신부도 교회의 여러 가지 증대한 일을 처리하게 했고, 또 그들은 기대에 맞게 잘 처리하여 교회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839년의 기해박해가 시작되어 성직자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면 목숨을 잃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들 형제는 선교사들을 용감하게 집에 모시고 접대하였으니, 이미 그들은 순교를 각오하고 준비하고 있었음이 분명하였다.
 
한편 조정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김여상은 체포자 명단에 그들의 이름도 올려놓고 있다가 그해 9월에 홍 베드로와 바오로를 붙잡았다. 그러나 형제는 똑같이 순교자의 자손답게 하느님을 증거하고 다른 신자들을 고발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포장은 이들 형제의 배교를 단념하고 형조로 이송하였는데, 당시 형조판서 홍명주는 이들의 친척이었다. 그는 이들 형제 때문에 자신에게 무슨 해가 미칠까 두려워한 나머지 부하들에게 모든 수단을 다 써서 그들을 배교시키되 사형언도는 내리지 말라고 명하였다. 이에 그 부하들은 상관에게 잘 보일 생각으로 그들을 배교시키지 위해 모든 방법을 다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쓸데없는 일이었으니, 이 형제는 끝까지 마음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입장이 되자 마침내 그들에 대한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형인 홍 베드로는 박종원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와 같이 참수되었고, 동생인 홍 바오로는 그 이튿날에 형을 따라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는 그 당시 법에서 형제를 같은 날 죽이지 못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따로따로 형을 집행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형은 42세의 나이로 1840년 1월 31일에 순교하였으며, 동생은 39세의 나이로 그 이튿날에 참수당하여 영광스런 월계관을 함께 받았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이상 가톨릭 성인사전]
 
 
복자 이성례 마리아(1801-1840년)

 

1801년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난 이성례(李聖禮) 마리아는, 내포 지역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의 집안 사람이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남성처럼 씩씩한 정신을 지녔던 그녀는 17세 때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과 혼인하여 홍주 다락골의 새터(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에서 살면서 1821년에 장남 최양업 토마스 신부를 낳았다.

이 마리아는 언제나 집안일을 지혜롭게 꾸려 나갔고, 일가친척들이 불화 없이 지내도록 하는 데 노력하였다. 또 나이가 어린 남편을 공경하고 그의 말에 순종하면서 가정을 화목하게 이끌어 나갔다. 그러다가 얼마 뒤에는 가족과 함께 한양으로 이주하였으며, 박해의 위험이 있자 다시 강원도를 거쳐 경기도 부평, 수리산 뒤뜸이(현, 경기도 안양시 안양 3동)로 이주하였다. 그동안 장남 최양업 토마스는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로 떠났다.

이처럼 고향과 재산을 버리고 낯선 곳으로 자주 이주하는 가운데서도 이 마리아는 모든 어려움과 궁핍을 기쁘게 참아 내었다. 어린 자식들이 굶주림에 지쳐서 칭얼거릴 때면, 요셉과 성모 마리아가 이집트로 피난 가시던 이야기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시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인내심을 갖도록 하였다. 또 수리산에 정착한 뒤로는, 남편을 도와 이 마을을 교우촌으로 일구는 데 노력하였다.

1839년에 기해박해가 일어난 뒤, 남편 최 프란치스코가 한양을 오가면서 순교자들의 시신을 찾아 묻어 주고 교우들을 돌보자, 이 마리아는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자식들을 보살폈다. 그러던 가운데 포졸들이 마침내 수리산 교우촌으로 들이닥쳤다. 이때 그녀는 음식을 준비해서 포졸들을 대접한 다음, 남편 일행의 뒤를 따라 어린 자식들과 함께 한양으로 향하였다.

포도청으로 압송된 이 마리아는 남편이나 다른 자식들과 격리되어, 젖먹이 최 스테파노와 함께 여인들의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문초와 형벌을 받아 팔이 부러지고 살이 너덜너덜하게 찢어졌으나, 용감하게 신앙을 증언하였다.

이 마리아는 이러한 육체적인 고통보다 갓난아기에 대한 모성애 때문에 더 큰 고통을 느껴야만 하였다. 젖은 나오지 않았고, 먹일 것이 없어서 한 살밖에 안 되는 최 스테파노가 굶어 죽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남편이 매를 맞다가 순교하고, 최 스테파노가 더러운 감옥 바닥에서 죽어 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어야만 했던 그녀는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이 마리아는 자신의 본디 마음과는 달리 현세적인 구원을 도모하려는 그릇된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장남 최양업 토마스가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중국에서 유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이내 그녀는 다시 체포되어 형조로 압송되었다.

이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인자하심으로 당신 여종의 나약함을 구원해 주시는 은혜를 베푸셨다. 형조에 이르자, 이 마리아는 용감한 신자들의 권면으로 큰 용기를 얻게 되었다. 이제 그녀는 이전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쳤고, 재판관 앞으로 나가 전에 한 말을 용감하게 취소하였다. 또 모성애를 비롯하여 모든 유혹을 용감히 이겨 냈으며, 막내아들을 하느님께 바친 것을 기뻐하였다. 이 무렵 그녀의 둘째 아들인 최의정 야고보가 한 달 이상 감옥을 오가면서 모친과 신자들의 시중을 들었다.

 

이 마리아는 관례대로 마지막 문초와 형벌 끝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런 다음 감옥으로 찾아온 자식들에게 “형장에는 오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자신의 마음이 약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녀는 자식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이제는 다들 가거라. 절대로 천주와 성모 마리아를 잊지 마라. 서로 화목하게 살며, 어떤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서로 떨어지지 말고, 맏형 토마스가 돌아오기를 기다려라.”

1840년 1월 31일(음력 1839년 12월 27일), 이성례 마리아는 동료 신자 6명과 함께 형장으로 정해진 당고개(현, 서울 용산구 원효로2가)로 끌려 나갔다. 그런 다음 영광스럽게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녀의 나이는 39세였다. 순교 당시까지 그녀는 안온하고 평화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이성례 마리아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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