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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 해미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생매장 구덩이에 부는 바람
지번주소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274-10 
도로주소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성지1로 13
전화번호 (041)688-3183
팩스번호 (041)688-9039
홈페이지 http://www.haemi.or.kr
전자메일 mbh7799@hanmail.net
복자 인언민 마르티노(1737-1800년)
 
1737년 충청도 덕산 주래(현, 충남 예산군 삽교읍 용동리)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인언민(印彦敏) 마르티노는 온순하면서도 꿋꿋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또 어려서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상당한 학식도 쌓게 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평소에 알고 지내던 황사영 알렉시오를 만나면서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되었고, 이내 그에게서 교리를 배운 뒤, 한양으로 올라가 주문모 야고보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때 인 마르티노는 장남 요셉을 주 신부 곁에 남겨 두었으며, 얼마 뒤에는 차남을 유명한 교우의 딸과 혼인시켰다. 그러고 나서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집과 재산을 버리고 공주로 이주하였다. 이때 친척들이 그의 행동을 이상하게 생각하자, 그는 이주하는 이유를 솔직하게 고백하면서 천주교 교리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친척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1797년에 시작된 정사박해가 한창 진행되던 어느 날, 인 마르티노는 공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밝히고, 천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기를 원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고백한 뒤 옥으로 끌려갔다. 그런 다음 청주로 이송되어 심한 고문을 당하였으며, 감사의 명에 따라 다시 그의 고향을 관할하던 해미 관장 앞으로 이송되었다.

인 마르티노는 청주에서 받은 형벌 때문에 걸을 수조차 없었다. 그래서 청주에서 해미까지 가는 동안, 조정 관리들이 이동할 때 사용하는 말을 타고 가야만 하였다.

해미에 있는 감옥에서 인 마르티노는 젊은 이보현 프란치스코를 동료로 만나게 되었다. 이후 그들은 언제나 서로를 권면하면서, 갖은 형벌과 문초와 유혹 아래서도 변함없이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러자 관장은 어쩔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인언민도 이보현과 같이 때려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형리들은 관례에 따라 사형수에게 주는 마지막 음식을 인 마르티노에게 가져다 준 뒤, 그를 옥에서 끌어내 매질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그들 가운데 하나가 엄청나게 큰 돌을 들어 그의 가슴을 여러 번 내리쳤다. 이내 그의 턱이 떨어져 나가고 가슴뼈는 부서지고 말았다.

결국 인언민 마르티노는 이러한 형벌로 죽음에 이르게 되었으니, 그때가 1800년 1월 9일(음력 1799년 12월 15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63세였다. 마지막으로 매질을 당하는 동안에도 그는 여러 차례 다음과 같이 되뇌었다고 한다.

“그렇구 말구. 기쁜 마음으로 내 목숨을 천주께 바치는 거야.”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인언민 마르티노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이보현 프란치스코(1773-1800년)

이보현(李步玄) 프란치스코는 1773년 충청도 덕산 황모실(현, 충남 예산군 고덕면 호음리)의 부유한 양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부친을 여의었다. 그는 조금 고집스러운 성격을 지니고 있었는데, 제멋대로 행동할 수 있는 나이가 된 후에는 어떻게나 난폭하였던지, 아무도 그를 억제할 수 없었다.

20세가 조금 넘었을 때, 이 프란치스코는 고향 인근에 살던 황심 토마스에게 교리를 배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황심은 훗날 북경을 왕래한 교회의 밀사로 그의 아내는 바로 이 프란치스코의 누이였다.

진리를 깨닫고 얼마 안 되어, 이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소행을 고치고 본성을 억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혼인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지만, 모친의 권유에 순종하려고 혼인을 하였다. 그런 다음 교리를 자유롭게 실천하고자 황 토마스와 함께 충청도 연산으로 이주해 살았고, 1795년에는 주 야고보 신부를 자신의 집에 모셔다 성사를 받기도 하였다.

교리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이 프란치스코의 열심은 날로 더해 갔다. 그는 보속과 고행에 열중한 나머지 산중에 들어가 힘들게 생활한 적도 있었다.

1797년의 정사박해로 신자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자, 이 프란치스코는 박해를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고 가족과 동네 교우들을 격려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는 날마다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를 그들에게 들려주면서 “신앙을 고백하고 천국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마라.”고 권면하였다.

박해가 시작된 지 한두 해가 지난 어느 날, 이 프란치스코는 머지 않아 자신에게도 위험이 닥쳐오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온 동네 사람들을 불러 술을 대접하면서 ‘이것이 마지막 잔치’라고 말하였다. 과연 이틀 뒤에 포졸들이 연산 땅에 나타났고, 그는 곧바로 체포되어 그곳 관아로 압송되었다.

연산 관장은 포졸들에게 끌려온 이 프란치스코가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확인한 뒤, 교우들과 교회 서적이 있는 곳을 대도록 하면서 배교를 종용하였다. 그러나 그는 배교를 거부하고, “만물의 대군(大君)이신 천주에 대해 말한 책을 관장에게 맡길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화가 난 관장은 포졸들을 시켜 그에게 혹독한 매질을 하게 한 다음 옥에 가두었다.

얼마 뒤 이 프란치스코는 충청 감사의 명에 따라, 그의 고향 덕산을 관할하는 해미 관장에게 이송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다시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여러 차례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형벌을 받으면서도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사람들의 기원이 태초에 그들을 창조하신 천주께 있으니, 어찌 그분을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한나절 넘게 이 프란치스코는 갖은 고문을 당하였지만,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옥으로 끌려간 뒤에도 그는 기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고, 함께 갇힌 사람들을 격려하였다.

해미 관장은 할 수 없이 감사에게 이 프란치스코의 처분을 문의하였다. 그러자 감사는 ‘아무것도 자백하지 않으면 매를 쳐서 죽이라.’는 명령을 내려보냈고, 이에 따라 그는 다시 한 번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그런 다음 관장이 사형 선고문을 내밀자, 기쁜 표정으로 거기에 서명하였다.

다음 날 아침, 이 프란치스코는 장터로 끌려 나가 혹독하게 매를 맞았다. 그럼에도 목숨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망나니들은 그를 넘어뜨린 뒤, 몽둥이로 불두덩을 짓찧어 죽게 하였다. 그때가 1800년 1월 9일(음력 1799년 12월 15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27세였다.

며칠 뒤에 교우들이 그의 시신을 거둘 수 있었는데, 그토록 많은 형벌을 받았는데도 얼굴에는 웃음을 띠고 있었으며, 이를 직접 목격한 비신자들 여러 명이 입교하였다고 한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이보현 프란치스코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김진후 비오(1739-1814년)
 

충청도의 내포 평야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면천의 솔뫼(현,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태어난 김진후(金震厚) 비오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증조부요, 1816년에 순교한 김종한 안드레아의 부친이다. 족보에는 그의 이름이 ‘운조’(運祚)로 기록되어 있다.

김 비오가 천주교 신앙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맏아들이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에게서 교리를 전해 듣고는 이를 형제들에게 전하면서였다. 당시 김 비오의 나이는 50세가량이었다.

그러나 김 비오는 처음부터 천주교 교리에 귀를 기울이지는 않았다. 그는 세상의 권세와 쾌락에 대한 관심 때문에 은총의 부르시는 소리를 들을 여유가 없었다. 특히 그는 감사 밑에서 작은 관직 하나를 얻게 되자, 자식들의 권유를 강하게 물리쳤다.

이후에도 김 비오의 자식들은 부친을 개종시키려고 꾸준히 노력하였다. 그러면서 그의 영혼은 점차 예수 그리스도께 기울어지게 되었고, 마침내 관직을 버리고 비신자 친구들과의 관계도 끊어 버리게 되었다. 그는 열심히 신자의 본분을 지켜 나감으로써 어른으로서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김 비오는 1791년의 신해박해 때에 처음으로 체포되어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그는 이후에도 네다섯 차례나 체포되었다가 풀려나곤 하였다. 또 1801년의 신유박해 때에는 다시 체포되어 배교를 뜻하는 말을 하고는 유배형을 받았지만, 얼마 뒤에 귀양에서 풀려났다.

집으로 돌아온 김 비오는 1805년에 다시 체포되어 해미로 압송되었다. 그가 천주교 신자답게 행동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관장 앞에서도 서슴없이 신앙을 고백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당시의 박해가 공식적인 것이 아니었으므로, 김 비오는 사형 판결을 받지 않은 채 오랫동안 옥에 갇혀 지내야만 하였다. 그 동안 그는 점잖고 품위 있는 성격으로 해미의 관리와 옥리들에게 존경과 대우를 받게 되었고, 드러내 놓고 신자의 본분을 지킬 수도 있었다.

이렇게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김 비오는 모범적인 인내심으로 옥중 생활의 고통을 참아 냈으나, 이미 생명의 한계가 다가오고 있었다. 결국 그는 1814년 12월 1일(음력 10월 20일)에 옥중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75세였다. 아무리 신앙으로 인내심이 강하다고 할지라도 고통스러운 옥살이를 견디기 어려운 나이였다.

김진후 비오가 병으로 죽었는지, 굶주림이나 또 다른 고통으로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생전에 받은 박해와 옥중에서 보여준 신앙생활 때문에 온 교회가 그를 기리게 되었다는 사실만이 전해올 뿐이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김진후 비오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무명 순교자  [출처 : 이상 해미순교성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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