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사적지 목록

교구 성지명     지역명     내용 검색

안동교구 > 노래산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험준한 태백산맥의 노래산에 세워진 교우촌
지번주소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노래리 568(청송호 상부댐) 
전화번호 (054)872-2051
팩스번호 (054)872-2068
홈페이지 http://cafe.daum.net/cssungdang
관련기관 청송 성당    (054)873-2051
관련주소 경상북도 청송군 청송읍 군청로 77

복자 고성대 베드로(?-1816년)

‘여빈’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고성대(高聖大) 베드로는, 충청도 덕산의 별암(현,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상장리)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부모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는 본디 성격이 매우 포악하여 사람들이 가까이하기를 꺼렸지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 뒤로는 그러한 성격이 바뀌게 되었다.

고 베드로는 부모님께 효성을 다하였다. 언제인가는 아버지가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자, 그는 아우인 고성운 요셉과 함께 8개월 동안 아버지의 회복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였다. 또 그들 형제는 언제나 합심하여 성경을 읽고 다른 사람들을 권면하는 데 열심이었으므로, 모든 신자들의 모범이 되었다.

이후 고 베드로는, 고산 저구리(현, 전북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로 이주하여 생활하다가 1801년 신유박해 때 전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이내 전주로 끌려간 그는 처음에는 용감하게 신앙을 증언하였지만, 목숨을 보전하려는 유혹에 넘어가 석방되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온 고 베드로는 곧바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고, 이후로는 가끔 “이 큰 죄를 보속하려면 칼을 맞아야 마땅하다.”고 되뇌곤 하였다. 그러다가 아우와 함께 경상도의 청송 노래산(현, 경북 청송군 안덕면 노래2리)으로 이주하여 그곳 신자들과 함께 비교적 평온한 가운데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1815년, 고 베드로와 요셉 형제는 교우들과 함께 예수 부활 대축일을 지내다가 밀고자를 앞세운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되었다. 이때가 그해 2월 22일경이었다.

경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는 가운데서도 고 베드로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신앙을 굳게 지켰다. 그러자 경주 관장은 그들 형제와 함께 배교를 거부하는 모든 교우를 감사가 주재하는 대구로 이송하였다. 대구에서는 또다시 문초와 형벌이 여러 차례 이어졌으며, 17개월이 넘게 괴로운 옥중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고 베드로는 한결같이 이러한 고통을 참아 내면서 신앙을 증언하였다. 그런 다음 사형 판결을 받고,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에 아우와 함께 대구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까지 그는 혼인을 하지 않은 채 동정을 지키고 있었다.

이에 앞서 대구의 감사는 고성대 베드로 형제가 형벌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는 것을 보고는 다음과 같이 조정에 보고하였다.

“고성대와 고성운 형제는 어리석고 무식한 무리로 천주교에 미혹되어 깨달을 줄 모르기에, 엄한 형벌을 하면서 깨우쳐 주려고 하였지만, 끝내 마음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또 한 번 죽기로 한 마음을 목석과 같이 고집하니, 그들의 죄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고 베드로의 시신은 형장 인근에 매장되었다가, 이듬해 3월 2일 친척과 교우들에 의해 그 유해가 거두어져 적당한 곳에 안장되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고성대 베드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고성운 요셉(?-1816년)

‘성일’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고성운(高聖云) 요셉은, 충청도 덕산의 별암(현,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상장리)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부모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는 본디 성격이 착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으며, 신앙생활도 아주 열심히 하였다.

고 요셉은 부모에 대한 효성도 지극하였다. 또한 고 요셉과 고 베드로 형제는 언제나 합심하여 성경을 읽고 다른 사람들을 권면하는 데 열심이었으므로, 모든 신자에게 모범이 되었다. 고 요셉은 형과 함께 경상도의 청송 노래산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그는 1815년 2월 22일경, 교우들과 함께 예수 부활 대축일을 지내다가 경주 포졸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을해박해의 시작이었다.

이때 노래산 교우촌 신자들은 도적이 온 줄로 알고는 몸이 날쌔고 기운이 세었던 고 요셉의 지휘에 따라 힘으로 대적하였다. 그러나 이내 신자들은 그들이 도적이 아니라 관청에서 파견된 포졸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신자들은 모든 저항을 멈추었고, 고 요셉은 어린양처럼 양순해져서 제일 먼저 포승을 받았다.

고 요셉은 형과 함께 경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고, 감사가 주재하는 대구로 이송되었다. 거기에서도 고 요셉은 모든 고통을 참아 내면서 한결같이 신앙을 증언하였다. 그런 다음 사형 판결을 받고,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 형과 함께 대구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까지 그는 혼인을 하지 않았다. 고성운 요셉의 시신은 형장 인근에 매장되었다가 이듬해 3월 2일, 친척과 교우들에 의해 그 유해가 거두어져 적당한 곳에 안장되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고성운 요셉은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김화춘 야고보(?-1816년)

김화춘 야고보[金若古排]는 충청도 청양의 수단이(현, 충남 청양군 남양면 신왕리)에서 태어나 보령의 청라동(현, 충남 보령시 청라면)으로 이주해 살았다. 1839년 전주에서 순교한 김대권 베드로가 그의 형이다.

본성이 온순하고 참을성이 있던 김 야고보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형과 함께 아버지에게 교리를 배웠다. 그리고 장성한 뒤에는 하느님을 섬기고 영혼을 구하는 일에 큰 힘이 되고자 애썼다. 교회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지켰으며, 언제나 기도 생활과 성경 읽기에 부지런하여 교우들로부터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러다가 그는 좀 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경상도 청송으로 이주하여 생활하였다.

1815년 을해박해가 일어나 경주 포졸들이 청송 일대의 신자들을 수색하고 다닐 때, 김 야고보도 그들과 함께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관장이 제시한 온갖 유혹을 거절하고, 혹독한 형벌을 신앙으로 극복하였다. 그런 다음 고성대 베드로와 고성운 요셉 형제, 구성열 바르바라 등과 함께 대구로 압송되어 옥에 갇히게 되었다.

대구에서 여러 달을 갇혀 지내는 동안, 김 야고보는 여러 차례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가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전혀 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신앙을 굳게 지켰으며, 감사도 마침내 그의 신앙에 굴복하여 사형을 선고하게 되었다. 이때 그에게 내려진 선고문은 다음과 같다.

“김화춘은 아버지로부터 천주교 신앙을 배워 대대로 죄악을 저질러 왔다. 모두 어리석고 무식한 자들로, (천주교 교리를) 귀로 전해 듣고 입으로 외우면서 그 사악한 말을 깊이 믿었다. 여러 차례 형벌과 문초를 당하면서도 죽기를 맹세하고 뉘우치지 않으니, 그 요사하고 사악함이 아주 지극하다.”

김화춘 야고보는 이후에도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그러다가 임금의 윤허가 내려져 동료들과 함께 대구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이었다. 김 야고보의 시신은 형장 인근에 매장되었다가, 이듬해 3월 2일 친척과 교우들에 의해 그 유해가 거두어져 적당한 곳에 안장되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김화춘 야고보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구성열 바르바라(1776?-1816년)

충청도 홍주의 한내장벌(현, 충남 예산군 고덕면 대천리) 출신인 구성열(具性悅) 바르바라는 본디 성격이 온화하고 참을성이 있으며, 덕행이 남달라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1801년 신유박해 이전에 입교한 그녀는, 첫 남편을 잃고 서석봉 안드레아에게 개가하였는데, 이때부터 사람들은 그녀를 ‘서 과부’라고 불렀다.

구 바르바라 부부는 사위인 최봉한 프란치스코 부부와 함께 교우들이 모여 사는 경상도 청송의 노래산(현, 경북 청송군 안덕면 노래2리)을 찾아가 그곳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1815년 예수 부활 대축일에 밀고자를 앞세우고 노래산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되었다. 체포될 당시에 구 바르바라는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지만 이를 용감하게 이겨 냈다.

경주로 압송되자마자 구 바르바라는 다시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면서 차츰 마음이 약해졌고, 옥으로 돌아와서는 배교할 마음까지 가지게 되었다. 이때 그녀의 사위인 최 프란치스코가 그녀를 위로하면서 ‘천주를 위하여 함께 목숨을 바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를 설명해 주었다. 이러한 권면 덕택에 구성열 바르바라는 다시 신앙을 다잡고 어떠한 형벌도 꿋꿋이 참아 낼 수 있게 되었다.

얼마 안 되어 구 바르바라는 남편과 사위, 그리고 신앙을 고수한 다른 동료들과 함께 감사가 주재하는 대구로 압송되었다. 이곳에서 그녀는 또다시 여러 차례에 걸쳐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고, 17개월이 넘게 괴로운 옥중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그동안 남편과 사위는 형벌 때문에 옥사하고 말았다.

이러한 아픔이 있었음에도 구성열 바르바라는 한결같이 신앙을 증언하면서 모든 고통을 이겨 내었다. 그런 다음 사형 판결을 받고,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 다른 동료들과 함께 대구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녀의 나이는 약 40세가량이었다.

구 바르바라의 시신은 형장 인근에 매장되었다가 이듬해 3월 2일, 친척과 교우들에 의해 그 유해가 거두어져 적당한 곳에 안장되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구성열 바르바라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이시임 안나(1782-1816년)

1782년 충청도 덕산의 높은뫼(현, 충남 예산군 고덕면 몽곡리)에 있는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이시임(李時壬) 안나는 나이가 들어서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게 되었다. 그녀의 집안은 본디 무관으로 이름이 있었는데,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후에는 고향을 떠나 가난한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1827년의 정해박해 때 체포되어, 8년 뒤 전주 옥에서 사망한 이성지 요한이 그녀의 오빠이다.

이 안나의 부친은 처음부터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사를 다닐 때면 천주교 신앙을 문제 삼아 자식들에게 악담을 퍼붓곤 하였다. 그러다가 죽기 2년 전에야 비로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 안나는 재색을 겸비한 처녀로 교리 실천에 뛰어난 열성을 보였다. 또 일찍부터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하였는데, 이 때문에 가족이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괴로움을 당하게 되었다. 이에 그녀는 가족의 괴로움을 덜어 주고자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한 동정녀 공동체로 가서 그들과 함께 살기로 작정하였다.

이때, 성이 박씨(朴氏)인 한 교우 뱃사공이 이 안나를 그 공동체까지 데려다 주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이 뱃사공은 그녀와 함께 있게 되자 마음이 달라져 강제로 그녀와 혼인을 하였고, 둘 사이에서 종악이가 태어나기에 이르렀다. 이후 그녀의 남편은 몇 해 안 되어 사망하였고, 그녀는 어린 종악이를 혼자 길러야만 하였다.

과부가 된 다음에도 이 안나는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또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신자들이 모여 사는 진보 머루산(현, 경북 영양군 석포면 포산리) 교우촌으로 가서 살았다. 바로 이곳에서 그녀는 1815년 을해박해를 겪게 되었다.

포졸들에게 체포된 이 안나는 먼저 안동으로 끌려가 신앙을 굳게 증언하였다. 그런 다음 동료들과 함께 대구로 이송되어 형벌을 받고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어야만 하였다. 그녀는 아들 종악이가 자신의 품에서 죽는 괴로움 속에서도, 또한 여러 차례의 문초와 형벌 속에서도 결코 신앙심을 잃지 않았다.

당시 조정에서는 대구 감사의 사형 선고문을 받고서도 오랫동안 판결을 내리지 않다가 1년 6개월 정도가 지난 뒤에야 임금의 재가를 얻었다. 이때 대구 감사는 끝까지 신앙을 증언한 신자들을 형장으로 끌어내 마지막으로 배교를 종용하였는데, 이에 대한 이 안나의 답변은 이러하였다.

“예수님과 마리아께서 저희를 부르시면서 같이 천국으로 올라가자 하시는데, 어떻게 배교할 수 있겠습니까? 이 잠시 지나가는 목숨을 보존하려고 참된 생명과 영원한 행복을 잃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다음 이 안나는, 동료들과 함께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로, 당시 그녀의 나이는 34세였다. 이시임 안나의 시신은 형장 인근에 매장되었다가 이듬해 3월 2일, 친척과 교우들에 의해 유해가 거두어져 적당한 곳에 안장되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이시임 안나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김희성 프란치스코(1765-1816년)

교우들 사이에서는 ‘경서’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김희성(金稀成) 프란치스코는, 1765년 예산 여사울(현, 충남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의 부유한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1801년에 예산에서 순교한 김광옥 안드레아가 바로 그의 부친이다.

김 프란치스코는 어려서부터 전통 학문을 배워왔으나, 아버지가 신앙을 받아들인 이후에는 이를 버리고 천주교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아주 열심인 신자가 되어 기도와 애긍 생활을 실천해 나갔으며, 언제나 영혼을 구하는 일에 힘쓰게 되었다.

아버지가 1801년에 순교하자, 김 프란치스코의 열성은 날로 높아져 갔다. 그리고 아버지의 모범을 따르겠다는 그의 의지는 더욱 굳어져만 갔다.

김 프란치스코는, 모든 재물을 버리고 경상도 일월산에 있는 영양의 곧은장으로 들어가 가족과 함께 생활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금욕 생활을 하면서 여러 가지로 고신극기를 실천하였다. 또 급한 성격을 극복하고자 노력한 결과, 오래지 아니하여 양순함과 인내의 모범이 되기에 이르렀다.

1815년 3월 을해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밀고자가 포졸들을 이끌고 곧은장으로 쳐들어왔다. 그때 김 프란치스코는 산에 올라가 있었는데, 포졸들이 내려오라고 소리치는 것을 듣고는 아들 문악이에게 이렇게 당부하였다. “나는 천주의 명을 따라 가야 한다마는, 너는 나를 따라오지 말고 온 집안을 보살피되, 특히 할머니를 극진히 모시거라.”

그런 다음 김 프란치스코는, 아주 기쁜 낯으로 하산하여 포졸들은 물론 밀고자까지도 관대하게 대접하였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하직 인사를 올리면서 상냥한 말로 위로하였으며, 아내에게는 어머니를 잘 봉양하고 자식들을 잘 가르친 뒤에 자신의 뒤를 따르도록 부탁하였다.

김 프란치스코는 웃는 낯으로 포졸들을 따라나섰다. 안동 관아로 끌려간 그는 그곳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결코 여기에 굴하지 않았다. 그러자 안동 관장은 그를 김종한 안드레아와 함께 대구로 이송하였고, 그들은 이곳에서 다시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때 김 프란치스코는 관원들이 당황할 정도로 항구한 신앙심을 보여 주었다.

대구 감사는, 김 프란치스코의 심지가 너무 굳은 탓에 결코 배교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의 최후 진술을 받아 조정에 보고한 뒤, 다른 신자들과 함께 옥에 가두어 두도록 하였다. 당시 대구 감사가 조정에 올린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김희성은 집 안에 천주교 서적을 숨겨 왔으며, 평소에 십계명과 같은 요사한 글들을 이웃과 함께 외우곤 하였습니다.”

김희성 프란치스코는 동료들과 함께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그러다가 사형 집행에 대한 임금의 윤허가 내려와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 대구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51세였다. 그의 시신은 형장 인근에 매장되었다가, 이듬해 3월 2일 친척과 교우들에 의해 그 유해가 거두어져 적당한 곳에 안장되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김희성 프란치스코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김종한 안드레아(?-1816년)

신자들 사이에서 ‘계원’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김종한(金宗漢) 안드레아는 충청도 면천의 솔뫼(현,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태어났다. 족보에는 그의 이름이 ‘한현’(漢鉉)으로 나온다. 1814년에 순교한 김진후 비오의 아들로, 김 데레사 성녀의 아버지이며,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작은할아버지이다.

김 안드레아는,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몇 년 뒤, 맏형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이에 앞서 그의 맏형은 ‘내포의 사도’라고 불리던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의 도움으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이를 가족에게 전해 주었다. 한편 김 안드레아의 부친인 김진후 비오는 처음에 입교를 거부하였으나, 계속되는 자식들의 권유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뒤에는 아주 열심인 신자가 되었다.

부친 김 비오가 박해를 받고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하였으므로, 그의 자녀들은 안전한 신앙생활을 위해 뿔뿔이 흩어져 살 수밖에 없었다. 김종한 안드레아도 가족과 함께 홍주를 거쳐 경상도 영양의 우련밭(현, 경북 봉화군 재산면 갈산리)으로 가서 오랫동안 숨어 살았다.

김 안드레아는 교리를 실천하는 데 아주 열심이었다. 끊임없는 기도 생활과 이웃을 위한 애긍, 신심을 함양하기 위한 극기 행위는 거의 일상이 되었다. 낮에는 천주교 서적을 필사하여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밤에는 신자들을 자신의 집에 모아 놓고 가르쳤다. 또한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에도 노력하여 많은 사람들을 입교시켰다.

1815년 을해박해가 일어난 뒤, 김 안드레아는 영양에서 체포되어 안동으로 끌려갔으며, 그곳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대구로 이송되었다. 그가 대구 감영 앞에 이르렀을 때, 마침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가 잠시 마음이 약해져 석방되어 감영 문을 나가고 있었다. 이것을 본 그는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그녀를 열성적으로 권면하였고, 이에 감화되어 그녀는 다시 관장 앞으로 나아가 신앙을 증언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김 안드레아가 신앙을 증언할 차례였다. 관장은 그의 마음을 돌려 보려고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를 강권하였으나, 그의 신앙은 여러 차례의 형벌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김 안드레아는 조용하면서도 꿋꿋하게 천주교가 진리임을 설명하였다. 그러자 감사는 그의 결심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김종한은 마음 깊이 천주교를 좋아하여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면서도 천주교 서적을 가지고 다니면서 익혀 왔습니다.”라고 조정에 보고하였다.

조정에서 사형 판결이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김 안드레아는 옥중에서 두 통의 편지를 형에게 보내고, 교우들에게도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 형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저는 순교를 향해 나아가는 중이며, 감히 이 마지막 은혜를 바라기까지 합니다. 제가 만일 이 훌륭한 은혜를 받지 못한다면, 이후에는 어떻게 삼구(三仇 : 영혼 구원의 세 가지 원수. 곧 육신, 세속, 마귀를 이른다)에 대적해 나가겠습니까? …… 만약에 제가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그것을 영영 찾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먼저 천주님의 은총을 바라고, 다음으로는 여러 교우들의 기도를 믿습니다.”

김종한 안드레아가 옥에 갇혀 있은 지 1년 6개월 정도가 되어서야 임금은 사형을 윤허하였다. 그러자 대구 감사는 즉시 천주교 신자들을 옥에서 끌어내 처형하도록 하였다. 이때 김 안드레아가 지도층 신자로 지목되어 제일 먼저 칼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그때는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이었다. 김 안드레아의 시신은 형장 인근에 매장되었다가, 이듬해 3월 2일 친척과 교우들에 의해 그 유해가 거두어져 적당한 곳에 안장되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김종한 안드레아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위로