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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 새남터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최초의 선교사가 목을 떨군 곳
지번주소 서울시 용산구 이촌 2동 199-1 
도로주소 서울시 용산구 이촌로 80-8
전화번호 (02)716-1791
팩스번호 (02)716-1794
홈페이지 http://www.saenamteo.or.kr
전자메일 saenamteo@saenamteo.or.kr
새남터는 한국교회 역사상 순교한 성직자 14분 중 11분이 순교하였으며 이 11분 중 8분과 교회의 지도급 평신자 3분이 성인품에 오른 한국의 대표 순교성지이다. 조선인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 최초로 한국에 들어왔던 신부인 중국인 주문모 신부, 최초로 한국에 들어왔던 주교 앵베르 성인, ‘기해일기’ 의 현석문 가롤로 성인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9분의 성인유해가 새남터에 모셔져 있다.
 
‘새남터’의 말뜻은 '새나무터'의 준말이다. '새나무'는 '풀과 나무'의 뜻이며, ‘새’라는 말은 억새의 의미이다. 다시, ‘새남터’에 대해서 설명하려면 조선조 초기로 거슬러 올라 가야한다, 이곳을 노들이라고 했는데, 지금의 노량진과 배로 왕래했던 나루터가 있는 곳이라는 의미이며, 새남터를 한자로 음역(音譯) 해서 사남기(沙南基)라고도 불렀는데,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말 그대로 숲이 울창한 곳이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이곳에 군사 훈련장으로 사용되다 국가에 대하여 중한 죄를 지은 사람(國事犯)을 처형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대표적으로 세조 2년, 1456년 단종을 다시 임금으로 올리려다 처형당한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이 이곳에서 피를 흘렸다.
 
새남터와 연결된 현 노량진에 있는 ‘아차고개’에 대한 일화가 있다, 사육신묘 마루터기에 있는 고개 이름인데, 이 고개는 조선 세조 때 영등포 이남에 살던 어떤 선비가 육신(六臣)을 처형함이 부당하다고 간청하기 위하여 도성을 향하여 말을 달려오다가 이 고개에 이르렀을 때 사육신이 이미 새남터에서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차! 늦었구나.' 하고 한탄하던 고개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이후 1801년부터 1866년까지 한국교회 4대 박해 기간 중 천주교 신자, 특히 사제들의 숭고한 피가 이곳에 뿌려져 너무나도 찬란한 신앙의 꽃을 한반도에 피우게 만들었다.
 
우리의 신앙 선조들은 목자 없이 스스로 신앙을 받아들여 교회를 세웠다. 이에 북경교구는 조선의 교우들을 위해 1795년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파견하게 되었다. 주문모 신부는 한양에 들어와 교세를 키웠으며 6년 만에 신자수가 6,000여명이나 늘어났다. 그러나 배교자의 밀고로 쫓기는 몸이 되었고, 당신을 위해 여러 사람이 희생되자 스스로 의금부를 찾았으며 결국 새남터에서 칼을 받고 장렬하게 순교하셨던 것이다. 이것이 1801년 신유박해 때의 일로 새남터에 처음으로 순교의 피가 흘렀다.
 
그로부터 30년이 흐른 1831년에는 북경 교구로부터 독립하여 조선 교구가 설립되었다. 이를 계기로 1836년과 1837년 사이에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아시아 지역에 대한 선교를 위하여 설립)의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앵베르 주교가 들어와 1년 동안 9,000여명의 신자를 늘리는 등 교세를 키웠으며,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 소년을 마카오에 유학을 보내 한국 천주교의 뿌리를 키웠고, 신자들에게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치는 등 많을 일을 하였다.
 
그러나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면서 세 명의 외국인 사제는 새남터에서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된다. 헌종 5년의 일로 많은 신자들이 신앙을 지키려고 목숨을 잃었는데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간의 시벽파 싸움에 천주교 신자들이 희생 제물이 되었던 것이다.
 
1836년 모방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고 두 번이나 중국으로 넘나들며, 수업을 하고 상해의 금가항 신학교에서 한국 사람으로서는 최초로 신부가 되신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이 1846년 이곳 새남터에서 참수되었는데 기해박해 때 순교한 세 분의 프랑스 신부에 대한 항의로 프랑스 군함 3대가 충청도 외면도에 들어와 조선 조정에 항의문으로 압박을 가하자 9월 16일 김대건 신부를 서둘러 처형하였다. 이것이 병오박해로 헌종 12년이었으며 3일 후 현석문도 처형하였다.
 
철종이 즉위하자 천주교를 박해하는 일이 없었다. 도리어 북돋아 주어 교세가 크게 확장 발전하게 되었다. 새 영세자도 많이 늘어났고, 천주교를 옹호하던 순원왕후가 철종의 정사를 뒤에서 맡아보게 되어 청나라로부터 많은 성직자들이 들어왔다. 이 결과 교우가 1850년에 일만 일천여명, 1855년 일만 사천여명을 헤아리게 되었고, 신학교까지 설립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20년 후에는 대원군이 수만 명의 천주교도를 죽이는 대학살의 비극이 일어났다. 러시아가 조정에 문호 개방을 요구하자,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 프랑스, 영국의 동맹을 결성하여 러시아의 남하를 물리치자고 한 건의가 시기를 놓치고 오해를 발생시켜 1866년 고종 3년에 시작되어 1873년까지 천주교도에 대한 대학살이 있었던 것이다.
 
새남터에서는 베르뇌 주교성인과 브르트니에르, 볼리외, 도리 등 사제성인, 푸르티에 및 프티니콜라 신부, 그리고 성 정의배 마르코, 성 우세영 알렉시오가 순교의 피를 흘렸다.
 
조선시대에 새남터의 저녁풍경은 돌아가신 영혼들의 피 때문인지 ‘용산 8경’의 하나로 손꼽힐 정도로 아름다웠다고 한다. 다른 성지와 다른 점이 새남터는 사제들의 순교지라는 것이며, 한국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성인이 군문효수형을 당한 바로 그 장소라는 의미에서 한국 천주교에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곳이다.
 
망나니들의 칼춤과 북소리에 슬픔을 감추지 못했던 하늘이 천둥소리로 대답했던 곳, 새남터의 북소리가 그칠 줄을 몰랐기 때문에, 오늘날의 한국 천주교회가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있다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
 
지금은 아파트가 밀집해 있고 열차 다니는 소리로 요란하지만 묘하게도 새남터성지 안에만 들어서면 이 모든 소리가 고요로 가라앉는 것 같다고들 한다. 한강 둔치와 이어져 있어 차분한 마음으로 산책하면서 바라보는 강도 그럴싸하고 이곳에서 보는 황혼이 왜 유독 아름다운지 깨닫게 해 주는 곳이다.
 
새남터 형장의 본래 위치는 서부 이촌동 아파트 인근으로,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1890년부터 이곳 순교터를 매입하고자 하였으나 경부선 공사로 인해 실패하였고, 1956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본래의 순교터보다 북쪽으로 500보 남짓 되는 곳(현 용산구 이촌 2동)에 현양비를 세울 수 있었다.
 
새남터 성지는 1950년에 순교기념지로 지정되었고, 1956년에 ‘가톨릭 순교성지’ 라는 기념탑이 세워졌다,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에서 관리, 운영하고 있으며, ‘복자학교’라는 교육 시설을 운영하다가 1981년에 한강본당으로부터 분가하여 본당으로 설정되었다.
 
국철을 타고 한강철교를 건너다보면 대교 북단 서쪽으로 한국식의 뾰족한 종탑이 있는 3 층 기와건물을 볼 수 있다. 현재 명지대 건축학 교수로 계신 박태연씨가 설계한 이 건물은 한국 순교복자 성직수도회에서 수도회의 자산을 정리해 1987년에 완공한 순교기념성전이다.
 
현재 새남터에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성 앵베르 주교, 성 모방 신부, 성 샤스탕 신부, 성 베르뇌 주교, 성 브르트니에르 신부, 성 볼리외 신부, 성 도리 신부, 성 우세영 알렉시오 등 9분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출처 : 새남터 성지 홈페이지]
 
 
새남터 성지 : 순교 기념 성당
 
신유박해(1801년) 200주년이 되는 2001년 1월, 영하 15도의 매서운 날씨를 안고 새남터 성당을 찾았습니다. 온 누리가 하얗게 눈으로 덮여 아름답기는 하였지만 눈물이 나도록 차가운 날씨여서 아름답기보다는 살을 에는 추위로 마음이 아프기까지 하였습니다. 순교 성지를 찾으려면 이런 날에 와야 한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잘 왔다는 판단이 서니까 갑자기 추위가 두렵지 않았습니다. 1. 범 앵베르 라우렌시오 성인님 2. 장 베르뇌 시메온 성인님 3.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 신부님 4. 나 모방 베드로 성인님 5. 정 샤스탕 야고보 성인님 6. 백 브르트니에르 유스토 성인님 7. 서 볼리외 루도비코 성인님 8. 김 도리 헨리코 성인님 9. 현석문 가롤로 성인님 10. 정의배 마르코 성인님 11. 우세영 알렉시오 성인님 12. 주문모 야고보 순교 신부님 13. 신 푸르티에 안토니오 순교자님 14. 박 프티니콜라 미카엘 알렉산델 순교자님.
 
모두 열 한 분의 성인과 시성되지 않으신 세 분이 이곳에서 순교하셨으니, 추위 따위는 아랑곳 할 여지도 없이 마음이 숙연해졌습니다. 몇 차례 이곳을 다녀갔고 한 번은 하루 종일 이곳의 신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에서 봉사한 적도 있었기에 친근감마저 드는 곳이었으나, 나도 이 여러 분 순교자들처럼 그렇게 단호한 신앙심을 가지고 있을까 하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앞섰습니다. 기념물 하나하나가 실감 있게 다가오며 호통을 쳤고, 성인 순교자님께서 따뜻하게 맞으며 잘 왔다고 너그러이 저를 받아주시는 듯한데도 제 마음은 쥐구멍만을 찾고 있었습니다.
 
한양성 밖 남쪽 한강변에 있는 새남터는 조선 초기부터 군사들의 연무장으로 사용되었으며 국사범을 비롯한 중죄인의 처형장이었습니다. 새남터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하기 시작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중국인 주문모 신부님이 처형되시면서, 그 이후 박해가 있을 때마다 주교님과 신부님과 평신도 지도자들이 순교하였습니다. 한국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새남터에서 순교하였고 기해박해 때 앵베르 범 주교님과 모방 나 신부님, 샤스탕 정 신부님 등 세 분 성직자가 순교하였습니다.
 
병오박해 때는 김대건 신주님과 현석문 회장이 순교했으며, 병인박해 때는 베르뇌 주교님과 브르트니에르 신부님, 볼리외 신부님, 도리 신부님, 푸르티에 신부님, 프티니콜라 신부님 등 다섯 분의 신부님과 평신도인 정의배 마르코와 우세영 알렉시오 등 두 분의 평신도가 순교하였습니다. 새남터 성당은 한국순교복자수도회에서 용산구 서부 이촌동 199번지의 땅을 매입하고 서울대교구에서 1950년 순교기념지로 지정하였습니다. 공사 착공 4년 만에 완공되어 지하 1층, 지상 3층의 주 건물과 종탑은 목조 3층탑 형식으로 1987년 9월 12일 축성식을 가져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새남터 성당은 한국식으로 지어졌으며, 건축 재료 역시 국내에서 나는 재료를 사용하였습니다. 먼저 십자고상을 받치고 있는 문양은 우리나라를 상징하고, 그 아래 사방팔방으로 뻗은 선은 온 세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을 상징했으며, 십자가 아래 받치고 있는 백합꽃은 순결을 뜻합니다. 돔 아래에 있는 비둘기와 어린 양은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지구의 모양을 하고 있는 감실은 통돌(한몸돌)에다 무궁화 꽃을 부조로 조각했고, 감실문은 사람의 가장 중요한 심장을 하트 모양으로 만들었습니다. 제대는 경전을 읽을 때 쓰는 경상을 역시 통돌(한몸돌)에 조각했으며, 오른쪽의 성수대는 우리나라 고유의 도자기 모양을 본뜬 것이고, 왼쪽의 강론대는 장구모양으로 장구소리처럼 복음이 널리 울려 퍼져나가라는 것을 상징한 것입니다.
 
그리고 정면의 부조는 103위 성인 성녀상입니다. 제대를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왕 중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우리나라의 임금님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제대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아기도령의 모습인 예수님을 안고 계신 성모 마리아님도 우리 왕후의 옷을 입으셨고, 성모님을 중심으로 새남터에서 순교하신 주교님과 신부님과 평신도와 갈매못에서 순교하신 세 분 프랑스 신부님들이 계십니다.
 
그리고 그림 아래의 출렁이는 바다는 이 세상의 세파를 표현했고 성전 양쪽 벽면에 있는 14처의 예수님과 로마병사들도 우리식으로 표현했습니다. 종탑은 목조 3층 탑 형식으로 종은 파리외방전교회의 순교자 후손들이 보내 주신 헌금으로 마련한 것입니다.
 
지금은 서울에서도 부유촌 가운데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이 많고,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사목이 어려운 곳이어서 이렇게 추운 날이면 신자들을 더 걱정할 사목자들을 생각하면서 순교자님께 전구기도를 드리며 떠났습니다. [출처 : 강수길 그레고리오, 순교자 현양, 제60호, 2001년 2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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