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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 양근 성지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최초의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고 퍼져나간 순교성지
지번주소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오빈리 173-2 
도로주소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물안개공원길 37
전화번호 (031)775-3357
팩스번호 (031)775-3358
홈페이지 http://cafe.daum.net/yanggeun-hl
전자메일 yanggeun-hl@casuwon.or.kr
녹암(鹿菴)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1736-1801년)
 
권일신의 형. 조선 개국공신이며 주자학자인 권근의 15대손으로  집안 대대로 거유가 많이 배출되었다. 학문이 높아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고 제자들이 많았다. 이벽 성조가 한국 천주교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대상자를 찾다가 가장 먼저 선택한 집안이 권철신의 가문이었으며, 그는 5형제 중 장남이었다.
 
그의 형제가 모두 학문이 높고 덕망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그중 권철신은 경학과 예학 등 학문이 뛰어나 경서와 철학을 연구하는데 일생을 보내게 되었으며, 당시 북경으로 부터 한역 서학서가 많이 들어와 학자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었다.
 
1777년(1779년?) 겨울 고향인 양근 감호(양평군 강상면 대석리 대감마을)에서 멀지 않은 주어사(여주군 산북면 하품리)에서 강학(走魚寺講學)회를 개최하였는데, 김원성, 이총억, 정약전, 정약용, 이벽, 이윤하 등과 함께 주자학과 기타 윤리서 및 선교사들로부터 입수한 철학 수학 종교 서적을 놓고  천주의 존재, 인생의 기본 문제 등에 관해 연구회를 가졌다. 연구결과 그들은 천주교 진리를 희미하게나마 깨닫고, 천주교 계명을 아는 대로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벽과 달리 오래 지속되지는 못하였고, 강학회가 끝난 후 이벽의 주선으로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천주교를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은 이벽은 천주교 전파를 위해 학덕이 높은 학자를 입교시킬 의도로, 1784년 음력 9월 양근의 권철신 형제에게 입교를 권하게 되었으며, 이때 셋째인 권일신은 즉시 입교하였고 맏아들 권철신도 주저하다가 결국 암브로시오라는 세례명으로 입교하였는데, 그는 매사에 조심성 있고 신중한 사람이라 교리를 깊이 연구한 후에야 비로소 입교할 결심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입교한 후에는 결코 변하지 않았다. 부모에게 대하여는 효도의 본분을 다하고 사회와의 관계에는 너그러움과 헌신적인 행동으로 주위 사람으로부터 신임을 얻을 수 있었고, 모든 사람이 그에 대한 크나큰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
 
권철신 암보로시오는 직접 전도하거나 천주교 일에는 관여하지 않은 채 집에서 학문과 종교 생활에만 전념하였으나, 그 이름의 권위로 말미암아 외교인들이 복음으로 끌려왔다. 그들은 "저 양반이 천주교를 참된 교로 생각하고 있으니 어떻게 우리가 그 교를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서로 말하였다.
 
이와 같이 직접 천주교 일에 관여하지 않았음에도, 1799년 여름 대사간(大司諫) 신헌조가 상소를 통해 권철신을 천주교 두목으로 몰았으나 정조의 비호로 화를 면하였다.
 
박해가 일어날 때마다 교우들이 형벌에 못 이겨 배교하였다는 말을 들으면 그는 "가련한 인간들, 참 애석도 하다, 저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반생의 업적을 무익하게 만들고, 그들의 고통으로 의당 받게 될 영광을 잃는 것이다"라고 탄식하곤 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 등 저명한 학자들이 체포되고, 같은 해 2월 11일 정약종과 같이 잡혀 국문을 받았는데, 그는 천주교 신앙을 용감하게 변호하였다.
 
형벌 중에도 그의 얼굴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으며, 매우 조용하고 침착하게 대답하였다. 그래서 자기 직분으로 인해 그의 심문에 참관하였던 그의 철저한 정적 중의 한 사람도 심문 장소를 나오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심문을 받을 때에 다른 죄인들은 몹시 당황하는데, 권철신은 마치 잔칫상 앞에 조용히 앉아 있는 사람 같았다"라고 말하였다.
 
마침내 4월 7일(음력 2월 25일, 22일?) 혹독한 고문으로 인한 장독으로  66세를 일기로 옥사하였다. 국문에서 천주교 신앙을 배반하였다는 설이 있으나 신빙성이 없으며, 달레의 교회사와 황사영의 백서에는 순교자로 쓰여있어 이 부분에 대한 검증이 요구된다. [출처 : 양근 성지 홈페이지]
 
 
이암(移庵)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751-1792년)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광암 이벽, 이승훈과 함께 한국 천주교회 창립의 삼대 공로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당시 삼남의 선비들에게 존경을 받던 양근 땅 감호(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의 명문가인 권씨 가문 5형제 중 셋째였다.
 
권일신은 가학을 이어가며 형과 함께 성호 이익에게 사사하였고 뒷날 실학자 안정복의 문인으로 들어가 그의 딸과 혼인하였다. 이 무렵 광암 이벽은 당대 거유인 이가환과 사흘 밤낮을 토론하여 천주교의 옳음을 밝혔으나 그가 천주교를 믿을 뜻이 없음을 알았고, 복음을 더욱 올바르게 전하려고 학식과 덕망으로 존경받는 양근 땅 감호의 권씨 형제를 찾았다. 지우인 이벽의 열의에 찬 강설을 듣고 크게 감동한 권씨 형제 가운데 권일신이 먼저 입교하여 이벽의 기대를 훨씬 넘어선 활약을 보여주었다.
 
1784년 9월 수표교 근처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을 때 권일신은 이미 복음전파에 헌신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그는 동양의 사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을 수호자로 모시기로 하고 그 이름을 세례명으로 정하였다.
 
천주교 신자가 된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자신의 신앙생활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 가족 전부를 가르쳐 신자가 되게 하였다. 그의 명성과 학식, 덕행은 주변의 친지들에게 그리고 그를 따르던 제자들에게 신앙을 전하는 데 크게 영향을 미쳤다. 내포 출신으로 형의 제자였던 이존창에게 천주교를 알려주고 중요한 믿을 교리와 신자로서의 본분과 실천방법을 자세히 일러주었으며, 고향으로 내려가 전교하게 하였다. 이존창은 크게 감복하여 루도비코 곤자가란 세례명으로 영세 입교하고, 충청도 내포로 내려가 전교활동에 투신해 내포지방의 사도가 되었다.
 
또 전라도 전주 초남에 덕망이 높고 재산이 많아 세력이 컸던 유항검 또한 권씨 형제를 따랐는데, 권일신은 그도 전교하여 그를 한국 초대교회의 전라도 사도로 남게 하였다. 이렇게 권일신의 덕망과 인품으로 한국교회는 서울에서 충청도와 전라도에까지 퍼져나가게 되었고, 그를 존경하며 따르던 이들이 속속 입교하였다.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가진 정기적인 종교집회가 한국 천주교 복음 선포의 기점이 되는데, 권일신은 정약용 형제, 이벽과 함께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 집회는 우연한 기회에 형조의 나졸들에게 발각되어, 이른바 '을사추조적발사건'이 일어나면서 중지되었고, 김범우만이 형조에 투옥되었다. 이때 권일신은 아들과 이윤하, 이총억, 정섭 등과 함께 형조판서 김하진에게 가서 성상을 돌려주고 김범우를 석방하든지, 아니면 함께 처벌해 달라고 용감히 말했다. 그러나 그의 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벽은 집 안에 감금되고 김범우는 유배형을 받았으며 지도층 교우들은 흩어졌다. 그는 교회 재건을 다짐하며 조동섬과 함께 양근에 있던 용문사에 들어갔다.
 
1787년 박해가 진정되자 권일신은 교회를 떠났다가 뉘우치고 돌아오는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이승훈, 이존창, 유항검, 최창현 등과 함께 조용히 교회재건운동을 벌였다. 이때 한국교회의 터전을 더욱 공고히 하려는 목적으로, 스스로 신부처럼 미사를 봉헌하고 세례성사, 고해성사, 견진성사 등을 집행하기로 하였다. 아직 성품성사와 성직제도, 전례에 대한 교리 지식이 부족했던 그때, 오직 교회재건의 열의에 불탔던 이들은 이른바 '가성직 제도'를 수립하여 평신도로서 성사를 집행했다. 이 평신도에 의한 임시성사 집행은 약 2년 동안 계속되었다.
 
권일신과 동료 10여 명은 대단한 열성으로 엄격하게 재를 지키며 성사와 전례를 거행하였다. 그러나 교회서적을 공부하면서 그들의 이러한 행위가 교리에 위배되고 독성죄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곧 북경 주교에게 밀서를 보내 문의하였다. 당시 밀사로 윤유일이 선정되어 1789년과 1790년 두 차례 북경을 다녀왔는데, 권일신은 그 첫번째 파견 때 북경으로 서한을 보냈다.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서 천주교 교리와 윤리에 대한 간단한 설명과 함께 함부로 성사를 집행한 사실에 대한 엄한 책망을 들었다. 주교는 회답에서 일체 성사를 거행할 수 없음을 설명하고 다만 교우들을 가르치고 격려하며 비신자들을 입교시키는 일은 기쁘고 좋은 일이니 꾸준히 계속할 것을 당부하면서 신부를 보내줄 것을 약속하였다. 주교의 편지를 받은 권일신 등은 모든 신자들 앞에서 웃음거리가 될 난처한 입장임에도 교회에 순명하는 자세로 곧 성직수행을 멈추고, 오직 신입교우들을 가르치고 복음을 선포하며 전교하는 일에만 전심전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때 주교의 회신 가운데 조상에 대한 제사를 금하는 내용도 있어 많은 양반 신자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었는데, 1791년 전라도 진산에서 제사문제로 윤지충과 권상연이 순교하는 박해가 일어났다.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 때 이미 그 신원이 드러났던 권일신은 1791년의 이 '진산사건'으로 홍낙안, 목만중 등에게 천주교 교주로 지목받아 고발당하기 시작했고, 그해 11월에 체포되어 형조에 넘겨졌다.
 
권일신은 여러 차례 고문을 받았으나 형리들 앞에서 "하늘과 땅과 사람을 창조하신 위대하신 천주를 섬기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의 무엇을 준다 해도 그분을 배반할 수 없고, 그분께 대한 제 의무를 다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죽음을 당하겠습니다."라고 자신의 신앙을 웅변하였다.
 
당시 정조 임금은 권일신의 덕망과 자질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는데, 형조의 보고를 듣고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라도 그를 설복시키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거듭되는 곤욕을 치르면서도 권일신의 신앙고백은 한결같았고, 어떤 유혹과 형벌도 그를 꺾을 수 없었다. 그는 '배교'란 말만 나오면 무섭게 화를 내며 들으려 하지 않았다. 권일신을 사형에 처하고 싶지 않았던 정조는 그를 제주도로 귀양가게 하였다.
 
유배지로 떠나기 전 누이동생인 이윤하의 집에 머물던 그에게 충신을 희생시키지 않으려 애쓰던 정조 임금이 사람을 보내어 80세의 노모를 생각하게 하였다. 다시는 보지 못할 어머니에 대한 효심으로 착잡해진 권일신의 심정을 이용하여 배교가 아니라 임금께 조금만 양보하는 뜻을 쓰게 하였고, 이를 권일신의 굴복으로 임금께 보고하였다. 그렇게 해서 유배지가 노모가 계시는 예산으로 바뀌었으나 그는 이미 모진 형벌로 기진하여 귀양지에 가던 길에 한 주막에서 객사하였다. 신앙 때문에 당한 그의 고독한 죽음은 민족의 구원사에 더 깊은 인상으로 남게 되었다. [출처 : 김길수 요한, 전 대구 가톨릭 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경향잡지, 2000년 6월호]
 
 
복자 윤유일 바오로(1760-1795년)와 지황 사바(1767-1795년)와 최인길 마티아(1765-1795년)

 

‘인박’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윤유일(尹有一) 바오로는 1760년 경기도 여주의 점들(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금사리)에서 태어나 이웃에 있는 양근 한감개(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로 이주해 살았다. 1801년에 순교한 윤유오 야고보는 그의 동생이고, 윤점혜 아가타와 윤운혜 루치아는 그의 사촌 동생들이다.

양근으로 이주한 뒤 권철신 암브로시오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던 윤 바오로는, 서적을 통해 천주교 신앙을 차츰 이해하게 되었다. 그런 다음 스승의 동생인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며, 이후 가족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데 열중하였다.

교회의 지도층 신자들은 1789년에 북경의 구베아(A. Gouvea, 湯士選) 주교에게 밀사를 보내 그동안의 상황을 보고하고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기로 하였다. 이때 밀사로 선발된 이가 바로 윤 바오로였는데, 그 이유는 그의 성격이 온순한 데다가 심지가 굳고 학식이 높았으며 교리에도 밝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윤 바오로는 북경을 오가는 상인으로 가장하고, 주교에게 보내는 신자들의 서한을 옷 안에 숨긴 뒤, 1789년 10월 조선을 떠나 북경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초에는 북당에 있는 라자로회 선교사들과 남당에 있는 구베아 주교를 만날 수 있었다. 또 윤 바오로는 북경에 머무는 동안 라자로회의 로오(N. J. Raux, 羅) 신부에게 조건부 세례를 받고, 구베아 주교에게 견진성사를 받았다. 아울러 구베아 주교에게서 ‘조선에 성직자를 파견하는 데 필요한 준비’에 대해 들었다.

윤 바오로가 1790년 봄에 귀국하자, 지도층 신자들은 성직자를 영입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 일 때문에 윤 바오로는 그해에 다시 한 번 북경을 다녀와야만 하였다.

구베아 주교는 다음 해, 조선 신자들과 한 약속에 따라 후안 도스 레메디오스(Juan dos Remedios) 신부를 조선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그 신부는 조선 밀사들과 만나지 못함으로써 조선에 입국할 수 없었다. 이렇게 1791년에 있었던 첫 번째의 영입 시도는 실패로 끝났으며, 바로 그해 말에 일어난 박해로 이러한 노력은 한동안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윤 바오로는 실망하지 않고 지황 사바, 최인길 마티아 등과 함께 성직자를 영입하고자 꾸준히 노력하였으며, 1794년 말에 마침내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조선에 잠입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뒤, 윤 바오로는 북경 교회와 연락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지홍’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지황(池璜) 사바는 1767년에 한양의 궁중 악사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조선에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원하여 교리를 배웠다. 본래 성격이 순직하고 부지런하였던 그는, 천주교에 입교하자마자 오직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만 열중하였고, 하느님을 위해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위험이나 궁핍, 고통을 당할 때에도 결코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성직자 영입 운동이 재개된 1793년에, 이미 북경을 다녀온 적이 있는 윤 바오로와 지 사바와 박 요한이 밀사로 선발되어, 함께 조선의 국경으로 가게 되었다. 지 사바와 박 요한은 조선의 사신 행렬에 끼어 북경으로 향하였고 윤 바오로는 그곳에 남았다.

북경에 도착한 지 사바는 얼마 안 있어 구베아 주교를 만날 수 있었는데, 이때 지 사바의 신심에 감명을 받은 구베아 주교는 뒷날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우리는 1793년에 지황의 신앙심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40일간 북경에 머무르는 동안 눈물을 흘리면서 견진과 고해와 성체성사를 아주 열심히 받았습니다. 그래서 북경의 교우들은 그의 신심에 감화를 받았습니다.”

1794년 초, 구베아 주교는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하였다. 이에 지 사바는 주 신부와 만나 약속 장소를 정한 뒤, 각각 다른 길을 통해 국경으로 가서 상봉하였다. 그러나 감시가 심한 데다가 압록강이 얼기를 기다려야 하였으므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져야만 하였다.

지 사바는 이후 조선으로 귀국하였다가 다시 국경으로 가서 주 야고보 신부를 만났으며, 12월 24일(음력 12월 3일) 밤에, 그를 조선에 잠입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런 다음 윤 바오로와 함께 주 신부를 안내하여 12일 만에 한양 최인길 마티아의 집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한양의 역관 집안에서 1765년에 태어난 최인길(崔仁吉) 마티아는,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이벽 세례자 요한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801년에 순교한 최인철 이냐시오는 그의 동생이다. 최 마티아는 이승훈 베드로가 신앙을 전파하고자 선발한 최초의 회장들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하다. 최 마티아는 입교 초기부터 동료들과 함께 이웃에 복음을 전하는 데 앞장섰으며, 윤 바오로가 1790년에 북경 교회를 방문하고 돌아온 뒤에는 성직자 영입 운동에 참여하였다.

한양 계동(현, 서울시 종로구 계동)에서 1795년 초에 주 야고보 신부를 맞이한 최 마티아는, 주 신부의 안전을 지키려고 최선을 다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밀고자에 의해 그의 입국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고 말았다. 다행히 교우들의 재빠른 처신으로 주 야고보 신부는 최 마티아의 집에서 빠져나와 여회장인 강완숙 골룸바의 집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그에 앞서 최 마티아는, 주 야고보 신부에게 피신할 시간을 벌어주고자 자신이 신부로 위장하고 집에서 포졸들을 기다렸다. 그가 역관 집안에서 태어나 중국어를 알았으므로 이런 계책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위장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체포된 지 얼마 안 있어 최 마티아의 신분이 드러나게 되었고, 이에 놀란 포졸들은 다시 주 신부의 행방을 쫓으려 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처럼 최 마티아는 주 신부를 안전하게 피신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곧 주 신부의 입국 경위가 밝혀지고, 그의 입국을 도운 밀사인 윤 바오로와 지 사바도 체포되고 말았다.

윤 바오로와 최 마티아와 지 사바는 체포된 날부터 포도청에서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이때 그들의 신앙심에서 우러나오는 굳은 인내와 결심, 그리고 지혜로운 답변은 박해자들을 당황케 하였다. 그들은 주 신부의 행방을 알아내려고 수없이 형벌을 가하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그들의 마음에는 천상의 기쁨이 넘쳐 얼굴에까지 번졌다. 이제 박해자들은 더 이상 그들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때려죽이기로 결심하였다. 그 결과 윤 바오로와 지 사바와 최 마티아는 그날로 사정없이 매를 맞고 숨을 거두게 되었으니, 이때가 1795년 6월 28일(음력 5월 12일)이었다. 당시 윤 바오로의 나이는 35세, 지 사바의 나이는 28세, 최 마티아의 나이는 30세였다. 박해자들은 비밀리에 그들의 시신을 강물에 던져 버렸다.

이후 구베아 주교는 조선의 밀사에게서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듣고는, 윤 바오로와 그의 동료들이 순교 당시에 보여 준 용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자를 공경하느냐?’는 질문에 용감히 그렇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또 그리스도를 모독하라고 하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참된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독하기보다는 차라리 천 번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단언하였습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윤유일 바오로와 지황 사바와 최인길 마티아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1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유한숙(兪汗淑, ?-1801년)과 윤유오(尹有五) 야고보(?-1801년)
 
대왕대비의 천주교 박해령이 내리자 조정의 대신들은 일제히 그동안의 온건책을 버리고 천주교도를 엄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잇달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리고 정약종의 심문에 참여하였던 영부사 이병모는 "이들 흉악한 역적의 경우는 남을 죽이는 것보다 그 자신이 죽는 것이 낫다"고 여기며 "엄히 심문하여도 한결같이 진술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혀를 묶어 완고하기가 목석과 같다"고 하면서 이들을 엄형에 처하라고 주장했다.
 
1801년 2월 지중추부사 등 현직관리 수십 명이 연명으로 천주교 신자들을 탄핵하라는 상소가 올려지고 이미 지목된 신자들에 대한 심문과 탄핵이 가중되는 가운데, 앞서 본 바와 같이 2월 26일에 정약종을 비롯하여 최필공, 이승훈, 최창권, 홍교만, 이존창, 홍낙민이 처형됐다. 이때 이가환과 권철신은 고문을 이기지 못해 옥사하였으며 정약전은 신지도로 정약용은 장기현으로 귀양가도록 확정됐다. 이들의 박해를 자세히 알아보면, 서울에서의 박해가 지방으로 확산되어 내포의 사도 이존창은 정약종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고 공주로 이송되어 참수 당하였고, 이 무렵 별로 알려지지 않은 한 무명의 순교자와 함께 청주에서 잡힌 이종국은 공주에서 처형당했다. 경기도 포천에서는 홍교만이 아들 홍인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아버지 홍교만이 먼저 서소문 밖에서 정약종과 함께 순교했던 것이다.
 
그리고 여주에서는 일찍이 부활찬미경을 함께 부르다 잡혀온 신자들이 이때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이 확정된 후 각자의 고향으로 이송되어 참수되었는데 원경도, 임희영, 최창주, 이중배, 정종호 등이 그들이다. 이때 함께 체포된 조용삼은 옥사하였다. 이후에도 대왕대비는 박해를 멈추지 않고 아직도 숨어있는 서학도를 조속히 체포하라고 독려하고 나섰다.
 
그러자 음력 2월 30일에 좌부승지 김근순은 홍낙임, 송문로, 유기주 등을 탄핵하였다. 이로 인해 송문로는 전라도 녹도진으로 유기주는 진도군 금갑도로 유배되었고, 3월 10일에 이기양은 함경도 단천부로 오석중은 전라도 영광군으로 각각 정배되었다. 그런 다음 특별한 혐의가 더 드러나지 않자 박해는 어느 정도 소강상태에 들어가는 듯하다가 3월 14일 주문모 신부가 자현하여 자수함으로써 박해는 새로운 국면을 띄며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주문모 신부의 자현과 순교하기까지 즉, 주신부가 의금부에서 심문과 옥고를 치르는 동안에 지방인 양근에서는 유한숙과 윤유오 등 13명이 처형되었고, 4월 2일에는 서소문 밖에서 정철상, 최필제와 중인출신인 정인력, 윤운혜, 정복혜, 이합규 등 6명이 처형되었는데, 이제 신유박해의 새로운 국면의 전개에 앞서 이들 중 몇 사람을 간단히 정리해 보고자한다.
 
먼저 유한숙(兪汗淑, ?~1801년)이다. '사겸'이라고도 불리던 유한숙은 경기도 양근지방의 동막골에서 살던 향반집안 출신이었다. 그는 입교한 뒤 한동안 친척인 동정녀 이아가다의 동정생활을 돕기 위해 그를 보호하며 외교인들의 눈을 피해 서울의 윤점혜 아가다에게 데려다 주기도 했다.
 
그는 양근의 유력한 신자로서 누구보다 독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며 세속의 쾌락을 버리고 오로지 기도와 묵상으로 신심을 굳혀나갔다. 그러던 중 체포되어 경기도 감사인 이익운으로부터 심문과 형벌을 달게 받고 끝내 배교하지 않아 사형판결을 받고 고향인 양근의 길가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구경하는 가운데 참수형을 당하니 그때가 1801년 음력 3월 13일이었다. 유한숙이 참수형을 당할 때 함께 참수형을 받은 사람이 윤유오(尹有五, ?~1801년) 야고보이다. 이때 양근에서는 7명의 신자가 함께 체포되었는데 모진 형벌 속에도 끝까지 신앙을 고백하고 순교한 사람은 유한숙과 윤유오 둘 뿐이었다.
 
유한숙과 같이 윤유오 또한 그에 대한 기록이 매우 단편적이어서 그 행적을 자세히 알 수는 없다. 그의 집안은 본래 경기도 여주지방의 양반이었고 양근으로 이사한 다음 그가 태어났다. 집안 전체가 열성적인 천주교 신자였으니 그도 일찍부터 가족과 함께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양반으로 세속적 복락을 누릴만했던 그의 집안은 천주교 신앙으로 풍비박산이 났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가족들을 한국교회가 존재하고 있는 한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그의 사촌 형인 윤유일 바오로는 주문모 신부를 조선으로 모셔오는데 큰 역할을 하였고 1795년 6월 28일에 순교한 한국교회 초대역사에 높이 기억될 순교자이다. 동정녀로 유명한 윤점혜 아가다는 그의 사촌누이로서 순교자이며, 신앙을 버리지 않았던 부친 윤장은 임자도로 귀양갔고 숙부 윤형은 해남으로 유배되었다. 또 다른 숙부인 윤관수는 고문 중에 옥사하였다.
 
이렇듯 그의 가계는 온통 천주교 신앙으로 인해 파산되고 희생된 그러나 놀라운 신앙의 증거자들이었다. 윤유오는 이러한 증거자들의 가족답게 모진 형벌과 심문에도 의연한 모습으로 신앙을 고백하여 마침내 고향의 신앙동지인 유한숙과 함께 고향 땅 큰길가에서 고향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참 삶의 길을 목숨 바쳐 증거한 것이다. [출처 : 김길수, 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 가톨릭신문, 2001년 7월 15일]
 
 
복자 윤유오 야고보(?-1801년)
 
윤유오(尹有五) 야고보는 경기도 여주의 점들(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금사리)에서 태어나 인근에 있는 양근 한감개(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로 이주해 살았다. 1795년에 순교한 교회의 밀사 윤유일 바오로는 그의 형이다.

일찍부터 형 윤유일 바오로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게 된 윤 야고보는 고향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웃에 교리를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뿐만 아니라 형이 순교한 뒤에는, 인근에 사는 조동섬 유스티노, 권상문 세바스티아노 등과 만나 기도 모임을 갖거나 교리를 연구하면서 신심을 북돋우었다. 또 1795년 초,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지방 순회에 나서 양근에 도착하였을 때 그를 만나 성사를 받기도 하였다.

1801년에는 신유박해가 일어나 각처에서 신자들이 체포되거나 순교하게 되었다. 이때 윤 야고보도 양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그곳 관아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그는 갖가지 문초와 형벌을 당하면서도 전혀 신앙을 버리지 않았으며, 관장의 강요에도 단호하게 배교를 거부하였다. 그의 마지막 신앙 고백은 다음과 같았다.

“저는 형이 가르쳐 준 십계명을,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실천해야 할 도리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서적을 밤낮으로 외우고 익혔으며, 진실로 배교할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결국 관장은 윤유오 야고보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1801년 4월 27일(음력 3월 15일), 양근 관아로부터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큰길가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게 되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윤유오 야고보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윤점혜 아가타(?-1801년)
 

윤점혜(尹占惠) 아가타는 1778년경 경기도에서 태어나 양근의 한감개(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에서 살았으며, 일찍이 어머니 이씨(李氏)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795년에 순교한 윤유일 바오로는 그의 사촌 오빠이고, 1801년에 순교한 윤운혜 루치아는 그의 동생이다.

윤 아가타는 일찍부터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바치려고 동정 생활을 하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풍속에서는 처녀가 혼인을 하지 않고 혼자 산다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다. 이에 그녀는 몰래 집을 떠날 결심을 하고는, 어머니가 마련해 둔 혼수 옷감으로 남자 옷을 지어 숨겨 둔 뒤에 기회를 엿보기로 하였다. 그런 다음 어느 날 남장을 하고 사촌 오빠 윤 바오로의 집으로 가서 숨었다. 얼마 후 윤 아가타는 다시 어머니에게 돌아가 가족과 이웃 사람들에게 질책을 받았지만 꿋꿋하게 참아 내었다.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1795년에 입국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윤 아가타는, 어머니와 함께 한양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과부처럼 행세하며 동정을 지켜 나갔으며, 2년 뒤에 주 야고보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러던 가운데 어머니가 사망하자, 윤 아가타는 여회장 강완숙 골룸바의 집으로 가서 함께 생활하였다. 또 주 야고보 신부의 명에 따라 동정녀 공동체를 만들고, 그 회장으로 임명되어 다른 동정녀들을 가르쳤다. 이후, 그녀는 교리의 가르침을 엄격히 지키면서 극기와 성경 읽기, 그리고 묵상에 열중하여 다른 신자들의 모범이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어머니를 위해 연도를 자주 바쳤으며, 아가타 성녀처럼 순교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하였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윤 아가타는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압송되었고, 이후 포도청과 형조에서 갖가지 형벌을 받았다. 그렇지만 그녀는 신앙을 굳게 지키면서 밀고와 배교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박해자들도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녀에게 사형을 선고하였고, 그녀의 고향인 양근으로 압송하여 처형하게 함으로써 그곳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주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윤 아가타는 양근으로 이송되어 그곳 감옥에 갇혔다. 당시 그 감옥에는 여자 교우 한 명이 함께 갇혀 있었는데, 뒷날 그녀는 윤점혜 아가타에 대해 증언하기를 “아가타는 말하는 것이나 음식을 먹는 것이 사형을 앞둔 사람 같지 않고, 태연자약하여 이 세상을 초월한 사람 같았다.”고 전하였다.

윤 아가타는 1801년 7월 4일(음력 5월 24일)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쳤는데, 순교 당시 그녀의 목에서 흐른 피가 우윳빛이 나는 흰색이었다고 한다. 그녀가 형조에서 한 최후 진술은 다음과 같았다.

“10년 동안이나 깊이 빠져 마음으로 굳게 믿고 깊이 맹세하였으니, 비록 형벌 아래 죽을지라도 마음을 바꾸어 신앙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윤점혜 아가타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윤운혜 루치아(?-1801년)

윤운혜(尹雲惠) 루치아는 경기도에서 태어나 양근의 한감개(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에서 살았으며, 일찍이 어머니 이씨(李氏)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801년에 순교한 정광수 바르나바는 그의 남편이고, 윤점혜 아가타는 그의 언니이다.

윤 루치아는 나이가 차자, 여주에 사는 정 바르나바와 혼인하였는데, 비신자인 시부모의 반대로 혼인 문서는 주고받을 수 없었다. 또 시부모가 조상 제사에 참여하도록 강요할 때마다 그녀는, ‘교회에서 금하는 일이기 때문에 제사에 참여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이를 거부하였다. 결국 윤 루치아는 남편과 함께 부모의 곁을 떠나 한양의 벽동으로 이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때가 1799년이었다.

한양으로 이주한 뒤부터 윤 루치아 부부는 더욱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면서 교회 일을 돕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자기 집 마당 한편에 따로 집회소를 짓고,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모셔다 미사를 봉헌하였으며, 그 집회소를 교우들의 모임 장소로 제공하였다. 이때 그곳에 자주 모이던 교우들은 홍필주 필립보, 김계완 시몬, 홍익만 안토니오, 강완숙 골롬바, 정복혜 칸디다 등이었다.

윤 루치아 부부는 전교에도 힘써, 어느 누구보다 많은 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과 성모님의 상본을 그리거나 나무로 묵주를 제작하였고, 교회 서적들을 베껴서 교우들에게 팔거나 나누어 주었다.

그러던 가운데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 언니 윤점혜 아가타가 체포되자, 윤 루치아는 자기 부부도 머지않아 체포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그녀는 남편 정 바르나바를 피신시킨 다음, 교회 서적과 성물들을 다른 교우의 집으로 옮겨다 숨겨 놓았다. 그리고 혼자 남아 집을 지키다가 그해 2월에 체포되었다.

이후 윤 루치아는 포도청과 형조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며 신문을 받았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밝혀진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발설하지 않았으며, 배교도 거부하였다. 그러자 박해자들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녀에게 사형을 선고하였고, 이에 따라 윤 루치아는 형장으로 끌려 나가 5월 14일(음력 4월 2일)에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형조에서 윤운혜 루치아에게 내린 사형 선고문 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너는 남편을 도와 함께 행동하였으며, 시댁의 제사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천주교 신자들과 이웃을 삼아 서로 교류하였고, 여성 교우들과 밤낮으로 얽혀 지냈으며, 교회 서적과 성화 · 성물들을 비밀리에 제작하여 이곳저곳으로 가지고 다니며 팔았다. 여러 사람을 유혹해 들여 온, 세상을 어지럽힌 죄는 만 번 죽어도 아쉽지 않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윤운혜 루치아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권상문 세바스티아노(1769-1802년)
 

권상문(權相問) 세바스티아노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양반 집안 출신이다. 교회 창설 주역들의 스승이요 학문으로 이름이 높던 권철신 암브로시오는 그의 큰아버지였으며, 교회 창설에 참여한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그의 아버지였다. 뒷날 권 세바스티아노는 조선의 풍습에 따라 큰아버지의 양자가 되었다.

1769년 경기도 양근에서 태어난 권 세바스티아노는 일찍부터 집안의 신앙을 이어받아 열심한 신자가 되었다. 또 장성한 뒤에는 교회 활동에 참여하는 한편, 이웃에 사는 윤유일 바오로 형제를 비롯하여 몇몇 교우들과 함께 기도 모임을 갖거나 교리를 연구하였다.

1791년의 신해박해로 생부인 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죽임을 당하자, 권 세바스티아노는 마음이 약해져 한때 교회를 멀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뒤로는 다시 신앙을 회복하였고, 성사를 받으려고 한양으로 이주하였다. 이때 그는 동료들과 함께 주 야고보 신부를 방문하고 모임을 가졌으며, 얼마 뒤에는 고향인 양근으로 돌아왔다. 그런 다음, 1795년의 을묘박해로 주 야고보 신부가 피신 생활을 하게 되자, 3일 동안 주 신부를 자신의 집에 유숙시키면서 교리를 배웠다.

1800년 6월 경기도 양근에서 일어난 박해로, 권 세바스티아노는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후 그는 양근과 경기 감영을 오가면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꿋꿋하게 신앙을 증언하였다. 그런 다음 1801년의 신유박해가 한창일 무렵에 한양으로 압송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권 세바스티아노는 포도청과 형조에서 잠시 마음이 약해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이전에 한 말을 취소하였으며, 사정없이 가해지는 형벌을 받으며 신앙을 증언하였다. 그러자 형조에서는 그의 최후 진술을 들은 뒤, 다음과 같은 죄목으로 사형을 언도하였다.

“생부 권일신이 사망한 뒤에도 천주교에 깊이 빠졌으며, 아울러 요사한 말과 글을 오로지 대중을 미혹시키는 데에 이용하였다.”

동시에 형조에서는 ‘권상문을 고향으로 이송하여 처형하라.’고 명령하였다. 권상문 세바스티아노의 고향인 양근 주민들이 경각심을 주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그는 1802년 1월 30일(음력 1801년 12월 27일) 양근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권상문 세바스티아노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조숙 베드로(1786-1819년)


‘명수’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었던 조숙(趙淑) 베드로는 1786년 경기도 양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숙’은 그의 관명(冠名)이다. 이후 그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양친과 함께 강원도의 외가로 피신하여 생활하게 되었다.

성장해 감에 따라, 조 베드로는 출중한 재능을 보였고, 성품 또한 착하고 친절하였으며, 나이에 비해 아주 점잖았다. 그러나 주변의 환경 때문에 신앙생활을 점차 등한시하게 되었다. 그가 다시 신앙에 눈을 뜨게 된 것은, 17세 때 권천례 데레사를 아내로 맞이하면서이다.

혼인날 밤, 아내 권 데레사는 ‘동정 부부로 살자고 부탁하는 글’을 써서 조 베드로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그는 마음이 변하여 아내의 뜻을 들어주었고, 잠깐 사이에 신앙심이 되살아나서 딴사람이 되었다.

이후 조 베드로 부부는, 남매처럼 지내기로 한 약속을 지키면서 생활하였다. 그들의 신심은 날로 깊어져 기도와 복음 전파, 고신 극기 행위가 일상이 되었으며, 가난하게 살면서도 남을 위한 애긍에 열중하게 되었다. 이렇게 15년을 생활하는 동안, 조 베드로는 처음의 약속을 어기는 유혹에 빠지기도 하였으나, 아내의 권유로 다시 마음을 돌리곤 하였다.

언제부터인가 조 베드로 부부는 정하상 바오로 성인을 도와 일하게 되었다. 정하상 바오로 성인이 성직자를 영입하려고 북경을 오갈 때마다 필요한 뒷바라지는 모두 그들 부부의 몫이었다. 정 바오로 성인은 교회 일을 위해 떠나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한양에 있는 조 베드로 부부의 집에 머무르면서 모든 준비를 하였다. 당시 고 바르바라(또는 막달레나)라는 과부가 그 집에 살면서 그들 부부를 도와주었다.

그러던 가운데 정 바오로 성인이 다시 한 번 북경에 갔을 때, 포졸들이 수색 과정에서 우연히 조 베드로가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알아내게 되었다. 이내 포졸들은 그의 집으로 몰려들어 그를 체포하였다. 이때 아내 권 데레사는 자원하여 남편을 따라나섰고, 고 바르바라도 그들 부부와 함께 투옥되었다. 그때가 1817년 3월 말경이었다.

문초가 시작되자, 관장은 조 베드로 부부를 유혹하면서 ‘배교하고 동료들을 밀고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 부부는 누구도 밀고하지 않았으며, 혹독한 형벌을 꿋꿋하게 참아 내었다. 관장은 몇 차례에 걸쳐 문초와 형벌을 가하였지만, 그들 부부의 신앙심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옥에 가두라고 명령하였다.

이후, 고통스러운 옥살이 중에도 조 베드로 부부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특히, 아내 권 데레사는 남편 조 베드로의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용기를 북돋워 주면서 순교를 권면하였다.

조숙 베드로 부부와 고 바르바라는 이렇게 2년 이상을 옥에 갇혀 있어야만 하였다. 그렇지만 이들의 신앙은 여전히 굳건하였고, 마침내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바칠 자격을 얻게 되었으니, 그들 셋이 참수형을 받고 순교한 것은 1819년 8월 10일(음력 6월 20일) 이후로, 당시 조 베드로의 나이는 33세였다. 교우들은 한 달이 지나서야 그들의 시신을 거둘 수 있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조숙 베드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권천례 데레사(1783-1819년)

 

권천례(權千禮) 데레사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인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딸이요, 1801년 신유박해 순교자 권상문 세바스티아노의 동생이다. 1783년 경기도 양근에서 태어난 권 데레사는 6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1791년의 신해박해로 아버지까지 잃었다.

권 데레사는 어렸을 때부터 덕행과 신심이 남달랐다. 또 성장한 뒤로는 온화함과 애덕으로 형제간에 평온을 유지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나이 17세 때 일어난 신유박해로 온 집안이 풍파를 입게 되었다.

아무도 의지할 데가 없게 된 권 데레사는 조카 하나를 데리고 한양으로 올라가 생활하면서 동정을 지키며 살아가려고 하였다. 그러자 친척들이 그녀를 찾아와 ‘조선에서 동정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하며 설득하였다. 결국 그녀는 계속되는 친척들의 설득을 받아들여 동정을 포기하기로 작정하였으며, 20세에 이르러 조숙 베드로와 혼인을 하였다. 당시 조 베드로는 냉담자였다.

혼인날 밤에, 권 데레사는 ‘동정 부부로 살자고 부탁하는 글’을 써서 남편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조 베드로는 마음이 변하여 아내의 뜻을 들어주었고, 잠깐 사이에 신앙심이 되살아나서 딴사람이 되었다. 이후, 권 데레사 부부는 남매처럼 지내기로 한 약속을 지키면서 15년을 생활하였으며, 정하상 바오로 성인이 성직자를 영입하려고 북경을 오갈 때마다 모든 뒷바라지를 하기도 하였다. 그들이 1817년 3월 말경에 포졸들에게 잡혀 문초를 받는 동안 어느 누구도 밀고하지 않았으며, 혹독한 형벌을 꿋꿋하게 참아 내었다. 권 데레사는 관장이 배교를 권유하자 이렇게 답하였다.

“천주는 모든 사람의 아버지이시고,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십니다. 어떻게 그분을 배반하겠습니까? 이 세상 사람 모두, 부모를 배반하는 경우에는 용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어찌 우리 모두의 아버지가 되시는 그분을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

관장은 다시 몇 차례에 걸쳐 문초와 형벌을 가하였지만, 권 데레사 부부의 신앙심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옥에 가두라고 명령하였다. 권 데레사는 고통스러운 옥살이 중에도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또 남편의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용기를 북돋워 주면서 “하느님께서 내려 주실 순교의 은혜에 감사를 드리자.” 하며 권면하였다.

권 데레사 부부는 2년 이상을 옥에 갇혀 있어야만 하였다. 그럼에도 그들의 신앙은 여전히 굳건하였으며, 마침내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바칠 자격을 얻게 되었다. 그들이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한 것은 1819년 8월 10일(음력 6월 20일) 이후로, 당시 권 데레사의 나이는 36세였다.

교우들은 한 달이 지나서야 그들의 시신을 거둘 수 있었다. 이때 교우들은 권 데레사의 머리채를 바구니에 담아 남이관 세바스티아노 성인의 집에 두었는데, ‘바구니를 열면 향기가 진동하였다.’고 여러 교우들이 증언하였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권천례 데레사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조용삼 베드로(?-1801년)
 

경기도 양근에서 태어난 조용삼 베드로는 일찍 모친을 여의고 부친 슬하에서 자라났다. 그러나 집이 가난한 데다가 몸과 마음이 모두 약하였고, 외모 또한 보잘것없었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만나면 비웃기만 하였다. 그는 서른 살이 되도록 혼인할 여성을 구할 수조차 없었다.

그 뒤 조 베드로는 부친과 함께 여주에 사는 임희영의 집에 가서 살게 되었는데, 이때 처음으로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그때부터 조 베드로는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를 스승으로 받들고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의 스승인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모든 사람이 조 베드로를 조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열심을 칭찬해 주면서 차츰 신앙의 길로 인도해 나갔다.

조 베드로가 아직 예비 신자였을 때인 1800년 4월 15일, 예수 부활 대축일을 지내려고 부친과 함께 여주 정종호의 집으로 갔다. 그리고 이곳에서 이중배 마르티노, 원경도 요한 등과 함께 대축일 행사를 갖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비록 예비 신자임에도 조 베드로의 용기는 체포되자 바로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혹독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고백하자, 박해자들은 화가 나서 더욱 세게 매질을 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박해자들은 그의 아버지를 끌어내다가 ‘네가 배교하지 않는다면 아버지를 당장에 죽여 버리겠다.’고 하면서 혹독한 매질을 하였다.

조 베드로는 마침내 굴복하여 석방되었다. 그러나 관청에서 나오다가 이 마르티노를 만나게 되었고, 그가 권면하는 말을 듣고는 곧바로 마음을 돌이켜 다시 관청으로 들어가 신앙을 고백하였다.

이후, 조 베드로의 신앙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박해자들은 전처럼 그의 마음을 꺾을 수 있으리라 믿고는 더욱 혹독한 형벌을 가하였지만, 그의 신앙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런 다음 그는 경기도 감영으로 끌려가 다시 여러 차례 문초를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 곳곳에서 신자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였다. 바로 그 무렵 조용삼은 옥중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영세하였으며, 이후로는 착한 행동과 아름다운 말로 여러 신자들을 감동시켰다.

조 베드로는 1801년 2월에 다시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가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큰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약해진 그의 몸은 더 이상의 형벌을 감당할 수 없었고, 결국에는 다시 옥에 갇힌 지 며칠 만인 3월 27일(음력 2월 14일)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마지막 형벌 때에 그는 박해자들을 향해 이렇게 신앙을 고백하였다.

“하늘에는 두 명의 주인이 없고, 사람에게는 두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천주를 위해 한 번 죽는 것뿐이며, 다른 말씀은 드릴 것이 없습니다.”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조용삼 베드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홍익만 안토니오(?-1802년)
 

홍익만(洪翼萬) 안토니오는 양반의 서자로 태어나 양근에서 살다가 1790년을 전후하여 한양의 송현으로 이주해 살았다. 1801년의 순교자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서사촌(庶四寸) 동생이요, 홍필주 필립보와 이현 안토니오의 장인이다.

홍 안토니오는 1785년에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듣고는 김범우 토마스를 찾아가 교회 서적을 빌려 읽었으며, 이승훈 베드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이후 그는 교회 지도층 신자들과 교류하면서 교리를 연구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다만,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제사를 폐지할 생각을 가졌으나, 주변 환경 탓에 이를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1796년 홍 안토니오는 사위인 홍 필립보의 집에서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만나 교리를 배운 뒤, 자주 신부를 방문하여 성사를 받았다. 또 가까운 신자들과 공동체를 만들고 교회 활동을 도왔으며, 때때로 주 야고보 신부를 자신의 집에 영접하였다. 당시 그의 집은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의 하부 조직이요 집회소였던 ‘6회’의 하나로 선정되어 있었다.

1801년에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홍 안토니오는 안산과 여주로 피신해 다녔다. 그러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문초 과정에서 홍 안토니오는 교우들을 밀고하고 천주교를 배교하도록 강요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체포된 교우들 외에는 어느 누구도 밀고하지 않았으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신앙생활을 떳떳하게 고백하였다. 이때 그가 재판관들 앞에서 대답한 내용 중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들어 있었다.

“저는 제가 지은 죄가 용서받기 어려운 것임을 스스로 알면서도, 몇 달 동안 도망을 다니다가 비로소 체포되었습니다. ……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 있으니, 마음을 바꾸어 신앙을 버릴 생각은 없습니다. 죽음밖에는 따로 진술할 말이 없습니다.”

이렇게 신앙을 증언한 홍익만 안토니오는 마침내 사형 판결을 받게 되었다. 그런 다음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 새남터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02년 1월 29일(음력 1801년 12월 26일)이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홍익만 안토니오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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