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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죽음으로 신앙을 지킨 윤유일 가족의 안식처
지번주소 경기도 이천시 모가면 어농리 322-4 
도로주소 경기도 이천시 모가면 어농로62번길 148
전화번호 (031)636-4061
팩스번호 (031)636-4062
홈페이지 http://www.onong.or.kr
전자메일 onong-hl@casuwon.or.kr
을묘박해(1795년) 순교자 3위
 
복자 윤유일 바오로(1760-1795년)와 지황 사바(1767-1795년)와 최인길 마티아(1765-1795년)

 

순교복자 윤유일 바오로 초상화.‘인박’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윤유일(尹有一) 바오로는 1760년 경기도 여주의 점들(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금사리)에서 태어나 이웃에 있는 양근 한감개(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로 이주해 살았다. 1801년에 순교한 윤유오 야고보는 그의 동생이고, 윤점혜 아가타와 윤운혜 루치아는 그의 사촌 동생들이다.

양근으로 이주한 뒤 권철신 암브로시오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던 윤 바오로는, 서적을 통해 천주교 신앙을 차츰 이해하게 되었다. 그런 다음 스승의 동생인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며, 이후 가족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데 열중하였다.

교회의 지도층 신자들은 1789년에 북경의 구베아(A. Gouvea, 湯士選) 주교에게 밀사를 보내 그동안의 상황을 보고하고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기로 하였다. 이때 밀사로 선발된 이가 바로 윤 바오로였는데, 그 이유는 그의 성격이 온순한 데다가 심지가 굳고 학식이 높았으며 교리에도 밝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윤 바오로는 북경을 오가는 상인으로 가장하고, 주교에게 보내는 신자들의 서한을 옷 안에 숨긴 뒤, 1789년 10월 조선을 떠나 북경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초에는 북당에 있는 라자로회 선교사들과 남당에 있는 구베아 주교를 만날 수 있었다. 또 윤 바오로는 북경에 머무는 동안 라자로회의 로오(N. J. Raux, 羅) 신부에게 조건부 세례를 받고, 구베아 주교에게 견진성사를 받았다. 아울러 구베아 주교에게서 ‘조선에 성직자를 파견하는 데 필요한 준비’에 대해 들었다.

윤 바오로가 1790년 봄에 귀국하자, 지도층 신자들은 성직자를 영입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 일 때문에 윤 바오로는 그해에 다시 한 번 북경을 다녀와야만 하였다.

구베아 주교는 다음 해, 조선 신자들과 한 약속에 따라 후안 도스 레메디오스(Juan dos Remedios) 신부를 조선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그 신부는 조선 밀사들과 만나지 못함으로써 조선에 입국할 수 없었다. 이렇게 1791년에 있었던 첫 번째의 영입 시도는 실패로 끝났으며, 바로 그해 말에 일어난 박해로 이러한 노력은 한동안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윤 바오로는 실망하지 않고 지황 사바, 최인길 마티아 등과 함께 성직자를 영입하고자 꾸준히 노력하였으며, 1794년 말에 마침내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조선에 잠입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뒤, 윤 바오로는 북경 교회와 연락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순교복자 지황 사바 초상화.‘지홍’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지황(池璜) 사바는 1767년에 한양의 궁중 악사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조선에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원하여 교리를 배웠다. 본래 성격이 순직하고 부지런하였던 그는, 천주교에 입교하자마자 오직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만 열중하였고, 하느님을 위해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위험이나 궁핍, 고통을 당할 때에도 결코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성직자 영입 운동이 재개된 1793년에, 이미 북경을 다녀온 적이 있는 윤 바오로와 지 사바와 박 요한이 밀사로 선발되어, 함께 조선의 국경으로 가게 되었다. 지 사바와 박 요한은 조선의 사신 행렬에 끼어 북경으로 향하였고 윤 바오로는 그곳에 남았다.

북경에 도착한 지 사바는 얼마 안 있어 구베아 주교를 만날 수 있었는데, 이때 지 사바의 신심에 감명을 받은 구베아 주교는 뒷날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우리는 1793년에 지황의 신앙심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40일간 북경에 머무르는 동안 눈물을 흘리면서 견진과 고해와 성체성사를 아주 열심히 받았습니다. 그래서 북경의 교우들은 그의 신심에 감화를 받았습니다.”

1794년 초, 구베아 주교는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하였다. 이에 지 사바는 주 신부와 만나 약속 장소를 정한 뒤, 각각 다른 길을 통해 국경으로 가서 상봉하였다. 그러나 감시가 심한 데다가 압록강이 얼기를 기다려야 하였으므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져야만 하였다.

지 사바는 이후 조선으로 귀국하였다가 다시 국경으로 가서 주 야고보 신부를 만났으며, 12월 24일(음력 12월 3일) 밤에, 그를 조선에 잠입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런 다음 윤 바오로와 함께 주 신부를 안내하여 12일 만에 한양 최인길 마티아의 집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순교복자 최인길 마티아 초상화.한양의 역관 집안에서 1765년에 태어난 최인길(崔仁吉) 마티아는,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이벽 세례자 요한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801년에 순교한 최인철 이냐시오는 그의 동생이다. 최 마티아는 이승훈 베드로가 신앙을 전파하고자 선발한 최초의 회장들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하다. 최 마티아는 입교 초기부터 동료들과 함께 이웃에 복음을 전하는 데 앞장섰으며, 윤 바오로가 1790년에 북경 교회를 방문하고 돌아온 뒤에는 성직자 영입 운동에 참여하였다.

한양 계동(현, 서울시 종로구 계동)에서 1795년 초에 주 야고보 신부를 맞이한 최 마티아는, 주 신부의 안전을 지키려고 최선을 다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밀고자에 의해 그의 입국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고 말았다. 다행히 교우들의 재빠른 처신으로 주 야고보 신부는 최 마티아의 집에서 빠져나와 여회장인 강완숙 골룸바의 집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그에 앞서 최 마티아는, 주 야고보 신부에게 피신할 시간을 벌어주고자 자신이 신부로 위장하고 집에서 포졸들을 기다렸다. 그가 역관 집안에서 태어나 중국어를 알았으므로 이런 계책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위장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체포된 지 얼마 안 있어 최 마티아의 신분이 드러나게 되었고, 이에 놀란 포졸들은 다시 주 신부의 행방을 쫓으려 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처럼 최 마티아는 주 신부를 안전하게 피신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곧 주 신부의 입국 경위가 밝혀지고, 그의 입국을 도운 밀사인 윤 바오로와 지 사바도 체포되고 말았다.

윤 바오로와 최 마티아와 지 사바는 체포된 날부터 포도청에서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이때 그들의 신앙심에서 우러나오는 굳은 인내와 결심, 그리고 지혜로운 답변은 박해자들을 당황케 하였다. 그들은 주 신부의 행방을 알아내려고 수없이 형벌을 가하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그들의 마음에는 천상의 기쁨이 넘쳐 얼굴에까지 번졌다. 이제 박해자들은 더 이상 그들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때려죽이기로 결심하였다. 그 결과 윤 바오로와 지 사바와 최 마티아는 그날로 사정없이 매를 맞고 숨을 거두게 되었으니, 이때가 1795년 6월 28일(음력 5월 12일)이었다. 당시 윤 바오로의 나이는 35세, 지 사바의 나이는 28세, 최 마티아의 나이는 30세였다. 박해자들은 비밀리에 그들의 시신을 강물에 던져 버렸다.

이후 구베아 주교는 조선의 밀사에게서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듣고는, 윤 바오로와 그의 동료들이 순교 당시에 보여 준 용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자를 공경하느냐?’는 질문에 용감히 그렇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또 그리스도를 모독하라고 하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참된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독하기보다는 차라리 천 번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단언하였습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윤유일 바오로와 지황 사바와 최인길 마티아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1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신유박해(1801년) 순교자 14위
 
복자 주문모 야고보 신부(1752-1801년)
 
1752년 중국 강남의 소주부 곤산현에서 태어난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모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그러다가 스스로 천주교 신앙을 진리라고 생각하여 이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이후 북경교구 신학교에 입학하여 제1회 졸업생으로 사제품을 받았다.

당시 북경의 구베아 주교는 조선에 성직자를 파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그는 신앙심이 깊은 데다가 조선 사람과 닮은 주 야고보 신부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하고, 성무 집행에 필요한 모든 권한을 부여하였다.

주 야고보 신부는 1794년 2월에 북경을 떠나 약속된 장소로 가서 조선 교회의 밀사인 지황 사바와 박 요한을 만났다. 그러나 압록강이 얼기를 기다려야만 했기 때문에 요동 일대에서 사목을 하다가 약속된 날짜에 다시 국경 마을로 가서 조선의 밀사들을 만났다. 그런 다음 조선 사람으로 변장하고 그해 12월 24일(음력 12월 3일) 밤에 조선에 입국하였다.

한양에 도착한 주 야고보 신부는 계동(현, 서울 종로구 계동 지역)에 있는 최인길 마티아의 집에 머물면서 한글을 배웠으며, 1795년 예수 부활 대축일에는 신자들과 함께 처음으로 미사를 봉헌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그의 입국 사실이 탄로 나자, 그는 부랴부랴 여회장 강완숙 골롬바의 집으로 피신해야만 하였다. 반면에 주 야고보 신부의 입국을 도운 밀사 윤유일 바오로와 지황 사바, 그리고 집주인 최인길 마티아 등은 그날로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혹독한 형벌을 받다가 모두 순교하고 말았다.

이때부터 주 야고보 신부는 아주 비밀리에, 그러나 열심히 성무를 집행하였다. 이곳저곳으로 다니면서 성사를 베풀었으며, 신자들의 교리 공부와 전교 활동을 위해 명도회를 조직하였고, 교리서도 집필하였다. 이처럼 그가 활동한 지 6년이 지나면서 조선 교회의 신자수는 모두 1만 명에 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1801년의 신유박해가 모든 것을 앗아 가고 말았다.

박해가 일어나자 연이어 신자들이 체포되었고, 주 야고보 신부의 행방을 자백하도록 강요를 받거나 죽임을 당하였다. 이때 주 야고보 신부는 자기 때문에 신자들이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하여 귀국을 결심하였다가, ‘나의 양 떼와 운명을 같이하여 순교함으로써, 모든 불행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자수를 결심하였다.

1801년 4월 24일(음력 3월 12일), 주 야고보 신부는 스스로 박해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내 재판이 열리고 문초가 시작되었으나, 그는 형벌 가운데서도 침착한 자세를 잃지 않고, 모든 질문에 신중하고 지혜롭게 대답하였다.

“제가 월경죄(越境罪, 몰래 국경을 넘나드는 죄)를 두려워하지 않고 지황을 따라 조선에 온 것은, 오로지 조선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 예수님의 학문은 사악한 것이 아닙니다. …… 남에게나 나라에 해를 끼치는 일은 십계에서 엄금하는 바이므로, 절대로 교회 일을 밀고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박해자들은 자신들이 원하던 말을 한마디도 들을 수 없었다. 그러자 그들은 주 야고보 신부에게 군문효수형(軍門梟首形, 죄인의 목을 베어 군문에 매어 달던 형벌)을 선고하였고, 이에 따라 신부는 형장으로 정해진 한강 근처의 새남터로 끌려갔다. 그곳에 도착한 뒤, 주 야고보 신부는 자신의 사형 판결문을 읽어 내려갔다. 그러고 나서 조용히 머리를 숙여 칼날을 받으니, 그때가 1801년 5월 31일(음력 4월 19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9세였다.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순교할 당시 다음과 같은 기이한 현상이 있었다고 전한다.

“하늘이 본디 청명하였는데, 홀연히 어두운 구름이 가득 차고 갑자기 광풍이 일어, 돌이 날리고 소나기가 쏟아져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형 집행이 끝나자 바람과 비가 곧바로 그치고, 하늘의 해가 다시 빛났으며, 영롱한 무지개와 상서로운 구름이 멀리 하늘 끝에서 떠서 서북쪽으로 흩어져 버렸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주문모 야고보 신부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윤유오 야고보(?-1801년)
 
윤유오(尹有五) 야고보는 경기도 여주의 점들(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금사리)에서 태어나 인근에 있는 양근 한감개(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로 이주해 살았다. 1795년에 순교한 교회의 밀사 윤유일 바오로는 그의 형이다.

일찍부터 형 윤유일 바오로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게 된 윤 야고보는 고향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웃에 교리를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뿐만 아니라 형이 순교한 뒤에는, 인근에 사는 조동섬 유스티노, 권상문 세바스티아노 등과 만나 기도 모임을 갖거나 교리를 연구하면서 신심을 북돋우었다. 또 1795년 초,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지방 순회에 나서 양근에 도착하였을 때 그를 만나 성사를 받기도 하였다.

1801년에는 신유박해가 일어나 각처에서 신자들이 체포되거나 순교하게 되었다. 이때 윤 야고보도 양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그곳 관아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그는 갖가지 문초와 형벌을 당하면서도 전혀 신앙을 버리지 않았으며, 관장의 강요에도 단호하게 배교를 거부하였다. 그의 마지막 신앙 고백은 다음과 같았다.

“저는 형이 가르쳐 준 십계명을,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실천해야 할 도리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서적을 밤낮으로 외우고 익혔으며, 진실로 배교할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결국 관장은 윤유오 야고보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1801년 4월 27일(음력 3월 15일), 양근 관아로부터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큰길가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게 되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윤유오 야고보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윤운혜 루치아(?-1801년)

윤운혜(尹雲惠) 루치아는 경기도에서 태어나 양근의 한감개(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에서 살았으며, 일찍이 어머니 이씨(李氏)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801년에 순교한 정광수 바르나바는 그의 남편이고, 윤점혜 아가타는 그의 언니이다.

윤 루치아는 나이가 차자, 여주에 사는 정 바르나바와 혼인하였는데, 비신자인 시부모의 반대로 혼인 문서는 주고받을 수 없었다. 또 시부모가 조상 제사에 참여하도록 강요할 때마다 그녀는, ‘교회에서 금하는 일이기 때문에 제사에 참여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이를 거부하였다. 결국 윤 루치아는 남편과 함께 부모의 곁을 떠나 한양의 벽동으로 이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때가 1799년이었다.

한양으로 이주한 뒤부터 윤 루치아 부부는 더욱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면서 교회 일을 돕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자기 집 마당 한편에 따로 집회소를 짓고,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모셔다 미사를 봉헌하였으며, 그 집회소를 교우들의 모임 장소로 제공하였다. 이때 그곳에 자주 모이던 교우들은 홍필주 필립보, 김계완 시몬, 홍익만 안토니오, 강완숙 골롬바, 정복혜 칸디다 등이었다.

윤 루치아 부부는 전교에도 힘써, 어느 누구보다 많은 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과 성모님의 상본을 그리거나 나무로 묵주를 제작하였고, 교회 서적들을 베껴서 교우들에게 팔거나 나누어 주었다.

그러던 가운데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 언니 윤점혜 아가타가 체포되자, 윤 루치아는 자기 부부도 머지않아 체포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그녀는 남편 정 바르나바를 피신시킨 다음, 교회 서적과 성물들을 다른 교우의 집으로 옮겨다 숨겨 놓았다. 그리고 혼자 남아 집을 지키다가 그해 2월에 체포되었다.

이후 윤 루치아는 포도청과 형조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며 신문을 받았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밝혀진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발설하지 않았으며, 배교도 거부하였다. 그러자 박해자들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녀에게 사형을 선고하였고, 이에 따라 윤 루치아는 형장으로 끌려 나가 5월 14일(음력 4월 2일)에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형조에서 윤운혜 루치아에게 내린 사형 선고문 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너는 남편을 도와 함께 행동하였으며, 시댁의 제사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천주교 신자들과 이웃을 삼아 서로 교류하였고, 여성 교우들과 밤낮으로 얽혀 지냈으며, 교회 서적과 성화 · 성물들을 비밀리에 제작하여 이곳저곳으로 가지고 다니며 팔았다. 여러 사람을 유혹해 들여 온, 세상을 어지럽힌 죄는 만 번 죽어도 아쉽지 않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윤운혜 루치아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정광수 바르나바(?-1802년)

정광수(鄭光受) 바르나바는 경기도 여주 부곡(현, 여주군 금사면 도곡리)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함으로써, 신자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 1801년에 순교한 윤운혜 루치아는 그의 부인이고, 정순매 바르바라는 그의 여동생이다.

정 바르나바는 입교한 뒤 누구보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양근에 살던 윤 루치아와 혼인을 하였는데, 이때 천주교 신자가 아닌 그의 부모가 결혼을 반대하였기 때문에 혼인 문서는 주고받을 수 없었다. 또한 집안에서는 교리의 가르침을 지킬 수도 없었다.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1794년 말 조선에 입국하자, 정 바르나바는 한양으로 올라가 신부에게 성사를 받고 교리도 배웠다. 그리고 신부의 명에 따라 김건순 요사팟에게 편지를 전하였으며, 고향 인근에 교리를 전하면서 비신자를 입교시키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나 정 바르나바의 부모는 여전히 천주교 신앙을 버리고 제사에 참여하도록 강요하였다. 이에 그는 1799년 아내와 함께 여주를 떠나 한양으로 이주하였다. 그런 다음 자신의 집 한편에 교회 집회소를 짓고 주 야고보 신부를 모셔다 미사를 봉헌하였으며, 이곳을 교우들의 모임 장소로 제공하였다. 이때 그의 여동생 정 바르바라도 그들 부부를 따라 한양으로 올라왔다.

본디 상당한 학식을 지니고 있던 정 바르나바는, 교회 서적을 베껴 신자들에게 배포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또한 아내와 함께 예수님과 성모님의 상본이나 묵주 등을 제작하여 교우들에게 팔거나 나누어 주었고, 가까운 교우들과 자주 만나 함께 교리를 연구하거나 기도 모임을 갖곤 하였다. 그들 부부는 자식에게도 일찍부터 교리를 가르쳐 신앙의 길로 인도하였다.

1801년에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처형인 윤점혜 아가타가 체포되자, 정 바르나바는 자기 부부도 머지않아 체포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실제로 박해 초기에 그는 이미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있었고, 2월에는 그의 집을 급습한 포졸들에게 아내 윤 루치아가 체포되었다.

당시 정 바르나바는 한양과 지방을 오가면서 이리저리 피신해 다니고 있었다. 그러다가 포졸들이 수사망을 좁혀온다는 사실을 알고는 더 이상의 피신을 단념하고 스스로 그들 앞으로 나아가 천주교 신자임을 고백하였다. 그때가 1801년 음력 5월 초순이었다.

포도청으로 압송된 정 바르나바는 여러 차례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여기에 굴복하지 않았으며, 신자들을 밀고하라는 명령도 거부하였다. 그런 다음, 형조로 이송되어 사형 판결을 받고, 고향 여주로 이송되어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2년 1월 30일(음력 1801년 12월 27일)이었다.

정광수 바르나바가 형조에서 마지막으로 진술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저는 양반의 후손으로, 나라의 금지령을 무시하고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졌습니다. 천주교 신자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주문모 신부를 아버지처럼 생각하였습니다. …… 또 천주교 성물을 만들어 곳곳에 배포하였고, 교우들과 함께 천주교 신앙을 전파하는 데 노력하였으니, 그 죄는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정광수 바르나바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윤점혜 아가타(?-1801년)

 

윤점혜(尹占惠) 아가타는 1778년경 경기도에서 태어나 양근의 한감개(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에서 살았으며, 일찍이 어머니 이씨(李氏)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795년에 순교한 윤유일 바오로는 그의 사촌 오빠이고, 1801년에 순교한 윤운혜 루치아는 그의 동생이다.

윤 아가타는 일찍부터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바치려고 동정 생활을 하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풍속에서는 처녀가 혼인을 하지 않고 혼자 산다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다. 이에 그녀는 몰래 집을 떠날 결심을 하고는, 어머니가 마련해 둔 혼수 옷감으로 남자 옷을 지어 숨겨 둔 뒤에 기회를 엿보기로 하였다. 그런 다음 어느 날 남장을 하고 사촌 오빠 윤 바오로의 집으로 가서 숨었다. 얼마 후 윤 아가타는 다시 어머니에게 돌아가 가족과 이웃 사람들에게 질책을 받았지만 꿋꿋하게 참아 내었다.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1795년에 입국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윤 아가타는, 어머니와 함께 한양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과부처럼 행세하며 동정을 지켜 나갔으며, 2년 뒤에 주 야고보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러던 가운데 어머니가 사망하자, 윤 아가타는 여회장 강완숙 골룸바의 집으로 가서 함께 생활하였다. 또 주 야고보 신부의 명에 따라 동정녀 공동체를 만들고, 그 회장으로 임명되어 다른 동정녀들을 가르쳤다. 이후, 그녀는 교리의 가르침을 엄격히 지키면서 극기와 성경 읽기, 그리고 묵상에 열중하여 다른 신자들의 모범이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어머니를 위해 연도를 자주 바쳤으며, 아가타 성녀처럼 순교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하였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윤 아가타는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압송되었고, 이후 포도청과 형조에서 갖가지 형벌을 받았다. 그렇지만 그녀는 신앙을 굳게 지키면서 밀고와 배교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박해자들도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녀에게 사형을 선고하였고, 그녀의 고향인 양근으로 압송하여 처형하게 함으로써 그곳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주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윤 아가타는 양근으로 이송되어 그곳 감옥에 갇혔다. 당시 그 감옥에는 여자 교우 한 명이 함께 갇혀 있었는데, 뒷날 그녀는 윤점혜 아가타에 대해 증언하기를 “아가타는 말하는 것이나 음식을 먹는 것이 사형을 앞둔 사람 같지 않고, 태연자약하여 이 세상을 초월한 사람 같았다.”고 전하였다.

윤 아가타는 1801년 7월 4일(음력 5월 24일)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쳤는데, 순교 당시 그녀의 목에서 흐른 피가 우윳빛이 나는 흰색이었다고 한다. 그녀가 형조에서 한 최후 진술은 다음과 같았다.

“10년 동안이나 깊이 빠져 마음으로 굳게 믿고 깊이 맹세하였으니, 비록 형벌 아래 죽을지라도 마음을 바꾸어 신앙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윤점혜 아가타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강완숙 골룸바(1761-1801년)

강완숙(姜完淑) 골룸바는 1761년 충청도 내포 지방에서 양반의 서녀(庶女)로 태어났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지혜로움이 뛰어나고 정직하여 옳지 않은 일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1801년에 순교한 홍필주 필립보는 그녀의 아들이다.

장성한 뒤 덕산 지방에 살고 있던 홍지영의 후처로 들어간 강 골룸바는, 혼인한 지 얼마 안 되어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게 되었다. 그런 다음 이에 관한 책을 얻어 읽는 가운데 그 신앙의 위대함을 깨닫게 되었다. 당시 그녀는 “천주는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고, 그 종교의 이름이 의미하는 바가 올바르니, 그 도리가 반드시 참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후 강 골룸바는 신앙에 대한 열정과 극기를 바탕으로 교리를 실천해 나갔으며, 이러한 그녀의 행동은 누구나 감탄할 정도가 되었다. 1791년의 신해박해 때에는 위험을 무릅쓰고 옥에 갇힌 신자들을 보살펴 주다가 자신이 도리어 옥에 갇힌 적도 있었다. 또 그녀는 시어머니와 전처의 아들인 홍 필립보에게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온갖 노력을 다하였음에도 남편만은 입교시킬 수가 없었고, 오히려 신앙 때문에 남편에게 시달림을 받아야만 하였다. 이후 남편은 첩을 얻어 따로 생활하였다.

어느 날, 강 골룸바는 한양의 신자들이 교리에 밝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에 그녀는 시어머니와 아들 홍 필립보와 의논한 뒤 함께 상경하였고, 이후로는 신자들과 오가면서 생활하였다. 또 성직자 영입 운동이 시작되자, 이를 위해 노력하는 교우들에게 경제적인 뒷받침이 되어 주었다.

1794년 말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그녀는 주 야고보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그를 도와 활동하였다. 이때 주 신부는 강 골룸바의 인품을 알아 여회장으로 임명하여 신자들을 돌보도록 하였다.

1795년 을묘박해가 일어나자, 강 골룸바는 자신의 집을 주 야고보 신부의 피신처로 내놓았다. 여성이 주인으로 있는 양반 집은 관헌이 들어가 수색할 수 없다는 조선 사회의 풍습을 이용하였던 것이다. 이후 그녀는 주 야고보 신부의 안전을 위해 자주 이사를 하였으며, 그때마다 그 집은 신자들의 집회 장소로 이용되었다. 윤점혜 아가타가 동정녀 공동체를 이끌어 나간 곳도 강 골룸바의 집이었다.

강 골룸바는 지식과 재치를 겸비하였으므로, 여러 사람들을 권유하여 입교시킬 수 있었다. 그들 가운데에는 지체 높은 양반 부녀자들도 있었고, 과부, 머슴, 하녀도 있었다. 왕실 친척인 송 마리아와 며느리 신 마리아가 주 야고보 신부에게 세례를 받게 된 것도 강 골룸바 덕택이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한결같이 “골룸바는 슬기롭게 모든 일을 권고하였으며, 열심인 남자 교우들도 기꺼이 그의 교화를 받았다. 그것은 마치 망치로 종을 치면 소리가 따르는 것과 같았다.”고 말하였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강 골룸바는 그동안의 활동들 때문에 곧바로 관청에 고발되었고, 4월 6일(음력 2월 24일) 집 안에 함께 있던 사람들과 같이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끌려갔다. 그 와중에서도 그녀는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잊지 않았다.

박해자들은, 강 골룸바에게서 주 야고보 신부의 행방을 알아내려고 여섯 차례나 혹독한 형벌을 가하였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녀의 굳은 신앙심은 형리들조차 “이 여인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다.”라고 감탄할 정도였다. 3개월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강 골룸바는 신심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함께 갇혀 있는 동료들을 권면하면서 순교의 길로 나아갔다. 그런 다음 사형 판결을 받고,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 그녀의 나이는 40세였다.

형조에서는 사형 선고를 내리면서 이렇게 죄목을 붙였다. “강완숙은 천주교에 깊이 빠져 이를 널리 전파하였고, 6년 동안 주문모를 숨겨 주면서 남녀와 신분을 가리지 않고 불러들여 천주교에 물들게 하였다.” 이에 대해 강완숙 골룸바는 다음과 같이 최후 진술을 하였다.

“이미 천주교를 배웠고 스스로 ‘죽으면 즐거운 세상(곧 천당)으로 돌아간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형벌을 받아 죽을지라도, 신앙의 가르침을 믿는 마음을 고칠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강완숙 골룸바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조용삼 베드로(?-1801년)
 

경기도 양근에서 태어난 조용삼 베드로는 일찍 모친을 여의고 부친 슬하에서 자라났다. 그러나 집이 가난한 데다가 몸과 마음이 모두 약하였고, 외모 또한 보잘것없었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만나면 비웃기만 하였다. 그는 서른 살이 되도록 혼인할 여성을 구할 수조차 없었다.

그 뒤 조 베드로는 부친과 함께 여주에 사는 임희영의 집에 가서 살게 되었는데, 이때 처음으로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그때부터 조 베드로는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를 스승으로 받들고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의 스승인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모든 사람이 조 베드로를 조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열심을 칭찬해 주면서 차츰 신앙의 길로 인도해 나갔다.

조 베드로가 아직 예비 신자였을 때인 1800년 4월 15일, 예수 부활 대축일을 지내려고 부친과 함께 여주 정종호의 집으로 갔다. 그리고 이곳에서 이중배 마르티노, 원경도 요한 등과 함께 대축일 행사를 갖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비록 예비 신자임에도 조 베드로의 용기는 체포되자 바로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혹독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고백하자, 박해자들은 화가 나서 더욱 세게 매질을 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박해자들은 그의 아버지를 끌어내다가 ‘네가 배교하지 않는다면 아버지를 당장에 죽여 버리겠다.’고 하면서 혹독한 매질을 하였다.

조 베드로는 마침내 굴복하여 석방되었다. 그러나 관청에서 나오다가 이 마르티노를 만나게 되었고, 그가 권면하는 말을 듣고는 곧바로 마음을 돌이켜 다시 관청으로 들어가 신앙을 고백하였다.

이후, 조 베드로의 신앙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박해자들은 전처럼 그의 마음을 꺾을 수 있으리라 믿고는 더욱 혹독한 형벌을 가하였지만, 그의 신앙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런 다음 그는 경기도 감영으로 끌려가 다시 여러 차례 문초를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 곳곳에서 신자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였다. 바로 그 무렵 조용삼은 옥중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영세하였으며, 이후로는 착한 행동과 아름다운 말로 여러 신자들을 감동시켰다.

조 베드로는 1801년 2월에 다시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가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큰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약해진 그의 몸은 더 이상의 형벌을 감당할 수 없었고, 결국에는 다시 옥에 갇힌 지 며칠 만인 3월 27일(음력 2월 14일)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마지막 형벌 때에 그는 박해자들을 향해 이렇게 신앙을 고백하였다.

“하늘에는 두 명의 주인이 없고, 사람에게는 두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천주를 위해 한 번 죽는 것뿐이며, 다른 말씀은 드릴 것이 없습니다.”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조용삼 베드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최창주 마르첼리노(1749-1801년)
 

‘여종’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었던 최창주(崔昌周) 마르첼리노는 경기도 여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40대 초반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후 그는 온 가족을 입교시키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으나, 1791년의 신해박해 때 체포되어 광주로 압송되었다가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1840년 전주에서 순교한 최조이 바르바라는 그의 딸이다.

이후 최 마르첼리노는 자신이 지은 죄를 깊게 뉘우쳤고, 순교의 은총을 입어 죄를 씻어 낼 방도를 구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는 가족과 이웃 교우들을 힘써 권면하였으며, 두 딸을 모두 교우에게 출가시켰다. 그 가운데 하나는 1801년 여주에서 순교한 원경도 요한의 아내이고, 다른 하나는 1839년 전주에서 순교한 신태보 베드로의 며느리 최 바르바라이다.

여주 지방에서는 1800년 예수 부활 대축일에 다시 박해가 일어났다. 이때 사위인 원 요한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최 마르첼리노의 아내는 그에게 피신할 것을 간청하였고, 그의 어머니 또한 피신을 종용하였다. 이에 그는 한양으로 피신하기로 작정하고 길을 나섰다. 그러나 집을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순교를 다짐했던 이전의 마음을 되찾고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으며, 그날 밤에 체포되어 여주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관장은 곧바로 최 마르첼리노에게 형벌을 가하면서 알고 있는 천주교 신자를 밀고하도록 강요하였다. 그러나 그는 “천주교에서는 누구에게라도 해를 끼치는 것을 금하고 있으니, 한 사람도 고발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면서 밀고하기를 거부하였다. 이에 그는 다시 옥으로 끌려가 원 요한과 이 마르티노 등과 함께 갇히게 되었다.

이후 최 마르첼리노의 옥중 생활은 6개월이나 계속되었다. 또 10월에는 경기 감영으로 끌려가 다시 형벌을 받았지만, 그의 신앙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1801년에 들어 신유박해가 시작되자, 감사는 옥에 갇혀 있는 신자들을 다시 끌어내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를 강요하였다. 이때 최 마르첼리노는 신자들을 대표하여 “모든 사람들의 임금이시며 아버지이신 참 천주를 알고, 그분을 섬기는 행복을 받았으니, 저희는 그분을 배반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제 형벌은 점점 더 가혹해져 갔다. 그럼에도 최 마르첼리노는 동료들과 함께 온갖 유혹을 뿌리치고 서로를 권면하였다. 그러자 감사는 그들을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는 최후 진술을 받아서 조정에 보고하였고, 조정에서는 ‘고향으로 돌려보내 처형함으로써, 그곳 백성들이 경각심을 갖도록 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에 따라 최 마르첼리노는 동료들과 함께 여주로 압송되어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1년 4월 25일(음력 3월 13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2세였다.

경기 감사가 조정에 보고한 최창주 마르첼리노의 최후 진술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최창주는 (천주라는 큰 부모가 있다 하여) 제 아버지를 진정한 아버지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아버지의 이름을 잊어버렸다고 말할 정도로 아주 흉악합니다. 또 모진 형벌을 당하면서도 교회 서적이 있는 곳을 대지 않았고, 끝내 (천주교 신앙을 믿는) 마음을 고칠 수 없다고 하였으니, 이는 인륜과 도덕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주 달가운 마음으로 죽음을 받아들이겠다고 하였습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최창주 마르첼리노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이중배 마르티노(1751?-1801년)
 

이중배(李中培) 마르티노는 경기도 여주의 양반 집안 출신으로, 본디 용기와 힘이 남보다 뛰어나고 호쾌한 기개가 있었다. 반면에 그에게는 난폭하고 성을 잘 내는 성격도 있었는데, 이러한 성격은 그가 천주교에 입교한 뒤로 완전히 변하기 시작하였다.

이 마르티노가 처음 천주교 신앙에 대해 알게 된 것은 1797년이었다. 이때 그는 사촌인 원경도 요한과 함께 평소에 가깝게 지내던 김건순 요사팟에게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듣고는 곧바로 이를 받아들였다. 그런 다음 부친과 아내에게 교리를 전하였고, 이후로는 교회의 지시에 따라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특히 그는 누가 알게 되더라도 상관하지 않고 신앙을 고백하였는데, 그의 용감한 성격이 이를 뒷받침해 주었다.

1800년의 예수 부활 대축일에 이 마르티노는 사촌인 원 요한과 함께 동료의 집으로 가서 부활 삼종 기도를 바치고, 성가를 부르며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그런데 이 무렵에는 천주교 신앙을 뿌리 뽑으려는 마음을 갖고 있던 여주의 관장이 포졸들을 풀어 은밀히 신자들을 찾고 있었다. 바로 그때 천주교 신자들이 모임을 갖고 있다는 밀고가 들어왔고, 관장은 곧장 포졸들을 그곳으로 보내 신자들을 모두 체포하도록 하였다.

관청에 끌려가자마자 이 마르티노 일행은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이때 그들은 자주 이 마르티노의 굳센 용기와 격려로 힘을 얻어 굳건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이 마르티노의 옥중 생활은 6개월이나 계속되었다. 그동안 그는 여러 차례 형벌을 받았으나 결코 신앙이 흔들리지 않았으며, 오히려 함께 있는 신자들이 굳건하게 신앙을 지킬 수 있도록 권면하였다. 또 그는 사촌인 원 요한의 늙은 여종이 옥으로 찾아와 그의 마음을 되돌리려고 하자 엄하게 꾸짖어 보냈으며, 심지어는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아버지를 설득하였다.

“아버님, 저는 효의 근본을 잊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님도 저와 같은 신자이시니, 부자의 정을 넘어 더 높은 곳에서 이 사실을 바라본다면, 인정에 끌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배반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본디 이 마르티노는 약간의 의술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옥중에서 보여준 그의 의술은, 평소 같아서는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적 같은 효험을 나타냈다고 한다. 목격자들은 한결같이 병을 치료받으려고 찾아온 사람들로 옥이 장터 같을 정도였고, 모든 이가 그 효험에 놀라워했다고 전하였다.

1800년 10월에 이 마르티노와 동료들은 경기 감영으로 이송되어 다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에 신유박해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자, 경기 감사는 옥에 갇혀 있는 신자들을 다시 끌어내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이 마르티노는 이에 굴하지 않았으며, 동료들과 함께 온갖 유혹을 뿌리치고 서로 용기를 북돋워 나갔다.

감사는 마침내 최후 진술을 받아서 조정에 보고하였고, 조정에서는 ‘고향으로 돌려보내 처형함으로써, 그곳 백성들이 경각심을 갖도록 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에 따라 이 마르티노는 동료들과 함께 여주로 압송되어 1801년 4월 25일(음력 3월 13일)에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 그의 나이는 50세가량이었다.

이에 앞서 경기 감사가 조정에 올린 이중배 마르티노의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천주교에 깊이 빠져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없앴으니, 그 죄는 만 번 죽어도 마땅합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이중배 마르티노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원경도 요한(1774?-1801년)
 

‘사신’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원경도(元景道) 요한은 경기도 여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스물세 살 되던 1797년에 사촌 이중배 마르티노와 함께 김건순 요사팟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이후 원 요한은 온 가족을 입교시켰으며, 최창주 마르첼리노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1800년의 예수 부활 대축일에 원 요한은 이 마르티노와 함께 동료의 집으로 가서 부활 삼종 기도를 바치고 성가를 부르면서 하루를 보내다가 체포되었다. 원 요한과 동료들이 여주 관아로 끌려가는 도중에 일행은 원 요한의 집을 지나치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그의 노모가 눈물을 흘리면서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게 해 달라고 포졸들에게 부탁하였으나, 포졸들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관아에 도착하자마자 여주 관장은 그들 일행에게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를 강요하고, 신자들을 밀고하라고 독촉하였다. 이때 원 요한은 일행을 대표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천주교에서는 다른 사람을 밀고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 없습니다. 더욱이 천주를 배반하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이후에도 그들은 6개월 이상이나 옥에 갇혀 있으면서 여러 차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당시 옥중에는 뒤에 체포된 원 요한의 장인인 최 마르첼리노도 함께 있었다.

그동안 원 요한은 여러 차례의 형벌로 인해 많은 상처를 입었지만, 그 상처가 기적적으로 낫곤 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늙은 여종이 옥으로 달려와 노모와 부인이 슬퍼하고 있는 사정을 전하면서 그의 마음을 움직여 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사촌인 이 마르티노의 도움을 받아 흔들리려는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1800년 10월에 원 요한과 동료들은 경기 감영으로 이송되어 다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에 신유박해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자, 경기 감사는 옥에 갇혀 있는 신자들을 다시 끌어내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원 요한은 이에 굴하지 않았으며, 동료들과 함께 온갖 유혹을 뿌리치고 서로 용기를 북돋워 나갔다.

감사는 마침내 그들로부터 최후 진술을 받고 사형을 선고한 뒤, 이를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때 감사가 내린 원 요한의 사형 선고문에는 “천주교에 깊이 빠져 교회의 지시대로 형에게 제사를 폐지하도록 권하였으니, 이는 인간의 도리를 모두 끊어 버린 행위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그 뒤 조정에서는 ‘고향으로 돌려보내 처형함으로써, 그곳 백성들이 경각심을 갖도록 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에 따라 원경도 요한은, 동료들과 함께 여주로 압송되어 1801년 4월 25일(음력 3월 13일) 많은 사람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27세 또는 28세였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원경도 요한은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심아기 바르바라(1783-1801년)
 

경기도 광주 태생인 심아기(沈阿只) 바르바라는 오빠 심낙훈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한 뒤 신자로서의 본분을 지키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에 성인들의 모범에 감동하여 하느님께 동정을 바치기로 결심하였으며, 이후로는 조용히 집 안에서만 지내면서 모범적으로 교회의 법규를 지켜 나갔다.

1801년의 신유박해로 오빠가 체포되자, 심 바르바라는 포졸들이 얼마 안 있어 자신에게도 찾아올 것이라 예상하고 그들을 기다렸다. 마침내 포졸들이 들이닥쳐 체포하려고 하자, 그녀는 어머니를 향해 “너무 슬퍼하지 마시고 제가 천주의 성스러운 뜻에 순종하도록 놓아두십시오.”라고 말한 뒤, 스스로 그들 앞으로 나아가 분명하게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런 다음 동요하지 않고 옷을 갈아입고서 한양으로 끌려갔다.

이후 심아기 바르바라는 포도청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며 모진 형벌을 받았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계속되는 형벌을 견디어 내지 못하고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1년 4월 초로, 당시 그녀의 나이는 18세였다.

반면에 심 바르바라에 앞서 체포된 오빠는 형벌을 이기지 못하고 무안(務安)으로 유배되었다. 그녀가 매를 맞다가 순교한 뒤, 그녀의 오빠가 박해자들에게 진술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저는 제 누이 바르바라에게 (천주교의 교리를) 가르쳐 포도청에서 매를 맞아 죽게 하였는데, 누이는 끝까지 (신앙의 가르침을 믿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심아기 바르바라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정순매 바르바라(1777-1801년)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난 정순매(鄭順每) 바르바라는 열여덟 살 되던 해인 1795년에 오빠 부부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의 오빠는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도와 교회 일에 참여한 정광수 바르나바였고, 올케는 유명한 교우 집안 출신인 윤운혜 루치아로, 모두 1801년에 순교하였다.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자마자, 정 바르바라는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또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바치려고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한 뒤, 주변 사람들에게는 ‘허가와 혼인하였다가 과부가 되었다.’고 말하면서 과부로 행세하였다.

정 바르바라는 이후, 서울로 올라가 생활하면서 오빠 부부를 도와 교회 서적과 성물을 신자들에게 보급하는 일을 담당하였으며, 윤점혜 아가타가 회장으로 있던 동정녀 공동체의 일원으로도 활동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집에서 공소 예절을 치를 때면 언제나 정성을 다해 모든 것을 준비하였다. 그러던 중 주문모 야고보 신부에게 1800년에 세례를 받았고, 이후로는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착한 일을 하는 데 정성을 다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된 정순매 바르바라는, 문초와 형벌을 겪으면서도 아주 뛰어난 용덕을 보여 주었다. 그녀는 한 사람의 교우도 밀고하지 않았으며, ‘비록 죽음을 당할지라도 신앙을 버릴 수 없다.’고 하면서 여러 차례 신앙을 증언하였다. 그러므로 관장은 그녀에게 혹독한 형벌을 가하도록 하였지만, 자신이 원하던 것을 전혀 얻어낼 수가 없었다.

마침내 정 바르바라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고향으로 보내 처형함으로써 그곳 백성들이 경각심을 갖도록 하라.’는 명령에 따라 여주로 이송되었다. 그런 다음 1801년 7월 3일(음력 5월 23일), 또는 7월 4일에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당시 그녀는 24세의 나이로 동정녀였다.

정순매 바르바라가 사형 판결을 받기 전에 말한 최후 진술은 다음과 같다.

“포도청에서 모진 형벌을 받고 형조에서 엄한 문초를 당하는 것이 고통스럽지만, 저는 천주교 신앙을 너무나 좋아하여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습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순매 바르바라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홍필주 필립보(1774-1801년)
 

홍필주(洪弼周) 필립보는 충청도 덕산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1790년경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에게 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아명은 ‘문갑’(文甲)이다.

홍 필립보의 아버지는 처음부터 천주교 신앙을 아주 싫어하였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교리를 배워 입교한 계모 강완숙 골룸바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신앙을 실천해 나갔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는 아들 홍 필립보가 입교한 뒤로는 자신이 이해한 교리를 아들에게 가르쳐 주었으며, 홍 필립보 또한 어머니의 열렬한 덕행을 모범으로 삼았다.

이듬해에 신해박해를 겪고 나서, 홍 필립보는 할머니와 어머니를 따라 한양으로 이주하였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여전히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따라서 고향 집에서는 신앙생활을 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한양으로 올라온 홍 필립보는 가족과 함께 아주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1795년 5월에 어머니 강 골룸바가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자신의 집으로 피신시키자, 이때부터 신부의 복사가 되어 여러 가지 일을 돕기 시작하였다. 또 홍익만 안토니오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함께 교회 일을 도왔다.

이후, 홍 필립보는 자신의 집이 조선 교회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되자, 주 야고보 신부와 신자들의 안전을 위해 어머니와 함께 이곳 곳으로 집을 옮겨 다녔다. 또 한편으로는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회장을 비롯하여, 교회 지도층 신자들과 교류하면서 신심을 쌓아 갔다. 이러한 이유로 그의 이름은 어머니 강 골룸바와 함께 점차 교회 안에 드러나게 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홍 필립보의 이름은 일찍부터 박해자들의 명단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므로 박해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 포졸들이 그의 집으로 들이닥쳤고, 곧바로 그와 그의 어머니와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을 체포하였다.

포도청으로 끌려간 홍 필립보는, 형벌을 받으면서도 주문모 야고보 신부의 행방과 그동안의 행위를 조금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러나 혹독한 형벌이 계속되면서 그의 마음은 차츰 약해지게 되었다. 이때 조사를 받으러 가던 어머니 강 골룸바가 그를 보고는 “필립보야, 너는 어찌 예수 그리스도께서 네 머리 위에 임하시어 비추고 계심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그릇된 길로 가려고 하느냐?” 하고 권면하였다. 이에 그는 곧장 마음을 돌이켜 박해자들을 향해 ‘절대로 신앙을 버릴 수 없다.’고 고백하였다.

이후 그의 어머니는 먼저 순교하였지만, 홍 필립보는 오랫동안 옥에 갇혀 고통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조금도 마음이 약해지지 않았으며, 마침내는 동료들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게 되었다. 그런 다음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1년 10월 4일(음력 8월 27일)로, 그의 나이는 27세였다.

홍필주 필립보가 사형 선고를 받기 전에 형조에서 말한 최후 진술은 다음과 같았다.

“계모와 한마음으로 천주교에 깊이 빠졌으며, 외국 사람(주문모 야고보 신부)을 기이한 재물과 같이 생각하여 아버지처럼 모셨으니, 그 죄가 대단히 큽니다. 그뿐만 아니라 남녀가 함께 모여 비밀 공동체를 이루고, 어리석은 백성들을 유혹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에게서 손가락질을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는 것이라면 비록 사형을 받을지라도 달게 여기겠습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필주 필립보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한덕운 토마스(1752-1802년)

충청도 홍주 출신인 한덕운(韓德運) 토마스는 1790년 10월에 윤지충 바오로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바로 그 이듬해 윤 바오로는 신해박해로 체포되어 전주에서 순교하였다. 그럼에도 한 토마스는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하면서 더욱 열심히 교리를 실천해 나갔다.

그러던 가운데 한 토마스는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에 그는 성사의 은총을 받으려는 생각에서 주 야고보 신부를 만나려고 하였지만, 끝내 뜻을 이룰 수 없었다.

1800년 10월 한 토마스는 좀 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고향을 떠나 경기도 광주 땅에 속한 의일리(현, 경기도 의왕시 학의동)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성실하게 생활하면서 기도와 독서를 부지런히 하였으며, 오로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데에만 열중하였다. 그는 신자들을 모아 놓고 가르치고 권면하기를 좋아하였는데, 이럴 때면 그의 말은 언제나 그의 마음과 마찬가지로 굳건하고 날카로웠다고 한다.

이듬해 초에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한 토마스는 옹기 장사꾼으로 변장을 한 뒤 한양으로 올라가 보기로 작정하였다. 교회와 교우들의 소식이 궁금하여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양으로 올라가는 도중 청파동에 이르렀을 때, 한 토마스는 거적으로 덮여 있는 홍낙민 루카의 시신을 보게 되었다. 이때 그는 놀라고 비통한 마음으로 그 시신에 애도를 표하였다. 그런 다음, 그의 아들인 홍재영 프로타시오를 보고는 부친을 따라 함께 순교하지 못한 것을 엄하게 질책하였다. 홍 프로타시오는 그 뒤 다시 신앙을 되찾아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다가 1839년에 순교하였다.

한 토마스는 서소문 밖에서 최필제 베드로의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러 주기도 하였다. 사실 박해 상황에서 신자들의 시신을 돌보아 준다는 것은 자신이 신자임을 드러내는 위험한 일이었다. 결국, 한 토마스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끌려갔고, 여러 차례 혹독한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결코 다른 사람을 밀고하지 않았으며, 어떠한 형벌에도 굴하지 아니하였다. 그런 다음 동료들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고 경기도 광주에 있는 남한산성으로 옮겨져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02년 1월 30일(음력 1801년 12월 2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한덕운 토마스가 사형 선고를 받기 전에 한 최후 진술은 다음과 같다.

“저는 천주교의 교리를 깊이 믿으면서 이를 가장 올바른 도리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이제 비록 사형을 받게 되었지만, 어찌 (신앙의 가르침을 믿는) 마음을 바꿀 생각이 있겠습니까? 오직 빨리 죽기를 바랄 뿐입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한덕운 토마스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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