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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 배티 성지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최양업 신부의 사목 중심지이자 순교자들의 본향
지번주소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 471 
도로주소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 배티로 663-13
전화번호 (043)533-5710
팩스번호 (043)533-5721
홈페이지 http://www.baeti.org/
관련기관 양업 교회사연구소    
관련주소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 배티로 663-13
문화정보 충청북도 기념물 제150호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1821-1861년)
 
탄생과 성장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는 1821년 3월, 충청남도 청양의 다락골 인근에 있는 새터 교우촌에서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과 순교자 이성례 마리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박해를 피해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던 부친을 따라다니다가 경기도 부평을 거쳐 안양에 있는 수리산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이 수리산 마을은 그 뒤 신자들이 하나둘 모여들면서 비밀 신앙 공동체로 변모하였다.

이에 앞서, 조선 대목구의 전교를 위임받은 파리 외방 전교회에서는 선교사들을 조선으로 파견하려고 여러 가지로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경 감시가 심한 데다가 박해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으므로, 서양 선교사가 조선에 들어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난관을 극복하고 처음으로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는 프랑스 출신의 성 모방 베드로 신부였다.

1835년 말, 조선 천주교회에서 파견한 밀사들의 안내로 입국한 모방 신부는 곧바로 전국의 신앙 공동체들을 순회하기 시작하였고, 이듬해 초에는 부평에 있는 최경환 프란치스코의 집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장래가 촉망되는 최양업 토마스를 한국의 첫 신학생으로 선발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15세였다.

신학생으로 선발된 최양업 토마스는 1836년 2월 6일 서울의 모방 신부 댁에 도착하여 라틴어 수업을 받았다. 이어서 모방 신부가 신학생으로 간택한 최방제 프란치스코가 3월 14일에, 김대건 안드레아가 7월 11일에 각각 도착하여 함께 생활하였다.

마카오 유학과 부제 서품

최 토마스는 1836년 12월 2일, 동료 신학생들과 함께 성경에 손을 얹고 순명을 서약하고, 다음 날 마카오 유학길에 올랐다. 그리하여 중국 대륙을 남하하여 다음 해 6월 7일 마카오에 있던 파리 외방 전교회 극동 대표부에 도착하였으며, 이때부터 그곳에 임시로 설립된 신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하였다.

마카오에서의 유학 생활은 1842년까지 계속되었는데, 1837년 11월에는 동료인 최방제 프란치스코가 열병으로 사망하는 아픔을 겪었고, 1839년에는 마카오의 소요 때문에 필리핀의 마닐라로 장소를 옮겨 수업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다가 같은 해 말에 마카오로 돌아왔다.

그러나 신학생 최 토마스는 아직 공부가 끝나기도 전인 1842년 4월에 마카오를 떠나게 되었다. 한국과 통상 조약을 원하는 프랑스 함대에서 통역자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이때 극동 대표부의 장상인 리브와(Libois) 나폴레옹 신부는 박해로 끊어진 조선 천주교회와 연락을 기대하고 최 토마스와 김 안드레아를 각각 다른 프랑스 함대에 승선토록 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가 남경에 도착한 다음에 더 이상의 북진을 원하지 않게 되자, 최 토마스와 김 안드레아는 프랑스 함대에서 내려 요동으로 가게 되었다. 조선으로 들어가고자 입국로를 탐색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최양업 토마스는 만주의 소팔가자로 거처를 옮겨 조선 대목구의 부주교인 페레올(Ferreol) 요한 주교에게 계속 수업을 받았고, 1843년에는 리브와 신부를 통해 프랑스 파리의 무염 성모 성심회에 가입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조국에서 일어난 박해와 순교자들의 소식을 들었다. 이때 그는 프랑스로 귀국해 있던 스승 르그레즈와(Legregeois) 베드로 신부에게 서한을 보내 다음과 같이 자신의 심정을 이야기하였다.

“저는 우리 부모님과 형제들을 따라서 공을 세우지 못하였으니, 저의 신세가 참으로 딱합니다. 그리스도 용사들의 그처럼 장열한 전쟁에 저는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말입니다. 정말 저는 부끄럽습니다! 이렇듯이 훌륭한 내 동포들이며, 이렇듯이 용감한 내 겨레인데, 저는 아직도 너무나 연약하고 미숙함 속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인자하신 하느님 아버지, 당신 종들의 피가 호소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어 당신의 넘치는 자비와 당신 팔의 전능을 보이소서. 언제쯤이나 저도, 신부님들의 그다지도 엄청난 노고와 저의 형제들의 고난에 참여하기에 합당한 자가 되어, 그리스도의 수난에 부족한 것을 채워, 구원 사업을 완성할 수 있을까요?”

신학 수업을 계속하던 최양업 토마스는 1844년 12월 10일경에, 동료 김대건 안드레아와 함께 페레올 주교에게 부제품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김대건 안드레아 부제가, 사제품을 받고서 페레올 주교, 성 다블뤼(Daveluy) 안토니오 신부와 함께 조선에 입국한 뒤에도, 소팔가자에 남아 있으면서 매스트르(Maistre) 요셉 신부와 함께 귀국로를 찾고자 지속적으로 노력하였다.

사제 수품과 귀국

귀국로를 탐색하는 동안 최 토마스 부제는 조선 천주교회의 밀사들을 만나, 1846년의 박해와 동료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순교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서한을 보내 조국의 애통한 소식을 알렸다.

“마침내 지루했던 기나긴 포로 생활에서 해방되고, 저의 동포들한테 영접을 받으리라 희망하면서 크게 기쁜 마음으로 용약하여 변문(한중 국경의 성문)까지 갔습니다. 그러나 변문에 도착하여 보니, 이 희망이 산산이 무너졌습니다. 너무나 비참한 소식에 경악하였고, 저와 조국 전체의 가련한 처지가 위로받을 수 없을 만큼 애통하였습니다. …… 특히 저의 가장 친애하는 동료 안드레아 신부의 죽음은 신부님께도 비통한 소식일 것입니다.”

조선 천주교회 밀사들의 만류로 귀국을 포기한 최 토마스 부제는 극동 대표부가 이전해 있던 홍콩에 도착한 뒤에 ‘한국 순교자들의 행적’을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귀국로 탐색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1847년 8월에는 프랑스 군함을 타고 조선의 해안에 도달하였지만 밀사들을 만나지 못하여 귀국에 실패하고 말았다.

다시 상해로 거처를 옮긴 최양업 토마스 부제는 1849년 4월 15일, 마침내 서가회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이때 그에게 사제품을 준 사람은 예수회원으로 강남 대목구장으로 있던 마레스카(Maresca) 주교였다.

사제품을 받은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그해 5월에 상해를 출발하여 중국 요동 지방으로 가서 성 베르뇌(Berneux) 시메온 신부 아래서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1월에 매스트르 신부를 다시 만나 귀국을 시도한 끝에, 12월 3일 조선 천주교회의 밀사들을 만나 귀국하게 되었다. 이때 매스트르 신부는 발각될 위험이 있었으므로 조선에 입국하지 못하였다.

사목 활동과 선종

귀국하자마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만난 뒤, 각처에 숨어 있는 신자들을 순방하기 시작하였는데, 1850년 초부터 6개월 동안 5개 도와 5천여 리를 걸어다니며 3,815명의 신자를 방문하였다. 이후, 진천 배티를 사목 중심지로 삼게 되었다.

이러한 사목 활동은 11년 6개월여 동안 꾸준히 계속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휴식 기간을 이용하여 한문 교리서와 기도서를 한글로 번역하였고,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을 도왔으며, 신학생들을 말레이 반도에 있는 페낭(Penang) 신학교로 보냈고,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을 수집하였다.

물론 전국에 산재해 있는 신자들을 순방하기란 쉽지 않았다. 도중에 최 토마스 신부는 서양인으로 오인을 받아 마을에서 쫓겨나기도 했고, 포졸들의 습격으로 죽을 위험에 처하기도 하였다. 특히 1859년에는 순방 도중에 발각되어 포졸과 외교인들로부터 흠씬 두들겨 맞고, 주막에서 쫓겨나 반쯤 나체가 된 몸으로 눈 쌓인 밤을 헤맨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그의 신앙과 조국애, 그리고 신자들에 대한 애정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1860년 경신박해 때,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몇 명의 신자들과 함께 경상남도의 한 모퉁이에 갇혀서 대목구장 베르뇌 주교나 다른 선교사들과 연락이 끊긴 채 지내야만 하였다. 이때 그는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다시 서한을 보내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고, 다음과 같이 조선 천주교회를 도와주십사고 부탁하였다.

“우리를 환난에서 구하소서. 엄청난 환난이 우리에게 너무도 모질게 덮쳐 왔습니다. 원수들이 우리에게 달려들고 있습니다. 당신의 보배로운 피로 속량하신 당신의 유산을 파멸시키려 덤벼들고 있습니다. 당신께서 높은 데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들을 대항하여 설 수가 없습니다.

지극히 경애하올 신부님들께서 열절한 기도로 저희를 위하여 전능하신 하느님과 성모님께 도움을 얻어 주시기를 청합니다.

이것이 저의 마지막 하직 인사가 될 듯합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지, 계속 추적하는 포위망을 빠져나갈 수 있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 불쌍하고 가련한 우리 포교지를 여러 신부님들의 끈질긴 염려와 지칠 줄 모르는 애덕에 거듭거듭 맡깁니다.”

다행히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갇혀 있던 곳을 빠져나와 경상도 남부 지방의 사목 방문을 다 마친 다음, 베르뇌 주교에게 성무 집행 결과를 보고하고자 길을 나섰다. 그러나 과로에다 장티푸스까지 덮쳐 1861년 6월 15일에 문경읍 또는 진천 배티 교우촌에서 선종하고 말았으니, 이때 그의 나이 40세였다.

이 소식을 들은 베르뇌 주교는, 파리 외방 전교회의 신학교 교장인 알브랑(Albrand)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서, 다음과 같이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신심과 열심, 그리고 평소에 보여 준 사제로서의 분별력을 칭송하고, 동시에 그를 잃은 아쉬움을 표시하였다.

“최 토마스 신부는 신심, 영혼의 구원을 위한 불과 같은 열심, 그리고 무한히 귀중한 일에서는 훌륭한 분별력으로 우리에게 그렇게도 귀중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유일한 한국인 신부 최 토마스가 구원의 열매를 풍성히 맺은 성사 집행 뒤에, 내게 자신의 업적을 보고하려고 서울에 오던 중, 지난 6월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착한 신부가 처해 있는 위험에 대한 소식을 맨 처음 받은 푸르티에(Pourthie) 신부는 그에게 마지막 성사를 줄 수 있을 만큼 일찍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그 신부는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죽어 가는 그의 입술에서 아직 새어 나오는 말이 단지 두 마디 있었으니, 그것은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이었습니다. …… 최 토마스 신부는 12년간 거룩한 사제의 모든 본분을 지극히 정확하게 지킴으로써 사람들을 감화시키고, 성공적으로 영혼 구원에 힘쓰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의 죽음은 저를 난처하게 합니다. 그가 성무를 집행하던 구역에는 커다란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는, 서양 사람이 뚫고 들어가기 어려운 많은 마을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를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이 서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배론 신학교에서 170-180리 지점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그 당시 신학교에 있던 푸르티에 신부가 이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는 곧장 최 토마스 신부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그가 들을 수 있는 말은 아주 열성적으로 부르는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뿐이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선종 뒤, 5개월이 지난 다음, 베르뇌 주교의 주례로 최 신부의 장례가 성대하게 치러졌고, 그의 시신은 배론 신학교 뒷산에 안장되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진천 출신 순교자 중 복자 8위
 
복자 오반지 바오로(1813-1866년)

오반지(吳盤池) 바오로는 충청도 진천의 반지(현, 충북 진천군 이월면 사곡리)에서 오랫동안 살아오던 집안 출신으로, 비교적 풍요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장성할 때까지 공부와는 담을 쌓았으며, 혼인한 뒤에는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다 날려 버리고 말았다.

오 바오로가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된 것은 40세가 훨씬 지난 1857-1858년 무렵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아주 성실한 사람이 되었는데, 어느 날에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가족과 함께 진천의 지장골(현, 충북 진천군 진천읍 지암리)로 이주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그리스도교적인 체념으로 가난을 참아 견디었으며,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의 본분을 아주 정확하게 지켜 나갔다.

오 바오로의 열심은 이내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래서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마자 청주 병영에서 파견된 포졸들이 그를 체포하기 위해 지장골로 들이닥쳤다. 그는 한 젊은이와 함께 체포되어 진천에 투옥되었다가 청주로 이송되었으니, 이때가 3월 13일(음력 1월 27일)이었다.

청주 병영으로 압송된 오 바오로는 모진 형벌과 문초 가운데서도 교회 일을 조금도 누설하지 않았으며, 단지 ‘나는 천주교인이요.’라는 말만을 되풀이하였다. 한번은 형벌을 받고 옥으로 끌려갈 때, 형리들이 몽둥이로 그의 머리를 내리쳐 피가 솟아나자, 오 바오로는 대뜸 “나를 죽이고 싶으면 죽여도 좋소. 하지만 관장의 명령도 없는데 왜 마음대로 때리는 거요”라고 항의하였다.

당시 옥에는, 오 바오로와 함께 체포된 젊은이와 새로 체포되어 온, 배 바오로라는 교우가 있었다. 관장은 이들 세 사람을 죽일 생각이 없었으므로 ‘배교한다.’는 한마디만을 얻어 내려고 여러 방법으로 유혹하였지만, 오 바오로는 조금도 이러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권면에도 함께 갇혀 있던 동료들은 관장의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다. 오 바오로가 옥중에 있을 때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당부의 말이 적혀 있었다.

“교우로서의 본분을 잘 지키고 남의 빚을 갚도록 하여라. 그리고 만일 체포되면 주님을 위해 순교하도록 하여라.”

관장은 어떠한 형벌과 유혹으로도 오 바오로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음을 알고는 마침내 그에게 사형을 언도하였다. 이때 오 바오로는 “만 번 죽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할 수 없다.”는 말로 신앙을 증언하고, 청주 남문 밖으로 끌려 나갔다. 그런 다음 사형 집행을 관장하는 관리가 마지막으로 배교를 유도하려고 종이를 갖다 주자, 그는 끝까지 ‘배교한다는 말을 쓸 수 없다.’고 단언하였다.

바로 그때였다. 오반지 바오로의 옆에 있던 사형 집행인이 그에게 달려들어 군중이 보는 앞에서 그의 목을 졸라 죽이고 말았다. 이렇게 오 바오로가 순교한 날은 1866년 3월 27일(음력 2월 11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3세였다. 그가 순교한 날에는 ‘백일청천에 무지개가 떠서 그의 시체에서부터 하늘까지 닿았다.”고 한다. 오반지 바오로의 시신은 아들과 신자들 몇 명에 의해 지장골로 옮겨져 그 인근에 안장되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반지 바오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김원중 스테파노(?-1866년)

충청도 진천의 발래기(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 명암리)에 살던 김원중 스테파노는 본디부터 성품이 순량하고 온후하였으며, 그의 열심과 신덕은 교우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의 이웃에는 사촌인 김선화 베드로가 살고 있었다.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진천 관아에서는 이미 발래기 신자들에 대해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으므로, 전갈을 보내와 “다시는 천주교를 봉행하지 않겠다는 증거로, 천주교 서적을 관아에 갖다 바치고 직접 관장 앞에서 다짐을 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러한 전갈을 받은 발래기 신자들은 놀랍고 두려운 나머지 대부분 관청으로 서적을 갖다 바치고, 관장 앞에 가서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다.

이때 김 스테파노만은 “내가 천주교를 신봉하는데 어찌 배교 행위를 하겠느냐?”라고 말하면서 서적도 갖다 바치지 않고, 관아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그러자 이 소식을 들은 외교인들은 물론, 발래기의 신자들까지도 그 화가 자신들에게 미칠까 두려워 김 스테파노를 원망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신앙을 위해 모든 원망을 감수하였다.

1866년 11월 10일(음력 10월 4일), 관아에서는 다시 전갈을 보내와 “발래기 사람들은 모두 관아에 출두하라.”고 명령하였다. 이 명령을 전해 들은 김 스테파노는 교우들에게 “이제 들어가면 모두 죽게 될 것이다. 그러니 모두 관아로 갈 것이 아니라, 죽음을 달게 받을 정도로 신덕이 깊은 사람만 관아로 가자.”고 말하였다.

이튿날 진천 관아에서 포졸들이 왔을 때, 발래기 신자들 중에서 김 스테파노를 비롯하여 10명만이 자진하여 체포되었다. 그들 일행이 관아로 들어가자 관장은 “일전에 갖다 바친 책이 누구의 것이냐?”라고 물었다. 김 스테파노는 책을 갖다 바친 적이 없으면서도 “저의 책이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관아에서는 곧바로 그를 가두어 버렸고, 이때 신성순 회장과 2명의 신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겁에 질려 배교를 다짐하였다.

진천 관아에서는 25일 동안 이들을 가두었다가, 모두 12월 6일(음력 10월 30일)에 감사가 주재하던 공주로 압송하였다. 이때 김 스테파노는 공주로 압송되기에 앞서 아우에게 편지를 보내, “나는 주님을 위해 순교할 각오가 되어 있으니, 너도 아무쪼록 주님을 위해 열심히 수계하여 훗날 천당에서 다시 만날 수 있도록 하여라.”라고 당부하였다. 아울러 아내에게도 다음과 같은 당부의 말을 전하였다.

“우리는 모두 주님께서 창조하신 것이오. 자녀들을 잘 보살피고, 죽으나 사나 주님의 명에 순종하다가, 죽은 뒤에 천당에서 서로 만날 수 있도록 합시다. 나는 공덕이 없지만 주님의 도우심만을 믿고 천당에 오르기를 바라고 있으니, 이 세상에서는 다시 나를 볼 생각을 하지 마시오.”

김원중 스테파노 일행을 인도받은 공주 관아에서는 이들을 모두 옥에 가두었다. 그러나 이후 그들이 어떠한 형벌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모두가 끝까지 신앙을 증언하였으며, 12월 16일(음력 11월 10일) 함께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는 사실이다. 김원중 스테파노의 아우가 공주로 와서 이들 네 명의 시신을 찾아 장사를 지내 주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김원중 스테파노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장 토마스(1815-1866년)

경기도 수원 느지지(현, 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요당리)에서 태어난 장(張) 토마스는 1866년에 순교한 장주기 요셉 성인의 육촌 형제로, 그와 함께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 입교하였다. 이후 그들은 참된 신앙생활을 위해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다니면서 교회 일을 도왔다. 그러다가 장주기 요셉 성인은 충청도 배론(현, 충북 제천시 봉양면 구학리)에 정착하였고, 장 토마스는 진천 배티(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에 정착하였다. 당시 배티에는 장 토마스의 인척으로 생각되는 장 시몬 회장이 거주하고 있었다.

장 토마스는 이때부터 열심히 계명을 지키는 생활을 하면서 하나뿐인 아들에게 열심히 교리를 가르쳤다. 이 무렵 가까운 인척과 친구들은, 그의 본심이 순량한 탓에 그에 대해 말할 때면 언제나 ‘착한 사람’이라고 일컬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시작된 뒤, 장 토마스는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곳으로 피신하지 않고 오로지 주님의 명령만을 따르기로 작정하였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청주 포졸들이 들이닥쳐 그와 가족들을 모두 체포하였다.

이내 진천 관아로 압송된 장 토마스는 관장 앞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때 관장이 “천주교를 배반하면 죽이지 않을 것이며, 너의 세간을 돌려주어 살 수 있도록 할 것이다.”라고 말하자, 그는 “세간과 목숨은 버릴지언정 천주교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 토마스는, 군대가 주둔하는 청주로 이송되었다. 그곳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을 때 다시 영장이 “천주교를 배반하지 못하겠느냐?”라고 묻자, 여전히 “만 번 죽어도 천주교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한결같이 대답하였다.

이윽고 장 토마스에게 사형이 선고되고, 포졸들은 그를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將臺, 현,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 2가)로 끌고 나갔다. 바로 그때 장 토마스는 자기의 대자가 배교하려는 것을 목격하고는 “주님을 위하여 천주교를 봉행해 왔는데, 이런 기회를 버리고 목숨을 건진다면 장차 천주님의 벌을 어찌 면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권면하였다. 그런 다음, 칼날 아래 목을 드리우고 순교의 영광을 얻었으니, 당시 장 토마스의 나이는 51세였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장 토마스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송 베네딕토(1798-1867년)

송(宋) 베네딕토는 충청도 충주 서촌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자식들에게도 열심히 교리를 가르쳐 가정 공동체를 이루었으며, 온 가족이 함께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송 베네딕토는 좀 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고자 아들 가족과 함께 진천 배티 교우촌(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으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교우촌 신자들과 어울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났고, 이듬해 봄에는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러 다니던 한양 포졸들이 배티로 들이닥쳤다.

배티로 몰려온 포졸들은 그곳에 거주하던 송 베네딕토를 비롯하여 아들 가족 모두를 체포하여 진천 관아로 압송하였다. 그런 다음 경기도의 죽산 관아로 끌고 가서 가두었다가 다시 한양으로 이송하였는데, 이때 체포된 이들은 나이가 가장 많은 송 베네딕토와 그의 아들 송 베드로와 송 베드로의 딸, 송 베드로의 며느리인 이 안나, 그리고 이 안나의 아이 등 모두 5명이었다.

이들 가족은 한양으로 압송된 뒤에 모두 신앙을 굳게 지킨 다음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67년으로 당시 송 베네딕토의 나이는 69세였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송 베네딕토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송 베드로(1821-1867년)

송(宋) 베드로는 충청도 충주 서촌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우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장성한 뒤에는 부친 송 베네딕토를 모시면서 성 가정을 이끌어 나가는 데 열중하였다. 송 베드로는 부친인 송 베네딕토와 함께 가족을 데리고 진천 배티 교우촌으로 이주하여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났고, 이듬해 봄에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러 다니던 한양 포졸들이 배티로 들이닥쳤다.

배티로 몰려온 포졸들은 그곳에 거주하던 송 베드로의 가족 모두를 체포하여 진천 관아로 압송하였다. 그런 다음 경기도의 죽산 관아로 끌고 가서 가두었다가 다시 한양으로 이송하였는데, 이때 체포된 이들은 송 베드로와 그의 부친 송 베네딕토, 그리고 그의 딸과 며느리 이 안나, 이 안나의 아이 등 모두 5명이었다.

송 베드로는 한양으로 압송된 뒤에 신앙을 굳게 지킨 다음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67년으로 그의 나이는 46세였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송 베드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이 안나(1841-1867년)

이(李) 안나는 인천 재궁골의 신자 가정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자 충청도 충주 서촌에 살던 교우 송(宋) 베드로의 아들과 혼인하였다. 이때부터 그녀는 남편과 함께 시조부 송 베네딕토와 시부모를 모시면서 교리를 실천하는 데 열중하였다.

송씨(宋氏) 집안이 좀 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고자 진천 배티 교우촌으로 이주하게 되자, 이 안나도 남편을 따라 이주하였다. 그곳에서 그녀는 교우촌 신자들과 어울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그녀는 1867년 봄에 한양 포졸들에게 체포되었으며, 진천 관아와 경기도의 죽산 관아를 거쳐 한양으로 이송되었다.

이 안나는 한양으로 압송된 다음에도 신앙을 굳게 지키고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67년으로 그녀의 나이는 26세였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이 안나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박경진 프란치스코(1835-1868년)

1835년에 태어난 박경진 프란치스코는 장성한 다음 오(吳) 마르가리타와 혼인하여 충청도 청주에서 살았다. 그들 부부는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안전한 곳을 찾아 아들 사 형제를 데리고 진천 절골(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로 이주하여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하였다.

박 프란치스코의 가족은 절골에서 2년가량 평온하게 생활하면서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그러나 1868년에 이르러 박해가 더욱 거세어지면서 다시 위험에 놓이게 되었고, 그해 9월 5일(음력 7월 19일)에는 마침내 경기도의 죽산 포졸들이 절골로 들이닥쳤다.

이때 박 프란치스코의 가족은 포졸들이 온다는 사실을 알고 산중으로 피신하던 도중에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그중에서 박 프란치스코의 아내 오 마르가리타는 어린 자식을 업고 산에 숨어 있다가 체포되어 많은 매를 맞았다.

한편 가족의 사정이 궁금해진 박 프란치스코는, 동정을 살피려고 산에서 내려오다가 그 동네의 한 비신자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런데 그 비신자는 박 프란치스코에게 ‘내 집에 자면서 동정을 살피는 것이 좋겠다.’며 안심을 시키고는 밤중에 뒷문으로 빠져나가 포졸들에게 박 프란치스코를 밀고하였다.

박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체포되어 아내 오 마르가리타와 함께 죽산으로 끌려갔다. 박 프란치스코는 옥중 생활을 하는 동안 동생인 박 필립보와 맏아들 박 안토니오에게 소식을 전하였는데, 특히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당부가 들어 있었다.

“어린 조카들을 잘 보살피면서 진정으로 천주님을 공경하고, 천주님께서 안배하시는 대로 순명하여 나의 뒤를 따라오도록 하여라.”

이 편지는 집안에 남아 있던 성물과 함께 박해 중에 소실되었다고 한다.

박 프란치스코와 오 마르가리타 부부는, 이후 어떠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굳건하게 신앙을 지켰다. 그런 다음 1868년 9월 28일(음력 8월 13일) 죽산에서 함께 순교하였으니, 당시 박경진 프란치스코의 나이는 33세였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박경진 프란치스코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오 마르가리타(?-1868년)

오(吳) 마르가리타의 출생지와 천주교에 입교한 사정은 알려져 있지 않고, 뒷날 박 프란치스코와 혼인하여 충청도 청주에서 살았다는 사실만이 알려져 있다. 그들 부부는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안전한 곳을 찾아 아들 사 형제를 데리고 진천 절골로 이주하여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하였다.

박해가 더욱 거세어지면서 1868년 9월 5일(음력 7월 19일)에 경기도의 죽산 포졸들이 절골로 들이닥쳤다. 오 마르가리타는 어린 자식을 업고 산에 숨어 있다가 가장 먼저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많은 매를 맞았다. 그리고 동정을 살피려고 산에서 내려왔다가 나중에 체포된 남편과 함께 죽산으로 끌려갔다.

오 마르가리타와 박 프란치스코 부부는, 이후 어떠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굳건하게 신앙을 지켰다. 그런 다음 죽산에서 함께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68년 9월 28일(음력 8월 13일)이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오 마르가리타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진천 출신의 순교자 26위

 
 
배티 인근의 순교자 무덤 28기

 
[도표 출처 : 배티 성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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