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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 명동 성당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한국 천주교회의 심장부
지번주소 서울시 중구 명동 2가 1-1 
도로주소 서울시 중구 명동길 74
전화번호 (02)774-1784
팩스번호 (02)753-1784
홈페이지 http://www.mdsd.or.kr
문화정보 사적 제258호
천주교 신앙의 수용과 명례방 공동체
 
1. 유학자들의 천주교 신앙 수용
 
1603년 이광정(李光庭)이 북경으로부터 마테오 리치가 제작한 세계 지도를 가져온 이래 조선에 전래되기 시작한 한문서학서(漢文西學書)들은 약 200여 년 동안 조선의 유학자들에 의해 연구되었다. 그리고 천진암, 주어사를 중심으로 강학회를 개최하면서 실학 운동을 전개하던 권철신(權哲身)을 중심으로 한 일군의 남인 실학자들이 1777년 혹은 1779년에 이르러 광암 이벽(曠菴 李檗)의 설득에 의해 한문서학서 안에 담겨있던 천주교 사상을 받아들이기로 결정을 내린다.
 
이 때 이벽이 참석했던 강학 모임은 녹암 권철신의 주도하에 이루어지고 있었고, 참석자들 역시 그의 문하생들이었다. 그러므로 이들 역시 다른 실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한문서학서 안에 포함된 천주교 교리를 거부할 것인지 아니면 보유론(補儒論)적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갈등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뒤늦게 이 강학회에 참석한 이벽으로부터 천주교 교리에 담긴 깊은 가르침에 대해 설명을 들은 후 이를 보유론적인 가르침으로 받아들일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구체적으로 천주교의 가르침을 실천해 보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매일 아침저녁으로 엎드려 기도를 드렸으며, 7일 중 하루는 하느님 공경에 온전히 바쳐야 한다는 것을 읽은 후로 매월 7일, 14일, 21일, 28일에는 다른 일은 모두 쉬고 묵상에 전념하였으며, 또 그 날에는 육식을 피하였다.
 
2. 이승훈의 북경행과 세례
 
하지만 이들이 주어사, 천진암 강학회를 통해서 천주교 교리에 대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정을 내리기는 하였지만, 이벽 이외의 사람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이 가르침을 지속적으로 유지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이벽마저도 자신들의 학과 안에서 천주교 신앙을 적극적으로 탐구하고 받아들이도록 설득할 수는 있었지만, 그 동안 북경에서 전래된 서적만을 가지고서는 천주교를 완전하게 실천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러한 때 그의 친구이자 이가환(李家煥)의 생질(甥姪)이며 정약용(丁若鏞)의 매서인 이승훈(李承薰)이 1783년 동지사행의 서장관으로 임명된 그의 부친을 따라 북경에 가게 되었다.
 
이승훈은 천진암, 주어사 강학회에 참석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서한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천주교 교리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수학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이 북경을 방문하게 되면 서양인 선교사를 통해 서양의 발달된 수학 이론에 대해 배우고 그에 대한 책도 얻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승훈이 북경에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벽은 즉시 그를 찾아가서 천주교 가르침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 "자네가 북경에 가는 것은 참된 교리를 알라고 하늘이 우리에게 주시는 훌륭한 기횔세. 참 성인들의 교리와 만물의 창조주이신 천주교를 공경하는 참다운 방식은 서양인들에게서 가장 높은 지경에 이르렀네. 그 도리가 아니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그것 없이는 자기 마음과 자기 성격을 바로 잡지 못하네. 그것이 아니면 임금들과 백성들의 서로 다른 본분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것이 없으면 생활의 기초가 되는 규칙도 없네. 그것이 아니면 천지창조며 남북극의 원리며 천체의 규칙적인 운행을 우리는 알 수가 없네. 그리고 천사와 악신의 구별이며, 이 세상의 시작과 종말이며, 영혼과 육신의 결합이며, 죄를 사하기 위한 천주성자의 강생이며, 선한 사람은 천당에서 상을 받고 악한 사람은 지옥에서 벌을 받는 것 등, 이 모든 것도 우리는 알 수가 없네."
 
이벽의 말을 들은 이승훈은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며 감탄하여 이벽이 가지고 있던 책들을 대강 읽어보고 나서 자기가 할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이벽은 신앙을 실천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자세히 알아오도록 다음과 같이 부탁하였다 : "자네가 북경에 가게 된 것은 천주께서 우리나라를 불쌍히 여기사 구원코자 하시는 표적일세. 북경에 가거든 즉시 천주당을 찾아가서 서양인 학자들과 상의하여 모든 것을 물어보고, 그들과 교리를 깊이 파고들어, 그 종교의 모든 예배 행위를 자세히 알아보고, 필요한 서적들을 가져오게. 삶과 죽음의 큰 문제와 영원의 큰 문제가 자네 손에 있으니, 가서 무엇보다도 경솔하게 행동하지 말게."
 
이러한 이벽의 부탁을 받고 북경에 들어간 이승훈은 북당을 찾아가 프랑스 선교사들로부터 교리를 배운 다음 입교할 결심을 하고 귀국 직전 부친의 동의를 얻어 영세를 청하였다. 그리하여 그에게 교리를 가르친 그랑몽(Jean Joseph de Grammont, 1736-1812) 신부로부터 첩을 두지 않겠다는 것과 매년 선교사들과 연락을 취하겠다는 약속을 한 다음 조선 천주교회의 주춧돌이 되라는 뜻에서 베드로란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3. 이벽의 선교 노력과 수표교 선교공동체

북당에서 세례를 받은 이승훈은 1784년 3월 말경 선교사로부터 얻은 많은 책과 십자고상과 상본과 물건을 가지고 서울로 돌아와서 이 서적들을 이벽에게 보냈다. 이벽은 친구가 보내준 많은 교리서를 받자마자 교리를 연구하기 위하여 외딴집을 세내어 교리서 탐독과 조용한 묵상에 전념하였다. 이렇게 이승훈이 귀국하면서 가지고 온 교리서 등을 연구한 뒤, 1784년 9월 이벽이 세례자 요한이란 본명으로 세례를 받고 나서 본격적으로 선교 활동을 벌이게 되는데, 갑진년(甲辰年, 1784년) 겨울부터 이벽의 집이 있던 수표교는 천주교에 입교한 초기의 중요한 신도들의 세례 장소로 활용되었다.
 
이벽은 효과적인 전교 방법을 생각하던 중 학식과 평판으로 당대 학자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던 몇몇 사람들을 입교시켜 그 지주로 삼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이가환(李家煥), 양근(陽根, 경기도 양평군)의 권일신(權日身) 등 양반 학자들을 방문하여 그들을 설복시켰으며, 1784년 11월 어느 날 이승훈은 이벽의 집에서 정약전(丁若銓), 정약용(丁若鏞) 형제와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등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다음으로 이벽은 천주교 신앙이 모든 백성들에게 빠짐없이 전파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한문서학서를 한글로 번역할 수 있는 중인(中人) 역관 계급을 중심으로 선교를 시도하였다. 그리하여 최창현(崔昌顯), 김범우(金範禹), 최인길(崔仁吉)을 위시하여 지황(池璜), 김종교(金宗敎) 등이 입교하였는데, 이들에 의해 전래된 한문 교리서들이 한글로 번역됨으로써 천주교의 가르침이 일반 민중들과 여인들에게까지 분명하게 전해질 수 있었다.
 
권일신 역시 자기 자신의 입교로 만족하지 않고, 곧 그의 친척과 친지들에게도 선교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충청도 태생인 이존창(李存昌)은 권일신과 역관 김범우로부터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듣고 즉시 개종하였다. 개종한 그는 고향으로 내려가서 그의 가족과 친지들에게 선교함으로써 이 지방 교회의 초석이 되었다. 같은 무렵 전주 출신의 유항검(柳恒儉)도 천주교에 대해 듣고 권씨 집을 찾아 상경하였다. 그리고 권일신의 권고와 가르침을 받고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다음 고향으로 돌아가 많은 사람을 입교시킴으로써 호남지방 교회에 초석을 놓았다. 이렇게 서울에서 시작하여 마재, 여주 등 경기도 일대에 전파되었던 천주교는 전라도 지방에까지 전파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이승훈의 진술에 의하면, 1784년부터 1785년 1년 동안에 신자 수가 1천여 명에 달하였고 교세의 범위도 두루 천 리에 이르렀다.
 
4. 명례방 공동체와 한국 천주교회의 탄생
 
이처럼 신도들이 늘어나게 되자 자연히 영세식 외에 정기적인 신앙 집회가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한국 교회 최초로 정기적인 신앙 집회가 열리던 곳은 명례방(明禮坊) 장악원(掌樂院) 앞(중구 명동 1가)에 있던 김범우(도마)의 집이다.
 
중인 김범우는 원래 이벽과 면식이 있어 그의 집에 왕래하다가 그의 권면에 의해 천주교 서적을 검토한 끝에 천주교 신앙을 수용하였다. 그는 세례를 받자 자신의 집을 신앙 집회의 장소로 제공하여 1784년 겨울부터 정기적인 신앙 집회인 "취회(聚會)"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명례방에서 정기적인 집회를 갖게 되면서 양근, 마재, 내포, 호남 등지의 신앙 공동체들과 잦은 교류를 갖게 되었고, 각 공동체가 올바로 성장할 수 있도록 의견을 교환하였다. 이 명례방 공동체는 이벽의 주도하에 한국 최초의 정기적인 신앙 집회를 가지게 되었고, 이후 이러한 신앙 집회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명례방 공동체가 탄생함으로써 명실공히 한국 천주교회가 공식적으로 시작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명례방 공동체의 예배 모습을, "벽위편(闢衛編)"에서 묘사하고 있는 설명을 통해 살펴보면, 대체로 이승훈이 북경에서 보고 온 서양 선교사들의 미사 지내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푸른 두건으로 머리를 덮어 어깨까지 드리우고 예배를 이끌던 이벽의 복장은 제의를 입은 서양 선교사들의 모습일 것이고, 신도들이 모두 얼굴에 분을 바르고 푸른 수건을 쓴 것은 미사보와 서양 선교사들의 얼굴이 흰 것을 보고 분장을 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또 예수의 화상과 몇 가지 물건들은 바로 전례 장소를 장식하기 위해 성당에 드리워진 여러 성화상과 성물을 말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런데 여기서 만일 이벽이 거행한 예배가 '미사'였다고 한다면, 1786년 봄에 이승훈이 다시 신도들을 규합하여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를 시행하기 이전, 다시 말해서 조선 천주교회 창립 초기부터 이승훈과 이벽을 주축으로 한 '가성직제도'가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이영춘 신부, 순교자 현양 제50호(2000년 4월 12일),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 발행, pp.4-6]
 
 
한국의 첫 순교자 김범우 토마스
 
김범우(1751-1787년)는 경주 김씨 충의공파 62세손으로 역관 가문의 출신이다. 그는 조선조 영조 27년(1751년) 음력 4월 23일 서울 명례방에서 부사맹 벼슬을 하던 김의서와 남양 홍씨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정지’였는데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공부를 잘하여 중국어에 능통하였다.
 
김범우는 스물두 살 때인 영조 49년(1773년)에 국가의 통역관 시험인 역과 증광시에 2등급으로 합격하여 역관이 되었고, 학문을 좋아하여 당대를 풍미하던 학자들, 그 가운데서도 서학이란 신학문을 하던 양반들과 친교를 맺었다. 그는 양반 선비들 가운데서 특별히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추종을 받고 있던 이벽의 인품에 끌려 스승으로 모시며 따랐다. 김범우는 이렇게 한국교회 창설 공로자인 이벽을 따르면서 그에게 천주교 교리를 듣고 심취하여 신봉하게 되었다.
 
정조 8년(1784년)에 김범우는 초기 한국교회의 입교 절차가 행해졌던 이벽의 집에서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세례명을 토마스로 하였다. 천주교 신자가 된 김범우 토마스는 당시 남인계 실학자인 정약전/약용 형제와 권일신 부자 등과 함께 이벽의 집에 드나들며 교리를 배우고 교회 예절에도 참례하였다. 그러다가 입교자가 늘어나면서 여러 가지 사정으로 집에서 모임을 갖기가 어려워져 안타까워하는 이벽의 근심을 알아차리고 김범우 토마스는 곧 자신의 집을 임시 성당으로 내놓고 모임 장소로 사용해 줄 것을 청하였다. 이벽은 이 청을 받아들여 정기 집회의 장소를 수표동 자신의 집에서 명례방 김범우의 집으로 옮겼다. 이렇게 1784년부터 김범우의 집에서 갖게 된 정기 집회가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 기점이 되었다. 이 모임을 기점으로 보고 1984년에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했던 것이다.
 
이들은 주일이 7일째에 온다는 것을 생각하여 1784년 늦가을부터 매월 1일, 7일, 14일, 21일, 28일에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교리를 공부하며 첨례와 기도를 바쳤다. 수표동 이벽의 집이, 이벽과 정약전/약용 형제, 권일신, 최창현, 김범우 등이 이승훈으로부터 세례성사를 받았던 곳으로 한국교회의 최초의 천주교 입교 절차가 행해진 장소라고 한다면, 명례방 김범우의 집은 초기 신자들이 모여 정기적인 신앙 집회를 가졌던 곳이라는 점에서 천주교의 창립과 확산, 김범우의 역할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천주교에 대한 학문적 연구와 수용은 양반 선비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천주교의 학문적 연구와 수용 과정에 중인들의 참여는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신분제도 아래의 조선 사회에서 양반가에 서민이 드나드는 것은 제한되어 있었고, 서로 쉽게 통교하는 처지도 못되었다. 이러한 제약은 양반들에 의해 받아들여진 천주교의 포교와 확장에 한계가 되었다. 그런데 김범우의 집은 비교적 통교와 출입이 자유로운 중인의 집이었기에 천주교 확장과 서민에 대한 선교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실제로 김범우의 집에는 "천주실의", "칠극" 등 천주교 서적이 비치되어 있었고, 서학에 관심이 있는 많은 사람이 신분을 초월하여 그의 집을 방문하였다. 초기 한국교회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순교자 최인길, 최필공, 김종교 등 중인 출신의 인재들이 모두 김범우를 따라서 입교한 사람들이었다.
 
홍익만, 변덕중, 윤지충 등의 양반들이 중인인 김범우의 집에 드나들며 천주교 서적을 접하고 입교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를 따라 입교한 역관 출신 중인과 특히 그 뒤에 의관 출신 중인들이 활동과 출입이 자유로웠던 이점을 활용해 남긴 복음 선교의 업적과 열의가 모두 김범우에게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의 가족도 신앙생활로 이끌었는데 그의 동생인 김이우/현우가 모두 1801년 신유박해 때 장렬히 순교하였다. 그리고 명례방의 그의 집이 중국 사신들이 거처하던 장례원에 가까이 있었고, 또 그 자신이 역관이었기 때문에 당시 중국을 통해 들어오던 천주교 관계 서적을 입수하고 중국 사신들한테서 중국 천주교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역할도 담당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1785년 김범우 토마스의 집에서 정기집회를 시작한 지 몇 달 만에 형조의 순라군에게 발각되었고 집주인인 김범우가 투옥되었다. 이 사건에 대해 이만채가 천주교 박해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쓴 "벽위편"에 이렇게 적혀있다.
 
"을사년(1785년) 봄에 이승훈, 정약전, 정약용 등이 장례원 앞 중인 김범우 집에서 설법을 하였다. 거기에는 이벽이라는 자가 있었다(이는 지퇴당 이정형의 후손이요 병사 이격의 동생이며, 동시에 병사 이석의 형이다). 이벽은 푸른 수건으로 머리를 덮어쓰고 바람벽을 의지하여 앉아있었다. 이승훈과 정약전/약종/약용 삼 형제와 권일신 부자가 모두 스스로 이벽의 제자라고 칭하며 책을 들고 둘러앉아 있었다. 이벽이 설법하고 가르치며 꾸짖곤 하는데, 우리 유교에서 사제지간에 갖추는 예의보다 훨씬 더 엄하였다.
 
날짜를 정하여 함께 모이기를 이미 수개월 동안이나 하였으며 양반, 중인 등 여러 선비들이 수십 명씩이나 되었다. 그런데 추조금리가 그 모임을 술 마시고 도박하는 것으로 의심하고 들어가보니 거의 다 얼굴에 분을 바르고 푸른 수건을 쓰고 손가락으로 이상한 손놀림을 하므로 그 예수 그림과 책과 물건들을 압수하여 추조에 가져왔다. 추조판서 김화진은 양반집 자제들이 잘못된 길에 빠지게 된 것을 애석하게 여기고 잘 타일러서 내보내고 다만 김범우를 가두었다."
 
형조판서 김화진은 김범우가 양반들과 함께 교회 예절을 거행했는데 양반들은 돌려보내고 김범우만 옥에 가두고 배교를 재촉하였다. 그러나 배교를 거부하자 여러 가지 고문이 가해졌다. 이러한 소식을 듣고 앞서 풀려났던 권일신 등이 다른 여러 신자들과 함께 “우리도 김범우와 같은 종교를 신봉하니 같이 처벌해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김화진은 그들을 다시 돌려보내고 김범우에게만 계속해서 배교할 것을 강요하며 형벌을 가했다. 이 사건을 이른바 ‘을사 추조 적발 사건’이라 한다. 그리고 이것이 한국 천주교회가 받은 최초의 박해이다.
 
중인이었기에 혼자만 문초를 받게 된 김범우는 형조판서 앞에 불려가서 배교를 강요당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배교를 끈기있게 거부했다. 여러 가지 고문이 계속되었지만 그는 잠시도 굽히지 않았다. 김범우 토마스의 행적과 옥중 형벌의 내용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형조에서는 여러 가지 형벌을 가하며 배교를 재촉했으나 그의 불굴의 의지와 굳은 신앙을 꺾을 수 없자 매질하여 귀양보냈다. 그는 귀양지에서도 큰소리로 기도문을 외우고, 자기 말을 듣고자 하는 모든 사람을 가르쳤다. 그의 강인한 용기와 인내심은 조금도 변함없었다. 그러나 모진 형벌에서 얻은 깊은 상처가 더욱 악화되어 마침내 귀양지에서 이 세상을 떠났다.
 
최근 김범우 토마스의 귀양지가 경남 밀양의 단장임이 밝혀졌다. 우리 나라에서 공식적으로 조정으로부터 사형선고를 받고 형 집행을 당한 최초의 순교자는 진산사건으로 순교한 윤지충이다. 그러나 비록 관아에서 사형선고를 받지는 않았으나 분명히 그보다 앞서 박해와 형벌 속에서 신앙을 증거했으며, 그 형벌의 상처로 죽은 김범우는 한국의 첫 순교자이다. 그리고 서울의 명동성당은 한국교회 창설의 기점이 된 집회가 이루어졌던 명례방 김범우의 집을 역사적으로 기념하는 성당이기도 하다. [출처 : 김길수 요한, 대구 효성 가톨릭 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경향잡지 2000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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