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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 죽산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끌려간 사람 잊어야 하기에 이진 터인가?
지번주소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 죽림리 703-6 
도로주소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 장암로 276-44
전화번호 (031)676-6701
팩스번호 (031)676-6702
홈페이지 http://org.catholic.or.kr/juksan
전자메일 juksan-hl@casuwon.or.kr
복자 박경진 프란치스코(1835-1868년)

1835년에 태어난 박경진 프란치스코는 장성한 다음 오(吳) 마르가리타와 혼인하여 충청도 청주에서 살았다. 그들 부부는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안전한 곳을 찾아 아들 사 형제를 데리고 진천 절골(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로 이주하여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하였다.

박 프란치스코의 가족은 절골에서 2년가량 평온하게 생활하면서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그러나 1868년에 이르러 박해가 더욱 거세어지면서 다시 위험에 놓이게 되었고, 그해 9월 5일(음력 7월 19일)에는 마침내 경기도의 죽산 포졸들이 절골로 들이닥쳤다.

이때 박 프란치스코의 가족은 포졸들이 온다는 사실을 알고 산중으로 피신하던 도중에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그중에서 박 프란치스코의 아내 오 마르가리타는 어린 자식을 업고 산에 숨어 있다가 체포되어 많은 매를 맞았다.

한편 가족의 사정이 궁금해진 박 프란치스코는, 동정을 살피려고 산에서 내려오다가 그 동네의 한 비신자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런데 그 비신자는 박 프란치스코에게 ‘내 집에 자면서 동정을 살피는 것이 좋겠다.’며 안심을 시키고는 밤중에 뒷문으로 빠져나가 포졸들에게 박 프란치스코를 밀고하였다.

박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체포되어 아내 오 마르가리타와 함께 죽산으로 끌려갔다. 박 프란치스코는 옥중 생활을 하는 동안 동생인 박 필립보와 맏아들 박 안토니오에게 소식을 전하였는데, 특히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당부가 들어 있었다.

“어린 조카들을 잘 보살피면서 진정으로 천주님을 공경하고, 천주님께서 안배하시는 대로 순명하여 나의 뒤를 따라오도록 하여라.”

이 편지는 집안에 남아 있던 성물과 함께 박해 중에 소실되었다고 한다.

박 프란치스코와 오 마르가리타 부부는, 이후 어떠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굳건하게 신앙을 지켰다. 그런 다음 1868년 9월 28일(음력 8월 13일) 죽산에서 함께 순교하였으니, 당시 박경진 프란치스코의 나이는 33세였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박경진 프란치스코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오 마르가리타(?-1868년)

오(吳) 마르가리타의 출생지와 천주교에 입교한 사정은 알려져 있지 않고, 뒷날 박 프란치스코와 혼인하여 충청도 청주에서 살았다는 사실만이 알려져 있다. 그들 부부는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안전한 곳을 찾아 아들 사 형제를 데리고 진천 절골로 이주하여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하였다.

박해가 더욱 거세어지면서 1868년 9월 5일(음력 7월 19일)에 경기도의 죽산 포졸들이 절골로 들이닥쳤다. 오 마르가리타는 어린 자식을 업고 산에 숨어 있다가 가장 먼저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많은 매를 맞았다. 그리고 동정을 살피려고 산에서 내려왔다가 나중에 체포된 남편과 함께 죽산으로 끌려갔다.

오 마르가리타와 박 프란치스코 부부는, 이후 어떠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굳건하게 신앙을 지켰다. 그런 다음 죽산에서 함께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68년 9월 28일(음력 8월 13일)이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오 마르가리타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김 도미니코(?-1866년)

순교자 ‘김 도미니코’는 박해를 피해 깊은 산속에 숨어 평온히 주님께 의존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천주교 신자인 것을 안 마을 사람 10여명이 찾아와 열일곱 살 난 그의 딸을 겁탈하려고 딸을 내놓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힘이 센 김 도미니코의 둘째 아들이 누이동생을 데리고 산으로 피하며 따라오는 사람은 돌로 쳐 죽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순교자 김 도미니코에게 딸을 내놓지 않으면 포졸을 데리고 와서 너희 가족을 몰살하겠다고 위협하였습니다. 그래서 순교자 김 도미니코는 여러 가족을 생각하여 할 수 없이 피눈물을 흘리면서 딸을 그들 앞에 내어 주었습니다. 이렇게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갖은 모욕과 고난을 당하면서도 신앙을 고수하다가 마침내는 순교의 길을 걸어간 것입니다.
 
 
여기중(?-1866년)과 여정문(?-1867년)

순교자 여기중은 한 가족 3대가 한 자리에서, 순교자 여정문은 아내와 어린 아들과 함께 한날 한 자리에서 순교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국법으로도 부자를 한 날 한 시 한 장소에서 처형하는 것을 금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죽산 순교성지에서는 부자가, 부부가 한 날 한 장소에서 처절하게 처형되었습니다. [출처 : 이상 죽산순교성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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